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고 화창한 날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비가 조금 내려도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가볍게 뒤집어버리는 강풍이 불어닥쳤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웠다. 부디 다음 날 아침에는 잠잠해지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가 커튼부터 젖혔다. 물기를 머금은 자동차 바퀴소리가 불길했지만, 도로 위에 남아있는 빗물이길 바랐다. 


아, 이럴수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고집스러웠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만약 여행 일정에 여유가 (엄청) 많았다면, 인천 공항에서 사왔던 책을 들고 카페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독서를 하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언제나 여행자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도 흥미를 잃었다. 고작 1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의 날씨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이 빠졌다. 빈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일정을 짤 것인가, 비가 오더라도 브라티슬라바로 갈 것인가.. 순간 번뜩하고 제3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참에 아예 먼 곳으로 가볼까? 


부다페스트 역 내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비를 피할 수 있을 테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 날씨가 바뀌거나 이동하는 시간 동안 비구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당장 구글 지도를 보면서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음, 음, 음.. 여기 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그 곳. 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다. 


부다페스트 역 외부 



"오길 정말 잘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던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여행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만들어 낸 풍경들이 경탄스러웠다. 놀라지 마시라. 하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졌다. 동유럽의 새파란 하늘을 만끽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진화했고,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잠시 쾌적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다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계획은 이랬다. 우선,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나우 강(Donau, 독일 남부에서 시작된 이 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에 이르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으로 이어진다)과 강변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등 주변(페스트 지역) 풍경을 감상하고, '부다 왕궁(Budavári Palota)'에 올라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ösök Tere)'를 비롯해 도심을 전반적으로 둘러보고, 저녁 무렵 '아경'을 보기 위해 다시 '부다 왕궁'에 오르기로 했다. 동선으로 보면 중복이라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도나우 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낮과 밤, 중복으로 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날씨가 좋았다. 또, 부다 왕궁의 낮과 밤도 궁금했다. 인공적인 빛이 발산하는 아름다움도 매력적이지만, '햇빛'이라는 천연 조명의 깊은 맛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국회의사당


Calvinist Church


2호선을 타고 Keleti pályadvar 역을 출발해 Batthyány tér 역까지 이동했다. 지상으로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빛났다. "이야, 진짜 오길 잘했다" 정말이지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걸으며 부다페스트의 낭만에 빠져들었다. 마냥 걷기만 해도 행복감이 솟구쳤다. 계획에 없던 즉흥성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자 쾌감은 더욱 커졌다. 


파리를 여행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트램(Tram)이 도심 외각에서만 운행을 하고 있어 굳이 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체코 · 드레스덴 · 빈에서는 그 활용도가 훨씬 커졌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버스는 노선이 복잡해 이용하기 어려운데, 트램은 훨씬 간단했다. 또, 애초부터 24시간 권(1,650 포린트 = 약 6,800원)을 끊어두었으니 대중교통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트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건 두 다리뿐,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19번과 41번 중 빨리 오는 트램을 타고 Batthyány tér 역과 부다 왕궁을 왕복했고,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Deák Ferenc tér 역까지 이동한 후 1호선으로 환승해 Hösök Tere 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들이 점차 익숙해는 게 느껴졌다. 여행지의 대중교통을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랄까.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회쇠크 광장)은 헝가리의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인데, 그 좌우에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또 다른 미술관인 뮈처르노크가 위치해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의 기념비는 그 높이가 36m에 달하고, 헝가리 민족의 수호신인 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기념비 아래에 아르파드(Árpád, 845년 경-907년 경)를 비롯한 헝가리 민족 초기 부족장 7명의 기마상이 있고, 기념비 양 옆으로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 14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미욱한 중생이 헝가리의 역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저 푸르스름한 동상과 한없이 푸르른 하늘의 '깔맞춤'에 감탄을 한 후 서둘러 뒤편의 공원으로 이동할 밖에.


버이더후녀드 성






영어로 'City Park'라는 뜻의 시립 공원(Városliget)은 제법 규모가 컸다. 공원 내부에 동물원과 세체니 온천, 버이더후녀드 성(Vajdahunyad vára) 등이 있었고, 호수와 인공 분수 주변에는 휴식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시민들이 찾고, 많은 여행객들이 머무는 장소답게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호수의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담뿍 맞으며 여유를 즐겼다.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다. 지도를 보면서 다음 동선을 머릿 속으로 그렸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선,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부다페스트만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Corvin Mozi'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도 가보기로 하자. 








