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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 필요했던 송혜교와 김은숙, 그들의 살벌한 복수극 ‘더 글로리’가 성공한 이유

너의길을가라 2023. 1. 2.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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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송혜교)


학교폭력으로 영혼까지 산산히 부서진 여자, 문동은(송혜교)은 온 생을 걸어 치밀한 복수를 준비했다. 지옥과도 같은, 그 참혹한 폐허를 견뎌냈다. 18년 동안, 그러니까 10대와 20대, 30대 초반의 삶을 온통 복수를 위해 갈아 넣었다. 그리고 가해자의 외동딸이 다니는 초등학교의 담임이 돼 나타났다. 그는 가해자에게 선언한다. “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고. “지금 너무 신”난다고.

고교시절의 문동은(정지소)는 소위 일진이었던 박연진(신예은)과 그 일당들에게 집요한 학교폭력을 당했다. 단순한 괴로힘 정도가 아니었다. 문동은의 몸에는 고데기에 의해 지져진 상처로 성한 곳이 없었다. 문드러진 살점은 참을 수 없이 가려웠고, 긁을 때마다 피가 배어나왔다. 저들은 일말의 망설임이나 죄책감 없이 문동은의 영혼을 파괴했다. 마치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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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도 문동은을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학교는 눈을 감았고, 경찰도 묵인했다. 학교 폭력을 눈치챈 양호 선생님은 곧바로 학교에서 쫓겨났다.   ’금수저‘ 박연진 집안의 재력과 인맥은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담임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이라며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자신의 고과에 마이너스가 된다는 이유였다. 엄마조차 돈의 유혹에 딸의 고통을 방치했다.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게 나을까. 문동은은 한겨울 차가운 강물 앞에 서기도 했고, 건물 옥상 위에 올라보기도 했다. 한 걸음만 내딛으면 삶을 옥죄는  고통이 사라질까. 치욕에서 멀어질까. 지옥을 만든 저들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 순간, 문동은은 ‘꿈’을 가지기로 했다. 그 꿈이란 바로 ’박연진‘이다. 혼자 죽지 않겠다. 저들과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겠다. 문동은은 복수를 꿈꾼다.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송혜교)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는 ‘로맨스 달인’이라 불릴 만큼 멜로라는 장르에 특화되어 있는 김은숙 작가의 ‘복수극’이다. 이 ‘이질감’은 호기심과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 과연 김은숙이 쓴 복수극은 어떤 느낌일까. 게다가 이 복수극의 주인공이 송혜교라니, 낯설기만 했다. 가슴 설레는 달달한 멜로에 주로 출연했던 그가 복수의 살벌함을 그려낼 수 있을까.

이질감과 낯섦은 곧 기대감으로 바뀌었다. 자칫 ’뻔한 통속극‘이 될 수도 있었던 <더 글로리>는 ‘웰메이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갔다. 뼈대가 탄탄한 스토리라인은 시청자들을 순식간에 몰입시켰는데, 그러면서도 예상을 조금씩 빗겨가며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또, 김은숙 작가 은유적 설정과 대사들은 극을 풍성하게 만들었다. 물론 특유의 ‘오글거림’도 여전하기는 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송혜교의 ‘변신’이었다. 송혜교는 KBS2 <태양의 후예>, tvN <남자친구>, SBS <지금, 해어지는 중입니다> 등 최근 멜로 드라마에 연달아 출연했는데, 이 선택은 작품의 화제성과는 별개로 그의 연기 폭을 ‘제한’했다. 연기 인생에 있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더 글로리>에서 송혜교는 분노, 증오, 적개심, 절망 등의 감정을 뻔하지 않게 표현했다.

분노, 증오, 적개심 등을 ‘격렬하게’ 연기하는 건 쉬운 일이지만, 소리를 지르거나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은 상태에서 감정을 전달하는 건 어려운 일이다. 이 난도 높은 연기를 미묘하게, 자유자재로 연기하는 송혜교를 보고 있으면 경이롭기까지 하다. 연기 인생의 분기점을 마련한 듯하다. 왕자가 아니라 망나이가 필요하다는 대사에서 김은숙과 송혜교의 연대를 뚜렷하게 확인할 수 있다.


<더 글로리>는 ‘학교폭력’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불편함도 함께 전한다.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고통 속에 허우적대지만, 가해자들은 번듯한 삶을 살아가는 비극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냈다. 그런 의미에서 ‘현모양처’가 된 박연진(임지연)을 비롯해 전재준(박성훈), 이사라(김히어라), 최혜정(차주영), 손명오(김건우) 등 각자의 꿈을 성취한 가해자들의 추락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가해자들의 붕괴만큼이나 피해자들의 연대도 눈에 띤다. 가정폭력범 남편을 죽여주는 조건으로 동은에게 접근해 고용된 현남(염혜란)은 긴장감 넘치는 드라마의 ‘쉼표’ 같은 존재인데, 그의 ’명랑함‘은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잊을까봐 웃음조차 잊은 동은을 마침내 웃게 만든다. 무심하고 섬뜩한, 싸늘한 얼굴의 송혜교가 슬며시 웃을 때 그 감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한 여운을 남긴다.


작년 12월 30일, 시즌1(8부)이 공개된 <더 글로리>는 공개와 동시에 TV쇼 부문에서 글로벌 전체 9위에 랭크됐고, 상승세를 타고 5위까지 뛰어올랐다.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카타르, 사우디아라비아, 싱가포르, 대만, 태국, 베니수엘라 등에서 차트 1위, 홍콩, 일동 등에서 2위) 2일 현재 국내 넷플릭스 시리즈 순위에서 1위에 오를 정도로 뜨거운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시즌1의 성공으로 3월에 공개될 예정인 시즌2 역시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첫 복수극’을 집필한 김은숙과 연기 변신에 성공한 송혜교, 과감히 칼춤을 추기로 협심한 두 사람의 합작품 <더 글로리>의 결말이 어떨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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