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운 감독에겐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의열단 단장 김원봉을 모티브로 한 정채산(이병헌)을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도 있었다. '특별출연'만으로도 엄청난 아우라를 뽐낸 이병헌의 힘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멋스러웠던 정채산은 보는 이들의 가슴을 한껏 설레게 만들지 않았던가. 아니면 의열단의 단원들을 본격적으로 다루는 선택도 가능했다. 가령,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던 김상옥을 빗댄 김장옥(박희순)이라든지, 식민통치기관을 파괴하기 위해 폭탄을 운반하는 작전을 맡았던 김시현을 빗댄 김우진(공유)을 더 집중적으로 그릴 수도 있었다. 



그랬다면 훨씬 더 강렬하고 뜨거운 영화가 됐을지도 모르겠다. 또, 영화를 홍보 하기에도 한결 수월했을 테고, 상업 영화의 존재 이유이자 제1 목표인 흥행에도 유리했을 것이다. 하지만 김지운 감독의 선택은 의열단과 일본 경찰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던 조선인 출신 일본 고등경찰, 그러니까 '밀정' 이정출이었다. 결과적으로 경쟁작인 <고산자, 대동여지도>를 압도적으로 누르고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함으로써 그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냈지만, 굳이 '꽃길'을 피해 가시밭길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의 인터뷰에서 답을 찾아보자.


"이정출을 중심에 놓은 이유는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정신적인 이중국적자의 내면에 흥미를 느꼈다. 항일, 친일로 변신하는 인물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시대적 공기를 압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정채산이라는 인물이 극적이고, 이야기를 풍성하게 할 수 있지만 이정출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다. 한 나라의 시스템이 정상적이지 않을 때 개인도 딜레마에 빠질 수 있다.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이다. 황옥이라는 인물이 정말로 위장잠입했는지, 밀정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다만 그 인물의 마음이 궁금했다."


<스포츠경향>,  '밀정' 김지운 감독이 말하는 이정출을 택한 이유는?


황옥(1887~?). 다른 등장 인물들도 역사 속 진짜 이름을 언급했으니, 이정출에게도 진짜 이름을 찾아줘야겠다. 김지운 감독이 꽂혔던 인물은 바로 역사 속 '황옥 경부 사건'의 주인공 황옥이었다. 그는 김지운 감독의 말처럼, 역사학계에서도 '독립운동가'인지 '밀정'인지를 두고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논란의 인물이다. '회색지대'의 인물을 영화적으로 다룬다는 건, 김지운 감독에게도 부담스러운 도전이었을 것이다. 친일파 청산이라는 과업을 이루지 못한 시대적 아픔이 깊은 상흔을 남긴 채 현존하지 않던가. 그로 인해 역사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선'이 여전히 강퍅한 위세를 떨치고 있기에 <밀정>은 자칫 잘못하면 고립될 여지가 충분했다. 



1923년 1월 12일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날아든다. 큰 피해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번화가 한복판에서 발생한 폭탄 투척 사건으로 일제는 경악했다. 곧이어 의열단원 김상옥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한다. 공안 당국의 추적은 집요했고, 결국 1월 22일 아침 김상옥은 사살되고 만다. 이 추격 장면이 <밀정>의 첫머리에 등장한다. 한편,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의 범인을 김상옥으로 단정짓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의열단은 김상옥을 주축으로 '대암살 파괴'를 계획하고 있었고, 폭탄을 국내로 반입시킬 작전을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종로경찰서 폭탄 투척 사건이 발생하면서 계획이 뒤틀려 버린 것이다.


상황이 바뀌자 의열단은 김시현을 책임자로 한 두 번째 계획을 시도한다. 김시현은 자신이 고려공산당에 입당하는 걸 도와준 황옥을 작전에 끌어들이고자 한다. 비록 일본 경찰 신분이지만 믿을 수 있는 인물이라 판단한 것이다. 김원봉은 황옥을 신뢰해도 되는지 확인하게 위해 베이징으로 데려오게 한다. 황옥을 직접 만나 본 김원봉은 그를 신뢰해도 된다고 판단하고 작전에 투입시킨다. 특히 경찰 신분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을 높이 산다. 하지만 폭탄을 안둥현까지 운반한다는 의열단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간다. 3월 15일, 황옥을 비롯한 관련자 전원이 체포되고, 도주했던 김시현마저도 일본 경찰에 붙잡히게 된다.



작전이 새나갔던 것일까? 암암리에 활동하고 있던 '밀정'의 짓일까?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인가. 설마 황옥인가? 재판 과정에서 황옥은 충격적인 발언을 쏟아내는데, 그 심리 내용을 살펴보자.


- 황옥의 법정 증언, <동아일보>, 1923년 8월 9일 -


판사 : 상관이 물어도 사건에 대해 말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황옥 : 일이 위험한 상황이면 말했겠지만 경성에 온 폭탄은 모두 내 손에 들어왔으므로, 상해에서 실행 단원이 오면 그때 모두 잡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소.

판사 : 이번 일로 피고의 신변이 의심스럽게 된 것은 언제인가?

황옥 : 13일이오.

판사 : 13일부터 그랬으면 그때부터 검거를 하여 의심을 푸는 것이 좋지 않은가?

황옥 : 일부 검거로는 의심을 풀 수 없으므로 전부 검거하여 공을 세우려 했소.

판사 : 피고가 잡히기 전에 왜 미리 전말을 알리지 않았는가?

황옥 : 최후까지 성공을 기대했기에 말하지 않았소.


- 조한성, 『한국의 레지스탕스』 에서 발췌 -


김시현의 입장에서 보면, 황옥을 의열단의 작전에 끌어들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황옥의 입장에서 보면, 의열단원들을 일망타진할 기회라 생각하고 김시현에게 접근한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공적을 독차지하고 경시(警視)로 승진하는 달콤한 꿈을 꿨던 황옥은 결국 최악의 결과를 맞이한다. 작전이 노출되고, 밀정이라는 오해를 사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경찰 내부의 알력 다툼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중 스파이' 역할을 했던 황옥의 교묘한 줄타기가 실패로 귀결된 것이다. <밀정>은 양쪽의 입장 차이를 절묘해 배합해 영화적으로 표현해낸다. 


김지운 감독은 회색 지대에 위치한 회색 인간 이정출, 그러니까 황옥을 '구원'한다.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나는 의열단이 아니라 의열단을 검거하기 위해 비밀 작전을 수행한 것이다'라는 황옥의 진술을 역으로 활용한다. 김지운 감독은 황옥이 실제로는 독립운동가였고, 의열단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 증언을 했을 것이란 '희망'을 영화 속에 투영했다. 아직 그의 정체에 대한 명확한 역사적 대답이 나오지 않은 상황이니 충분히 가능한 접근이다. 또, 김원봉이 "황옥은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다 불행히 관헌에 체포된 애련한 자"라고 소개한 예도 있고, 황옥이 김상옥과 김지섭 등 의열단원들의 피신을 도운 정황이 있기 때문에 더욱 헷갈린다.



- 황옥의 최후 진술, <동아일보>, 1923년 8월 13일 -


천진에 출장갔다가 경찰부에 돌아와 과장들에게 책망을 당하고, 아무도 나의 심사를 알아주지 못함에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까지 하려고 했소. 그러나 이번 사건을 교묘히 운용하여 대대적으로 검거를 행하는 동시에 나의 수완을 보이면, 책망하는 부장이나 과장이나 또는 경무국장까지도 나를 칭찬하고 경시까지 승급도 시켜주리라 믿었소. 나는 굳은 결심으로 사실을 말하지 않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이 경성으로 들어오기만을 기다렸소. 그런데 결국은 경찰국에서 모든 사실을 탐지하고 안동현에 있는 폭탄까지 압수하여, 오늘과 같이 의열단을 이용하려던 내가 공범자라는 말을 듣게 된 것이오.


