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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 연예

박원순의 '위력'에 분노한 대중, 안희정의 '위력'에는 왜 침묵할까?



"아니, 얘기를 하지!"


'위력(威力)'이 화두다. 위력이란 무엇인가. 지난 1일, 수행비서를 업무상 위력을 이용해 간음 또는 추행한 혐의로 기소됐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가 법정 구속됐다. 무죄를 선고했던 1심과 달리 2심은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했다. 1심은 '위력은 있지만 행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했으나 2심은 '자유의사를 제압할 정도의 무형적 위력이 있었다'고 봤다. 대중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엇갈렸다. 심지어 가해자의 위력을 두둔하기도 했다. 


잠시, 지난 설 연휴에 방송됐던 예능 프로그램을 살펴보자. KBS2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는 '일할 맛 나는 일터를 만들기 위한 대한민국 보스들의 자발적 자아성찰 프로그램'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박원순 서울시장, 이연복 셰프, 김준호가 출연해 직원들과 함께 어울리는 일상을 공개했다. 그런데 '훈훈함'을 이끌어내려 했던 기획 의도와는 달리,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는 첨예한 문제를 건드리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박원순 시장은 일주일에 2번, 새벽 6시부터 1시간 가량 마라톤을 했다. 그런데 그의 옆에서 함께 (억지로) 달리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다. 바로 김홍진 비서관이었다. 이 장면을 본 MC 김숙은 '갑질'을 뜻하는 버튼을 누르며 영상을 정지시켰다. "새벽에 조깅하기 싫을 수도 있지 않아요?" 이에 대한 박 시장의 대답은 "같이 운동하는 거니까.", "한 번도 싫다는 얘기를 안 해서."였다. 



아침밥도 챙겨먹지 못하고 새벽부터 출근하는 걸 달가워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그것도 시간 외 수당도 받지 못하는 '근무'가 아닌가. 고된 마라톤 일정이 끝난 후, 김 비서관은 아내와 전화통화를 했다. "오늘은 조금밖에 안 뛰어서 발목 조금 덜 아팠어." 몇 달 전에 다리를 살짝 삐어서 발목을 다쳤는데도 통증을 계속 참고 뛰었다는 것이다. 아, 이것이 을(乙)의 삶인 것을.. 


평소 김 비서관은 워낙 많은 업무량 때문에 밤 11시가 돼야 겨우 퇴근할 수 있었다. 오랜만에 조기 퇴근의 기회가 생기자, 김 비서관은 가족과 함께 외식을 하기로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이게 웬 청천벽력인가. "저녁이나 먹고 갈까?"라고 말하는 박 시장, 가족끼리 약속이 있다고 겨우 거절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같이 먹으면 되잖아." 아무리 비서관의 역할이 '시장과 365일 붙어있는 것'이라지만, 이건 좀 심하다 싶다.


우리는 이 (예능적으로 재미있게 편집된) 장면들을 통해 위력이 무엇인지, 또 위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엿볼 수 있다. 실제로 많은 시청자들이 박원순 시장과 김홍진 비서관의 관계에서 '위력'을 감지했고, 그로 인해 심한 불쾌감을 느꼈다. 답답했던 MC 김수미는 '비서관이 발목 부상을 알려야 했다.'고 말했지만, 명확한 갑을 관계에서 그런 이야기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라는 걸 을이라면 누구나 안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는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에서 난생처음 논문심사를 받았던 '수치의 기억'을 꺼내놓는다. 그는 심사할 논문을 읽지도 않은 채 그 자리에 참석했던 교수들에게 감히 되바라지게 한마디 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자신은 '웃는 돌처럼 무기력하게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고, '언제나 그러했던 것처럼 충실하게 학생 역할을 수행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인생이라는 극장 위의 배우들이 이처럼 별생각 없이 자기가 맡은 배역을 수행한다.'고 말한다. 박원순 시장과 김홍진 비서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별다른 경각심을 갖고 있지 않다. 그저 '시장 역할'과 '비서관 역할'을 '별생각 없이' 수행할 뿐이다. 김영민 교수의 말처럼, '위력이 왕성하게 작동할 때, 위력은 자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 위력은 그저 작동한다.'



다수의 시청자들이 <사장님 귀는 당나귀 귀> 속 박원순 시장의 모습을 보고 분노했던 까닭은 무엇일까. 그만큼 우리가 일상의 삶 속에서 수많은 '위력'을 경험하고 있(지만 그것을 직접 털어놓거나 솔직히 얘기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만큼 '위력 감수성'이 뛰어난 건 당연한 일이다. 박원순 시장이 행사한 '위력'이 엄청난 부정(不正) 불법이 아니었음에도 반응은 이처럼 뜨거웠다.


"참 웃기네. 나도 여자지만 솔직히 싫으면 당시 바로 싫다고 하던가 그게 어려웠다면 두 번째부터는 증거를 모았놨을 거 같은데. 왜 몇 번씩 가만 있었을까. 언론에 까발릴 정도면 충분히 거절의사를 분명히 했을거같은데. 왜 몇번씩 그랬을까." 한겨레, '안희정에게 무죄 준 '위력' 개념, 132명에게 물어봤다'에 달린 베스트 댓글 


이쯤되니 문득 궁금하다. 박원순 시장의 위력과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위력은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일까? 박원순 시장의 위력이 행사되는 메커니즘과 안희정 전 지사의 위력이 행사되는 메커니즘은 완전히 다른 것일까? 놀랍게도, 그 두 가지 위력은 본질적으로 다를 게 하나도 없다. 그리고 행사된 위력은 늘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아니, 싫으면 얘기를 하지!"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게 가능했을까?


박 시장과 김 비서관의 관계에서 '위력'을 손쉽게 감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위력의 은밀한 행사 방식에 공감하고 분노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위력'에 대해서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도출해 내는 걸까? 이 '사소한' 위력에도 치를 떠는 수많은 사람들이 어째서 성폭력 피해자에게 '합의'나 '애정' 같은 되먹지도 않은 말을 너무도 쉽게 갖다붙일 수 있는 걸까? 참으로 기괴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