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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 문맹률 논란, 오상진 아나운서의 중재가 돋보였다

너의길을가라 2022. 8. 25.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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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이 지금보다 훨씬 심심찮게 사용되던 시절에 '동음이의'를 활용해 말장난을 쳤던 기억이 있다. "에이, 사과가 심심해?"라는 식이다. 그러면 상대방은 "이 '심심'이 그 '심심'이냐?"며 면박 아닌 면박을 줬고, 서로 실없이 웃었다. '심심(甚深)하다'라는 단어의 뜻이 '마음의 표현 정도가 매우 깊고 간절하다'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하찮은 농담이었다.

물론 원래부터 그 의미를 파악하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심심한 사과'라는 말을 처음 접했을 때 그 뜻을 헤아리기 위해 국어사전의 도움이 필요했다. 언어의 확장은 그런 식으로 이뤄진다. 세상의 모든 어휘를 다 알 수 없기에 모르는 단어와 마주할 때마다 배워서 습득하면 된다. 아마 동음이의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해 주춤했을 누군가도 나처럼 국어사전의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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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심심한 사과'가 논란의 중심에 섰다. 지난 20일, 한 웹툰 작가가 열기로 한 사인회 예약 과정에서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자 주최 측인 카페에서 사과를 담은 공지문을 트위터에 게재했다. 공지문은 다음과 같이 끝난다. "예약 과정 중 불편 끼쳐 드린 점 다시 한 번 심심한 사과 말씀 드립니다." 정중한 사과에는 별다른 하자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한 사람이 있었다.

“제대로 된 사과도 아니고 심심한 사과? 진짜 XXX들 같다."

일부 트위터 이용자들은 '심심한 사과'하는 표현에 딴지를 걸었다. 이것 때문에 더 화가 난다며 꼭 '심심한'이라고 적어야 했냐며 댓글을 달았다. 이어 "심심한 사과? 난 하나도 안 심심하다. 너희 대응이 재밌다"며 생각 있는 사람이 공지글을 올리도록 하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심심(甚深)'이라는 한자어를 모르고, '할 일이 없어 지루하고 따분하다'는 뜻으로 새긴 탓이다.

이 상황을 포착한 일부 언론은 대한민국의 '실질적 문맹률'이 75%에 달한다는 OECD 조사를 언급하며, "기술이 발달할수록, 미디어로 정보를 접하거나 글을 읽는 게 익숙해질수록 실질 문맹률이 더욱 높아질" 거라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했다. 일각에서는 학교에서 한자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았 때문이라며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그밖에도 각종 조롱과 비난이 쏟아졌다. 정치권도 논평에 가세했다.


한편, 24일 오상진 아나운서는 '뒤늦게 올려보는 문해력에 논란에 대한 나의 생각'이라는 글에서 조심스레 자신의 의견을 밝혔다. 그는 "언어는 변화하기 마련"이고, "한국어는 참 어렵"다는 전제로 논지를 펼쳐나갔다. 결론은 '싸울 필요가 없다'였다. 어렵고 복잡한 한국어를 마스터하는 건 불가능하고, 그럴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오상진 아나운서도 사전의 도움을 받으면 된다고 강조했다.

오상진 아나운서가 생각하는 이 논란의 핵심은 무엇일까. 그는 "지나친 자기 확신과 뭘 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오만이 부딪혔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고 꼬집었다. 생각해보자. 고객을 상대하는 업체가 사과를 하는데 '조롱'이라는 수단을 쓸 까닭이 있을까. 설령 '심심한'이라는 말이 거슬렸을지라도 오해의 여지를 없애기 위해 국어사전에서 찾아봤다면 어땠을까.

또, 누군가 '심심한 사과'라는 말의 의미를 모른다고 해서 조롱할 필요도 없다는 게 오상진 아나운서의 생각이다. 그는 '학식을 갖춘 이들의 거드름과 무시가 사회의 갈등을 격화시켰다'는 마이클 샌델의 분석을 인용하며 "한 번 더 설명하고 이해를 구하는 태도"를 요구했다. 오상진 아나운서는 자신의 의견을 '양비론'이라 말하며 민망한 듯 웃었지만, 이 정도의 의견이 가장 균형감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같은 논란은 비일비재하게 나타날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듣도보도 못한 생소한 어휘'일 테지만, 누군가에게는 '당연히 알아야 할 상식적인 어휘'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충돌이다. 문제는 이 충돌이 소통의 여지를 차단하고, 조롱이나 비난처럼 소모적인 갈등으로 비화된다는 점이다. 얼마 전 '금일', '직조', '명징' 등의 단어가 도마 위에 올랐던 것과 같은 맥락이다.

흔히 언어는 살아있는 생물과 같다고 한다. 과거부터 언어는 계속 변화를 거듭했고, 현재도 변하고 있다. 기성 세대가 썼던 수많은 말들이 사라졌고, 오래된 책 속에 박제된 채 더 이상 쓰이지 않는다. 그 빈자리는 신세대가 만들어내는 신조어들로 채워진다. 다양하고 흥미로운, 재치있는 말들이 우리 삶에 들어온다. 우리는 이 흐름에 순응할 수밖에 없고, 또 적응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심심한 사과' 등 이른바 문맹률 논란에서 한 가지 더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우리 사회의 소통에 신뢰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신뢰 없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문맥을 이해하고 맥락을 살피기보다 어휘 자체에 몰두하고 집착하게 된다. 사과문에 조롱을 섞을 가능성이 없음에도 그 의도를 끊임없이 의심한다. 이런 갈등은 오해를 낳고, 심지어 악의적 오독으로 이어진다.

한쪽은 문맹이라 조롱하고, 한쪽은 꼰대라고 비웃는다. 한쪽은 교육을 강화하라고 아우성이고, 한쪽은 당신들은 신조어를 아느냐고 따진다. 이 소모적 논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오상진 아나운서가 말했듯, 모르면 알아가면 되고 모른다고 얕볼 필요는 없다. 양쪽 모두 조금 열린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싸우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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