- 조한성, 『한국의 레지스탕스』 에서 발췌 -


어느 쪽이 진실일까. 황옥은 정말 의열단원들을 모두 검거하고, 더 높은 자리로 올라가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던 '친일파'였을까. 아니면 조국과 민족에 대한 마음의 빚을 깊숙히 안고 살면서 의열단을 비밀리에 도왔던 독립운동가였을까. 어쩌면 어느 쪽에 속하지 않은 채,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왔다갔다 하는 진짜 '회색 인간'은 아니었을까. "아버지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를 위대한 독립운동가로 이정했다. 아버지의 진정한 생각과 행동은 하늘과 땅, 그리고 당신만이 알 뿐 아무도 모른다"는 황옥의 큰 딸의 말처럼, 진실은 어쩌면 황옥 그만이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우리는 김지운 감독의 예리한 접근과 송강호의 섬세한 연기를 통해 모순된 시대를 살아가야만 했던 수많은 '개인'들의 심리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국가라는 시스템 속에서 수많은 '황옥'들이 생존의 위협을 겪어야 했고,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쳐야만 했다. 일제 강점기를 바라보는 더욱 풍성한 시각을 제공해준 <밀정>을 계기로 더욱 다양한 시선들이 출현하길 기대해본다. 


P.S. 일본 당국이 황옥의 진술을 부인하며 그를 '밀정'으로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서, 황옥은 한국의 독립 운동가였다고 주장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공안 당국이 주도하는 '공작 수사'에 대한 일본 내의 여론이 악화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이를 수습할 유일한 해법이 황옥을 '밀정'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는 점에서 고지곧대로 믿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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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어제'는 8월 15일, 광복절(光復節)이었다. '대한민국'은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돼 나라와 주권을 다시 찾은 날'을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기념했다. 정부는 원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족들을 청와대로 초청하기도 했고, 대통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건국절 축사 같은) 광복절 축사'로 국민 앞에 나타났다. 언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광복절'과 관련한 기사들을 1면에 싣어 스스로의 '민족애(民族愛)'를 뽐냈다. 국민들은 어떠했는가. 역사의식이 부재한 한 연예인을 향해 분노의 철퇴를 내렸다.


본래 무언가를 맞이할 때는 떠들썩하기 마련이다. 또, 그 '맞이'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지나간 다음이 중요하다. 몸과 마음을 적시고 있던 흥분이 가신 후에야 우리는 제대로 '응시(凝視)'할 수 있다. 제71주년 광복절이 지나간 자리의 풍경을 되짚어보는 건 제법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태풍이 지나간 다음에 '청명함'이 찾아오는 것처럼 말이다. 정부도, 언론도, 국민도 이쯤이면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길 이 시점에서 다시 광복절을 차분히 이야기하자.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은 광복절을 앞두고 원로 애국지사와 독립유공자 유족들을 청와대 오찬에 초대했다. 그 자리에서 독립유공자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은 박 대통령의 면전에서 "대한민국이 1948년 8월 15일 출범했다고 이날을 '건국절'로 하자는 일부의 주장이 있다. 이는 역사를 외면하는 처사 뿐 아니라 헌법에 위배되고, 실증적 사실과도 부합되지 않고, 역사 왜곡이고, 역사의 단절을 초래할 뿐"이라며 '건국절 제정론'을 강하게 비판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조국의 민주개혁과 평화적 통일의 사명에 입각하여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고, 모든 사회적 폐습과 불의를 타파하며, 자율과 조화를 바탕으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더욱 확고히 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며, 자유와 권리에 따르는 책임과 의무를 완수하게 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세계평화와 인류공영에 이바지함으로써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다짐하면서 1948년 7월 12일에 제정되고 8차에 걸쳐 개정된 헌법을 이제 국회의 의결을 거쳐 국민투표에 의하여 개정한다. (대한민국헌법 전문)


"대한민국은 1919년 4월11일 중국 상하이에서 탄생했음은 역사적으로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그의 뒤이은 발언은 대한민국 헌법에 기초하고 있는 것임에도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건국절 제정론'은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의 비호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다. 당시 김영관 전 광복군동지회장의 일갈은 박 대통령으로부터 아무런 피드백도 받지 못한 채 외면당했다. 예상치 못했던 발언에 당황했기 때문인지,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때문인지 박 대통령은 사드 배치의 필요성에 대해서만 언급할 뿐이었다. 




"안중근 의사께서는 차디찬 하얼빈의 감옥에서 '천국에 가서도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박근혜 대통령)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이라며 건국절에 힘을 실어줬던 박 대통령은 올해 경축사에서도 "오늘은 제71주년 광복절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못박았다. 이쯤되면 광복절 경축사인지 건국절 경축사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이역만리(異域萬里)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의 바람은 허무하게 허공으로 흩어져 버렸다. 거기에 박 대통령은 안중근 의사의 순국 장소인 뤼순 감옥을 하얼빈 감옥으로 잘못 언급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국민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물론 '장소'를 틀린 것이 뭐 대단한 잘못이냐고 억울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와 함께 과거 걸그룹 AOA의 실현과 지민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과 그 이름을 매칭시키지 못해 국민적 공분을 사야했던 사건이 함께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사인(私人)에 불과한 연예인의 역사 인식과 대통령의 공식 석상에서의 발언을 어찌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할 수 있겠는가. 안중근 의사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가 '건국절 논란'과 함께 맞물리면서 더욱 뜨거운 이슈를 만들어내고 있는 건, 결국 박근혜 정부가 자초한 일이다.



한편, 국민들은 광복절을 소녀시대 '티파니'가 일으킨 태풍과 뒤엉켜 보냈다. 지난 14일 티파니는 일본 도쿄에서 'SM타운 콘서트'를 마친 후 멤버들과 함께 한 사진을 자신의 SNS에 올렸는데, 그 글에 일장기 이모티콘을 덧붙였다. 여기까지는 이해할 수도 있는 범위였겠지만, 광복절인 15일 전범기(戰犯旗)인 일본의 욱일기(旭日旗) 무늬가 포함된 '도쿄 재팬'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사진을 게시한 건 선을 넘는 행위였다. '광복절에 전범기가 웬말이냐'는 분노와 함께 티파니 개인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다.


급기야 그가 꼴보기 싫었던 사람들은 KBS2 <언니들의 슬램덩크> 측에 티파니의 하차를 요구하고 있다. 사태를 진화하기 위해 티파니는 자필로 사과문을 작성하는 등 고개를 숙였지만, 이번에는 그 사과의 '진정성'을 놓고 또 다른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덫'에 빠진 것이다. 스스로 자초한 것이지만, 한 명의 연예인에게 이토록 많은 '에너지'를 쏟아붓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의문이 든다. '사소한 것'에 분노할 수밖에 없는 우리들의 씁쓸한 현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한쪽에서는 국가의 대표인 대통령이 '광복절'에 '건국절'을 은근슬쩍 올려놓는 대범한 역사적 장난을 치고 있는데, 한쪽에서는 국가의 주인인 국민들이 한 연예인의 역사의식 부재를 놓고 분노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것이 제71회 광복절이 지나간 후의 풍경이다. 씁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작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정작 관심이 향해야 할 곳은 어디인가. 


