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묻는 입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너의길을가라 2013. 10. 2.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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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 글에서 '박정희의 정체성'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우선 질문지부터 확인해보자.

 

 

 

 

1. 박정희는 독재자인가?

2.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박정희는 독재자가 맞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군사 구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박정희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억압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등을 통해 법도 무시한 채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당했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유신헌법을 선포(12월 27일 공포)하고 장기집권, 사실상의 영구집권을 꿈꿨다.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 대통령의 권한을 무제한 허용함으로써 독재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질문과 달리,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은 많은 생각을 요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생각도 '그렇다'와 '아니다'로 극명하게 나뉠 것이다. 주장은 쉽다. 하지만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1945년 3월 박정희의 형이 구미면사무소에 제출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 박정희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으로 기록돼 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근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군에 자원했고, 나이 제한에 걸려 군관학교 입교가 거절되자 '혈서'를 써서 바쳤으며, 만주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로 창씨 개명을 했다는 사실도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한 레퍼토리다.

 

과연 이러한 '근거'들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친일파라는 용어가 '일본 체제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이들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친일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의적인 성격이 짙다.

 

물론 나름대로 공식적인 기준도 있다. 1948년 10월 23일,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승만이 친일파 처벌에 의지가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족행위 처벌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제국의회(帝國議會) 의원이 되었거나 독립운동가를 살상·박해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이밖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 동안 공민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2005년 5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치된 대통령 소속기관이었다. 친일규명위의 주요 업무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의 선정, 조사대상자가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의 수집·분석 등이었다. 문제는 친일규명위의 조사 결과 박정희가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보도 기사 ( < 만주신문 > 1939.3.31)"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 내용 일부)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

 

 

정운현은『친일파는 살아있다』에서 박정희 친일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이유들을 밝힌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최종적으로 반민족행위지로 선정하지 않았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당초 친일규명위는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의거해 그에 대해서도 조사 작업을 벌였다. 해방 당시 그의 계급이 중위였으니 '소위 이상의 장교'에 해당된 것이다. 그러나 2009년에 공개된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정치적 타협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운현조차도 "일각에서는 정치적 타협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친일규명위의 결정이 납득이 가는 면도 없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납득이 간다는 것일까? 정운현은 "특별법 제2조 10항을 만족시키려면 박정희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입증해야만 한다. 위원회는 중국 현지 조사를 포함해 다각적인 조사 활동을 벌였으나 '민주군 보병 8단 근무' 이상의 구체적인 자료는 입수하지 못했다."며 박정희가 특별법 제2조 10항을 만족시키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물론 "'혈서' 관련 신문자료가 발굴될 당시 위원회는 이미 업무처리를 마치고 보고서를 인쇄하고 있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혈서가 '적극 협력'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해방 전 경력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친일규명위는 해방 전 박정희의 경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박정희의 친일파로서의 규정을 해방 전 박정희의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친일파' 혹은 '반민족행위자'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 다시 말해서 '일제에 협력하거나 부역'한 것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반민족특위가 구성됐던 당시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이다.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지나치게 그의 해방 전 행위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야 한다. 오히려 한홍구 교수의 지적처럼 해방 이후의 박정희의 모습에서 '친일파'를 떠올리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은 아닐까?

 

한윤형은 『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해방 이후 법적인 처벌 대상이 되어야 했던 친일파와, 역사적 관점에서 비평(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친일파의 괴리 말이다. 전자를 기준으로 두고 얘기한다면 '박정희는 통념과는 달리 법적 판단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친일파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얘기해야 할 것이다. 반면 후자를 기준으로 두고 얘기한다면 다시 한 번 그 개념의 모호함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친일파의 개념을 그렇게 모호한 방식으로 확장해놓고는 그것이 법적 판단의 잣대가 된다는 식으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뒤끝이 참 쓰지만, 곱씹어 봐야 할 말이다. 무논리로 일관한 채, 이미 봉쇄된 근거들을 통해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녹음기처럼 외치는 것으로 '친일파 처단'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런 '반전'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논리로 싸워 이겨야만 한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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