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당신의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인가요, '안중근의 날'인가요?

너의길을가라 2016. 2. 12. 2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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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은 무슨 날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밸런타인데이(St. Valentine's Day)'라고 대답하지 않을까? 실제로도 그런 설문조사가 있었다. 2014년 결혼정보회사 더원노블 행복출발과 한국결혼진흥연구소가 미혼남녀 68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했는데, 90.1%(616명)이 2월 14일은 '발렌타인데이'라고 응답했다고 한다.


비록 '미혼남녀'라고 하는 제한된 대상을 토대로 한 결과이긴 하지만, 이것이 모든 세대를 아우르는 일반적인 관점이 아니라고 하긴 어려울 것 같다. 흥미로운 것은 결혼정보업체 듀오가 미혼남녀 542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의하면, 미혼남녀 10명 중 7명 이상이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와 같은 날이 사라지길 바란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연인에게 초콜릿(을 비롯한 선물)을 선물해야만 하는 날이 있다는 건 아무래도 부담일 수밖에 없다. 그뿐인가? 직장 동료들에게 자그마한 초콜릿 정도는 건네야 센스 있는 동료가 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것이 '상술(商術)'이라는 것은 버젓이 알고 있지만, 그로부터 한 걸음 비껴선다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원래 2월 14일은 '초콜릿을 선물하는' 따위의 천박한 자본주의가 개입된 날이 아니라 남녀가 사랑을 맹세하는 성스러운 날이었다. 발렌타인데이의 유래와 관련해서 여러가지 설(說)이 존재하지만, 그 중 가장 유명한 일화는 3세기(269년) 고대 로마시대의 그리스도교 성인 발렌티누스(Valentinus)와 관련한 이야기다. 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간단하게 짚어보도록 하자.


로마의 황제 클라우디우스 2세는 미혼 병사들이 더 잘 싸울 수 있다고 생각해 '금혼령(禁婚令)'을 내렸다. 아무리 황제의 명령이라고 할지라도 '사랑'의 힘을 막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금지를 거부하는 것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사랑하는 이와 혼약을 맺으려는 병사들은 금혼령에 아랑곳하지 않았고, 성 밸런타인 주교는 그런 군인들의 혼배성사를 집전했다가 황제의 노여움을 사 순교하게 되는데, 그 날이 바로 2월 14일이라는 것이다.



성 발렌티누스의 날을 연인들의 축일(祝日)로 삼게 된 것은 14세기부터라고 하는데, 이 날이 갑자기 초콜릿을 주고 받는 날로 바뀌게 된 건 19세기 중반이다. 영국의 초콜릿 제조업자 리차드 캐드버리가 초콜릿을 하트 모양의 상자에 담아 판매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 '시초'다. 한편, 대한민국의 발렌타인데이는 씁쓸하게도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 


1936년 일본 고베에 위치한 모로조프라는 제과점이 발렌타인데이와 초콜릿을 연계해 판촉 활동을 벌였는데,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리고 1960년 일본의 모리나가 제과가 여성들이 발렌타인데이에 초콜릿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도록 장려하는 캠페인을 벌이면서 하나의 풍습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것이다. 일본의 영향을 직간접적으로 받(을 수밖에 없었던)았던 우리가 그 상술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한 셈이다. 




그 누구도 달가워하지 않는 발렌타인데이. 초콜릿 회사들만 배불리는 상술의 전형. 변질된 발렌타인데이는 그야말로 악습(惡習)이 되어버렸다. 어떻게 하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의 범위를 넓혀보자. 아니, 시선을 틀어보자. 그렇다면 2월 14일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을 전복(顚覆)시켜버리는 건 어떨까? 우리가 흔히 '발렌타인데이'로 기억하고 있는 2월 14일은 역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날이다. 


1859년 - 오리건 주가 미국의 주로 33번째로 가입하였다.

1876년 -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과 일라이셔 그레이가 각각 전화에 대한 특허를 등록하다.

1879년 - 칠레가 볼리비아의 항구 도시 안토파가스타를 침공하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다.