"대한민국에 와서 아버지 고향에 가니까 많은 유공자 유족들이 내 손을 잡고 대한민국이 우릴 버렸다 이런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믿지 않았습니다. 직접 한국에 와서 살아보니 와닿아…" (독립유공자 후손 권명철 씨)


"국민 여러분, 우리가 지금껏 위로금 받겠다고 이렇게 싸우고 있습니까. 우리가 무슨 돈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 어렸을 적 끌려가서 그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데, 위로금 몇 푼 준다고 용서가 되겠습니까. 사죄하는 말 한마디 없이 용서할 수는 없습니다." (김복동(91) 할머니)


한 연예인을 조리돌림하고 난 감정적 소비 이후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보수 진영이 주도하고 있는 건국절 제정론은 앞으로 더욱 탄력을 받을 것이고, 반지하 월세방에서 하루를 견디며 겨우 버티고 있는 독립유공자들의 후손들의 삶은 바뀌는 게 없을 것이다. 한일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이 출연(出捐)하기로 한 '10억 엔' 앞에 40명만이 생존해 계시는 위안부 할머니의 슬픔은 또한 잊힐 것이다. '광복절'이라는 태풍이 지나간 자리, 우리 앞에는 이런 것들이 남아 있다. 청명한 하늘을 보고 싶었으나, 비바람에 부서지고 뒤집힌 우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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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IV-12권 -


A의 할아버지 춘산명세(春山明世)는 유교를 바탕으로 조선인을 황국신민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가 부활시킨 경학원(성균관의 나중 이름)의 사성(司成 · 관리)을 지냈고, 친일 유학자들을 동원해 만든 조선유도연합회(朝鮮儒道聯合會) 상임이사를 역임(1939년)했다. 1941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 발기인으로 참여했는데, 조선의 젊은이들을 향해 태평양 전쟁에 나가서 일왕(日王)을 위해 싸우다 죽으라고 강변했다.


1942년에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징병제를 찬양하는 한시와 글을 발표했고, 이러한 주장을 전달하는 강연에 나서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펼쳤다. 이와 같은 전력(前歷) 때문에 A의 할아버지는 2009년 발표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 포함됐고,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도 그 이름을 올렸다. 별다른 이견이 제기되기 어려울 만큼 분명한 친일파다.



B의 아버지 금전용주(金田龍周)는 일제 때 경북도회 의원을 지냈고, 조선임전보국단 간부로 활약했다. 또,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1943년 10월 3일자 2면 기사에 따르면, 그는 부민관 대강당에서 열린 전선(全鮮)공직자대회에서 "징병제 실시에 보답하는 길은 일본 정신문화의 앙양으로 각 면에 신사(神社)와 신사(神祠)를 건립하여 경신숭조 보은감사의 참뜻을 유감없이 발휘" 하도록 하여야 하며 "미영 격멸에 돌진할 것을 촉진"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징병제 시행 감사 적미영격멸 결의 선양 전선공직자대회 기록>면, "먼저 가장 급한 일은 반도 민중에게 고루고루 일본 정신문화의 진수를 확실히 통하게 하고, 진정한 정신적 내선일체를 꾀하여 이로써 충실한 황국신민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다. B<레> 다.



- 해촌 김용주 -


이미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이제 실명을 공개하도록 하자. A는 이인호 KBS 이사장이고, 그의 할아버지는 이명세(1893~1972년)다. B고, 는 해촌(海村) 김용주(1905~1985)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명세와 김용주는 구체적으로 명확히 친일 행위를 한 사람들이다. 쉬운 말로 '친일파(親日派)'라고 불릴 만한 사람들이다.


하지만 <암살> 속 염석천의 말처럼 '좋은 세상'이 되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후손을 잘 뒀기 때문일까? 이들은 '친일파'에서 '애국자'로 둔갑되고 있고 있다. 이력(履歷) 세탁이라고나 할까? 이인호 이사장은 조부의 친일 행각에 대해 "당시 일제가 요구하는 협력의 글을 쓰실 수밖에 없는 위치에 계셨지만 본인 목표는 서양 사조에 맞서 유학의 영향력을 증대시키자는 데 있었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한편, 서동훈(칼럼리스트>은 <경북매일>에 '해촌 김용주'라는 글을 기고하면서 그의 친일 행각은 쏙 빼버린 채 "조선총독부를 비난하다가 '포항지역 총살 대상 1호'로 지목"됐고, "해방후 해촌은 상당한 땅을 주민들에 나눠주었다. 기업이윤의 사회환원"이라면서 "김무성 대표가 해촌의 아들이다. "왕대밭에 왕대 난다"했"다며 노골적인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여기까지 정리를 해놓고,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보도록 하자.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700만 재외동포 여러분, 그리고 자리를 함께 하신 내외 귀빈 여러분,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첫 구절)


"오늘은 광복 70주년이자 건국 67주년을 맞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마치 커밍아웃처러 들리는 이 지난 광복 70주년을 맞아 기념식에 참석한 박 대통령의 축사 그 첫 구절이다. 광복 70주년에 굳이 건국 67주년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정부 수립이 건국이라는 용어로 바뀐 것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고자 하는 뉴라이트의 역사관과 다.


공교롭게도 이인호 이사장과 김무성 대표는 '건국절 논란(건국론)'의 중심에 서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이사장은 <중앙일보>에 기고한 '광복절은 대한민국 건국을 기념하는 날이다'이라는 글에서 "광복이 자주독립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적어도 오는 8월 15일은 ‘광복 70년’이 아니라 ‘해방 70년, 대한민국 건국 67년’을 기념하는 8·15 광복절임을 알고 기려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무성 대표는 지난 14일 이승만 전 대통령의 사저인 이화장을 찾은 자리에서 "역사는 공(功)과 과(過)가 있는데 그동안 과를 너무 크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공만 봐야 한다"며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언급을 했다. 그동안 자신이 강조했던 '이승만 국부론'을 강조한 것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국부로 내세우고, 광복절을 건국절로 대체하고자 하는 '후손'들의 공통적인 움직임에 혹시 다른 의도가 개입된 건 아닐까?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 정의인도와 동포애로써 민족의 단결을 공고히 하며 모든 사회적 폐습을 타파하고 민주주의제제도를 수립하여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각인의 기회를 균등히 하고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케 하며 각인의 책임과 의무를 완수케하여 안으로는 국민생활의 균등한 향상을 기하고 밖으로는 항구적인 국제평화의 유지에 노력하여 우리들과 우리들의 자손의 안전과 자유와 행복을 영원히 확보할 것을 결의하고 우리들의 정당 또 자유로히 선거된 대표로써 구성된 국회에서 단기 4281년 7월 12일 이 헌법을 제정한다. (1948.7.17. 제정된 헌법 '전문')


헌법 전문에는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다. 박 대통령을 위시한 여권과 뉴라이트 진영은 1948년을 '건국한 해'로 기억하고자 하지만, 헌법 전문에 따르면 1948년은 '재건한 해'인 것이다. 이처럼 반(反)헌법적인 해석을 계속적으로 시도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다.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는 것은 이승만과 해방 이후 애국자로 둔갑한 변절자들이다. 그리고 김구 같은 사람은 대한민국 독립, 다시 말해 남한 단독 독립에 반대했던 사람으로 전락하고 만다. 이인호 이사장이 "대한민국 공로자로서 거론하는 건 맞지 않다"고 말하는 건 이러한 맥락에서 가능한 이야기다.


