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대한민국 사회는 <한공주> 이후 얼마나 나아갔는가?

너의길을가라 2014. 10. 1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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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잘못한 거 없는데요?"로 시작된 영화는 "사과를 받는데요. 저는 왜 도망 가야 돼요?"라는 물음으로 되돌아온다.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느낌이다. 잘못한 것 없는 한 소녀가 왜 죄인 취급을 받고,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쳐야 할까? 어째서 우리 사회는 그 소녀를 따뜻하게 안아주지 못하는가? 영화 <한공주>가 던지는 물음은 우리를 한없이 부끄럽게 만든다.



"난 누가 피해자이고, 누가 가해자인지를 가늠하는 이야기나 그것으로 인해 공분을 일으키려는 목적이 아니다. 극단적인 상황에 놓인 소녀가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모습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이수진 감독)


그동안 <도가니>, <소원>, <방황하는 칼날> 등 미성년자 성폭력 범죄를 다룬 영화들이 있었지만, <한공주>는 그런 영화들과는 다소 결이 다르다. 미성년자에 의한 집단 성폭행피해자의 시각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성인에 의한 아동 성폭력 범죄를 다루고 있는 <도가니>와 <소원>가 차이가 있다. <도가니>는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벌어진 천인공노할 성폭력과 학대를 고발하는 성격을 띄고 있고, <소원>은 아동 성폭력 범죄의 비상식적인 형량 등 법적인 문제에 보다 치중하고 있다.


물론 <소원>에서는 피해자가 어떻게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한공주>에 비슷한 측면도 있다. <방황하는 칼날>은 미성년자에 의한 집단 석퐁행을 다뤘다는 점에서 <한공주>와 같지만, 역시 가해자들에 대한 (개인적) 복수와 (공권력에 의한) 처벌이라는 부분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은 큰 차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선 세 영화가 드라마적인 요소를 많이 가미해 관객들이 감정의 진폭을 겪게끔 유도했다면, <한공주>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호흡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결정적인 차이다. 물론 상업영화와 독립영화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러한 담담함이 관객의 마음에 더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은 생각해 볼 대목이다.



영화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면서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한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한공주가 "전, 잘못한 거 없는데요?"라고 말하는 이유, 그런 한공주가 전학을 가고 선생님의 어머니 집으로 숨어야 하는 이유, 카메라(스마트폰)로 얼굴 등의 모습을 찍고,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에 대해 극도의 격한 반응을 보이는 이유, 수영을 배우고자 집착하는 이유 등이 하나 둘씩 밝혀질 때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한숨은 짙어져만 간다.


<한공주>는 개봉 이전부터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휩쓸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던 작품이다. 제18회 부산국제영화제 CGV 무비꼴라쥬상과 시민평론가 상을 비롯해서 제13회 마라케시 국제영화제에서 금별상과 제43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에서 타이거상을 수상했고, 제16회 도빌 아시아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상, 국제비평가상, 관객상 등 3관왕을 차지했고, 프리부르 영화제에서도 대상을 수상했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영화의 작품성은 '입소문'을 타고 흥행으로도 이어졌다. 다양성영화 부문의 각종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고, 손익분기점이 10만 관객을 돌파하며 총 관객 224,556명을 동원했다. <한공주>와 영화계에 있어서는 쾌거라고 할 수 있지만, 과연 그 영화가 우리에게 던져 주었던 문제제기가 얼마나 사회적으로 수용되고, 변화했는지는 의문스럽다.



너무도 멀쩡하게 사회 생활을 영위하는 가해자들에 비해 피해자는 하루하루 너무도 생상하게 떠오르는 상처를 감당하며 살아가야 한다. 성폭력 피해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은 여전히 차갑기만 하다. 외면하고 부담스러워하고, 오히려 죄인 취급을 한다. 그럼에도 영화 속에서 한공주는 자신에게 등을 돌린 세상을 탓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가다듬고, 홀로 세상 속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천천히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나아가 보지만 '과거'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는다. '이제 됐다' 싶을 때마다 어김없이 다시 나타나서 한공주를 괴롭힌다. 반면, 영화 속에서 명확히 묘사되진 않지만, 성폭력 범죄의 가해자들은 '집단 성폭행'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음에도 그 어떤 반성도 하지 않고 살아간다. 한공주 앞에 나타나는 것은 '어른'들뿐이다.


한공주에게 도움을 주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를 부담스러워 하는 선생님과 피해자 신분의 한공주를 윽박지르고 죄인 취급하는 경찰관, 무엇보다 합의서를 들고 겨우 일상을 회복한 한공주의 학교에 쳐들어오는 학부모들의 존재는 (현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잔인하기만 하다. 학교가 시끄러워지자 교장 선생님님은 한공주에게 집에서 근신할 것을 강요한다. 이처럼 우리 사회의 '어른'들은 피해자인 한공주를 따뜻하게 안아주고 보살펴주기보다는 오히려 벼랑 끝으로 몰고 가고 있다.


무엇보다 자신의 아들만 귀한 줄 아는 가해자들의 부모들은 '아들의 앞길을 막지 말라'며 합의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한다. 돈으로 한공주의 아버지를 매수하기도 하고, 지인을 통해 접근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이 흘리는 눈물에는 그 어떤 고귀함도 담겨져 있지 않다. 그저 가족 이기주의에 경도된 잔혹하고 추악한 어른의 역겨움이 가득할 뿐이다.



다리에서 투신해 자살한 친구를 떠올리며 한공주는 자신의 운명을 직감한다. 자신도 그리 될지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가 닥칠 때마다 더욱 '수영'에 집착한다. "왜 그렇게 수영을 열심히 해?"라고 묻는 친구의 질문에 "다시 시작하고 싶어 질까봐"라고 대답하는 한공주의 말은 또 한 번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한공주'는 세상의 모든 '공주'를 대변하는 이름이다. 영화 속의 한공주는 세상 밖의 가상의 존재가 아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 차가운 사회의 시선으로부터 눈물 흘리고 있는 수많은 '공주'들 중의 한 명이다. 언제쯤 우리는 이 예쁜 공주들이 마음 편히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을까?


영화 외적(外的)으로 안타까웠던 것은 <한공주>처럼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를 청소년이 볼 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남동철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는 "한공주는 성폭력을 다루고 있지만 충분히 청소년의 삶에 밀착해 있어서 공감대를 만들 만한 영화다. 청소년을 너무 어린이 취급하는게 아닌지, 청소년도 사고를 할줄 아는 인격체로 존중받아야 한다"고 일침을 놨다. 심의를 통해 청소년을 보호한다면서 청소년들을 어린애 취급하는 '어른'들의 생각이 혹시 앞서 살펴봤던 '어른'들의 모습과 닮아 있진 않을까? 무엇으로부터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어른'들이 제대로 알고 있긴 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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