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원인 없고 희망 없는 <서울역>, 그런데 왜 봐야 하냐고?

너의길을가라 2016. 8. 1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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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한다. 하나의 세계관을 공유해서 재생산하는 느낌들이 <부산행>과 <서울역>이 줄 수 있는 큰 재미이지 않나 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하게 되었다" (연상호 감독)


지난 17일, <부산행>이 누적 관객 1,100만을 돌파했다. 그리고 그날, <부산행>의 프리퀄(Prequel, 본편보다 과거의 이야기를 다룬 속편)인 애니메이션 <서울역>이 개봉했다. <내부자들>이 700만 관객을 돌파한 시점에서 감독판인 <내부자들: 디 오리지널>을 순차적으로 개봉해 200만 관객을 더 끌어모으며 흥행 가도를 이어갔던 전례를 밟을 수 있을까? 



관건은 '입소문'일 텐데, 녹록치 않아 보인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좀비에 대한 원인을 찾고 싶었던 관객들이 느낀 '배신감' 때문이다. <부산행>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감염시켰던 정체불명의 바이러스의 실체, 전대미문의 거대하고도 불가항력적인 재앙의 까닭이 궁금했던 관객들은 <서울역>에서 뭔가 해답을 찾고 싶었을 것이다. 아니, 해답이 있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매정하고 얄밉게도 연상호는 입을 꾹 닫는다. 


MBC 수목 드라마 <W>에서 웹툰 작가 오성무가 강철의 가족을 살해한 진범의 정체가 사실은 '설정'이라고 고백한 것처럼, 연상호도 솔직하게 털어놓는 날이 오지 않을까? 애초에 원인 같은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말이다. 실제로 그는 원인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좋은 좀비 영화들에서는 어째서 좀비가 됐는지 밝히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좀비가 무서운 이유는 미지의 존재이기 때문"이라는 그의 말을 반박하기 어렵다. 



그가 집중하는 건 '좀비'라는 현상이다. 그 현상으로부터 야기된 또 다른 현상, 연상호가 집요하리만치 물고 늘어지는 건 그 부분이다. 좀더 풀어서 설명하자면, '좀비'라는 현상이 발생하고 난 후, '대한민국'이라는 사회가 그 현상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고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는지 그리고 그 현상을 흡수(해결)할 수 있는지와 같은 의문 말이다. 그래서 '현상'과 만난 '사회'가 어떤 결과로 치닫는지를 보여준다.


"<서울역>을 만들 때 사회를 비판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다. 세대가 넘어오면서 시스템 탓도 했다가 스스로 반성도 했다가 하는 세대의 흐름이 있었다. <서울역>을 만들고 기획할 당시에는 자포자기를 넘어서서 혐오의 시대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모두가 망해버리라는 사회 분위기를 고려해서 <서울역>을 만들게 됐다. 어쩌면 모두가 공평하게 좀비가 되는 것이 낫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연상호)



여기서 두 번째 이유가 도출된다. "그래서, 도대체, 좀비가 왜, 무엇 때문에 생긴 거야?!" 좀비의 실체, 감염 경로 등 <부산행>을 통해 관객들이 품게 된 의문이 철저히 외면된 후, 관객들은 무기력 속에서 '절망'과 마주하게 된다. 상업 영화 <부산행>과 달리 <서울역>에는 희망적 요소가 없다. 비판은 더욱 날카롭고 적나라해졌고, 메시지는 분명해졌다. 

조금 세심하게 들여다보면, 두 영화는 '제목'만으로도 '희망'의 유무가 드러난다. <부산행>이라는 제목에는 목적지, 그러니까 방향성이 있다. 그 곳에 도착하면 (비록 그것이 거짓일지라도) '안전'할 것만 같은 믿음. 그건 바로 '희망'이다. 하지만 <서울역>은 방향성이 없다. 고정돼 있다. 오도가도 못하는 고착된 위기와 파멸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 않은가? 


서울역 앞에서 대화를 나누는 한 청년은 '보편적 복지'를 강조하지만, 정작 눈 앞의 노숙자를 냄새가 난다며 외면한다. 말뿐인 정의 앞에 그 누가 떳떳할 수 있으랴. 화려한 외관의 서울역 역사(驛舍)에는 사회의 최하 계층을 형성하고 있는 노숙자들이 살아가고 있다. 그들의 삶은 '열악'하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누구에게도 '귀찮고 성가신 존재'인 노숙자들의 목소리는 어디에도 닿지 않는다. 그런데 그 불통(不通)이 낯설지 않은 건 무슨 까닭일까?


정부는 '감염된 좀비'와 '자신들이 지켜야 할 사람'을 구분하지 않은 채 뭉뚱그려 '폭동'으로 몰아간다.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절규하지만, 역시 전달되지 않는다. 정부에게 '소리를 지르는' 모든 존재는 그저 성가실 뿐이고, 고로 제거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이처럼 연상호는 '서울역'이라는 공간 속에 '대한민국'을 잘 새겨넣었다. 관객들은 현실을 잘 빗댄 익숙한 비유에 비릿함을 느낀다. 



기웅(이준)은 여자친구인 혜선(심은경)에게 성매매를 강요한다. 집을 나온 혜선은 갈 곳도 기댈 곳도 없다. 그를 찾겠다고 나선 아빠 석규(류승룡)의 정체도 갈수록 의심스러워진다. <부산행>에서 1,100만 관객들이 수아를 비롯해서 생존을 갈구하는 사람들을 응원했던 것처럼, <서울역>에서 관객들은 혜선의 생존에 관심을 기울인다. 하지만 희망과는 달리 그의 미래에 희망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서, 관객들은 견디기 힘든 불편함을 느낀다. 


이처럼 원인도 없고, 희망도 없는 이 영화에 '입소문'이 좋게 날 리 만무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이 영화를 보지 말아야 할까? 정말 나쁜 '입소문'을 낼 생각인가? 역설적으로 그래서 우리는 <서울역>과 마주해야 한다. 그 꿉꿉함을 정면으로 바라 볼 힘을 가져야 한다. 연상호가 <부산행>에 차마 담지 못했던 이야기들 속에서 '대한민국'을 발견하고, 그 '희망 없음'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혐오의 시대'를 인정하고, 새로운 질문과 대답을 찾아내야 한다.


마지막으로 첨언하자면, <서울역>에는 표면적으로 보이는 현상 말고도 감춰진 또 하나의 공포가 있다. 그건 '좀비'보다 무서운 건 오히려 '인간'이라는 진리다. <삼시세끼>를 따라해보자면, "우리 선조들이 대단하셔. 옛 선조들은 이렇게 말씀하셨지. 귀신보다 사람이 무섭다"고, 정말 그렇다. 사실 '좀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보면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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