까? 광복을 기준으로 하면, '친일 VS 독립운동'이라는 프레임이 설정되지만, '건국'을 기점으로 하면 좌익과 우익의 구도가 형성된다. 건국절을 만들고자 하는 시도는 오랫동안 그들을 괴롭혀왔던 '친일파'라는 굴레를 떨쳐내면서 '애국자'로 변신할 수 있는 신의 한 수인 셈이다.




건국절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을 가만히 잘 살펴보면, 이들이 자신의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의 행적에 대해 미화(美化)를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곧 자신들에 대한 면죄부이기도 하고, 자신의 출세(성공이라고 해도 좋다)를 위한 걸림돌을 제거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방법만이 유일하고 바람직한 해결책인 걸까?


다. 다. <암살> 속의 염석진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해방이 될 줄 몰랐으니까!" 타협 혹은 포기가 어느 정도는 정당화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광복을 기대하기에는 가혹했고 잔혹했던 시대였으니까.


또, 조상의 친일 행위를 그 다.다만, 그 역사적 사실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그 인정과 사과는 더욱 큰 날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 김용주에 대해선 달리 평가할 부분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위에서 언급했던 두 사람의 행보는 매우 아쉽기만 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첫돌 1월 1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 58명이 상해에서 태극기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국가보훈처 홈페이지 (www.mpva.go.kr)



면, '3·1운동과 임시정부가 수립된 1919년' 응답이 63.9%고, '된 1948년'은 21%다. 하지만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고, 다.


면, 63.9%도 순식간에 붕괴될지 모를 일이다. <암살>을 소개하면서 '기억'의 힘을 강조한 적이 있다. 영화 속에서 "잊혀지겠죠? 미안합니다"라고 읊조리는 김원봉, "우리 잊으면 안돼!"라며 덤덤히 돌아서는 영감(오달수), "알려줘야지. 우린 계속 싸우고 있다고"라며 결의를 다지는 안옥윤. 자, 우리의 대답은 무엇일까? 광복절과 건국절을 둘러싼 논란 앞에 서 있는 우리의 대답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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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BS 에서 발췌 -



Q1. "3·1절을 읽어보세요" 


적지 않은 중학생들이 3·1절을 '삼점일절'로, 3·1운동을 '삼점일운동'으로 읽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해지더군요. 기사가 나간 뒤 일부 네티즌들은 댓글에서 학생 인터뷰가 조작된 것 아니냐고까지 물으시더군요. 취재진이 중학생을 만나기 위해 서울시내 중학교 5군데를 돌아다녔고요, 20명 남짓 되는 중학생을 붙잡고 물어본 결과, 20%정도의 중학생이 3·1절 읽는 법조차 몰랐습니다. 차라리 조작이었다면 저도 좋겠습니다. 


Q2. "3·1절은 무슨 날인가요?" 


'일제에 항거해 1919년 3월 1일 벌어진 우리민족 최대 독립운동'이란 답을 딱 한 명이라도 해주길 기대했습니다. 저렇게 정확한 답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행히 '대한민국 만세'정도 기억하는 학생은 꽤 많았습니다. '독립운동'이라고 말한 학생들도 꽤 있었고요. 그런데 중고등학생을 막론하고 엉뚱한 대답을 하는 학생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실 대한민국 만세도 엉뚱한 대답인데..)


'전범기가 뭐에요?' 기형적 역사교육의 심각함 SBS



제95주년 3·1절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삼점일절'의 충격은 가시지 않는다. 고작 1년도 지나지 않은 일이다. 위에 발췌한 내용은 지난 2013년 4월 SBS가 '청소년들의 역사교육 현실'을 취재한 기사의 일부(3·1절과 관련된 부분만 발췌)이다결과는 보시는 것과 같이 충격적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한국사는 그저 어렵고 머리 아픈 암기 과목이었다. '모험'을 감수하면서 한국사를 수능 선택 과목으로 선택할 학생은 많지 않았다. 역사교육의 현실, 그 부끄러운 민낯이 드러나면서 여론은 들끓었다. '역사를 잃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신채호 선생의 유명한 말씀이 서슬 퍼런 꾸짖음으로 다가왔다. 결국 정부는 한국사를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했고, 한국사 교육 강화에 힘을 실었다. 


사실 '3·1절'을 '삼일절'로 읽든, '삼점일절'으로 읽든 그것이 뭐 그리 큰일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그 의미를 알고 있느냐의 여부다. 게다가 엄밀히 말하면, SBS는 어문 규정을 어긴 셈이다. 3·1절은 이처럼 '가운뎃점'을 써야 함에도 3.1절처럼 온점을 찍고 있지 않은가? 물론 최근에는 가운뎃점과 온점의 사용이 엄밀히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언론의 문제가 심각한데, 가운뎃점을 쓰기가 번거롭고 귀찮다보니 온점으로 대체해서 표기하는 것이다. SBS의 실수를 감안하더라도, 3.1절을 삼점일점으로 읽은 것은 분명 충격적이었다. 단지 그것이 삼점일점이라고 읽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수의 학생들이 3.1절의 의미와 의의를 모르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것이다. 그렇다. 3·1절이 잊히고 있는 것이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1. 吾等(오등)은 玆(자)에 我(아) 朝鮮(조선)의 獨立國(독립국)임과 朝鮮人(조선인)의 自主民(자주민)임을 宣言(선언)하노라. 此(차)로써 世界萬邦(세계만방)에 告(고)하야 人類平等(인류 평등)의 大義(대의)를 克明(극명)하며, 此(차)로써 子孫萬代(자손만대)에 誥(고)하야 民族自存(민족자존)의 政權(정권)을 永有(영유)케 하노라.


1. 우리는 이에 조선이 독립국임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한다. 이 선언을 세계 온 나라에 알리어 인류 평등의 크고 바른 도리를 분명히 하며, 이것을 후손들에게 깨우쳐 우리 민족이 자기의 힘으로 살아가는 정당한 권리를 길이 지녀 누리게 하려는 것이다.


- 독립 선언문(기미 독립 선언문) -


1919년 3월 1일, 태화관(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소재)에는 손병희 · 이승훈 · 한용운 등 민족 대표 29인이 모였다. 그들은 그 자리에서 독립 선언문(기미 독립 선언문)을 발표하고,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원래대로라면 민족대표들은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치렀어야 했다. 일각에서는 만약에 있을 학생들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겼다고 주장하지만 선뜻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다. 


박은식 선생의 『한국 독립 운동 지혈사』에는 '당시 만세 시위에 참가한 인원은 총 200여 만 명이며, 일본 군경에게 피살당한 사람은 7,509명, 부상자는 15,850명, 체포된 사람은 45,306명'라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집회인수가 106여 만 명이며, 사망자가 7,509명, 체포된 사람이 4만 7천여 명이라고 한다) 학생들의 희생을 고려한 선택이라기엔 일제의 탄압은 '어차피' 무차별적이었다. 태화관에서 '조신하게' 독립 선언서를 낭독한 민족 대표들이 행사가 끝난 후, 총독부 정부총감 야마가타 이자부로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잡아가시오'라며 자수를 했던 것을 미뤄보면 그 의미를 조금은 유추할 수 있을 것도 같다. 


