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가난한 청춘 · 웃지 못하는 청춘을 더 참혹하게 만드는 사회

너의길을가라 2016. 10. 15. 13:43
반응형


남의 것을 훔치는 것을 절도라고 한다. 따질 것도 없이 명백히 나쁜 짓이다. 사실판단(事實判斷)이야 그렇다치고, 가치판단(價値判斷)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조금 다른 이야기들을 할 수 있다. 가령, 사회 고위층과 부유층을 대상으로 대범한 절도 행각을 벌이는 대도(大盜)의 소식을 접하게 되면 묘한 생각이 든다. 비록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도 통쾌함을 느끼기도 하고 심지어는 응원까지 하게 된다. 한편, '장 발장(Jean Valjean)'과 같은 생계형 절도범에겐 '어쩌다 저리 됐을까..'라며 애잔한 감정을 품기도 한다.



광주의 한 대학교의 도서관에서 발생한 절도 사건은 어떨까? 용의자인 40대 남성은 동안(童顔)의 외모에 대학교 교재(『국토 및 지역계획론』)를 들고 마치 대학원생인양 도서관을 손쉽게 출입했다. 그는 지난달 30일부터 약 보름 가량 동안 8차례에 걸쳐 학생들과 취업준비생들의 소지품을 훔쳤다. 대상자들이 취업 준비에 지쳐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물건들을 슬쩍한 것이다. 그렇게 훔친 물건은 식권, 교통카드, 얼마 되지 않는 현금 등이었다고 한다.


22세 대학생(여)의 지갑에는 현금 3,000원과 신분증만 들어 있었고, 31세 취준생(남)의 지갑에는 2,500원이 전부였다. 소유자를 파악할 수 없는 지갑에는 식권 18장이 고이 접혀 있었다고 한다. 이 기사를 보도하면서 <연합뉴스>는 대학도서관 도둑이 훔친 지갑속에서 드러난 '가난한 청춘' 이라는 제목을 달았는데, 그보다 절묘한 표현을 찾기 어렵다. '가난한 청춘'이라는 말이 가슴을 때리고, 마음을 시리게 한다. 이 기사에 달린 베스트 댓글은 이렇다.



"정말 짠하다. 한국의 청춘들이 왜렇게 살아가야하는지.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넘치는 기쁨으로 충만해야될 시기가 아닌가. 그러나 지갑속에 들어있는 너무나 초라한 청춘들의 현실을 보며 알수없는 죄책감을 느낀다. 지금 내 자신이 너무 부끄럽다."


"정말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털어먹고 사는 헬코리아"


청춘들의 현실을 보며 죄책감을 느끼며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누군가와 그의 말에 수많은 공감을 보낸 사람들의 존재에서 위안을 얻다가도 '가난한 자가 가난한 자를 털어먹고 산다'는 표현에서 또 다시 무너져 내린다. 겉으로 드러나는 몇몇 수치로는 세계에서 제법 잘 사는 나라가 된 대한민국이지만, 안을 들여다보며 곪고 썩어 있는 걸 쉬이 확인할 수 있다. 한국의 청춘들의 삶이 왜 저토록 피폐해졌을까. 그들의 현실을 보다 잘 보여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다.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실시한 '일상생활에서의 정서경험과 콘텐츠 소비의 관계' 설문조사(전국 만 19세~59세 성인남녀 1000명을 대상)에 따르면, 응답자의 49%가 평소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감정을 숨기는 것이 좋다'는 응답은 42.4%로 나타나 동의하지 않는 의견(44.3%)가 비슷했다. 놀라운 건 20대의 반응이었는데, 무려 50%가 감정을 숨기는 게 좋다고 대답했다. 이는 30대 45.6%, 40대 38.8%, 50대 35.2%보다 높은 수치였는데, 흔히 자유분방할 것이라 여겨지는 20대의 반응이라곤 믿기지 않는다.


아무래도 감정 표현에 솔직하고, 좌충우돌 부딪쳐야 할 20대가 어째서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는 삶에 익숙해진 것일까? 또, 그래야 한다고, 그것이 맞다고 여기게 된 것일까? "조직에 맞춰 감정을 숨기는 게 편하다. 이젠 눈물이나 웃음도 안난다. 그런 감정은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20대 직장인과 "미래에 대한 부담감 때문에 웃고 떠드는 것이 뭔가 가식적이라는 생각이 스스로 들었다"는 20대 취준생의 대답을 읽고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이 사회가 그들에게서 웃음을 빼앗아 간 것이다. 지금의 20대 대부분이 2008년 촛불 집회를 경험하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가감없이 표현하고 드러냈던 세대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경직성은 더욱 놀랍기만 하다. 한편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보수적 성향과 억압이 어느 정도인지 새삼 절감케 된다. 재기발랄했을 청년들이 마음껏 뛰어 놀 판을 만들기보다 기존의 딱딱한 틀 안에 집어 넣고, '여기에 적응해라'고 강압했던 '어른'들이 만들어 낸 결과가 처참하기 이를 데 없다.



지갑 안에 현금 3,000원을 들고 다니는 대학생, 돈은 가져도 좋으니 밑줄 그어 공부한 책은 제발 돌려달라는 취준생, 웃음은 사치라고 말하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는 수많은 20대들.. 그런 그들에게 이화여대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아왔던, 비선 실세 의혹을 받고 있는 최순실 씨의 딸 정유라에 대한 뉴스는 어떻게 들렸을까? 학교 측의 특별 관리를 받고, 학점도 아무 어려움 없이 손쉽게 딸 수 있었다고 알려졌던 '특별한' 또래로 인한 박탈감을 얼마나 컸을까? 


과제물을 첨부하지 않아도 교수로부터 "앗! 첨부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보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는 친절한 메일을 받을 수 있었다. 이미 제출 기한이 지나 학기가 끝났고, 그마저도 인터넷 검색을 하면 쉽사리 찾을 수 있는 자료들을 붙여넣기 한 과제물이었음에도 B학점을 받았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구친다. 지울 수 없는 허탈감이 공허히 맴돈다. '공정함'이라는 게 사라진 사회, '부모'가 그리고 '권력'이 그리고 '부(富)'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 그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청년들에게 '재주껏' 살아남아 보라니. 이 얼마나 잔인한가.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