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동시조합장 선거는 돈 선거판? 반쪽 성과? 그럼에도 냉소를 거두자

너의길을가라 2015. 3. 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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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시민이 폴리스를 다스리는 데 생업의 큰 부분을 기꺼이 희생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정치를 통해 시민이 자신의 가치와 서로의 동등함을 느낄 수 있었다는 게 한 가지 이유일 것이다. 더군다나 폴리스는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었다. 모임을 갖고 토론을 하고 투표를 하는 정치 무대는 시민이 일상을 보호하고 공동의 정체성을 발견해 고양하는 장소였다.

 

-로저 오스본,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지난 11일, 제1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가 치러졌다. 사상 처음으로 동시에 농 · 수 · 산림 조합장을 선출하는 선거가 치러진 것이다. 부정선거가 발생하는 것을 막기 위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위탁해 조합장을 뽑기로 한 만큼 기대가 컸다. 1326곳에서 3523명의 후보자가 입후보(2.6대 1의 경쟁률) 했고, 투표권을 가진 조합원 229만 7,075명 중 투표율은 80.2%로 집계됐다.

 

<세계일보>는 경북 안동시 임동면 중평리 등 투표가 이뤄진 전국의 각 지역의 모습들을 전하면서 무엇보다 투표 열기가 높았다고 전하고 있다. 특히 '부산 해운대구 좌2동 투표소에서는 한 수협 조합원이 목발을 짚은 채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해 눈길을 끌었다'는 부분은 의미있게 와닿았다. 생업의 큰 부분(작은 부분이라고 할 지라도)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정치'에 참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투표소를 찾는 사람들의 모습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이렇게 훈훈한 소식만 전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다음 날 전해진 뉴스들은 제1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에 대해 다루면서 내리면서 다음과 같은 표현들을 사용했다. "'돈 선거판' 된 첫 전국동시 조합장 선거", "조합장 동시선거 '반쪽 성과'" 하루만에 완전히 180도 뒤바뀐 평가였다.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면, 이번 조합선거로 당선된 총 1천326명 중 181명(13.6%)이 내 · 수사 대상이고, 이 가운데 3명은 구속된 상태라고 한다.

 

경찰 측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견을 제시했다. 먼저, 후보자 본인만 선거운동을 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 지금의 조합장 선거 운동 제한을 다소 완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은 조합원 자격 심사를 강화해서 선거 기간에 발생할 수 있는 편법과 부정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조합장에 비해 인지도 면에서 불리할 수밖에 없는 다른 후보자들이 돈 선거의 유혹에 휩싸일 우려가 크다는 점도 지적했지만, 이는 여타의 선거와 다를 바 없는 공통적인 특성이라고 여겨진다.

 

 

제1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가 '돈 선거판'으로 전락했다는 뉴스를 접한 사람들은 분노를 쏟아냈을 것이다. 더 이상 화를 내는 데 지친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안 썩은 데가 없어'라며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을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 선거를 비롯해서 지방선거에 이르기까지 각종 선거들에 극도의 실망감을 가지고 있을 사람들에게 이번 선거의 부정적인 모습이 주는 타격은 더욱 심할 것이다. 회의주의가 더욱 팽배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눈을 돌릴 것인가? '어차피 똑같아'라는 자조 섞인 말로 '정치'를 외면할 것인가? 이번만큼은 중앙선관위의 말을 믿어보는 건 어떨까? "처음 실시한 동시 선거인 만큼 수사 대상에 오른 당선자들이 많은 것 같다. 선거가 반복되면서 불법 선거 운동에 대한 인식이 정착된다면 앞으로 불법 선거 행위가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세계일보

 

일부의 부정(不正) 때문에 전체를 놓치는 우(愚)를 범해선 안 된다. 적어도 중앙선관위에 위탁한 이번 선거에선 부정선거를 저지른 당선자(조합장)들에게서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게 됐다. 베일 속에 가려져 있던 과거에 비해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다. 게다가 13.6%가 내 · 수사 대상에 올랐다는 말은 86.4%(중 안 걸린 사람도 있겠지만)는 깨끗한 선거를 치렀다는 의미가 아니겠는가? 적어도 민주주의에 있어서는, 보다 긍정적인 측면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이는 비단 조합장 선거에만 국한된 접근법은 아닐 것이다.

 

먼저 한 가지는 분명히 해두고 시작하자. 민주주의는 두말할 것 없이 인류 최고의 업적이다. 누군가는 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이상화하고, 번용하고, 왜곡하고 , 놀리고, 조롱한다. 또 누군가는 방탕한 연인처럼 구애하다 한눈을 팔고, 가식적인 친구처럼 환대하다 등을 돌리고, 줏대 없는 동지처럼 손을 잡았다가 난도질을 한다. 하지만 생활양식이자 정치 체제로서 민주주의는 현대를 사는 인간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을 꾸려나가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수단이다. … 민주주의는 개인적인 삶을 허용하면서도 우리를 하나로 결속시키는 계속적이고 집단적인 노력이다.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민주주의 없는 세상은 암울하다.

 

-로저 오스본, 『처음 만나는 민주주의 역사』-

 

비록 아쉬운 모습들이 드러나긴 했지만, 조합장 선거가 '빛'으로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한 걸음 이상 나아간 셈이다. 부족한 부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보완해나가면 될 일이다. 벌써부터 지레 포기할 이유는 없다. 우리가 제1회 전국 동시 조합장 선거를 바라보면서 '냉소'만을 머금고 지나친다면, 우리의 세상은 더욱 암울해질 것이다. 더불어 앞으로 있을 굵직한 선거들을 마주하는 우리들의 마음가짐도 다잡아보도록 하자. 함께 기억하자. "민주주의가 살아 있는 한 희망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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