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현각이 가리키는 달을 볼 것인가, 현각의 손가락을 볼 것인가?

너의길을가라 2016. 8. 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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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초반, 대한민국 사회를 향해 날 펜대를 거침없이 휘두르던 '파란 눈의 한국인' 블라디미르 티호노프, 아니 '박노자'의 등장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적나라한 비판들에 대해 사람들은 신선하다 여겼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불쾌함에 가까운 불편함을 드러냈다. "네가 뭔데? 대한민국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아?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냐?" 사람들은 박노자의 비판을 애써 '외부인'의 목소리 쯤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그는 이미 한국 국적을 취득한 '내부인'이었고, 그 누구보다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푸른 눈의 수행자' 현각 스님이 한국 불교에 던진 비판은 그런 느낌으로 와닿는다. 그는 한국 불교의 유교적 권위주의, 기복신앙, 물질만능주의 등을 지적하며 깊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예일대 학부, 하버드 대학원(로스쿨 비교종교학과) 출신의 혀각 스님은 1990년 숭산 스님의 설법에 마음이 동해 1992년 출가했고, 한국 불교를 세계에 알리는 데 앞장 서 왔다. 그의 비판은 제법 '외부인'의 시각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내부인'의 기준을 총족시키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힘'을 얻었다.


여전히 '푸른 눈(파란 눈)'을 강조하고, 그의 비판에 '자격(내부인)'을 따진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사회는 '박노자'로부터 그다지 나아진 점이 없다. 박노자가 한국 국적을 취득했던 까닭이 그 스스로가 "나? 한국인이야. 내부인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고자 했던 것임으로 떠올려본다면 쓸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당시 박노자에 호응했던 수많은 지식인과 대중들처럼, 현각 스님의 목소리에 불교계도 자성(自省)의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이다. 



- 현각 스님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게재한 한국 불교에 대한 비판 글 -


이 사람들의 마음을 100% 이해하고 100% 동감합니다. 나도 이 접은 정신 자연스럽게 떠날 수 밖에 없다. 이번 해는 승려생활 25년째임으로 반성하면서 주한 외국스님들의 오르지 조계종의 데커레이션이다-- 이게는 내 25년간 경험이다. 그 외국인 교수님들과 그 4-5년 전에 KAIST 그만했던 노벨상 총장도 마찬가진 생각일 것이다. 참 슬픈 현상이다. 


요새 그리스에선 하고 있는 선/요가 수련 마치자마다 이번 8월 중성에 한국으로 마지막 공식 방문한다. 앞으로 한참 동안 서양에서만 머물다. 화계사(주)으로 가서 은사스님의 부도탑 앞에 참배, 지방에서 행사 참석, 그리고 사요나라 준비. 물론 환속 안하지만은 현대인들이 참다운 화두선 공부 할 수 있도록 유럽에서나 미국에서 활동할 포그스 것이다. 


숭산스님께서 45년전에 한국불교위해서 새 문열었다. 나와 한 100명 외국인 출가자들이 그 포용하는 대문으로 들어왔다. 참 넓고 현대인들에게 딱 맞는 정신.... (그 문을 열어 줄 수 있는 열쇠를 오르지 계룡산 숭산선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종단 그 문 자꾸자꾸 접게 만들어서 지난 2-3년간만 한 7, 8, 9 명 외국인 승려들 환속했고 나도 요새는 내 유럽 상좌들에게 조계 출가 생활로 절대로 권하지 못 함. 내가 어떻게 그 조선시대 정신에게만 얼리는 교육으로 이 합리주의 바탕에서 자랑했던 서양 사람들은 (특히 서양 여자들) 보낼 수 있을까? 대신에 난 그 신심 있는 애들이 계룡산으로나 한 유명한 일본 선방으로 보냅니다. 다른 서양 스님들도 마찬가지로 생각한다. 


숭산스님이 세우신 혁명적인 화계사 국제선원을 완전히 해체 시키는 송설정 등등 대단해요. 다시 조선시대로 인도 해줬다! 한국 선불교 전세계 전파했던 누구나 자기 본성품을 볼 수 있는 열린 그 자리는 그냥 기복 종교로 귀복시켰다. 왜냐하면 기복 = $. 참 슬픈 일이다...



