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스승의 날 선물? 가격이 문제가 아니라 원천적으로 금지시켜야

너의길을가라 2016. 5. 14. 0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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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반복된다. 스승의 날은 어김없이 돌아오고, 엄마들의 고민은 시작된다. '선물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은 학부모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선생들도 괴롭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감사의 인사로 간단한 선물을 주고 받는 것을 선의(善意)로 해석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치 않지만, 그로 인한 폐해가 훨씬 더 깊으니 아예 원천적으로 차단할 방법을 고민해 봐야 하지 않을까?




<한국일보>는 인천의 한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의 사례를 통해 '작은 성의'의 곤란함에 대해 보도했다. 스승의 날에 학교를 찾은 한 학부모가 "면세점에서 구입해 3만원도 안 되니 부담 갖지 마시라"며 명품 브랜드 D사의 립글로스를 굳이 놓고 떠났다고 한다. 1차적으로 거절했지만 완강한 학부모를 꺾을 수 없었고, 결국 돌려줄 타이밍도 놓쳐서 아예 '선물을 받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퍼졌다는 것이다.


물론 위와 같은 상황이 '불법'은 아니다. 애초에 공무원 행동 강령에는 선물 비용에 대한 상한액이 없으므로, 9월부터 시행될 예정인 '김영란 법(부정 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법)'을 기준으로 살펴보자면, 식사는 3만 원, 선물은 5만 원, 경조사비는 10만 원 이하까지만 가능하다. 또, 실제 가격이 5만 원을 초과한다고 하더라도, (면세점 등에서) 싸게 구입했다는 '영수증'만 있다면 불법이 아니다. 


물론 교육청마다 다른 기준(서울시교육청은 3만 원 이내의 꽃이나 선물만 허용)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럴 경우에는 더 엄격한 기준이 우선적으로 적용된다. 선생님 입장에서 정말 난감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물론 '다른' 학부모 입장에서도 그러했을 것이다. '선물을 안 줬다가 우리 아이만 피해를 입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에 눈치 게임이 시작됐을 테고, 성의표시 러시가 본격적으로 이뤄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이 계속 발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스승의 날은 선생들에게 선물을 주는(정확히는 '줘야 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아직까지 공유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촌지'라고 해서 '돈 봉투'를 건네는 것이 일상적이었지만, 이제 그런 방법은 '무식한 짓'으로 여겨진다. '교양 있게' 선물을 건네야 하고, 그건 눈에 띠지 않는 방법으로 '노련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노골적으로 '선물'을 요구하는 선생은 시대의 흐름과 함께 거의 사라졌다. 남은 것은 '은근슬쩍' 기대하는 선생 정도다. '한번 거절하고, 그래도 주면 어쩔 수 없이 받는' 정도랄까. 물론 선생의 입장에서 계속 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건 이해가 된다. 학부모와의 관계가 틀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차라리 값이 비싸면 거절해도 이해를 할텐데 소액이니 받기도 안받기도 애매하다"는 푸념도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다.



선물과 뇌물의 경계를 정하는 '상한선'을 정한 까닭은 정치적인 계산에 의한 타협점이다. 그것이 '고액'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것일까. 법망이 아무리 촘촘해도 구멍이 있기 마련이고, 부정과 부패는 그 구멍을 자유로이 활보한다. 3만 원이든 5만 원이든 그것이 '상한선'이라는 이야기는, 그만큼만 주고 받으면 '괜찮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하한선'이고, 그 밑바닥은 '박원순법'의 1,000원 이상처럼 선물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수준이어야 한다. 물론 그러자면 김영란법이 '내수를 위축시킨다'는 대통령의 발언이나 "김영란법을 그대로 시행한다면 한우 축산 농가는 모조리 사라질 것"이라는 보도를 통한 '흔들기'를 넘어야 한다. 5만 원으로 정하는 데도 저리 죽겠다고 아우성인데, 박원순법은 '혐오'의 대상이지 않을까?



다시 돌아와서, 스승의 날은 선생들에게 선물을 주는 날이라는 인식의 배경에는 '감사의 마음'보다 '선물을 주지 않으면 우리 아이만 피해를 볼 것이라는 불안감'이 자리잡고 있다. 선생도 사람인지라 무언가를 받으면, 그 아이에게 눈길이 한번 더 가게 마련이다. 고마워서라기보다는 마음의 빚을 덜고자 하는 심리적 반응이다. 그것이 바로 선물의 호용성(效用性)이다. 


김동석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의 "금액의 크고 작음을 떠나 교사와 학부모 사이에 물질이 오가게 되면 신뢰가 깨질 수 있다"는 말은 원론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선물을 안 해 자녀가 미움 받지 않을까'하는 걱정보다 믿음을 갖고 지켜봐 주는 것이 교사의 자긍심을 살려주는 참된 스승의날의 의미"라는 말은 공허하게 들린다. 누구는 주는 데, 누구는 안 준다는 것이 부모의 마음에서 가능하냐는 말이다.



따라서 원천적인 봉쇄가 필요하다. '3만 원(혹은 5만 원)의 선물은 괜찮다'는 느슨한 규제가 아니라 '선물은 안 된다'는 보다 강력한 규제 말이다. 공직 사회 전반에 '박원순법'의 도입이 절실한 까닭이다. 그렇게 되면 매년 돌아오는 스승의 날마다 이어지는 '눈치 게임'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선생의 입장에서도, 학부모의 입장에서도 그게 마음 편한 일 아닐까?


사실 더 큰 문제는 그나마 법적 규제의 테두리에 있는 '공교육'이 아니라 그로부터 벗어나 있는 '민간 영역'일 것이다. 국민권익위원회가 밝혔듯이 "학원이 민간 영역이고 어린이집도 보육기관이어서 제재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학부모들은 더욱 괴롭기만 하다. 따라서 공교육이든 민간 영역이든 간에 변화의 주체는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 그야말로 규제는 거들 뿐이다. 


'스승'으로서의 '자존감'이 요구된다. 또, 이를 '기관'들은 이를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령, 학부모가 선물을 떠밀듯 놓고 갔다면, 이를 돌려주는 책임을 '개인'에게 둘 것이 아니라 '학교(기관)' 차원에서 돌려주는 시스템을 만들어놓아야 한다. 또, 선물을 자진신고할 경우 교육청 차원에서 포상을 한다면 신고율은 훨씬 더 높아지지 않을까?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스승의 날에 왜 선물을 줘야(받아야) 할까?'라는 근원적인 물음들이 계속해서 고민을 잉태하는 것이다. 또, 선물을 주지 않아도 내 아이가 차별받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그리고 그 믿음에 부응하는 건강한 선생들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야말로 이 '찌질할'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해결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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