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삼성전자의 직업병 보상? 전향적 제안이라는 호들갑

너의길을가라 2015. 1. 1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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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 삼성전자 반도체 직업병 보상에 대한 제2차 조정회가 열렸다. 서울 충정로 법무법인 지평에서 열린 이 자리에는 삼성전자와 삼성직업병피해자가족대책위원회(이하 가대위),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이 참석했고, 각자 자신들의 제안서를 발표했다. 삼성전자 측은 백혈병을 포함해 모든 혈액암과 뇌종양, 유방암까지 보상 대상에 포함시키겠다고 제안했고, 언론들은 이 발표 내용을 '전향적 제안'이라고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 '삼성 반도체 직업병 피해보상' 2차 조정위원회 -


삼성전자 전향적 제안.."백혈병 포함 모든 혈액암 보상" <머니투데이>

삼성전자, 백혈병 보상 전향적 제안.."모든 혈액암 포함" <한국경제>


대기업의 횡포, 이른바 갑(甲)질에 대한 비판 여론이 높은 시점에서 삼성전자의 전향적(이라 이름 붙여진) 제안은 많은 호응을 받았다. 물론 거기에는 '전향적', '모든' 등의 표현들이 들어간 제목의 기사를 남발한 언론의 역할이 지대(至大)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도배된 언론의 보도만 놓고 보면, 이른바 '삼성직업병'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삼성전자 "혈액암·뇌종양·유방암 보상" <경향신문>

'삼성 백혈병' 2차 조정위 보상대상 이견 <한겨레>

삼성전자 직업병 보상? 7개 질병만, 협력업체 직원도 제외 <미디어오늘>


<경향신문>은 호들갑스러운 수식어 없이 드라이한 제목을 뽑았고, <한겨레>는 2차 조정위의 주체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한편, <미디어오늘>은 삼성전자의 제안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다른 언론들이 '전향적', '모든'으로 삼성전자의 제안을 칭송했지만, 그 '모든'이 7개 질병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협력업체 직원도 제외되었다는 점을 부각시킨 것이다.


- 영화 <또 하나의 약속>의 한 장면 -


삼성전자가 삼성직업병 피해자 문제에 있어서 각 주체들과의 대화에 응하고, 구체적인 안을 내놓는 것은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없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고(故) 황유미 씨와 그 가족들의 피눈물나는 고군분투를 다룬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서 잘 그려진 것처럼, 그동안 삼성전자 측은 직업병을 인정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질병일 뿐'이라는 대답으로 일관해왔다.


그랬던 삼성전자가 대화의 장에 나서고, 교섭을 시작(2013년 3월)한 이후 처음으로 구체적인 안을 들고나왔다는 것은 '전향적'인 변화라고 할 만 하다. 직업병을 인정하는 데 있어 워낙 '철벽'이었기에 이 정도의 변화를 두고도 호들갑을 떨고 있지만, 전체적인 내용을 따지고 보면 아쉬운 측면이 훨씬 크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이 정도의 변화를 두고, 이 정도의 칭송을 하는 건 상당히 낯부끄러운 일이다.


ⓒ 한국경제


우선, 적용 대상과 관련해서 삼성전자와 가대위, 반올림 측의 의견이 어떻게 엇갈리고 있는지 그 차이를 살펴보도록 하자. 삼성전자는 '반도체·엘시디(LCD) 공장에서 1~5년 이상 일한 재직자와, 회사를 그만둔 지 10년 이내의 퇴직자가 백혈병 등 림프조혈기계암, 뇌종양, 유방암에 걸린 경우 업무 연관성과 관계없이 보상하겠다'고 제안했다. 


반면, '근무 기간에 관계없이 재직자와 회사를 그만둔 지 12년 이내의 퇴직자를 대상으로 삼자'는 입장이다. 병의 잠복기간을 고려해서 기간을 좀더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3개월 이상 일한 재직자나 회사를 그만둔 지 20년 이내 퇴직자한테 발생한 모든 암과 희귀난치성 질환, 불임 등까지도 보상'할 뿐만 아니라 '계열사와 협력업체에서 근무한 노동자까지 포함'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협력사 직원은 이직 등이 잦아 인사나 근태 등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문제 등이 있다"며 난색을 표했다. 협력업체 직원은 보상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반올림은 "간접고용 노동자라 해도 안전보건관리의 책임은 원청인 삼성전자에 있"으며 "위험한 업무를 협력업체로 전가하는 현실도 고려"해야 한다며 협력업체 직원도 보상 범위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입장이다. 과연 어느 쪽의 입장이 더 올바른 것일까?


그밖에도 재발방지 대책과 사과 부분도 의견이 달랐다. 삼성전자는 '성분을 알 수 없는 공급사 영업비밀 물질에 대해 수시로 샘플링 조사를 실시해 유해성분 포함 여부를 점검'하겠다는 입장이고, 반올림은 삼성전자 각 사업장에서 취급하는 화학물질 공개 등을 요구했다. 또, 가대위와 반올림은 외부 감사(제3자 참여)를 주장했지만, 삼성은 내부 보건관리 조직을 확대해 해결하겠다며 거부하고 있는 모양새다.



사과와 관련해서는 반올림이 삼성의 안전관리 부실과 사건 은폐를 주장하며 이에 대한 구체적이고 공개적인 사과를 요구한 반면, 가대위는 "조정이 길어져선 안 된다"며 공개사과를 포기한 상황이다. 이처럼 '전향적', '모든'이라는 꺼풀을 들춰내고,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조정회의 세 주체 간의 입장과 의견이 차이를 보이는 지점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삼성전자의 '변화'가 전향적이긴 하지만, 그 제안 자체가 '전향적'이라고 보기엔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회사의 직원이 근무 도중에 발생한 '직업병'으로 사망하게 됐을 때, 이를 책임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이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채, '개인적인 질병일 뿐'이라며 철저히 외면해왔던 것이 삼성전자였다.


삼성전자 반도체 · LCD 부문에서 일하다 백혈병 등 중증질환에 걸렸다는 제보자만 해도 총 164명이고, 그 중 70명이 사망했다. 이는 알려진 피해자에 지나지 않는다. 또, 지금의 조정회가 열리기까지 무려 7년이라는 길고도 힘든 싸움이 있었다. 그 중심에 고(故) 황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와 반올림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건희 이후'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삼성, 후계자 승계와 재산 상속 등의 문제를 안고 있는 삼성 측이 최근 들어 사회적인 측면에 있어 다소 변화된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은 반가운 일임에는 틀림없지만, 여전히 삼성이 대한민국에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말끔히 지워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28일로 예정된 3차 조정기일에서 지금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는 진정으로 '전향적'인 협상이 이뤄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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