민족 대표의 행방을 알 길이 없던 민중들은 원래 약속 장소였던 탑골공원에서 별도의 독립 선언식을 거행했다. 학생 한 명(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 선언서를 낭독했고, 그 자리에 모여있던 천 여명의 학생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윽고, 수십 만의 민중들이 합류했고, 그야말로 3·1운동이 펼쳐졌다. 이쯤에서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교과서 등에는 '대한독립만세'라고 외쳤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아마 당시의 민중들에게 더 익숙했던 국호는 '대한'이 아니라 '조선'이었을 것이다. 그 중에는 오히려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지 않았을까? 물론 '대한'이든 '조선'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수십 만의 민중들이 간절히 바라 마지않았던 것은 단 한 가지, 민족의 독립이었을 테니까.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3월 1일부터 4월까지 계속됐던 3·1운동은 안타깝게도 실패했다. 당황한 일제는 더욱 강경하고 무지막지한 탄압을 가했다. 헌병과 경찰, 완전무장한 2개 사단이 전국적으로 진행된 3·1운동을 짓밟았다. 압도적인 무력 앞에 시위자들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물론 그 외에도 실패의 이유는 더 있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족 대표의 수상한(?) 태도는 말할 것도 없고, 당시의 엘리트 계층에 팽배해 있던 비현실적 낙관주의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에도 이것이 조선의 독립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고 착각했던 점(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의 독립과는 무관)은 아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의 독립 문제는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을 것이다. 유럽의 열강이나 미국이 조선의 독립을 지지해 일본의 심기를 건드릴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 않다. 설령 독립이 주어진다 하더라도, 우리는 독립에 의해서 이득을 볼 준비를 갖추지 못하였다.


- 윤치호,『윤치호 일기』-


(친일파로 규정된) 윤치호는 당시 3·1운동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그가 내세운 '자치능력결여론'은 그의 친일 행각을 암시하는 것이긴 하지만, '조선의 독립 문제가 파리강화회의에 상정될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그의 정세 분석만큼은 정확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3·1운동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일제는 3·1운동을 계기로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을 '문화 통치'로 전환한다. 또, 3·1운동은 해외 각지에 퍼져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결속시키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다만, 제암리 학살 사건, 천안 아우내 만세운동, 사천 학살 사건, 대구 학살 사건, 합천 학살 사건, 남원 학살 사건 등 우리가 기억조차 못하는 수많은 죽음들이 가슴 아플 뿐이다.


- <국제신문>에서 발췌 - 


제95주년 3·1절을 맞이한 오늘. 사정이 조금은 나아졌을까? '삼점일절'의 충격은 더 이상 없는 것일까?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면서 이런 일은 상당히 줄어들 것이다. 물론 수능에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기 때문에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자발적인 관심이 생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진 않기로 하자. 그리고 학생들만 탓한 문제도 아니다. 서경덕 교수는 "가장 큰 문제는 무관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가 먼저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우리 스스로도 역사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져왔는지 되돌아볼 일이다.


보수단체, 3·1절에 교학사 역사교과서 판매 <뉴시스>


역사에 대해 모르는 것도 당연히 문제이지만, 더욱 심각하고 악질적인 문제는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하는 것이리라. 한국사가 수능 필수 과목이 됐지만, 이 틈을 노리고 뉴라이트의 '교학사 교과서'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정부는 대놓고 '교학사 교과서 구하기'에 나섰고, 여당인 새누리당도 뉴라이트 역사관을 옹호하고 나섰다. 잘못된 역사 교육은 차라리 안 하니만 못한 결과를 만든다. 옆나라 일본의 우경화가 좋은 사례이지 않은가?


일본의 아베 총리와 그의 충복들은 하루가 멀다하고 망언을 쏟아내고 있다. 우리 정부는 그때마다 '발끈'하는 듯 하지만, 장기적인 안목에서 역사 왜곡에 대응한다기보다는 국민 눈치보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그럼 점에서 또 하나의 '적대적 공존 관계'가 형성된 셈이다. (적대적 공존 관계가 왜 이리도 많단 말인가!) 우환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3·1절을 맞아 스스로를 보수라고 주장하고 있는 각종 단체들이 '바른역사 독립을 위한 시민대회'를 연다고 한다. '치욕스런 친북자학사관을 떨치고 우리 역사의 독립을 선언'할 예정이라나? 아,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이들의 행태를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삼점일점'의 충격이 편안하게 느껴질 정도다. 제95주년 3·1절은 오늘도 안녕하지 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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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서세원, 이승만 대통령 영화 연출..4년만의 복귀 <스타뉴스>


'이승만 영화' 제작?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11일, 이승만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가 제작될 계획이라는 뉴스가 전해졌다. 자세한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몇 가지 간단한 사실들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간단히 짚어보자면 제작은 애국프로덕션에서 맡았고, 코미디언 출신 영화감독 서세원 씨가 연출을 담당할 것이고, 시나리오는 이미 완성된 상태라고 한다. 또, 13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건국 대통령 이승만 영화 시나리오 심포지엄'을 열고, 영화의 내용 및 주제를 밝힐 예정이라고 알려졌다. 


이제 첫발을 내딛는, 부푼 꿈에 가슴 설렐 영화 관계자들에겐 조금 미안한 이야기를 조금 해야할 것 같다. 불편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잘 되라고 하는 소리니까 말이다. 우선, 영화 제목은 반드시 손질을 하길 바란다. 현재 알려진 바로는 영화 제목이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라는데, 무슨 60, 70년대도 아니고 이런 '구린' 제목으로는 관객에게 100% 외면 당할 것이다. 또 한 가지 지적하자면, 가능하면 '감독'도 바꾸길 바란다. 2004년 '도마 안중근', 2010년 '젓가락'의 실패는 우연이 아니다. 물론 한두 번 실패했다고 해서 다음 번의 도전에도 반드시 실패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감독으로서 갖춰야 할 가장 중요한 기능인 연출의 능력에 관한 문제다. 


기왕 영화를 만들려면 성공을 목표로 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투자자들이 돈이 남아돌아서(그럴 가능성도 있다) 영화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이상, 필자의 조언에 조금은 귀를 기울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두 가지 제안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영화가 흥행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해는 하지 말길 바란다.



- <노컷뉴스>에서 발췌 -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든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인물(캐릭터)이 갖고 있는 힘일 것이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이승만은 영화로 제작할 만큼 매력적인 인물인가? 관객들의 마음을 훔칠 만큼의 흡입력을 가진 인물인가? 굵직하거나 혹은 다채로운 이야깃거리가 풍부한가? 마지막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과 강렬히 '조응(照應)'할 수 있는 교집합이 존재하는가? 


이승만은 충분히 매력적인 인물이다. 이는 필자만의 생각은 아니다. 해방 전후, 조선의 대표적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광복 직후 <매일일보>에서 조사한 '조선을 대표하는 정치인'에서 무려 3위에 올랐을 만큼 대중적 지지를 받고 있었다. 참고로 1위는 여운형, 2위는 김구였다. 여담이지만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암살'을 당했고, 그 배후로 이승만이 지목되고 있을 뿐이다.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만큼 다양한 이야깃거리도 갖고 있다. 다만, 한 가지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것은 '이승만이라는 인물과 현재의 우리가 영화를 통해 만날 이유'다. 이 물음에 제대로 된 대답을 내놓지 못한다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모델로 한 영화 '변호인'과 같은 흥행 대박은 결코 꿈꿀 수 없다. 


앞으로 서세원 감독이 만들어 나갈 '건국대통령 이승만'에는 어떤 이야기가 실려 있을까? 서세원은 '건국대통령 이승만'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일까? 영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려면 아직 긴 시간이 필요한 만큼 그에 앞서,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에 대해서 간단히 소개를 하고자 한다. 


