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당신의 '미의식'은 건강한가요?

너의길을가라 2013. 8. 21.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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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그림을 하나 떠올려 볼까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그림은 어떤 작품입니까?


아, 먼저 한 가지 짚고 넘어간다는 걸 깜빡했네요. '좋아하는 그림'이란 어떤 의미일까요?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그림이겠죠? 물론 '아름답다'는 것은 여러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 겁니다. 정말 '예쁜' 그림일 수도 있고, 가장 '감명' 깊었던 그림일 수도 있겠죠. 가장 '충격'적이었던 그림일 수도 있겠네요. 가령, 에드바르 뭉크의 '절규'를 떠올리신 분도 있을 테니까요. 그 그림은 '아름답다'고 말할 순 있지만, 분명 '예쁜' 그림은 아니죠. 


자, 다시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어떤 그림을 떠올리셨나요? 


제가 계속해서 좋아하는 그림을 묻고 생각해보라고 권하는 까닭은 그것이 '미의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가, 라는 질문은 곧 '미의식'을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미의식'이란 무엇일까요? 서경식 교수의 말을 들어볼까요?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이 실은 역사적 ·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울림이 깊고 진한 말입니다. 나는 무엇을 '예쁘다'고 느끼며 살아왔던가? 나의 '미의식'은 정말 '나의' 것일까? 다시 한번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그림을 떠나서 한번 생각해 볼까요? 세상에는 70억 명의 사람이 존재합니다. 같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죠. 모두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70억 개의 '미의식'이 존재해야 합니다. 뭐, 그게 좀 겹칠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엄청나게 많은, 다양하고 다채로운 '미의식'이 만개(滿開)해야 합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떤가요? 시나브로 '미의식의 획일화'가 이뤄지고 있진 않나요? 마치 '미(美)'에 순위가 있는 것처럼, 마치 고차원의 미(美)가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죠. 굳이 TV 속의 연예인들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누구의 얼굴처럼 만들어주세요' 라며 자신을 뜯어고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서경식 교수의 말처럼,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닙니다. 어떤 것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의식'입니다. 중요한 것은 '판단'이고, 그 판단의 주체는 '나'인 것이죠. 우리 중의 누군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장 프랑수아 밀레의 '만종'을 머릿 속에 그린 분도 있겠죠. 고흐의 그림을 상상하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제 자신에게 대답할 차례입니다. 왜 그 그림을 떠올렸는지, 당신의 '미의식'은 무엇인지 말입니다. 


'오토 딕스'


서경식 교수가 『고뇌의 원근법』을 통해 소개한 화가 중 한 명입니다. 익숙하지 않은 이름입니다. 오토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는 자원입대해서 전쟁을 수행하기도 했었죠. 이후 오토 딕스는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하고 참혹한 전쟁의 참상(慘狀)을 화폭에 옮겨 담습니다. 그렇기 때문일까요? 그의 그림은 참으로 신랄합니다. 꾸밈이 없이 날것 그대로입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전쟁'이란 역사책에서 읽는 것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멋진 모험과도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쟁'은 자국의 영토를 넓히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죠. 일상이 파괴되는 일입니다. 전화는 물론 전기와 물도 끊기게 되죠. 지금처럼 편안하게 에어컨을 틀어놓고 컴퓨터를 하는 일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사방에서 포탄과 총알이 쏟아지고, 귀를 막아도 엄청난 굉음들이 머리를 울립니다. 집에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겠죠. 피난을 떠나야 할 테지만, 어디로 가야 할까요? 주요 시설들은 이미 파괴가 된 이후일 텐데요. 그야말로 아비규환입니다. 건물들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붕괴됐고, 거리는 온통 피로 가득합니다. 피비린내라 코를 지르겠죠. 포탄과 총알은 노인과 아이라고 해서 비껴가지 않죠. 널부러져 있는 시체들.. 그 끔찍한 모습들.. 전쟁이란 그런 것이죠. '오토 딕스'는 그런 전쟁을 실존적으로 경험한 사람인 겁니다.  


이쯤에서 그의 그림들을 좀 살펴볼까요? 




- 오토 딕스, 무너진 참호, 1924년 - 



- 오토 딕스, 적진으로 돌진하는 병사들, 1924년 - 



오토 딕스, 오래된 커플, 1923년 -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앞서 뭉크의 '절규'를 언급하면서 '예쁜' 그림은 아니라고 말씀드렸는데요. 오토 딕스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외면하고 싶은 그림입니다. 편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는 그림이죠. 전쟁의 고통, 그 참혹했던 상처들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포장되지 않은, 미화되지 않은 날 것을 받아들일 때의 찜찜함과 무거움이 동시에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예쁘다'는 것은 보는 이가 그다지 저항감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엄밀하게 말하자면 지루하다는 것도 된다.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하다. 


- 서경석, 『고뇌의 원근법』- 




오토 딕스의 그림을 언뜻 봤을 때, '추'하다고 여기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 쳤던 고독한 한 명의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추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화폭에 담아냈던 것이죠. 그만큼 그는 용기있는 인간이었습니다. 어쩌면 '추한 현실'을 오롯이 살아냈던 한 인간이 담아낸 '추'한 그림.. 그것이 진정한 '아름다운 그림'은 아닐까요? 


'나의' 미의식에 대해 생각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대한민국'의 미의식은 어떨까? 지금 우리 현실을 그림으로 담아내는 화가가 있을까? 추하다는 것도 상대적인 개념이지만, 필자가 느끼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의 대한민국을 그려낸 그림이 있다면 그것은 추한 것이 마땅하겠죠. 그 그림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그림일 겁니다. 단지, '그림'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글'도 그러하고, 때로는 우리의 '생각'과 '말'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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