도심의 중앙부는 활력이 넘쳤다. '동유럽', 특히 '헝가리'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노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패션 거리의 'C&A'라는 의류점 앞에서 만난 '브레이킹 댄스'는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곳은 젊고, 힘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다만, 영화관은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예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어 멀티플렉스가 휩쓸기 전의 영화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람쥐마냥 재빠르게 돌아다녔지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입장 시간이 지난 뒤라 건물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됐다.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를 만나러 갈 타이밍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두 다리는 한껏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녹초가 된 두 다리도 살려내는 법이다.


아래의 사진은 부다 왕궁에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선물이다. 비록 부족한 사진이지만, 마음껏 감상하길.. 마음껏 빠져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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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10시 52분에 프라하를 출발한 기차가 14시 50분이 돼서야 빈(Wien)에 도착했다. 거의 꼬박 4시간이 걸렸다. 체코는 평지와 산지의 비율이 7:3 정도인데, 기차로 이동하는 내내 푸른 초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간혹 건물들이 눈에 띠긴 했지만, 워낙 간헐적이라 '밋밋해진' 풍경들에 지루해져 어느덧 잠이 쏟아졌다.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한 것이다. 어떻게 유럽의 풍경들이 밋밋하고 지루할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도착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중간중간 몇 번의 스트레칭을 거듭한 끝에 결국 국경을 넘고 빈에 당도하게 됐다. 맙소사, 오스트리아라니, 그것도 빈이라니! 빈 중앙역 (Wien Hauptbahnhof)의 근처(도보로 5분)에 있는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할 채비를 했다. 우선, 숙소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부터 가 볼 예정이다.





1. 벨베데레 궁전

- 입장 시간 : 10시부터 18시까지 

- 입장료 : 14유로


벨데베레 궁전은 상궁(Oberes)과 하궁(Unteress)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무래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상궁 쪽이 보다 핫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숙소가 인근에 있어서 산책 겸 총 3번 방문했는데, 역시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이 잦았다. 패키지 여행의 필수 코스로 지정돼 있는 듯 했다. 도심 속에 있는 궁전이라는 점에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Jardin du Luxembourg)'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I(1901)」, 「키스(1907-8)」

에곤 실레, 「포옹(1917)」, 「가족(1908)」

자크 루이 다비드,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1908)」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들판(1890)」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 정원길(1902)」


벨베데레 상궁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은 매우 훌륭한 편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실부터 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유럽의 어느 미술관을 가더라도 한 점씩 포함돼 있기 마련인 고흐나 모네의 그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기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아깝지 않은가. 





아쉬운 점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술관을 찾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관람에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면 관람객 친화적 분위기라고 할까. 접근을 불허하는 라인을 만들어 놓지도 않았고, '조용히 하라'는 암묵적 억압도 없었다. 또, 사진 촬영도 허용됐다. (다만, 플래시와 셀카폰은 금지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그림'과 마주했고, 대화를 나눴으며, 그 순간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벨베데레 상궁은 사진 촬영을 불허했고, 이 때문에 재미있는(?) 장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금지된 욕망은 그만큼 유혹적이라 했던가. '카메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휴대전화가 '카메라'를 대신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드는데, 일일이 그들이 사진을 찍는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당연히 틈을 봐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띠었다. 


그 비양심적인(?) 행동들은 대체로 어쩔 수 없이 용납됐지만, 구스타프 클림프 전시실에서만큼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 곳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은 잔뜩 날을 세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로지 사진을 찍으려는 행동을 취하는 듯한 관람객들을 예의주시했다. 앞서 몰래 사진을 찍어왔던 사람들은 이번에도 같은 기술을 시전하려 했지만, '감시'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깨갱'하는 모습이 왠지 통쾌했다.