이승만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소개한다. 단독정부를 수립하고 공산화를 저지했다는 것이다. 또,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의 초석을 닦았다고 말한다. 사실 그 외에도 여러가지 주장들이 있지만, 그나마 동의 가능한 것들은 이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남한의 공산화를 저지한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미국' 아닌가? 



- <연합뉴스>에서 발췌 -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은 6·25 전쟁이 발발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쏜살같이 대전으로 도망을 쳤다. 그리고 한강 인도교를 폭파한다. 다리에는 피난민들로 가득차 있었고(약 4000년여 명으로 추정), 이들은 예상도 하지 못했던 죽음을 맞아야 했다. (사망자는 약 600~800명으로 추정) 미처 다리를 건너오지 못한 사람들은 의지와는 관계없이 납북될 수밖에 없었다. 놀랍게도 당시 이승만은 '아군이 의정부를 탈환했으니 서울시민은 안심하라'는 기만적인 라디오 방송을 하며 국민을 속였다. 



- <노컷뉴스>에서 발췌 - 


기왕 말이 나왔으니 6·25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자. 많이 알려진 대표적인 사건으로 경남 거창에서 양민 500명이 공산군으로 오인돼 국군에 의해 사살당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년 2월 11일)과 1·4 후퇴 기간동안 무려 약 30만 명이 사망했던 '국민 방위군 사건'(1950년 12월 ~ 1951년 3월)이 있다. 국민 방위군 사건은 고급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품을 빼돌린 권력형 비리로 인해 발생했는데, 이 때문에 애꿎은 장정들이 혹독한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갔다. 


이승만 정권, 다시 말해 제1공화국(1948년~1960년)에 대해서 좀 이야기 해보도록 하자. 이승만은 두 번의 '개헌'을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발췌개헌(1952년 7월 4일)과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1954년 11월 29일)이 그것이다. 6·25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건만, 이승만에게 중요한 것은 오로지 자신의 권력이었던 모양이다. 당시 대통령은 '간선제(국회의원들이 선출)'였는데, 이승만은 자신의 당선 가능성이 낮다는 것을 눈치챘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이승만은 강제력을 동원해 대통령 간선제를 직선제로 바꿔버린다. 


1954년에는 더 어이없는 개헌을 추진하는데, 바로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 제한을 철폐한다는 것이었다. '장기 집권'을 꿈꿨던 것인데, 개헌 내용이 참 좀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는 개헌안이 통과하려면 2/3의 찬성(재적인원 203명 중 2/3에 해당하는 135.333명 넘는 136명)을 얻어야 하는데, 그에 한 명 못 미치는 135명의 찬성밖에 얻지 못했다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승만이 이 문제를 아주 간단히 해결해 버린다. 소수점 이하의 숫자는 1인이 되지 못하여 인격으로 취급할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해서 135명이 된다는 괴상한 논리로 자신의 '장기 집권' 플랜을 밀어붙인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그 외에도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았던 진보당의 조봉암을 간첩죄로 사형을 시켰고, 급기야 1960년에는 자신의 권력욕을 주체하지 못하며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말았다. 당시 <동아일보>는 3·15 부정선거에 대한 기사를 실었는데, 여기에는 '4할 사전 투표', 3인조 또는 5인조 공개 투표', '완장 부대 활용', '야당 참관인 축출' 등의 내용이 실려 있었다. 3·15 부정선거는 당시 민중들의 마지노선이었던 모양이다. 부정 선거를 규탄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됐고, 마산에서 최루탄에 맞아 죽은 김주열의 시체가 바다 위로 떠오르면서 4·19 혁명이 벌어졌다.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필자가 알고 있는 '건국대통령 이승만'이다. 너무 야박한 것 아니냐고? 독립운동가로 활약하던 시절의 이승만은 그래도 존경받을 만한 인물이지 않냐고? 그럼 몇 가지 사실에 대해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1908년, 독립운동가인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오클랜드에서 친일 미국 언론가 D.W. 스티븐스를 저격해 사살했다. 두 사람은 재판에 회부됐는데, 재판의 진행을 위해 통역을 할 사람이 필요했다. 아, 우리에겐 최고의 학벌을 자랑하는 엘리트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있지 않았던가? 당연히 큰 기대를 갖고 이승만에게 통역을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기독교인으로서 살인자를 변호할 수 없다"였다. 물론 '기독교인'을 명목으로 내세운 건 거짓말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성공을 꿈꾸었던 이승만에게 유력한 백인 언론인을 사살한 장인환과 정명운은 부담스러운 짐이었던 것이다. 


1919년 2월, 이승만은 미국 정부에 '위임 통치안'을 제출한다. 그 안에는 국제 연맹이 대한민국을 위임 통치해 줄 것을 건의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단체들은 반발하고 나섰다. 우리의 이승만은 어떻게 했을까? 비판에 직면한 그는 미국으로 떠나 버렸다. 결국 1923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고 앞으로의 독립운동에 대한 격렬한 논의가 펼쳐진다. 각기 다른 의견들의 충돌로 국민대표회의는 결렬되지만 한 가지 성과는 거뒀다. 바로 이승만의 탄핵인데, 임시 대통령 이승만은 탄액안 심판위원들에 의해 1925년 3월 정식으로 파면된다. 

 

미국에서 이승만이 박용만을 견제하는 등 탐욕을 부리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탓에 독립운동 자체를 파국으로 몰고갔던 이야기는 지면상 생략하기로 한다. 다음에 또 기회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 출처 : 구글 이미지 검색 - 


과연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의 이야기가 서세원이 연출할 '건국대통령 이승만'에도 나올까? 물론 영화는 '전기 영화'가 아닌 이상, 특정한 시기, 특정한 모습을 집중적으로 부각시켜 보여주기 때문에 꼭 위의 내용들이 영화에 반영되리라는 법은 없다. 따라서 서세원을 비롯한 이승만 예찬론자들이 영화 '건국대통령 이승만'에서 위의 내용들을 제외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어떤 이승만을 그려내든 그건 그들의 마음이다. 


다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은 없길 바랄 뿐이다. 관점의 차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서 '예찬'을 갈무리하길 기대해본다. 그리고 기왕 이승만과 관련된 영화가 나온다고 하니, 우리들도 이승만에 대해 미리 예습을 해보는 건 어떨까? 필자가 알고 있는 이승만에 대한 이야기(일부분이긴 하지만)를 풀어놓았으니, 이번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의 차례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승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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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라이트는 김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한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뉴라이트의 주장에 거세게 반발하며, 망언이라고 되받아친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들도 같은 생각을 할 것이라고 짐작한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준비운동부터 시작해보자. 그래야 큰 부상을 방지할 수 있으니까. 우선,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에 대한 사전적 정의부터 살펴보자.


'테러리즘(terrorism)'의 사전적 의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조직적ㆍ집단적으로 행하는 폭력 행위. 또는 그것을 이용하여 정치적인 목적을 이루려는 사상이나 주의(네이버 국어사전)'이다. 자연스럽게도 '테러리스트'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하여 계획적으로 폭력을 쓰는 사람' 쯤으로 정의된다. 


