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교황에 흠뻑 빠진 대한민국, 교황은 해결사가 아니다

너의길을가라 2014. 8. 15.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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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 가난한 자[貧者]의 벗'이라고 불리는 프란치스코 교황이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1984년과 1989년 요한 바오로 2세의 두 차례 방한 이후 세 번째 있는 일이다. 당연한 일일까? 대한민국의 모든 언론은 일제히 교황을 향했다. 뉴스의 절반 이상은 교황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자연스럽게 대중의 관심도 교황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교황의 방한'은 언론의 입장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큰' 아이템이다. 그렇다고 '중요한' 아이템이라 말할 순 없다. 그저 흥미를 끌 수 있는 요소가 많고, 보도할 수 있는 내용이 많을 뿐이다. 좋게 말하면 '보고(寶庫)'이지만 나쁘게 표현하면 '블랙홀'이라고 할 수 있다. 14일 하루동안 KBS, MBC, SBS의 정규 뉴스를 비롯해서 YTN 등 뉴스 전문 채널, 그리고 종편까지 온통 교황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 채워졌다.


물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로마의 주교이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적 지도자이며 바티칸 시국의 국가원수이기도 한 교황의 방문은 그만큼 뉴스로서의 가치가 분명하다. 이는 종교를 떠나서 반길 일이고, 환영할 만한 일이다. 대한민국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교황의 방문에 열광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있을 수 있는 광경이다.



교황의 방한에 너무 심취했던 것일까? 무엇이든 도가 지나치면 화를 부르는 법이다. <중앙일보>는 '돈이 도네요, 고마워요 프란치스코' 라는 제목의 기사를 경제면 톱으로 내걸었다. 교황의 방문에 따른 긍정적 영향력을 가리켜 '프란치스코 효과'라고 일컫는데, 거기에는 단지 '경제적 효과'만 포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사회적 약자와 함께 하며 그들을 위로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돈'으로만 해석하는 천박한 언론의 민낯이 부끄럽기만 하다.


<중앙일보>만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아시아경제>는 '8월의 크리스마스 효과, 5500억의 축복'이라는 기사를,  <뉴스Y>는 '교황 방한, 침체된 한국경제 부활 계기 기대'라는 기사를 각각 썼다. "어떻게 증시가 2포인트 떨어지면 뉴스가 되고, 노숙자가 거리에서 죽어가는 건 뉴스가 되지 않는가. 어떻게 사람들이 굶어죽어 가는데 음식을 내다버리는 일을 참고 지켜볼 수 있는가"라고 말했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메시지를 기억한다면 어찌 저런 기사를 버젓이 써낼 수 있을까? 씁쓸하기만 하다.



교황의 방문으로 온 나라가 들썩이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보수적인 색채를 띤 언론들은 '돈이 돈다'며 그 경제적 효과를 칭송하고 있다. 이른바 '교황 마케팅'이 시작된 것이다.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일반 시민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교황에게 읍소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고 있다. 물론 기댈 곳이 없는 사람들의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조금 냉정할 필요가 있다.


'교황의 방문'은 하나의 이벤트에 불과할 뿐이다. 그가 나타났다고 해서 산적해 있던 문제들이 갑자기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은 공항에서 세월호 참사 유족 4명과 일일이 손을 잡으면서 "마음 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다. 가슴이 아프다. 희생자들을 기억하고 있다"는 위로를 건넸다. 15일에는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리는 미사 직후 세월호 가족 10명과 비공개 면담을 가질 예정이라고 한다.



이러한 교황의 행보 자체는 박수를 보낼 만한 일이다. 이렇게 되면 세월호 참사를 외면해왔던 언론들도 어쩔 수 없이 보도를 하게 될 것이고, 세월호 특별법과 관련한 유족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통해 시민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될 것이다. 그러나 효과는 딱 거기까지다. 교황이 할 수 있는 역할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듣고 위로를 건네는 것뿐이다.


현재 교황이 인지하고 있는 '세월호 참사'는 그 사고로 인해 다수의 학생을 포함한 300여 명의 사람들이 희생됐다는 사실 정도일 텐데, 그가 세부적인 내용들까지 속속들이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세월호 유족들이 교황을 만난 자리에서 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전달한다고 하더라도, 그 짧은 시간 내에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지난 4월 세월호 침몰 사고의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위로를 전해 주시고 기도해 주신 데 감사드린다. 그동안 따뜻한 서한을 보내주시면서 우리 국민들을 축복해 주셨고,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해서 많은 관심을 갖고 기도도 해 주시고, 애정을 보내주신 데 대해서 감사드린다"


- 박근혜 대통령 -


설령 전달이 됐다고 하더라도 교황이 그러한 유족들의 입장을 공식적인 자리에서 발언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이는 한 국가 내의 문제이기 때문에 교황이 할 수 있는 것은 원론적인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런 발언을 한다고 하더라도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이 움직일 리가 만무하다. 그가 한 국가의 대통령을 움직인다거나 국회를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우리는 빨리 현실을 깨달아야 한다. '교황 마케팅'은 박근혜 대통령도 이미 시작하지 않았던가?


물론 교황에게 실질적인 힘이 없다고 해서 그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무형의 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겠다는 일념, 자신의 아이들이 죽어야만 했던 이유에 대해 밝혀내야겠다는 굳은 신념으로 단식까지 하면서 하루하루를 버텨가고 있는 세월호 유족들의 입장에서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교황은 너무도 고마운 존재일 것이다.


숱한 왜곡과 철저한 외면으로 인해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세월효 유족들 아닌가? 진심이 담긴 위로는 그 어떤 것보다 큰힘이다. 이는 희생자 유족에게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세월호 참사를 잊고 싶어하는 많은 시민들, 너무도 괴로워서 외면하고자 했던 다수의 시민들이 다시 한번 마음을 모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여론을 환기시키는 부수적 효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교황 마케팅'은 독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인식해야 한다. 교황이 오면 모든 문제가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라고 여겼던 사람들의 헛된 믿음은 곧 무기력을 동반한 절망으로 바뀔 수 있다. 현실과 한계를 직시해야 한다. 결국 이 문제를 풀 수 있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사실 말이다.


'세월호 특별법'은 여전히 여야의 대치 속에 표류 중이다. 세월호에 대한 반성도 없이 정부는 크루즈산업육성법안 처리를 요구하고 나섰다. 또, 28사단 윤 일병 사망 사건을 비롯한 군대 내의 폭행 · 가혹행위 문제 역시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경악스럽고 충격적인 사실들이 하나씩 하나씩 밝혀지고 있다.


당분간은 '교황 마케팅' 탓에 대한민국의 처참한 민낯이 다소 가려질 것이다. 언론의 보도도 교황의 동선에 맞춰질 것이다. 무언가를 덮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더할나위 없는 호기(好機)인 셈이다. 반대로 무언가를 드러내고 풀어내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답답한 시기가 될 것이다. 참으로 역설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는 더욱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 한다. 물론 이런 말이 교황에 흠뻑 빠져 버린 대한민국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될 리 없을 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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