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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가해자가 만든 ‘더 글로리’ 시즌2의 빛바랜 영광

너의길을가라 2023. 3. 12. 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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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 시작할 땐 나도 테이큰 같을 줄 알았지." (동은)


피해자들의 연대는 가해자들의 연대보다 강했다. 위기의 순간도 많았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에도 변수가 생기는 법이니까. 게다가 악독하기 그지 없는 박연진(임지연)이 "왜 없는 것들은 세상에 권선징악, 인과응보만 있는 줄 알까?"라고 비웃음을 던질 때는 불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문동은(송혜교)과 조력자들을 응원했다.

10일 공개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더 글로리' 시즌2의 복수는 영화 '테이큰'의 그것과는 달랐다. "뒤도 밟아야지. 돈도 벌어야 하지. 학교도 옮겨야" 했다는 동은의 대사처럼 바쁘고 고단한 일이었다.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는 복수, 그러니까 정밀하게 판을 짜놓으면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아웅다웅, 옥신각신하다 자멸하게 만드는 복수였다. 비유로 여러 차례 언급됐던 '바둑'을 떠올리게 했다.

동은이 짠 치밀한 계획은 공고해 보였던 가해자들의 연대에 균열을 일으켰다. 한번 금이 가자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결국 저들은, 그들끼리 치고받으며 싸우다 파멸하고 말았다. 동은의 복수는 완벽했다. 가해자들은 저마다 가장 참담한 방식으로 몰락했다. 사실 그들을 나락으로 몰고 간 건, 그들의 엇나간 욕망일지도 모르겠다. ‘더 글로리’의 사필귀정은 짜릿하고 통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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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는 그런 생각을 했어요. 누가 됐든 뭐가 됐든 날 좀 도와줬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열여덟 번의 봄이 지났고 이제야 깨닫습니다. 저에게도 좋은 어른들이 있었다는 걸. 친구도 날씨도 신의 개입도요. 그리고 봄에 죽자던 말은 봄에 피자는 말이었다는 걸요. 저를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잘 크진 못했어요. 하지만 언젠가는 어느 봄에는 활짝 피어날게요.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동은)


'더 글로리'에서 복수는 가장 핵심적인 주제였지만, 복수 못지 않게 중요한 건 역시 '피해자들의 연대'였다. 저마다의 지옥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피해자들은 서로의 존재를 발견했고, 상대방의 아픔을 이해했고, 각자의 복수를 존중했고, 누구보다 응원하고 조력했다. 고맙게도 '더 글로리'는 그 연대의 단단함이 끝끝내 권력도, 돈도 무너뜨릴 수 있음을 강렬하게 보여줬다.  

김은숙 작가는 복수 이후에도 살아가야 할 피해자들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그 시선은 학교폭력의 피해자 동은에게만 맞춰져 있지 않았는데,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현남(염혜란)과 선아(최수인), 살인범에게 아버지를 잃은 여정(이도현)에게도 향했다. '더 글로리'는 피해자들에게 복수는 끝이 아닌 시작이고, 그들의 삶에서 영광을 되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끊임없이 얘기한다.

'더 글로리 : 파트2'는 공개 하루 만에 전 세계 26개국에서 1위('플릭스 패트롤'의 주간 순위 기준)에 오르며 파트1의 화제성을 이어갔다. 한국 · 일본 · 홍콩 · 대만 등 아시아 전역을 석권했고, 남미와 중동에서도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프랑스 · 터키 · 브라질에서는 2위, 미국에서는 3위, 영국 · 독일에서는 4위에 올랐다. 11일 기준 넷플릭스 전세계 TV 쇼 톱3에 해당하는 수치다.

"이 일을 통해 상처를 받으신 분들께 마음 속 깊이 용서를 구합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직접 뵙거나 유선을 통해서라도 사죄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안길호 법률대리인 공식입장)


한편, '더 글로리'의 인기가 뜨거운 시점에 아이러니한 사건이 터져 나왔다. 지난 10일, 미국 내 한인 커뮤니티 사이트 '헤이코리안'에 '더 글로리'를 연출한 안길호 PD에 대한 학교폭력 폭로 글이 게시된 것이다. 작성자는 1996년 필리핀 유학 시절에 고3이었던 안길호 PD를 비롯한 열댓 명에게 2시간 가량 폭행과 폭언을 당했다고 썼다. 작성자는 당시 중학교 2학년이었다.

이러한 의혹에 대해 안길호 PD는 "그런 기억이 없"다며 회피하려 했고, "제가 만든 드라마에서 가해자들은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피해자는 기억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했는데 지금 제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씀을 드려야 할 상황"이라고 답변했다. 하지만 좀더 구체적인 진술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자 그제서야 학교 폭력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안길호 PD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한 부분은 바람직하지만, 그 과정이 매끄럽지 않았다는 점은 아쉽다. 게다가 학교폭력 가해자가 학교폭력에 경종을 울리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아이러니는 올해 최고의 드라마로 손꼽히는 '더 글로리'의 인기와 작품성에 먹칠을 하고 말았다. 완벽한 결말을 완성한 '더 글로리'의 뒷맛이 씁쓸하기만 하다. 어쩌면 현실 속에서 가장 완벽한 결말을 맞이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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