이처럼 '테러리즘'이라는 말은 가치중립적인 용어이다. 물론 테러리즘의 정의 속에 '폭력 행위'라는 말이 눈에 띄는 건 사실이다. '폭력'이라는 단어에서 일종의 공포심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면, 이재명은 『오늘의 세계 분쟁』에서 '테러'의 역사적 뿌리를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그는 테러가 처음부터 부정적인 뜻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긍정적인 뜻이 강했다고 말한다. 18세기 말 프랑스의 '테러의 체제'가 프랑스 혁명 뒤 과도기의 무정부적 사회 혼란을 수습하고 질서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로베스피에르는 "테러는 정의이자 덕이다"고 말하기도 했다고 한다. 




- 윤봉길 의사가 한인애국단에 입단할 때 쓴 선언문과 함께 찍은 사진 -



간단히 질문해보자. '테러리즘'은 나쁜 것인가? '테러리스트'는 나쁜 사람인가? 우리는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반대로 이런 질문을 해보는 건 어떨까? 뉴라이트가 김구를 테러리스트라고 규정했을 때, 그 규정에 대한 당신의 반응은 무엇인가? 만약 저 민족주의 사학자들처럼 불쾌하고, 모욕적이고, 심지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면 당신은 '테러리즘'을 '나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논의를 좀더 확장해보자. 정말 '테러리즘'은 나쁜 것이고, '테러리스트'들은 나쁜 사람들일까? 흔히 테러는 '약자의 무기'라고 일컬어진다. '무장력에서 압도적인 국가 조직(정규군과 경찰)에 맞서려면 테러는 불가피한 폭력'일 수 있다. 저항을 위한 최후의 수단 말이다. 약소국의 처지에서 생각해보자. 과연 '테러'를 비난할 수 있을까? '테러'는 비난받아야 하는 행위일까? 장 폴 사르트르는 프란츠 파농의 『대지의 저주 받은 자들』 서문에서 "외세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식민지인들이 휘두르는 폭력은 정당하다"고 쓰지 않았던가! 약소국의 독립투사들은 자신들이 '테러리스트'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한윤형은 『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조선의 혁명가 김산의 생애를 다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보면 김산은 자신의 입으로 김구, 윤봉길, 이봉창 등 의열단 인사들을 '테러리스트'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인은 극동 전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테러리스트로 알려져 있었기에, 중국인은 일본인에 대한 테러를 하고 싶으면 대개 조신인 중에서 자원자를 물색한다고도 했'다는 것이다. 신채호는 「조선혁명선언」에서 '폭력은 우리 혁명의 유일 무기이다. 우리는 민중 속에 가서 민중과 손을 잡고 끊임없는 폭력 - 암살 · 파괴 · 폭동 - 으로써, 강도 일본의 통치를 타도하고…' 라고 외치고 있다. 한윤형은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독립운동가의 관점에서 볼 때 테러리스트가 자랑스러운 자기규정이었다면, 그 후손인 우리는 왜 그 독립운동가가 테러리스트라고 불리는 것을 단연코 반대해야 하는 걸까?




- 1920년대의 의열단원들 - 



여기서 민족사학자들이 뉴라이트의 '김구는 테러리스트'라는 규정에 대해 어떻게 반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이만열 숙명여자대학교 명예교수는 '의열투쟁과 테러의 차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테러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는 무고한 양민의 희생도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반인도주의적이라면, 의열투쟁은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파괴하는 제국주의를 표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인도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은 상당히 자의적이다. 중동이나 아프리카의 그 어떤 '테러리스트'에게 가서 물어봐도 그들은 자신들이 인류의 자유와 정의를 파괴하는 제국주의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의열투쟁과 테러를 구분짓는 것이 그 내용보다는 그것을 판단하는 주체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원로 학자 신용하는 '일본은 윤봉길의 투탄을 만주에서 조선 독립을 위한 편의대원의 공격과 동일한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시라가와가 임시정부의 특공전투로 전사한 것으로 처리했다.'면서 '이것을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 '테러'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되묻는다. 전투 중에 적군을 사살한 것이므로 테러라고 할 수 없다는 말이다. 한윤형은 이러한 신용하의 주장을 '분열적인 의식을 명료히 드러내준'다고 풀이하면서, '여기서 우리는 독립운동가들의 무장투쟁을 '전투'로 볼 것인지 '테러'로 볼 것인지를 가늠하는 가장 큰 잣대가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임을 발견한'다며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 행위의 정당성의 근거를 일본인의 평가에서 얻어야 하느냐'고 따져 묻는다. 


여기서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가 보다 분명해진다. 한윤형의 말처럼 '설령 그것이 테러라고 한들 무엇인 문제란 말인가?'라고 반문하는 것이다. 앞서 이만열의 주장의 주요한 포인트인 '무고한 양민의 희생'은 애초에 테러리즘의 정의에 해당하지 않는다. (불특정 다수의 민간인을 노리는 현대의 테러리즘을 설명하기 위해 '슈퍼 테러리즘'이라는 말이 새롭게 만들어졌다는 것에 주목하자.) 그러한 정의를 논외로 하더라도, 의열단의 '7가살'의 첫번째 '일본인'이었다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 맨 앞줄 좌로부터 (박찬익, 조완구, 김구, 이시영, 차이석 두번째 줄 맨 왼쪽 성주식, 오른쪽 김붕준 맨 뒷줄 왼쪽부터 조성환, 조소앙, 이청천, 이범석, 이름 미상 - 



정리를 해보자. 앞서 필자는 '테러리즘'과 '테러리스트'라는 용어가 가치중립적인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이는 우리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제국주의적 시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방증한다.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그래서 테러를 '나쁜 것'이라고 규정하는 서구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수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폭력은 나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미국 등의 국가 폭력에 대해서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까?) 하지만 그렇게 주장하려면, 우리는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의 폭력에도 같은 잣대를 내밀어야만 한다. 참 곤혹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이만열처럼 '인도적이냐 비인도적이냐'로 그것을 구분한다고 해도 역시 늪에 빠지게 된다. 


'김구는 테러리스트이다'는 뉴라이트의 규정은 명쾌하고 간단하다. 우리는 그 규정에 대해 '테러리스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한번 발끈하고, 뉴라이트의 검은 속내 때문에 또 다시 발끈한다. 그래서 무조건 '반대'입장을 취하고 보지만, 애석하게도 논리적인 모순에 빠지고 만다. 차라리 "그게 뭐 어때서?"라고 반문하는 것이 김구를 비롯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을 옹호하는 방법은 아닐까? 


김구를 비롯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은 저 악랄한 일제의 식민주의에 맞서 싸웠다.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뭐든지 썼다. 최후의 수단이었던 폭력과 테러조차 서슴지 않았다. 김산의 증언처럼 오히려 그들은 '테러리스트'라는 규정을 자랑스럽게 받아들였다. 우리가 '폭력'이라는 것 자체에 대해 반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라를 빼앗긴 사람들의 입장에서, 저 악질적이고 폭압적인 상대를 대상으로 무력을 사용했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평가는 달리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김구와 임시정부를 깎아내리려고 안달이 난 뉴라이트의 속내(뉴라이트 역시 제국주의적 시각을 차용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가 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우리의 독립운동가들을 '테러리스트'라라고 부르는 것이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오히려 일제와 목숨을 걸고 싸운 민족의 자랑스러운 테러리스트가 아닌가? 


뉴라이트의 김구와 임시정부 깎아내리기에 대응하는 것과 '김구는 테러리스트'라는 저들의 주장에 다른 논리적 근거로서 수긍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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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필자는 이 글에서 '박정희의 정체성'과 관련된 두 가지 질문을 던지고자 한다. 우선 질문지부터 확인해보자.

 

 

 

 

1. 박정희는 독재자인가?