1910년 - 한국의 독립 운동가 안중근에게 사형이 선고되다.

1912년 - 애리조나 주가 미국의 48번째 주로 가입하였다.

1950년 - 중소 우호 동맹 상호 원조 조약 체결.

1967년 - 대한민국 해병대 11중대가 북베트남군 2개 연대와 1개 게릴라 대대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짜빈동 전투가 발발하다.

1989년 - 민간용 위성항법장치를 위한 블록II의 첫 인공 위성이 발사되다.

1989년 - 이란의 호메이니가 《악마의 시》의 저자 살만 루시디에게 사형을 선고하다.

1990년 - 우주 탐사선 보이저 1호가 태양계를 벗어나면서, "창백한 푸른 점(Pale blue dot)"이라 명명된, 가장 멀리 떨어진 위치에서 지구를 촬영한 사진을 인류에게 전송함.

1992년 - 7군단장 전용헬기 추락 사고


- 『위키백과』에서 발췌 -


위에 정리된 '사건'들은 모두 '2월 14일'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 중에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기울이고, 기억을 해야 할 사건은 무엇일까? 바로 1910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이 선고된 일 아닐까?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만주 하얼빈을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안중근은 26일 하얼빈 역에 잠입해 이토를 사살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중근은 뤼순(旅順) 감옥에 갇혔고, 2월 14일 사형을 선고받았다. 물론 그의 사형이 집행된 건 3월 26일이기에 어떤 날을 기념해야 하는지 다소 의문이 들긴 하지만, 어떤 날을 기리든 그것이 그리 중요할 것 같진 않다. 물론 발렌타인데이의 상술에 대항하기 위해 민족주의적 아이템을 찾아낸 것이겠지만, 그 자체를 문제삼고 싶진 않다. 



실제로 최근에 2월 14일을 '안중근의 날'로 만들자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리얼미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찬성 의견이 75.5%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에는 하나의 '맹점'이 존재하는데, '민족주의'는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 누가 안중근을 기리자는 의견에 감히 반대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저 설문조사 결과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렵다.


혹자들은 발렌타인데이를 '외래문화'라 부르며 거부하자고 목소리를 높이지만, 오늘날 그런 것을 구분하는 것이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신토불이(身土不二)'가 무의미해진 시대가 아닌가. 발렌타인데이가 문제인 것은 그것이 외래문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자체가 지닌 본래의 의미가 변질된 채 상술만 남았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우리가 굳이 어떤 날을 기리고자 한다면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초콜릿이나 주고 받으며 제과업체의 배만 잔뜩 불려줄 것이 아니라 독립 운동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쳤던 안중근 의사를, 옥중에서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을 제창했던 훌륭한 사상가였던 안중근 의사를 한번 더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까? 



이쯤되면 '왜(Why)'의 문제는 해결된 것으로 보인다. 당위는 충분한데, 문제는 '어떻게(How)'이다. 어떤 누리꾼의 제안처럼, 『친일인명사전』을 선물하는 것은 산뜻하긴 하지만 현실적이진 않아 보인다. 당위만으로 누군가를 설득하고, 그 설득을 지속시키기는 매우 어렵다. 매혹적인 '어떻게'게 반드시 필요한 이유다. 안중근을 어떤 방식으로 기리고 기억할 것인지는 우리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가 아닌가 싶다.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 윤원태 사무국장은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한반도 평화가 위협받아 마치 구한말과 같은 상황에서, 동양 평화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안 의사의 뜻이 이런 날을 계기로 좀 더 알려졌으면 한다"고 전했다. 정부가 개성공단까지 폐쇄한 시점에서 동양평화론을 제시했던 안중근 의사의 존재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2월 14일이 발렌타인데이로 기억되는 오늘날, 우리는 사랑을 무엇인가로 증명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관습(악습)은 쉽사리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2세의 금혼령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던 군인들을 생각해보라. '사랑'을 탓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들에 대해서 좀더 고민을 해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허둥지둥 초콜릿을 사는 그 날, 우리의 역사 속에 '안중근'이라는 고독한 인물이 존재했음을 떠올려보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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