"현각 스님이 느낀 여러 모습에 대해 (재가모임도)같은 문제점을 지적해왔다"고 밝힌 바른불가재가모임 상임대표 우희종 서울대 교수는 "그가 굴종의 신앙을 유지하는 신도들과 욕심을 채우려는 종단 승려들에게 많은 실망을 느낀 것 같다. 사회적 실천으로의 회향 없는 개인 구복과 깨달음이란 기복적 미신에 불과하다는 지적에 공감하다. 그 동안 종단에 건의를 할 때마다 '한국 불교는 원래 이런 식이고, 외국인이라 잘 몰라서 그런다'며 종단이 그 조언을 듣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했다"며 현각 스님의 비판에 동의하면서 불교계의 자성을 요구했다.


기존에 한국 불교의 폐단을 인식하고 있던 사람들은 현각 스님의 발언에 즉각적으로 호응했다. 그리고 '달라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하사 주지 가섭 스님은 "그(현각 스님)가 인연을 정리하게 된 몇몇 이유는 한국불교의 가장 아픈 부분임이 분명하다. 생채기 난 환부를 긁힌 것처럼 쓰리고 아프다. 승가에서도 오래전부터 한국불교가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돼온 것이라 더욱더 그렇다"고 화답했다. 이런 태도는 오히려 신앙을 갖고 있던 불자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의 마음을 감화시켰다. '아직 한국 불교는 살아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아니,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기 마련인가. 파장이 점점 커지자 불길을 끄기 위해 소방수가 투입됐다. '반론'이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선두에 월정사 교무국장인 자현 스님이 있다. "현각이 제기한 조계종의 문제는 유교적 관습, 남녀·국적 차별, 형식주의, 기복주의, 스님과 신도의 차등, 외국 승려는 장식품이라는 총 6가지다. 현각의 비판은 외국 승려가 얼마나 이기적인 시각에서 한국 문화를 보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자현 스님을 비롯한 '반론'의 중심축은 현각 스님이 지적한 부분들, 가령 유교적 관습 같은 부분은 "한국 불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 동아시아의 보편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문화권에서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전제로 깔고 이해해야 하는 부분"인데, "(한국에) 25년이나 살고도 우리 전통문화를 존중하지도 문화적 다양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자기 우월주의에 빠진 사람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며 현각 스님에게 직접적으로 칼을 겨눴다.


이제 흐름을 두 갈래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자성론'과 '현각에 대한 비판론'. 이 극명한 대비가 주는 안타까움은 현각 스님이 던지 화두가 소모적인 논쟁으로 소진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그걸 바라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분은 미국식 사고, 백인 우월주의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것", "사대주의나 학벌주의가 유교문화라는 것은 다 알려진 이야기고요. 어떻게 보면 거기서 가장 큰 혜택을 본 분입니다. 우리나라에 오자마자 굉장히 불교계에서 높은 단계까지 순식간에 올라가신 분"이라는 비판은 방향이 빗나가도 한참 엇나갔다.



물론 현각 스님의 비판이 '완전'하다고 볼 수는 없다. 어쩌면 현각 스님이라는 비판의 주체도 그러할지 모른다. 그가 '미국인'이라는 국적과 '하버드'라는 학벌의 혜택을 본 불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혜택을 준 것은 결국 '한국불교'가 아닌가. 오히려 비판은 더욱 선명하게 도드라진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현각'만을 바라본다는 건 달을 보지 못하고 그걸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한국 불교가 집중해야 할 부분은 현각이 던진 '화두'이지 '현각'이 아니지 않은가.


어쩌면 현각 스님이 던진 화두는 단지 한국 불교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 한국 불교의 억울한 듯한 변명은 '우리만 그런 게 아니다'라는 항의일 것이다. 한국 사회가 잉태한 것이 한국 불교이거늘, 어찌 그것이 불교에만 국한된 문제이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반성의 책임이 사라지진 않는다. 이쯤에서 1+1 할인행사를 해보자. 한국 불교만큼보다 심각한 건 한국 개신교가 아닐까. 이름만 대도 그 '부패'와 '비리'가 떠오르는 대형 교회의 목사들의 행태는 어떠한가. 


라이즈업이라는 개신교계 청소년 교통선교단체의 목사는 미성년자를 협박해 성관계를 맺은 혐의에 대해 "모든 것을 인정한다"고 시인했다. 종교의 타락을 눈앞에서 목도하고 있다. 처참한 몰골을 한 종교가 자성으로 접어들기 위해선 외부의 객관적인 시선이 필요한지도 모르겠다. 그 지경까지 와버린 지도 모르겠다. 한국 사회의 몰락이 '푸른 눈의 한국인' 박노자에 의해 드러났던 것처럼, 대한민국 종교의 타락은 '푸른 눈의 선각자' 현각 스님의 등장으로 확인되고 있다. 자, 이 뜨거운 바통을 이어받지 않고 무엇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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