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5일 개봉했던 <쎄시봉>은 기대에 못 미치는 흥행 성적(170만 8,200명)을 거뒀다. 60~70년대 청년문화의 산실(産室)이었던 '쎄시봉'을 영화로 다룬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고, 출연 배우들이 "시나리오만으로 바로 출연을 결심하게 되었다"고 밝혔을 만큼 이야기의 완성도는 높았다. 하지만 <쎄시봉>은 실제로 만들어진 결과물에 비해 지나치게 가혹한 평가를 받았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명확한 답을 내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에 여러가지 요인들을 두루 언급해보도록 하자. 우선, 1,400만 관객을 돌파한 <국제시장>의 열풍에 파묻힌 측면이 있다. 당시에 개봉했던 영화들이 죄다 고꾸라졌다는 점은 이를 뒷받침한다. 물론 '쎄시봉' 자체의 파급효과가 떨어졌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지난 2011년 MBC <놀러와>를 통해 점화됐던 '쎄시봉 열풍'을 다시 끄집어내는 것은 다소 어려운 일이었다.
그밖에 '한효주 효과'도 빼놓을 수 없다. 한효주의 동생이 김일병 자살 사건의 가해자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비난 여론은 한효주에게로 옮겨붙었다. <쎄시봉>의 평점이 과도하게 낮은 것, 이른바 '평점 테러'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아보인다. 그러나 이는 계량화하기 어려운 부분이기 때문에 과연 <쎄시봉>의 부진을 '한효주 탓'으로 귀결시킬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영화 속 한효주는 민자영 역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악플의 또 다른 대상인 설경구의 경우에는 흥행에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고 있지 않은가? 입소문을 무시할 수 없지만, <국제시장>의 경우에는 '복고 열풍'에 대해 많은 누리꾼들이 핏대를 세우며 비판하고 있지만, 1.422만 명을 돌파하며 역대 흥행 순위 2위에 올랐다는 점도 참고할 만 하다. 역시 실패의 원인은 복합적인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 영화 외적인 이야기를 계속 나누기보다는 아무래도 영화 내적인 부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좀더 생산적일 것이다. '과거를 보는 감상적인 접근법'이 문제라는 듀나와 '단순한 추억 팔이가 아니'라 '영혼에 새겨진 상흔을 되새기는 영화'라고 강변하는 황진미의 영화 평론을 바탕으로 <쎄시봉>에 대해 좀더 자세히 들여다보도록 하자.
현학(?)적인 영화 평론으로 유명한 듀나는 "<쎄시봉>에는 김현식의 전작을 재미있게 만들었던 수많은 것들이 있었다. 남자 캐릭터들은 재미있었고 여자캐릭터들은 매력적이었다. 유머감각과 대사의 감도 여전"했다면서도 "유감스럽게도 이번 영화는 그가 <시라노: 연애조작단>까지 꾸준히 유지해왔던 그의 이전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했다. 무엇이 듀나를 마뜩잖게 했던 것일까?
그는 '한참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끝에'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과거를 보는 감상적인 접근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었다. "영화가 감상적이 된 이유는 단 하나. 거의 30분에 가까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때문"이며, "<쎄시봉>에서 90년대와 현재의 에필로그는 끊임없는 회한과 변명의 연속"이라는 그의 분석은 많은 공감을 자아냈다. 물론 듀나는 <국제시장>과 <쎄시봉>은 분명 차이가 있다고 전제하면서도 '복고 향수 장사'라는 비아냥을 서슴지 않는다.
뒤이어 따라나오는 독설은 다소 과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한다. "이 비장한 척하는 감상주의는 희생처럼 보이지만 사실 지독한 자기도취의 퍼레이드이다. 아무리 평생에 걸친 고통을 이해하고 싶어도 이
감상주의가 먼저 보이는 것이다. 실제 삶을 사는 인물과는 달리 필요한 감정만 챙기는 이야기꾼과 배우는 자기도취의 퍼레이드에 훨씬
쉽게 빠진다"
듀나는 "하긴 늙은이들의 눈으로 본 시대가 어딜 가도 비슷한 건 당연한 일"이라며 특유의 퉁명스러움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일견 타당한 이야기다. 분명 <쎄시봉>은 복고 열풍의 흐름에 놓여 있다. 이를 두고 '복고 향수 장사'라고 비아냥대는 것도 무리한 제스처는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쎄시봉>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을까? 김현식 감독이 말하고자 했던 것은 그저 '복고 향수'였을까?
