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뻐꾸기의 알은 누구의 것인가』, 인생은 유전자에 각인된 것일까?

너의길을가라 2013. 12. 30. 22:15
반응형



히가시노 게이고. 


물론 번역 과정을 거치긴 하지만, 2013년만 해도 5권의 책이 나왔다. 작년에도 4권, 재작년에도 4~5권은 되는 것 같다. 다음에서 검색을 하면, 그의 책이 무려 72권이나 검색이 된다. 그 중에 기획 상품으로 나온 것과 총 2권 혹은 3권으로 출판된 것의 수를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엄청난 다작(多作)이다.


실제로 서점이나 도서관에 가면, 일본 소설 코너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온다 리쿠'로 채워져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론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36』이 있다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겠지만. 


이쯤되면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이 나오기만을 오매불망(寤寐不忘)하는 팬이 아니고서야 독서의 속도가 출간의 속도를 따라잡을 수가 없다. 물론 팬의 입장에서는 정말 반가울 것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한 해에 무려 4~5권 씩 나오는 데 어찌 행복하지 않으랴? 하지만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른다. 떄로는 익숙함이 지루함을 불러오기도 하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매스커레이드』와 『사명과 영혼의 경계』 이어 또 다시 그의 소설을 읽은 셈인데, 『뻐꾸기의 알은 누구의 것인가』은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마치 어니스트 허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를 연상시킨다고 할까? '물음'이 담겨있는 오묘한 느낌 때문일까? 그렇다고 분명히 묻는 것 같지도 않고,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은.. 오랜 고민 끝에 이미 답을 내린 사람이 던지는 의미심장한 읆조림..?



- <국제신문>에서 발췌 -


책의 내용을 조금만 언급하자면, 소설에서 말하는 '뻐꾸기의 알'은 '유전자에 각인된 능력'이다. 아시다시피, 뻐꾸기는 다른 새(뱁새, 멧새 등)의 둥지에 알을 낳는다. 탁란(托卵)을 하는 참 특이한 새다. 먼저 부화한 뻐꾸기 새끼는 둥지에 있는 다른 알을 밖으로 밀어내 떨어뜨리거나 먹이를 독차지한다. 뻐꾸기 어미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뻐꾸기 새끼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다고 한다. 이걸 '영리'하다고 해야 할까, '얌체'라고 해야 할까? 고민스러운 대목이다. 어쨌든 원래 둥지의 주인들의 입장에선 '비극'이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새끼도 아닌 뻐꾸기 새끼를 자신의 새끼로 오인한 채 열심히 기르는 어미는 훗날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가령, 운동 능력이 탁월한 유전자가 있다고 해보자. 그 '피'를 이어받은 자녀는 당연히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기 때문에 운동 능력이 뛰어날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가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애초에 특정 종목의 운동 능력이 뛰어난, 다시 말해서 자질이 뛰어난 아이를 유년 시절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시키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흥미로운 발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역시 윤리적인 문제 등이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아무리 특정한 분야의 자질이 뛰어나다고 해도 성장 과정에서 다른 장점을 발견하거나 다른 분야에 흥미를 느낄 가능성 등도 배제할 수 없다. 단지 자질이 있다는 이유로 조기 교육에 돌입하는 것이 맞는 일인지도 의문이다. 


만약 유전자에 각인된 대로 '인생'이 결정되어 있다면, 확률적으로 자녀에게 보다 유리한 길이 있다고 해서 이를 부모가 마음대로 선택하는 건 합당한 일일까? 또, 성장 과정에서의 환경이나 양육, 훈육 등이 개입될 여지란 없는 것일까? 그야말로 유전자가 '운명'인 것일까?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매력적인 까닭은 이처럼 독자들에서 수많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의 문체가 평이하고, 문장이 특별히 돋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수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런 부분 때문이 아닌가 싶다. 『뻐꾸기의 알은 누구의 것인가』는 위에서 살짝 언급한 내용들과 '뻐꾸기 알'이라는 복선이 큰 축이 되어 힘 있게 전개된다. 읽는 데 큰 공을 들일 필요가 없어 쉽게 쉽게 읽힌다는 장점이 있으니, 짬이 나면 한번 읽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듯 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