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이 돌아왔다. 그 '귀환'을 기다려 온 기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누군가는 원더우먼(윌리엄 몰튼 마스턴이 탄생시킨 캐릭터)이 DC코믹스의 만화책에 처음 등장했던 1941년을 떠올릴 테고, 누군가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이반 라이트만 감독이 원더우먼을 영화화하겠다고 발표했던 1996년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들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던 원더우먼(갤 가돗)을 만났던 짜릿함을 상기하며 2016년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원더우먼>은 누군가에겐 평생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흔하디 흔한 '슈퍼 히어로물'이 하나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침내(76년 만에) <원더우먼>이 '시작'됐고,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원더우먼>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언더우먼>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고 보라, 당신은 결코 <원더우먼>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동안 DC가 제작했던 영화들이 '혹평'을 받으며 힘겹게 스타트를 끊었던 것과 달리 <원더우먼>은 출발이 매우 좋다. 영화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97%의 신선도를 기록할 만큼 전체적으로 호평이 압도적이었다. 현재는 수치가 조금 떨어져 93%라고 하지만, 마블 영화 가운데 최고라는 <아이언맨>의 94%에 필적하고, <어벤져스>의 92%보다는 높다.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이 28%,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25%를 얻었던 것과는 천양지차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원더우먼>을 통해 DC는 그동안의 실패를 마감하고 새로운 반전의 계기를 잡았다. MCU(Marvel Cinematic Universe)에 처참히 '발려' 왔던 탓에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축배를 터뜨리기엔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DCEU(DC Extended Universe)의 구원 투수이자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를 이끌어 나갈 중심축으로 원더우먼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점에 대해선 안도해도 될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부터 전 세계에 걸쳐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을 만나보자.
"넌 그들에게 과분해"
그는 제우스의 후손이자 아마존의 전사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왕국인 데미스키라의 공주로 태어난 다이애나(갤 가돗)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를 꿈꿨다. 어머니인 여왕 히폴리타(코니 닐슨)는 계속해서 만류하지만, 주어진 숙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결국 데미스키라 최고의 전사인 안티오페(로빈 라이트)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고, 결국 그를 뛰어넘는 최강의 전사가 되기에 이른다. 준비가 끝났으니 숙명을 받아들일 차례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상대할 수 있는 '갓 킬러'의 운명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세계의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가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하게 되고, 데미스키라의 전사들은 그를 뒤따라 온 독일군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현대의 무기'로 무장한 '백인' '남성' 군인들을 거뜬히 상대하는 데미스키라의 여성 전사들의 액션은 영화의 백미라 할 만 하다. 그들이 펼치는 화려하고 화끈한 전투 장면은 '아름답다'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다. 신대륙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기존의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해 왔던 서구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이애나는 트레버 대위로부터 인간 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아레스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을 구하고 '선(善)'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설처럼 아레스만 없애면 그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은 즉각 전쟁을 멈추고 '선'을 지향할 것이라 믿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일에 몰두하자 다이애나는 혼란에 빠진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의문에 봉착한 그는 고뇌 끝에 '사랑'의 힘에 힘입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이어나간다.
<원더우먼>이 구현하고 있는 '액션'의 진보와 달리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물음 자체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히어로물'이 답습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더우먼>이 갖고 있는 가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이 정도의 '흠'은 덮고 넘어갈 만 하다. '남성 일색'의 히어로물에서 '원더우먼'은 존재 자체로 청량감을 준다. 그건 통쾌함과도 연결된다. 가령, 여성은 출입할 수 없는 군 수뇌부의 회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답답함을 자아내는 남성들을 향해 '일갈'을 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처럼 말이다.
"남자는 아기를 낳으려면 필요하지만 쾌락을 위해서는 필요없대요."
그건 원더우먼의 탄생이 '페미니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해가 쉽다. 그 스스로도 페미니스트였던 윌리엄 몰튼 마스턴은 당대의 페미니스트들과 지속적인 교류(그의 아내 세이디 할러웨이도 여성 운동가였다)를 이어갔는데,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면서 전설적인 여성 운동가들의 면모를 녹여냈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기계가 아니다"며 산아 제한 운동에 나섰던 마가렛 생어, 여성의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 최저 임금 운동에 앞장섰던 플로렌스 켈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원더우먼이 봉착한 물음의 1차원적 성격은 <원더우먼>이 다이애나의 성장기이자 원더우먼의 탄생기라는 점에서 이해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두고 편을 갈라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단계까지 진행된 마블의 히어로들이 하는 고민과는 달리 여전히 인간의 선악을 두고 번뇌하는 DC의 그것은 그야말로 '어린애' 수준이지만, 그것이 원더우먼이라고 하는 새로운 캐릭터의 근원을 파헤치는 과정이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받아들여진다.
"사랑과 진실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원더우먼은 마법 같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우리 할아버지는 나에게 '삶에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내 안의 빛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 메시지를 영화가 담고 있다." (갤 가돗)
앞선 시기에 원더우먼의 영화화가 기획되면서 산드라 블록, 안젤리아 졸리, 비욘세, 메간 폭스, 엘리자 더시쿠, 캐서린 제타존스 등 많은 배우들이 원더우먼의 후보로 거론됐지만, 결국 그 영광은 갤 가돗에게 돌아갔다. 178cm의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지닌 그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군 복무 경험이 있다. 게다가 원더우먼이 되기 위해 7개월 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천부적인 신체 조건과 노력이 합쳐져서 갤 가돗이 펼치는 액션 장면들은 시원시원하고 환상적이다.
슈퍼 히어로물의 '역사'에 있어 <원더우먼>의 가치는 단연 돋보인다. 여성 감독(패티 젠킨스)이 연출을 맡은 여성 슈퍼 히어로 영화의 등장이 반갑다. 다만, '재미'보다 '가치'에 방점을 둬야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기존 DC 영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원더우먼이 인간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유머를 잘 녹여넣었다. 무엇보다 참호를 넘어 적진으로 뛰어드는 원더우먼의 과감한 돌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여성 히어로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는 위대한 출발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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