듀나의 <쎄시봉>에 대한 '경멸'에 가까운 영화평은 위화감(違和感)이 든다. 과연 영화를 제대로 '본' 것일까? 과도한 선입견의 발현은 아니까? '논(論)'하여 '평(評)'하기보다 감정적인 부분들이 지나치게 개입된 것은 아닐까? 오해와 편견에서부터 비롯된 것은 아닐까? 이제부터는 황진미의 '변명' 혹은 '제대로 된 이해'를 들어보도록 하자.
황진미는 <쎄시봉>을 향한 과도한 감상주의라는 비판에 대해 "왜 주저앉아 우냐고? 그게 핵심"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그렇게 답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감상적이라는 비판은 '영화의 주제와 감독의 의도를 도외시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김현석 감독은 <쎄시봉>은 '중년이 된 오근태가 주저앉아 우는 뒷모습에서 시작된 영화'라고 여러 차례 밝힌 바 있다.
황진미는 이를 "영화의 방점이 누구나 즐겁게 감상하는 '6-70년대의 낭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견이 갈리는 '90년대의 회한'에 있다"면서 "영화의 핵심이 왜 오근태는 갑자기 도망쳤으며, 20년 만에 우연히 만난 민자영을 왜 차갑게 뿌리쳤으며, 왜 주저앉아 우는가에 있다"고 설명한다. 오근태가 친구들을 팔아넘길 수밖에 없었던, 변절자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이유 말이다.
영화 속에서는 그것이 '사랑'으로 표현되어 있지만, 사실 그 이유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쎄시봉>을 혹독하게 비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낭만주의'를 언급하고 있지만, 오히려 <쎄시봉>은 "그 시절의 청년문화가 대결하고자 했던 시대의 억압을 보여주며, 그 억압을 그저 '외부의 벽'으로 사유하는 게 아니라 가담자의 내면에 새겨져있는 깊은 상흔으로 응시"하고 있는 불편한 고발 영화이기 때문이다.
<쎄시봉>은 통행금지와 미니스커트 단속을 비롯해 대마초 파동까지 다루면서 당시의 국가폭력을 묘사하는 동시에 그 국가폭력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청춘들을 그려낸다. <쎄시봉>은 <국제시장>처럼 '우리가 어떻게 만든 나라인데!'라며 '세대 부심'을 자극하는 영화가 결코 아니다. 오히려 국가폭력의 가담자가 될 수밖에 없었던 세대, 6~70년대에 청춘을 보낸 '쎄시봉' 세대들의 자괴감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비록 민자영을 지키기 위해 친구를 배신했지만, 자신의 행위에 대해 정당성을 확보할 수 없었던 오근태는 죄의식을 안고 평생을 살아간다. 20년 만에 이장희를 만난 오근태는 그 어떤 변명도 없이 "나 너네 친구 아냐"라며 돌아선다. 우연히 공항에서 마주친 민자영이 "너 나 때문에 그랬던 거니? 나 살리려고 친구들 팔았던 거야?"라며 애타게 부르지만, 끝내 오근태는 입을 열지 않는다. 그리고 홀로 주저앉아 눈물을 흘린다.
김현석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럴 수밖에 없었어"라는 변명이 아니라 "사실은 이랬던 거야"라며 이해를 구하는 것이 아니다. 황진미의 말처럼 "중년이 된 오근태의 차갑게 식어버린 표정과 주저앉아 우는 모습은 느닷없이 튀어나온 신파이거나 과도한 감상주의의 산물이 아니다. 오히려 감독이 바라보는 세대에 대한 압축적인 유비"이다.
듀나의 말처럼 '개성 없는 복고팔이로 밀어붙이는 하나의 흐름'으로 치부하기엔 <쎄시봉>이 주는 이야기는 훨씬 더 세련되고 정제되어 있다. 30분에 가까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는 단순한 감상주의로 치부할 내용이 아니다. "어처구니없는 국가탄압을 겪으면서, 그들 중 소수의 피해자들을 제외하면 오히려 가담자와 방관자로 내면화하는 과정"을 드러내기 위한 핵심적인 장면들이다.
어쨌거나 <쎄시봉>은 이런 식으로 매도하기엔 아까운 영화인 것만은 분명하다. 기회가 된다면 '편견' 없이 꼭 보길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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