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0분.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예상했던 결과가 나오리라 짐작했었지만, 전반부의 분위기가 썩 긍정적이지 않았다. 피가 말랐고, 입이 바짝 말랐다. 비단 나뿐이었겠는가. 온 나라가 그러했을 것이다. ‘긴장감 지수’라는 수치를 측정하는 기계가 있다면, 아마 버텨내지 못하고 고장나버리거나 폭발하지 않았을까. 그만큼 팽팽한 줄처럼 날이 선 긴장이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었다. 그의 입 모양에 주목했고,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들려 온 ‘결말’.
“피청구인 대통령 박근혜를 파면한다."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은 담담한 목소리로 단호히 말했다. 이 한 마디를 위해 이토록 오래 숨죽였던가. 시원함과 허탈함이 공존했다. 어딘가에는 탄식이 혹은 분노가, 어느 곳에서는 환호와 눈물이 흘렀을 것이다. 무거운 시작이 열린 순간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두괄식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비록 쫄깃한 긴장감은 없었겠지만, 불필요한 시간 낭비와 감정 소모를 덜어준다는 점에서 두괄식이 갖는 장점이 새삼 간절했다.
“만약 화성 탐사 로봇 '큐리오시티'가 화성에 착륙했을 때 실제로 생명체를 발견한다면?” (프로듀서 데이비드 엘리슨)
그래서일까. (벌써 두 문단이나 써버리고 말았지만) 문득 이 글은 ‘두괄식’으로 풀어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라이프>는 ‘퇴보(退步)’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가령, ‘분단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에 비유를 해보자. 이 계보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쉬리>(1999)의 경우, ‘분단’이라는 비극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각각 남과 북의 특수요원이었던 유중원(한석규)와 이명현(김윤진)은 연인이자 적으로 설정된다. 하지만 끝내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남북의 첨예한 대치와 대립 속에서 ‘개인’의 관계는 성립될 수 없는 종속적 관계로 그려졌다. 개인 간의 사랑, 우정 더 나아가 연대는 실패로 귀결됐다. 하지만 분단의 아픔을 정면으로 다루면서 당시 북한에도 통일을 바라보는 다른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줬다. 그리고 <공동경비구역 JSA>(2000)은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위원장의 남북정상 회담이 개최되면서 남북이 화해 국면으로 접어들었던 시점에 개봉됐다. 그 또한 비극적 결말로 귀결됐지만, 남북의 군인들이 서로 왕래를 하며 ‘우정’을 나눌 수 있다는 ‘상상력’을 발휘했던 유의미한 영화였다.
전쟁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던 <태극기 휘날리며>(2004)는 ‘형제애’를 통해 남과 북의 관계를 설명하려 애썼고,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웰컴 투 동막골>(2005)은 ‘동막골’이라는 마을을 지키기 위해 국군과 인민군, 미군인 스미스가 힘을 모아 연합군에 대항하는 기발한 발상에서 시작됐다. <국가대표2>(2015)는 ‘자매’라는 관계를 통해 갈등과 화해를 담아냈다. 그리고 2017년 개봉했던 <공조>는 남북의 형사가 함께 수사를 하며 인간적인 정을 쌓아가는 모습을 경쾌하게 그려냈다.
이처럼 분단문제를 다룬 영화의 계보를 살펴보면, ‘비극’에서 ‘희극’으로 조금씩 방향을 틀어왔다. 남북의 긴장 관계는 현존하는 것이지만, 그것이 개인의 관계까지 결정짓는 절대적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만약 이 ‘흐름’을 부정하고 <쉬리>의 비극으로 회귀하려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그를 두고 ‘퇴보’라 부르는 데 주저할 이유가 없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외계 생명체와의 적대적 관계를 답습한 <라이프>는 분명 퇴보라 할 수 있다.
