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순우리말 에세이 '낱말의 장면들', 당신의 낱말은 무엇입니까?

너의길을가라 2024. 4. 4.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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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무력하다고 느껴질 때 어떻게 하나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다양할 것이다. 몸을 짓누르는 무력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특정한 행동이나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오히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침잠(沈潛)하는 선택지도 있다. 그런데 "자신이 무력하게 느껴질 때면 외국어 단어를 외우"는 사람이라니! 몹시 흥미로웠다. 도대체 어떤 사람일까.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어릴 적부터 자신을 설멸할 수 있는 말들을 찾아 헤맸"던 저자 민바람은 국어국문학을 전공하고 10여 년간 외국 학생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현재는 편의점 알바생과 자유기고가 사이를 오가며 글을 쓴다. 성인 ADHD와 우울증, 사회불안장애를 겪으며 사람의 마음을 배웠고, "꼭 단단해지지 않아도 좋다는 단단함"을 깨우쳤다. 그 과정에서 낱말은 큰 역할을 했으리라.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 저자는 단어를 외운다. "온 힘을 다했지만 일터에서 인정받지 못할 때", "마음을 터놓을 대상이 없을 때"에도 낱말을 곰비임비 마음에 쌓는다. 문득 어릴 적 적적할 때마다 두꺼운 국어사전을 펼치고, 그 안을 빼곡하게 채운 수많은 단어들 사이를 여행하곤 했던 기억이 났다. 묘한 동질감, 애틋한 동지애가 느껴졌다.

민바람은 "낱말을 소리를 입 안에서 굴려보면 저마다 다른 말맛이 좋았고, 낯선 뜻과 소리를 연결 지으려고 엉뚱한 상상을 하다 보면 기분도 나아졌"다고 썼다. 그에게 '모르는 낱말들'은 삶의 우여곡절을 이겨내는 '진통제'가 되어주었다. 여는 글을 읽고, 이 책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저자가 찾은 낱말들이 궁금해 조바심이 났고, 그가 낱말과 함께 발견한 장면들을 공유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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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내공은 자신의 밑바닥을 움켜쥐는 힘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거칠고 버거운 감정까지, 제일 못난 모습까지. 그것은 나를 흔드는 것들을 막아내려 애쓰는 힘보다는, 흔들리되 뿌리까지는 흔들리지 않게 발 딛고 버티는 힘에 가까웠다. 내 안의 모든 것을 그저 바라보면 외부의 일을 받아들일 여력이 생겼고, 상황을 통제하려는 불가능한 시도와 거리를 둘 수 있었다. (p. 22)


<낱말의 장면들>은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저자는 '지친 마음을 쓰다듬는 낱맡', '나아갈 길을 열어주는 낱말',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낱말'로 나눠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은 불안장애와 공황 증세에 시달렸던 저자가 고통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만의 낱말들을 손에 꼭 쥐고 삶을 긍정해 온 기록과도 같다. 고된 과정을 겪은 후 닿은 안온한 일상은 너무나 소중해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저자가 소소한 일상 속에서 느낀 다채로운 감정들과 깊이 있는 사색들이 인상적으로 읽힌다. 결정을 주저하고 선택에 고민하는 일이 잦은 저자는 "후회는 과거의 선택을 현재의 시선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생긴다. (...) 스스로 선택했다는 건 그것만으로도 삶을 감장(제 힘으로 일을 처리하여 나가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뜻(p.97)"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간다.  

또, 사회의 관념이나 고정관념에 대한 자신만의 고민과 해답도 담겨 있다. 이를테면 건강을 강요하는 사회를 향해 "건강하지 않아도 괜찮다. 건강하지 않은 삶도 틀리지 않다."(p.37)고 담담히 말한다. "건강은 인생의 중요한 밑천이지만 건강하지 않다고 해서 인생이 불완전하거나 불행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 건강에 대한 집착에서 한걸음 물러선 저자의 관조적인 태도가 마음을 사로잡는다.

무엇보다 불안한 삶에 흔들렸던 저자이기에, 지금 이 순간 휘청거리는 사람들에게 진솔한 위로와 용기를 전한다. "내가 찾아낸 숨은 그림에서 아무 맛이 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는 잊지 않았는지 돌아본다. 내 힘으로 하루를 살아간다는 게 얼마나 큰일인지. (p.119)"라는 말에서 오랜 내공으로 쌓아왔을 저자의 '내밀힘(밖이나 앞으로 밀고 나아가는 힘)'을 느낄 수 있다.

저자가 공들여 선발한 '산말(실감 나도록 꼭 알맞게 표현한 말)'들을 입안에 넣고 여러 차례 발음해 보다보면 우리말이 주는 특유의 '말맛'을 느낄 수 있다. 신비로운 경험이다. 하나의 낱말을 알고, 외우고, 익히고, 말하는 일이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낱말의 장면들'은 알려준다. 저자는 "자신을 아끼는 마음에는 근거가 필요하지 않다(p. 199)"며 독자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준다.

민바람의 난맡들로 치유와 위로를 얻었다면, 이제 각자의 낱말들을 찾아보는 건 어떨까. 나에게 용기를 주는 단어들을 주머니 속에 담아두고 있다면 위기의 순간이나 불안의 순간에 잠시 휘청이더라도 넘어지거나 무너지지 않을 수 있으리라. 당신의 낱말을 찾는 여정을 시작해보자. 삶이, 삶을 살아가는 묘미가 훨씬 더 풍부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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