'잎이 꽃보다 화려해지는 시간'
누군가는 가을을 두고 '잎이 꽃이 되는 두 번째 봄'이라 멋드러지게 표현했지만, 사실 마뜩지는 않습니다. 가을을 봄에 빗대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을에는 가을에 가산점을 주고 싶은데요. 다시 봄이 되면 태세 전환할지라도 말이죠.
그래서 '잎이 꽃보다 화려해지는 시간'이라는 표현에 좀더 마음이 가나 봅니다. 그 화려함을 만끽하기에 짧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죠. 가을의 끝자락, 떠나가는 계절이 아쉬워 '덕수궁(德壽宮)'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마치 단풍이 비단길을 놓은 듯합니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던 곳입니다. 임진왜란 후 선조가 서울로 돌아와서 그 곳을 임시거처로 사용하게 되죠. 그때부터 '궁'으로 격상됩니다. 당시에는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이곳에서 즉위한 광해군은 경운궁으로 이름을 바꾸고(1611년), 1615년 완공된 창덕궁으로 옮겨갑니다. 이후 인목 대비가 유폐되기도 했고, 그에 따라 서궁이라 낮추어 부르게 됐죠. 왕실에서도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아 사실상 잊힌 곳이 되었습니다.
1897년 덕수궁에 따뜻한 햇살이 비추기 시작합니다. 러시아 공사관에 있던 고종이 거처를 옮기면서 많은 건물들이 지어지게 됐죠. 석조전(石造殿) 등 서양식 건물도 여럿 지어지게 됩니다. 1907년 순중에게 양위한 고종이 계속 머무르게 되면서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뀝니다. 장수를 빈다는 뜻이죠.
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덕수궁은 다른 궁궐에 비해 규모가 아담합니다. 역사도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죠. 하지만 덕수궁은 그만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현대의 고층 건물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고, 동서양의 건축물을 한눈에 볼 수 있기도 하죠.
덕수궁에 갔으니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을 그냥 진나칠 수 없죠. 퀄리티 있는 전시를 무료로 볼 수 있답니다. 11월 11일부터 '박수근 : 봄을 기다리는 나목' 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박수근은 한국을 대표하는 서양 화가인데요. 다들 이름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겁니다. 교과서에 실려 있기도 하니까요. 낯익은 이름이지만,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데요. 그래서 더욱 반가웠습니다.
"박수근의 작품들은 회색 톤에 조용히 스며드는 소박한 정취가 담겨 있어,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시를 읊고 있는 것 같다." (방근택)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박수근은 12살 때 장 프랑수아 밀레의 그림을 보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전문적인 미술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을 하며 실력을 갈고 닦아 18세에 조선미술전람회에 입선하게 됩니다.
평범한 이웃들의 삶에 관심을 기울였던 박수근은 서미들의 가장 진실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내려 노력했습니다. 소재를 단순화하고 공간감을 무시한 채 대상을 평면화했죠. 이렇듯 그의 그림에서 '절제의 미'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 이 그림 앞에서 한참 머무르게 됐는데요. 딱딱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고, 투박하면서도 따뜻했습니다. 단순함이 주는 평안이 온몸에 깃드는 기분이라고 할까요. 보는 내내 마음이 평온했습니다.
떠나가는 가을과 마지막 작별 인사를 하실 생각이라면 덕수궁을 방문하는 걸 추천드립니다. 더불어 박수근의 그림도 함께 감상하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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