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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킴의 극장

고정관념을 깬<안시성>을 묶어버린 또 다른 고정관념



대작들이 몰리며 혼돈 속에 빠졌던 추석 극장가의 승자는 <안시성>으로 결판났다. <물괴>, <명당>, <협상> 등 경쟁작에 우위를 점하고 있던 <안시성>은 지난 25일 하루에만 79만 4,806명을 동원하며 승부에 종지부를 찍었다. 개봉 8일 만에 300만 관객 돌파, 그야말로 파죽지세다. 당 태종 이세민의 매서운 공세를 견뎌내고 수성(守城)에 성공한 양만춘의 <안시성>답다.


<안시성>은 명쾌하다. 안시성을 사이에 두고 공격하는 자와 이를 막아내는 자가 존재한다. 전자는 당 태종 이세민(박성웅)과 당나라 군사들이고, 후자는 양만춘(조인성)과 고구려 백성들이다. 정말이지 치열하고 처절한 공성전이다. 이 구도는 워낙 분명하고 명확해서 관객들은 고민할 필요가 없다. 고구려를 응원하지 누굴 응원하겠는가? 자연스럽게 후자 쪽에 감정이입이 된 상태에서 주먹을 꽉 쥐고 스크린을 지켜보면 된다. 



고정관념은 <안시성>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합한 단어다. 우리는 '사극'에 대해 일종의 굳어진 관념을 가지고 있다. 사극의 주인공은 중후한 배우가 맡아야 한다는 생각 말이다. 가령, 최수종이나 김명민, 최민식과 같은 배우들(이 보여주는 이미지)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남성적인 이목구비와 묵직한 목소리를 기본 옵션이라 여긴다. 그런데 <안시성>은 이런 고정관념을 완전히 비틀어버렸다.


<안시성>은 양만춘 장군으로 조인성을 내세웠다. 파격적인 캐스팅이다. 이는 제작진이 <안시성>을 어떤 영화로 만들고 싶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대하사극이 아닌 젊은 느낌의 사극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이리라. 게다가 당시 고구려 장군들의 나이가 30대 중후반이었다고 하니 조인성(의 나이가 벌써 38이다)이 맡는다고 한들 이상한 그림이라 할 수는 없다. 우리 스스로 편견에서 벗어난다면 말이다.



또, <안시성>은 양만춘을 묘사하는 데 있어 인간적인 모습을 강조한다. 부하들과 성민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고 공감하는 인물로 캐릭터를 잡아 나간다. 애초에 양만춘에 대한 사료가 적다보니 제작진이나 배우 입장에서도 훨씬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었으리라. 그럼에도 제작비 220억 원의 영화를 만들면서 이와 같은 도전적인 선택을 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 부담을 짊어지고 있었을 조인성은 자신의 몫을 충실히 수행했다. 역사 속의 양만춘을 자신만의 색깔을 입혀 매력적으로 연기했다. 장수의 고뇌와 성주로서의 번민을 잘 표현해냈다. 이질감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목소리에 대한 아쉬움이 초반에 느껴지기는 하지만, 그 역시 다양성이라는 범주에서 이해하면 될 일이다. 모든 장수들이 중후한 목소리를 가졌을 리 없고, 그래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 또한 고정관념이다.



이렇듯 캐릭터의 고정관념을 깼던 <안시성>이지만, 영화적인 고정관념에선 탈피하지 못했다. 추석 대목을 겨낭하고, '천만 영화'를 노리는 영화답게(?) 클리셰들이 난무한다. 양만춘을 보필하는 부관 추수지(배성우), 환도수장 풍(박병은), 부월수장 활보(오대환)를 소개하는 장면들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뿐더러 캐릭터들도 평면적이다. 연기력만큼은 나무랄 데 없지만, 활용이 다소 아쉽다. 


또, 정확히 예상되는 지점에 '신파'를 배치해 관객들의 눈물을 유도하는 전략은 너무도 뻔하다. 가상의 인물인 백하(설현)는 양만춘의 여동생으로 설정됐는데, 기마부대장 파소(엄태구)와 사랑하는 사이로 그려진다. 아니나 다를까, 백하는 신파를 위한 카드로 전락한다. 영화 후반부의 우대(성동일)과 일꾼들의 희생도 전형적인 그림이라 감동보다는 억지스러움이 강하다. 



신녀 시미(정은채)는 도대체 왜 등장하는지 까닭을 알 수 없을 정도다. 그는 시종일관 "고구려의 신은 우릴 버렸다"를 외치며 계속해서 패배주의를 강요한다. 그리고 양만춘의 계획을 방해하는 등 민폐 캐릭터로 활약(?)한다. 결과적으로 그는 신의 뜻도 제대로 읽지 못한 무능력한 신녀였다. 전쟁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의 부재를 채우려는 시도였던 것으로 보이나 백하와 마찬가지로 실패에 가깝다. 


그럼에도 <안시성>이 구현한 공성 전투 장면들은 확실한 재미와 쾌감을 준다. 우리에겐 왜 그럴듯한 전쟁 영화가 없는가, 라는 아쉬움을 확실히 씻어주는 영화다. <안시성> 덕분에 우리에게도 멋드러진 전쟁 블록버스터 영화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되게 됐다. 영화적 만듦새나 이야기의 짜임새 등에서 드러난 고정관념이 아쉽긴 하지만, <안시성>이 깨버린 고정관념에 초점을 맞춘다면 '엄지 척'을 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