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연예

더 불쾌해진 '7인의 탈출', 김순옥 월드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너의길을가라 2023. 9. 19. 11:10
반응형

한 편의 극본을 쓰기 위해 작가들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뎌낸다. 인물을 창조하고, 사건을 부여하고, 삶을 그려낸다. 그렇게 하나의 세계를 직조한다. 여기에 '개연성'은 필수이다. 우격다짐으로 지어낸 이야기에 사람들은 몰입하지 않고, 공감하지 않는다. 그래서 작가들은 인물과 사건, 그러니까 자신이 만든 세계를 '그럴 법하게' 만드는 일에 온힘을 다 쏟는다.

당장 몇 명의 작가가 떠오른다. 김은숙 작가는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반복되던 자기복제를 극복하고, 넷플릭스 '더 글로리'로 또 한 번의 영광을 들어 올렸다. 학교폭력을 정면으로 다룬 강단에 박수를 받았다. 장르물의 대가로 꼽히는 김은희 작가는 SBS '악귀'로 tvN '지리산'의 아쉬움을 뛰어넘었다. 한국적 요소를 녹여낸 오컬트 장르까지 확장된 세계관을 뽐냈다.

JTBC '나의 해방일지'의 박해영 작가는 놀랍게도 매 작품마다 리즈를 갱신 중이다. 심지어 그는 '추앙'이라는 표현까지 설득시키는 필력을 발휘했다. 노희경 작가는 tvN '우리들의 블루스'를 통해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며 시청자들을 눈물바다에 빠뜨렸다. 이처럼 최고로 손꼽히는 작가들도 시청자를 설득하는 데 사활을 건다. 물론 그 이전에 스스로를 납득시켜야겠지만.

반응형

그런가 하면 '순옥적 허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일반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온갖 막장적 설정과 개연성 없는 전개조차도 '김순옥 월드'에서는 그러려니 하게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의 드라마에서는 전 남편에 대한 복수를 꿈꾸는 주인공이 얼굴에 점을 찍고 나타나거나 (판타지 장르가 아닌데도) 죽은 사람이 몇 번씩 살아 돌아오는 일이 태연하게 벌어진다. 헛웃음 그 자체다.

대중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순옥적 허용' 하에 김순옥의 막장 드라마를 (임성한, 문영남과 함께) 하나의 장르로 받아들이자는 쪽과 최소한의 개연성조차 갖추지 못한, 오로지 자극만을 좇는 그의 드라마에 비판적인 시선을 견지하는 쪽이다. 전자의 입장은 시청률 대박을 터뜨린 '펜트하우스' 시리즈의 흥행이 뒷받침한다. 후자의 경우 '욕하면서 보는 것일 뿐'이라 평가절하한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인 '김순옥 월드'에 새로운 작품이 추가됐다. 바로 9월 15일 첫 방송된 SBS 금토 드라마 '7인의 탈출'이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수많은 거짓말과 욕망이 뒤엉켜 사라진 한 소녀의 실종에 연루된 7명의 악인들의 생존 투쟁과 그들을 향한 피의 응징을 그린 피카레스크 복수극.' 이번에도 어김없이 악인, 욕망, 거짓말, 복수의 마라맛 조합이다.

"세상이 믿는 게 진실이야!" (금라희)


아니나 다를까. 1회와 2회는 캐릭터들의 악행으로 가득찼다. 우선, 금라희(황정음)는 시아버지 방철성 회장(이덕화)에게 투자를 받기 위해 자신이 버렸던 딸 방다미(정라엘)를 데려온다. 라희는 이제라도 엄마 노릇을 잘해보겠다며 눈물로 호소했지만, 딸을 이용하고자 하는 검은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진부하고 뻔한 설정도, 강약 조절없는 작위적인 연기도 아쉬웠다.

톱스타를 꿈꾸는 한모네(이유비)는 자신의 원조교제를 감추려고 전학 온 방다미를 방패막이로 이용한다. 이후 모네는 출산을 하게 되고, 다미가 미술실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거짓말을 퍼뜨린다. 그밖에도 자신의 불륜 사실을 알고 있는 다미를 없애기 위해 거짓말하는 교사 고명지(조윤희), 가짜 뉴스로 다미를 곤경에 빠뜨리는 기획사 대표 양진모(윤종훈) 등 악인들이 계속 등장했다.

그뿐인가. 산부인과 의사 차주란(신은경)는 그는 다미가 출산했다는 조작된 결과를 방 회장에게 전해 다미를 벼랑 끝으로 내밀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라희는 이성을 잃고 딸인 다미의 목을 졸랐다. '7인의 탈출' 1, 2회에서만 미성년자의 원조교제와 출산, 학교 내 집단 따돌림, 가정폭력 등 문제적 장면이 수두룩하게 등장했다. 각각의 사안에 대해 고심의 흔적이 있다기보다 단순 전시에 가까웠다.

'더 글로리'가 가정폭력, 학교폭력 등을 다뤘던 것이나 '우리들의 블루스'가 미성년자 출산을 얘기했던 것에 비하면 '7인의 탈출'의 그것은 천박한 수준이다. 악인과 선인의 이분법도 유치하지만, 이를 대비시키기 위해 심각한 범죄들을 나열하는 태도는 끔찍하다. 또, 복수의 통쾌감을 강조하기 의해 극중 미성년자인 주인공을 끔찍한 상황 속으로 내모는 것도 징글징글하다.

'욕하며 보는 드라마'라는 옹호 아닌 옹호도 인지하고 있고, 다양성의 차원에서 '김순옥 월드'를 용인하는 의견도 이해를 하지만, 점점 도를 넘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임계치가 높아진 터라 이런 경향은 더욱 심화될 것이다. 분명 '7인의 탈출'은 '펜트하우스' 시리즈에 비해 훨씬 막장의 강도가 세졌다. 앞으로 충격적인 장면들이 수도 없이 쏟아질 텐데, 시청자는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SBS '황후의 품격', '펜트하우스' 시리즈 등의 성공으로 '김순옥 사단'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그의 작품에 꾸준히, 그리고 기꺼이 출연하는 배우들도 많고, 인지도를 올리기 위해 어떻게든 '김순옥 월드'의 일원이 되려 애쓰는 배우들도 있다. 물론 배우로서의 성공도 중요하다. 하지만 작품의 선한 영향력을 고려하는 배우들이라면 출연 결정에 좀더 신중해야 하지 않을까.

시청률 20%에 육박했던 '펜트하우스 3'에 비해 '7인의 탈출'의 시청률은 6%에 불과하다. 9.1%로 출발했던 '펜트하우스1'과 비교해도 신통찮은 출발이다. 시청자들도 개연성 없는, 자극적인 맛으로만 가득한 '김순옥 월드'로부터 탈출을 선언한 걸까. 아니면 본격적인 막장의 세계가 펼쳐지면, 이전처럼 또다시 욕하며 보는 시청자가 늘어나게 될까.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