2. 박정희는 친일파인가?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간단하게 나온다. 박정희는 독재자가 맞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소장은 군사 구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했다. 이후 박정희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철저히 억압했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수많은 간첩 조작 사건 등을 통해 법도 무시한 채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고문을 당했다. 1972년 10월 17일에는 유신헌법을 선포(12월 27일 공포)하고 장기집권, 사실상의 영구집권을 꿈꿨다.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 침해, 권력구조상 대통령의 권한을 무제한 허용함으로써 독재를 뒷받침하는 것이었다.

 

쉽게 답을 내릴 수 있는 첫 번째 질문과 달리,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두 번째 질문은 많은 생각을 요한다.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의 생각도 '그렇다'와 '아니다'로 극명하게 나뉠 것이다. 주장은 쉽다. 하지만 근거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그 누구도 설득할 수 없다. 박정희가 친일파라는 근거는 무엇일까?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1945년 3월 박정희의 형이 구미면사무소에 제출한 '임시육군군인(군속)계'. 박정희 이름이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으로 기록돼 있다. ⓒ정운현 전 친일반민족행위자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근거(?)'를 떠올렸을 것이다. 박정희는 일본군에 자원했고, 나이 제한에 걸려 군관학교 입교가 거절되자 '혈서'를 써서 바쳤으며, 만주군 출신으로 대통령이 되었다. 물론 박정희가 '다카키 마사오', '오카모토 미노루'로 창씨 개명을 했다는 사실도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요한 레퍼토리다.

 

과연 이러한 '근거'들로 박정희를 친일파라고 정의할 수 있는 걸까? 사실 '친일파'에 대한 정의는 분명하지 않다. 일반적으로 친일파라는 용어가 '일본 체제에 협력하고 부역'했던 이들을 총칭하는 의미로 쓰이고 있지만 그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기준'으로 '친일파'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자의적인 성격이 짙다.

 

물론 나름대로 공식적인 기준도 있다. 1948년 10월 23일,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처벌하기 위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됐다. 이승만이 친일파 처벌에 의지가 있었는지는 차치하고,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 처벌법'을 제정했다. 반민족행위 처벌법의 기본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일합병에 적극 협력한 자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에 처하고, 그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거나 제국의회(帝國議會) 의원이 되었거나 독립운동가를 살상·박해한 자는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에 처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이밖에 악질적인 반민족행위를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거나 15년 이하 동안 공민권을 제한하고 재산의 일부 또는 전부를 몰수한다.

 

2005년 5월에는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됐다. 친일진상규명법에 따라 친일반민족행위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설치된 대통령 소속기관이었다. 친일규명위의 주요 업무는 친일반민족행위 조사대상자의 선정, 조사대상자가 행한 친일반민족행위의 조사, 친일반민족행위와 관련된 국내외 자료의 수집·분석 등이었다. 문제는 친일규명위의 조사 결과 박정희가 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 <오마이뉴스>에서 발췌, 박정희의 만주군관학교 혈서 지원 보도 기사 ( < 만주신문 > 1939.3.31)"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 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 (혈서와 함께 보낸 편지 내용 일부) ⓒ 민족문제연구소 자료실 -

 

 

정운현은『친일파는 살아있다』에서 박정희 친일의 핵심 인물로 거론되는 이유들을 밝힌 다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그를 최종적으로 반민족행위지로 선정하지 않았다."면서 당시의 상황을 설명한다. "당초 친일규명위는 특별법 제2조 10항(일본제국주의 군대의 소위 이상의 장교로서 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에 의거해 그에 대해서도 조사 작업을 벌였다. 해방 당시 그의 계급이 중위였으니 '소위 이상의 장교'에 해당된 것이다. 그러나 2009년에 공개된 보고서에는 그의 이름이 빠져 있다." 물론 이에 대해 '정치적 타협론'을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운현조차도 "일각에서는 정치적 타협이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친일규명위의 결정이 납득이 가는 면도 없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납득이 간다는 것일까? 정운현은 "특별법 제2조 10항을 만족시키려면 박정희의 '침략 전쟁에 적극 협력한 행위'를 입증해야만 한다. 위원회는 중국 현지 조사를 포함해 다각적인 조사 활동을 벌였으나 '민주군 보병 8단 근무' 이상의 구체적인 자료는 입수하지 못했다."며 박정희가 특별법 제2조 10항을 만족시키지 못했음을 설명한다. 물론 "'혈서' 관련 신문자료가 발굴될 당시 위원회는 이미 업무처리를 마치고 보고서를 인쇄하고 있었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혈서가 '적극 협력'을 증명할 수 있을지는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결과적으로 박정희는 반민족행위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박정희의 해방 전 경력만을 강조할 때, 우리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친일규명위는 해방 전 박정희의 경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역사학자 한홍구는 박정희의 친일파로서의 규정을 해방 전 박정희의 행위에서 찾지 않는다. 그의 주장을 들어보자.

 

"박정희의 친일이 문제되는 것은 해방 전의 그의 경력 때문만은 아니다. 해방 전 박정희의 친일경력이란 만주군관학교와 일본육사를 나와 1944년 7월, 만주군 소위로 임관되어 만주군 제5군관구 예하의 만군 보병 8단에 근무했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정도의 경력은 해방 직후 반민특위를 결성할 때나 각 정치단체에서 내건 악질 친일파의 처단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 '경미'한 이다. 박정희가 관동군 정보장교로 독립군 토벌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당시 만주에서 활동한 조선인 독립군부대나 공산유격대가 없었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없다. 그럼에도 박정희가 한국 현대사의 대표적 친일파로 꼽히는 까닭은 그가 가장 철저한 일본식 황국신민화 교육과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고, 대통령이 된 뒤에 일본 군국주의의 발전 모델, 특히 만주국에서의 경험에 따라 한국을 병영국가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박정희를 친일파로 규정하는 문제는 생각보다 간단하지 않다. '친일파' 혹은 '반민족행위자'라는 용어에 대한 정의, 다시 말해서 '일제에 협력하거나 부역'한 것에 대한 기준을 세우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다. 또 한 가지 생각해봐야 할 것은 반민족특위가 구성됐던 당시보다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 합당한지에 대한 판단이다. '박정희는 친일파인가?'라는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지나치게 그의 해방 전 행위에 대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돌이켜 보야 한다. 오히려 한홍구 교수의 지적처럼 해방 이후의 박정희의 모습에서 '친일파'를 떠올리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것은 아닐까?

 

한윤형은 『뉴라이트 사용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해방 이후 법적인 처벌 대상이 되어야 했던 친일파와, 역사적 관점에서 비평(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했던 친일파의 괴리 말이다. 전자를 기준으로 두고 얘기한다면 '박정희는 통념과는 달리 법적 판단으로 처벌의 대상이 되는 친일파는 아니다'라는 식으로 얘기해야 할 것이다. 반면 후자를 기준으로 두고 얘기한다면 다시 한 번 그 개념의 모호함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친일파의 개념을 그렇게 모호한 방식으로 확장해놓고는 그것이 법적 판단의 잣대가 된다는 식으로 착각에 빠진 것은 아닐까?"

 

뒤끝이 참 쓰지만, 곱씹어 봐야 할 말이다. 무논리로 일관한 채, 이미 봉쇄된 근거들을 통해 '박정희는 친일파'라고 녹음기처럼 외치는 것으로 '친일파 처단'을 이뤄낼 수 있을까? 필자는 그런 '반전'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논리로 싸워 이겨야만 한다. 그것이 유일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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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