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인간의 존재를 묻는 로봇, <채피>가 던지는 질문과 마주하다

너의길을가라 2015. 3. 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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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영화의 경우) 평점(評點)은 참고할 만한 자료이지만, 그에 휘둘려 판단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만큼 신뢰할 것까진 없다. 실제로 네티즌들이 참여하는 평점에서 6~7점을 꾸준히 확보하는 영화는 대개 평범한 영화일 가능성이 높다. 한마디로 '킬링타임 용'이라고 보면 된다. 하지만 롤러코스터 마냥 9~10점과 0~1점이 혼재(混在)되는 영화가 있다면, 대부분 획기적인 영화이거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혹은 회자될) 영화일 확률이 높다.

 

 

그런 관점에서 <채피>에 접근한다면, 이른바 '평점 테러' 때문에 이 훌륭한 영화를 놓치는 후회를 남기진 않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채피>는 지난 14일 15만 1,510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살인의뢰>, <킹스맨 : 시크릿 서비스>에 이어 박스오피스 3위를 차지했다. 누적 관객 수는 25만 4,710명으로, 청소년관람불가 영화들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극장가에서 순조로운 스타트를 끊었다.

 

그 이름도 발랄한 <채피>는 <디스트릭트9>과 <엘리시움>을 연출한 닐 블룸캠프 감독의 세 번째 작품으로 악역으로 변신한 휴 잭맨과 <슬럼독 밀리어네어>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데브 파텔이 출연했다. 무엇보다 영화의 주인공인, 스스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성장하는 로봇 '채피(샬토 코플리)'의 다채로운 연기(?)도 빼놓을 수 없다.

 

 

"겉모습은 영원하지 않다. 마음이 너를 특별하게 해준다"

 

'인공지능'을 소재로 한 만큼, <채피>는 감독이 전달하고자 하는 본질적인 의미와는 별개로, 뜨거운 논쟁의 한가운데 설 수밖에 없는 운명을 갖고 있다. 으레 평론가들의 "영화가 '동화적'이고, '과학적 논거'가 빈약하다"는 지적이 이어진다. 과학의 영역에 있어서, 완벽한 논증에 의해 가능성 제로로 결론나지 않는다면, 그 가설에 대해서는 언제든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

 

오히려 로봇 박사 한재권은 "로봇 '채피'가 영화에서 보여준 감정 반응은 기술적으로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다. 로봇은 사람의 표정과 음성 패턴을 인식하여 사람의 심리 상태를 유추할 수 있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그런 측면에서 상상력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SF의 영화의 특성을 조금만 고려하고, 다소 너그러운 태도로 <채피>의 메시지를 듣는다면 훨씬 더 풍성하게 영화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채피'는 로봇이지만, 사실상 인간에 가깝다. 마치 아기처럼 성장의 과정을 거친다. 언어를 배우고, 행위들을 습득해 나간다. 기존의 로봇들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을 이행하는 존재에 불과했다면, 채피는 자신만의 관점으로 상황에 맞게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자신을 속인 대상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를 드러내기도 한다.

 

또, 고장난 로봇(스카우트)의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배터리를 교체할 수 없어 영원히 살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한 다음에는 '죽음'을 느끼고, 그 사실에 격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기존에 접해왔던 기계적인 로봇과는 전혀 다른 개념의 감성 로봇이라고 할까? 이쯤되면 '인간'과 '로봇'의 경계는 사실상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과연 그런 세상이 오게 될까?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채피>가 주는 효과는 크다.

 

 

스스로 성장할 수 있기에 통제를 벗어난 로봇을 바라보는 인간은 어떤 입장을 취하게 될까? 로봇과의 공존은 가능할 것인가? <채피>는 인공지능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빈센트(휴 잭맨)를 통해 이 둘의 대결 양상을 전개한다. 물론 빈센트의 캐릭터가 다소 엉성하게 그려진 탓에 선악이 뚜렷하게 갈라져서 싱거운 싸움이 되고 말았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진지한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

 

"경찰 로봇처럼 비인간적인 존재에 완전히 인간적인 특징을 부여한 아이러니가 바로 이번 영화의 핵심이다. 로봇이 인간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며 양심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관객들은 혼란을 느낄 것이다" (닐 블롬캠프 감독)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교육의 중요성'이다. 채피는 '폭력은 나쁘다'는 대명제(大命題)는 알고 있지만, '무엇이' 폭력인지에 대해선 정확히 알고 있지 않다. 총을 사용해서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외의 다른 도구를 이용하는 것은 별다른 의구심 없이 받아들인다. '죽이는 것'을 '잠을 재우는 것'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채피는 서슴없이 사람들을 '재우기' 시작한다.

 

닐 블롬캠프 감독은 로봇이 인간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모습을 보이는 순간 관객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과연 '채피'의 행동들을 마냥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 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와 달리, 통제를 벗어난, 명령 체계를 벗어난, 자유 의지를 가진 로봇의 위험성만 더욱 강조된 것은 아닐까? 어찌됐든 <채피>는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고맙고 흥미로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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