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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 연예

시청자는 명품 드라마 '눈이 부시게'를 알아 봤다


​​"그래, 이 맛이야!"

추억의 광고 속 한 장면을 드라마에 이토록 절묘하게 녹여낼 줄이야! 웃다가 울다가, 이번에는 깜짝 놀랐다. '국민 배우' 김혜자를 위한 오마주였을까. 이미 웃음이 터졌고,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김혜자가 출연했던 조미료 광고의 저 맛깔스러운 대사를 접하지 못했던 세대들이야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갔겠지만, 그 시대를 기억하는 사람들은 드라마 속 김혜자의 입으로 재현된 저 장면이 반가워 한참동안 마음이 울렁거렸을 것이다.

JTBC <눈이 부시게> 3, 4회는 교통사고가 난 아빠를 살리게 위해 시간을 되돌린 25살 김혜자(한지민)가 그 대가로 70대로 늙어버린 후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갑자기 할머니가 된 김혜자(김혜자)는 좌절했다. 한순간에 젊음을 송두리째 빼앗겨 버렸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그렇게 몇 달의 시간이 지났고, 혜자는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에 조금씩 마음을 열어 갔다. 바야흐로 '김혜자의 웃픈 70대 적응기'가 시작된 것이다.

<눈이 부시게>의 최대 관건은 2인 1역을 맡은 한지민과 김혜자가 '김혜자'라는 캐릭터를 얼마나 이질감 없이 연기하느냐였다. 그건 온전히 김혜자의 역량에 달려 있었다. 다시 말해서 김혜자가 '몸은 70대지만, 마음은 25세인 김혜자'를 얼마나 실감나게 연기하느냐로 결정되는 문제였다. 사실 걱정은 하지 않았다. 김혜자가 누구인가. 데뷔 56년의 공력을 지닌 '국민 배우'가 아닌가. 그런데 김혜자는 기대 그 이상을 해냈다.


김혜자의 연기는 매우 섬세했다. 그는 25세 김혜자를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것보다 얇은 목소리를 내고 있고, 말의 속도도 평소보다 빠르게 했다. 김혜자는 한지민이 탄탄하게 구축해 놓은 캐릭터를 완벽히 본땄다. 머리 스타일과 목소리 톤, 말투를 일치시켜 싱크로율을 한층 끌어 올렸다. 어느 순간, 시청자들은 한지민과 김혜자가 한 사람으로 겹쳐 보이는 신기한 경험까지 할 수 있었다. 김혜자의 연기가 '설득력' 그 자체였던 셈이다.

최근 '타임 리프'를 소재로 한 드라마가 워낙 쏟아졌던 터라, <눈이 부시게>가 들려주는 이야기도 뻔하다는 인상을 줬을지도 모르겠다. 첫 회 시청률 3.185%(닐슨코리아 유료플랫폼)와 2회 시청률 3.188%는 '넌 좀 달라?'라는 시청자들의 유보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그런데 <눈이 부시게>의 타임 리프는 분명 남달랐고, 그 색다름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빠져들었다. 3회(3.743%)부터 상승 곡선을 그린 시청률은 4회 5.368%로 껑충 뛰었다

<눈이 부시게>의 최대 강점은 섣불리 비탄에 젖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이 드라마의 이야기는 슬플 수밖에 없다. 혜자는 생기 넘치는 25살에서 얼굴에 주름살 가득한 70대 할머니가 됐다. 단순히 외모의 변화뿐만 아니라 신체의 노화도 겪었다. 이제 계단 5개만 올라도 무릎이 '찌그덕'하고, 조금만 뛰어도 숨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다. 70대 할머니가 25세가 된다면 그 자체로 코미디겠지만, 청춘의 상실은 비통하기만 하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그 나이만큼 약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어르신들이 밥상 앞에서 밥맛없다고 하던 게 이해가 간다. 식사보다 그 이후에 먹어야 하는 수많은 약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미 배가 부르니까. 예전에 TV에서 봤던가. 양식장 속 연어들이 밥과 같은 양의 항생제를 매일같이 먹으며 작은 수조에서 살고 있었다. 그쯤 되면 연어들은 스스로 사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약발로 사는 거였다. 앞을 가로막는 세찬 물살도, 매서운 곰의 발톱도 경험해보지 못한 연어는... 연어초밥 먹고 싶다."

그런데 <눈이 부시게>는 슬픈 이야기를 슬프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전형적인 구성이 아니다.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다. 부분적으로도, 전체적으로도 적절한 무게감을 유지한다. 그 균형감각이 놀랍기만 하다. 가령, 늙어버린 혜자가 신세를 한탄하다가도 문득 내면의 25세 혜자가 튀어나와 시청자들을 웃게 만든다. 또, 오빠 김영수(손호준)는 드라마 내에서 다소 엉뚱하다 싶었던 캐릭터였지만, 분위기를 전환시키는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자신들보다 훌쩍 늙어버린 딸이 낯설고 어색한 엄마 이정은(이정은)과 아빠 김상운(안내상)의 눈빛은 보는 이의 마음을 절절하게 만들지만, <눈이 부시게>는 시청자들을 슬픔에 잠겨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엄마가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손님들에게 자신을 브라질에서 온 이모라 소개하는 혜자의 능청스러움을 통해, 아파트 경비 일을 하는 아빠의 도시락에 멸치를 가득 넣는 에피소드를 통해 분위기를 환기시킨다.


또, 혜자의 반려견 '밥풀이'를 등장시켜 혜자와 이준하(남주혁)을 연결짓고, 웃음까지 이끌어 내는 대목은 감탄스러울 정도다. 물론 아직 큰 산들이 제법 남았다. 당장 기자를 꿈꿨던 준하가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접고 노인회관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걸 발견하고 충격에 휩싸인 혜자, 두 사람의 관계가 어떻게 진행될지 쉽사리 예측하기 어렵다. 걱정할 필요는 없다. <눈이 부시게>는 남다른 균형 감각으로 웃음과 눈물을 적절히 조화시킬 테니까.

4회까지 방영된 <눈이 부시게>의 가장 큰 장점은 균형과 조화였다. '젊은 사람들은 늙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나이든 사람들은 젊음에 대해 어떻게 보고 있을까'라는 묵직한 주제의식, 그 질문을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영리한 방식, 그 질문과 방식을 연기라는 그릇에 담아낸 배우들, 모든 것들이 적절히 조화로웠다. 한마디로 <눈이 부시게>는 정말이지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드라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