우주 정거장에 머물며 화성 탐사선 필그램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던 6명의 우주인은 8개월 만에 돌아온 필그램이 가져 온 ‘샘플’에 환호한다. 화성에서 채취한 토양 속에서 놀랍게도 외계 생명체가 확인됐고, 최초의 그리고 위대한 발견에 지구 전체가 들뜬다. ‘캘빈’이라는 귀여운 이름을 붙여주고, 이 경이로운 생명체를 반갑게 맞이한다. 그런데 이 위대한 발견이 가장 위험한 발견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크기의 세포였던 캘빈은 급속도를 진화를 거듭한다.
모든 신체가 근육이자 뇌세포이며 시각 세포인 존재, 그것이 캘빈의 정체였다. 마치 식물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때만 해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인간과 교감을 할 줄 아는 듯 보였다. 하지만 이내 적대적인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고(이를 자초한 것은 결국 인간이었지만), 높은 지능과 뛰어난 생존 능력을 통해 인류를 위협하고 급기야 멸종시킬 존재로 자리 잡는다. 이제 6명의 우주인은 ‘괴물’로 변한 캘빈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여야 한다. 절대 지구로 들여서는 안 된다는 사명감이 더해져 이 싸움은 제법 숭고함까지 엿보인다.
밀폐된 공간 속에서 벌어지는 사투는 긴장감을 가중시키고, 이 과정은 분명 손에 땀이 날 만큼 흥미롭게 진행된다. 그런데 캘빈은 왜 인간을 공격하는가. 캘빈과 처음 교감을 나눴던 영국의 생물학자 휴 데리(앨리욘 버케어)는 캘빈이 어떤 목적이나 의도를 가지고 인간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본능 에 충실한 것이라는 것이다. 외계 생명체에 대한 무분별한 호기심에 대한 ‘경고’일까.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는 것을 나무랄 필요는 없겠지만, 외계 생명체를 ‘괴물’로 만들어버리고 인류의 ‘적’으로 그려낸 건 역시 퇴보다.
이미 외계 생명체를 인류의 적대적 존재로 못박고, 그들과 목숨을 건 사투를 벌인다는 이야기 구조는 <에이리언> 시리즈와 <에이리언>을 참고했던 수많은 영화들을 통해 숱하게 봐왔던 반복이라 할 수 있다. 그 이상의 놀라움과 독창성을 보여줄 자신이 없다면 굳이 도전하지 않아도 될 장르라는 말이다. 물론 현대 과학이 성취한 기술적 발전을 잘 담아내고 있는 <라이프>의 가치를 몽땅 무시할 생각은 없지만, 역시 <에이리언>이 줬던 충격과 공포를 재현하기엔 부족함이 많았다.
게다가 최근 개봉했던 <컨택트> 역시 외계 생명체와 인간의 조우를 다루고 있는데, ‘언어’, ‘시간’ 등 고차원적인 개념을 녹여내며 놀라움을 선사했다. 또, <컨택트>의 외계인들은 “3,000년 후에 너희들(인간)을 도움을 받기 위해” 언어를 알려주고 떠난다는 메시지를 던지면서 기존의 SF 영화들이 답습하던 ‘외계 생명체=적대적 존재’라는 등식에도 변화를 줬다. 그런데 <라이프>는 이 진보에서 다시 뒷걸음질을 쳐버린 것이다. 흉측하고 기괴스러운 괴물과 인류는 고작 ‘살아남기 위해’ 또 다시 서로를 죽여야만 한다. 이 얼마나 씁쓸한 일인가.
문득 또 하나의 생각이 스친다. 촛불 민심이 일궈낸 '박근혜 탄핵'이라는 위대한 승리가 자칫 위험한 승리로 귀결되는 것은 아닌가. '적대'와 '배제'의 정치가 다시 고개를 들고 있고, '음모론', '피해의식' 등이 '논리'와 '성찰'을 막아서고 있다. '촛불'이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됐던 '국민'들을 다시 둘로 쪼개고, 이들 간의 싸움을 부추기고 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참담한 심정을 숨길 수가 없다. '생존을 위해' 너를 죽여야 하는 수준의 정치에서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이 퇴보의 흐름에 우리의 몸을 맡기지 말자. 거슬러 올라감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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