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재난 영화 <터널>이 남달리 빛나는 두 가지 이유

너의길을가라 2016. 8. 10. 2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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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간다>의 김성훈 감독의 '지독함'과 '믿고 보는 배우' 하정우의 '진정성'이 만났다. 지난 8월 10일, 재난 영화 <터널>이 개봉했다. <덕혜옹주>, <인천상륙작전>, <부산행>, <수어사이드 스쿼드> 등 만만치 않은 경쟁작들이 이미 스크린을 활보하고 있는 상황에서 올림픽 특수가 예상되는 <국가대표2>까지 상대해야 하는 <터널>이 과연 순항할 수 있을까? 개봉 첫날 37만 8,942명을 동원하며, 압도적인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성적표만 놓고 봤을 때는 일단 '초록불'이 들어온 듯 보인다.



1. 기존의 재난 영화의 문법을 뒤흔들다


우리에겐 '재난 영화는 뻔하다'는 '확신'이 있다. 그건 '선입견'이 아니다. 그만큼 재난 영화를 표방했던 기존의 영화들이 고루(固陋)하고 진부했던 탓이다. 그 상투적인 영화들은 이른바 '전조(前兆)'라고 하는 '기미'가 초(중)반을 장식한다. 감독은 관객들에게 '긴장감'을 준다고 생각하겠지만, 이미 관객들은 지루함을 느낀다. 반복되고, 남용된 클리셰(cliché)는 더 이상 관객을 매료시키지 못함에도 재난 영화들은 발전 없는 나태한 모습으로 일관해 왔다. 떽!


한국 영화로만 범위를 좁혀보자. <해운대>, <감기>, <타워> 등을 쉽게 떠올릴 수 있다. 이 영화들은 재난의 징후를 알리는 데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낭비한다. 그리고 정작 '재난'에 대해선 매우 짧은 시간을 할애한다. 주객전도(主客顚倒)에 가깝다. 그리고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고, 그가 들려주는 '희생'과 '감동'의 스토리에 승부를 건다. 관객의 눈물을 뽑아내겠다는 얄팍한 수가 너무도 쉽게 읽히고, '또로록' 흐르는 눈물은 호들갑스럽게 클로즈업 된다. 아, 맙소사!





"기존의 재난 영화의 방식을 따라가진 않았고요. 기존의 재난 영화의 방식이라 하면, 재난이 일어나기 전 그 전조 현상, 그것을 준비하고, 대처하고, 그러다가 2/3 지점에서 그러한 재난을 맞이해서, 그러면서 영화가 흘러간다면, 이번 <터널> 같은 경우는 재난이 시작되면서 영화가 시작합니다. 그래서 재난 후에 그 안에 갇힌 한 남자가 어떻게 고군분투하면서 살아나는지를 집중하면서 보여주는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8월 4일 JTBC <뉴스룸>에 출연한 하정우의 인터뷰 중에서)


그런데 <터널>은 다르다. 이 영화는 '전조'가 없다. 시작과 함께 '재난'이 들이닥친다. 그리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부딪친 무력한 한 명의 인간이 있을 뿐이다. 초조함과 불안감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몸을 사시나무처럼 떨고, 공포 앞에 나약해진 한 인간 말이다. 이정수(하정우)는 생일을 맞은 딸에게 줄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가던 중 터널이 무너지면서 그 안에 꼼짝없이 갇히게 된다. 언제 구조될 지 알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생존을 위한 처절한 사투가 시작된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약간 웃음기가 가미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 과정은 숨막히고 절망적이다.


기존의 재난 영화들이 주인공의 '위대한 희생'이라는 상투적인 전략을 통해 재난을 극복하는 이야기를 그렸다면, <터널>은 주인공을 '영웅'으로 만들 생각이 애초부터 없다. 오히려 주인공은 무언가를 하려 나서기보다 구조대장 김대경(오달수)이 알려주는 '생존 수칙'을 충실히 이행한다. 버티고 또 버티는 것. 희생자인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생존'뿐이다. 또, 신파로 관객의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상황은 이미 주어져 있고, 배우의 연기는 그 결만 따라가면 되는 것이다. 아내 세현 역할을 맡은 배두나의 절제된 연기가 돋보이는 까닭은 거기에 있다. 





2. 대한민국 사회의 현주소, 그 적나라한 초상화 


<터널>은 적나라하다. '재난'을 마주한 대한민국 사회의 모습을 '극'사실적으로 비춘다. 터널 붕괴의 원인은 '부실 공사', '날림 공사' 때문이다. 여전히 '장관'은 얼굴을 비출 뿐, '전문가'가 아니다. "전문가들과 협의해서 결정하세요"라는 코멘트를 남긴 채 자리를 황급히 뜬다. 공무원들은 '적재적소'에 꼭 '얼굴'을 비추는 데, '사진' 한 장 남겼으면 그뿐이다. 매뉴얼이 부재한 구조 작업은 더디다. 애초에 설계도는 엉망이다. "대한민국의 안전이 무너졌다"며 엄중히 꾸짖던 언론은 정수의 '생존 기록'에 온통 관심이 쏠려 있다.  


그 묘사가 너무도 적확(的確)해서 영화를 보는 내내 마음이 참 불편했다. 고통이 가시질 않았다. 감히 예견해 본다면, 지금 당장 그와 같은 재난이 현실 속에서 똑같이 발생한다고 하면, 우리가 실제로 목도할 상황들이 <터널>의 그것과 별반 다를 것 같지 않다. 좀더 직접적으로 말해볼까? 대한민국 사회는 '세월호'를 겪었지만, 과연 오늘 또 하나의 '세월호'가 발생한다고 했을 때, 지난 2014년 4월 16일의 악몽이 재현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없다. 다를 것 같지 않다. 



손석희 : 영화 속의 상황이라든가, 대사 같은 것들이, 나중에 보시게 되면 어떻게 느끼실지 모르겠는데, 세월호를 연상하게 한다는 얘기가 많이 나왔습니다. 시사회가 끝난 다음에. 물론 이 영화를 감독한 분은 그거 아니다, 사실은 이 작품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기 훨씬 전에 나왔던 작품이기도 하고. 시나리오는. 그래서 그건 아니다, 라고 얘기했는데, 주연 배우로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정우 : 충분히 연관이 있을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고요. 물론 이건 다 관객이 판단할 몫이라고 생각이 들죠. 물론 그 의도를 가지고선 만들진 않았던 것 같아요. 지난 과거에 있었던 가장 가슴 아픈 일 중 하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감히 극 영화의 소재로 쓸 수 있냐라는 그런 조심스러움이 가장 큰 것 같아요. 하지만 그 가슴 아픈 일과 이 영화의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이 영화의 대사 중에, 오달수 선배가 친 대사 중에,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다. 이 안에 갇힌 건 사람이다. 자꾸 까먹는 것 같은데, 사람이라구요'라고 외치는 그런 대사가 있는데, 바로 그렇게 보편적이면서 진리에 해당하는 것을 너무 간과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이 영화는 바로 그런 소중함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 같아요.


영화 속에서 돋보이는 건,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는 '개인'뿐이다. 여전히 시스템은 작동하지 않는다. 언론은 사건이 발생한 후 얼마 동안은 집중적인 보도를 통해 관심을 환기시킨다. 사람들도 관심을 가진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뇌리 속에서 쉽사리 잊혀진다. 오히려 '방해'로 여긴다. 경제 논리에 밀려 '사람의 생명'은 뒷전이 된다. 구조대장 김대경의 "도룡뇽이 아니라 사람이에요. 이 안에 갇힌 건 사람이에요. 자꾸 까먹는 것 같은데, 사람이라구요"라는 외침은 사람들의 귀를 스쳐지나간다. 




이처럼 <터널>은 재난의 '생존자(희생자)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 변화에 주목한다. "이쯤하면 됐잖아"라는 합리화에 우리는 얼마나 얄팍한 양심을 드러내는가. 분명 이 영화는 '세월호' 이전에 시나리오 작업을 마무리한 작품이고, 직접적으로 그 사건을 묘사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우리는 이 영화를 통해 '세월호'를 떠올린다. 그리고 '미안함'이 마음을 아린다. '죄스러움'이 가슴을 후벼판다. 인터뷰에서 손석희 앵커의 다음 말이 참 아프다.


"감독이 이야기한 것 중에 한 가지 인상적인 것이 있었습니다. 세월호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연관성을 떠올렸다면, 그렇게 느끼게 된 현실이 슬픈 것이다.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슬프고, 고통스럽다. 무엇이 해결됐는가. 무엇이 달라졌는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계속해서 묻지 않을 없다. 과연 우리는 '세월호' 이후 얼마나 나아갔는가.. 누가 대답을 해줄 수 있을까. 답은 우리가 찾아야 한다. 찾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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