2. 성 슈테판 대성당


성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상징이자 심장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하늘 높이 뽀죡하게 솟아 있는 첨탑이 '내가 성 슈테판 대성당이다'라고 외치는 듯 하다. 1137년에 착공해 1160년에 완공됐는데,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꾸며진 지붕 타일은 빛을 받으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데, 그 압도적인 외관은 보는 이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덩달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당 내부는 무료로 구경이 가능한데,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입장료(남탑 : 4.5유로, 북탑 : 5.5유로)를 내야 한다. 북쪽 탑에 오르면 형형색색의 지붕 타일을 볼 수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 주변에는 케른트너 거리, 그라벤 거리 등 쇼핑 거리가 펼쳐져 시선을 끄는데, 모차르트하우스(Mozarthaus), 페터 성당(Peterskirche), 로스하우스(Loos haus) 등 관광 명소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에서도 그랬지만,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도 알 수 없는 위안을 얻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휴식을 취하면서 얻은 안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인근의 슈니첼(Schnitzel)로 유명한 '피그뮐러(Figlmueller)'라는 식당에서 한껏 음식을 섭취한 다음이라 다소 '배부른' 안식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도 유서 깊은 종교 시설이 주는 위안은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예의를 갖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성당 안을 구석구석 누볐고, 내부를 가득 채운 오르간 소리는 속세로부터 온 사람들의 다소 시끄러울 수 있는 소음을 완벽히 제압한 채 울려 퍼졌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조용히 그 공간을 느끼고, 그 공간에 나 자신을 맡겼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위로였고, 여전히 풍성한 채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성당을 나왔을 때, 갑자기 쏟아진 비에도 짜증이 나지 않았던 이유가?








3. 미술사 박물관 

- 입장 시간 : 10시부터 18시까지 

- 입장료 : 15유로


사실 빈(Wien)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모로 충분하지 않았다. 우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게다가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성 슈테판 대성당을 나서던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 날까지 계속해서 쏟아졌다. 아침에 숙소의 창문을 여는 순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에 따라 여행은 계속될 수밖에. 


사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빗발이 사납게 날렸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불어닥쳤다. 우산은 걸핏하면 뒤집어졌고, 옷은 마를 틈이 없었다. 사실 넉넉히 생각하면, 그 또한 여행이다. 언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몸을 가누기 힘든 바람을 맞아내며 걸어가는 경험을 해보겠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도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잠시나마 그 상황을 즐기게 만들기도 했다. 나도 질러볼 걸 그랬나?


'미술사 박물관'이라는 도피처가 있었기에 '반나절'은 어찌 보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궂은 날씨는 여행에 있어 결코 반가운 조건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은 10시부터 개관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바람이 몰아쳐 관람객들이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눈빛 공세를 보냈지만 얄짤 없었다. 미술관 직원들은 정확히 10시가 되어서야 문을 열어주었다.


자꾸 파리와 비교를 하게 되는데, '미술사 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필적하는 컬렉션을 갖췄다. 괜히 유럽 3대 미술관(또 다른 한 곳은 '마드리드의 프라도'이다.)의 하나로 꼽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가 16세기 이후 유럽의 상당 영역을 지배하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과거 프랑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라파엘로, 「초원 위의 성모(1505-6)」

아르침볼도, 「여름(1563)」

브뢰헬, 「바벨탑(1563)」, 「농가의 결혼식(1568)」

벨라스케스,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초상화 시리즈(1653-4/1659)」

렘브란트, 「자화상(1652)」

루벤스, 「1636-1640)」


0.5층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조각, 그리고 이집트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1층에는 유럽 각국의 주요 회화들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동전과 메달 등이 있다. 아무래도 관심은 1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루벤스 등 거장들의 그림들도 심장을 벌렁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브뢰헬 컬렉션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설렘을 안겨줬다.


특히 인간의 오만함을 담아낸 「바벨탑」은 워낙 좋아하던 그림이라 실제로 봤을 때의 감격스러움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책이나 컴퓨터를 통해서만 봤던 작품을 현실에서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역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이 머물렀다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워낙 방대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어서 한 바퀴를 둘러보는 데 진이 빠질 정도였는데, 4시간의 관람에도 마지막까지 브뢰헬 컬렉션을 한번 더 둘러보고 퇴장했다. 









+ 링 도로의 야경


그밖에도 왕궁(Hofburg), 자연사 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 무제움콰르티에 빈(MuseumsQuartier Wien), 레오폴트 박물관(Leopold Museum), 무목(mumok), 제체시온(Secession) 등 빈을 '예술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가 되는 명소가 수두룩하다. 또, 트램을 타고 링 도로를 이동하며 야경을 즐기는 것도 잊지 말자. 물론 낮에 링 도로를 돌며 <비포 선라이즈> 속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낭만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국회의사당, 시청사, 빈 대학, 포티프 성당을 지나 도나우 강을 따라가는 트램에 몸을 맡기고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번 왕복을 할 필요가 있다. 주요 스팟에 내려 야경을 감상하고, 다음 도착하는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식으로 즐기는 것도 좋다. 그러기 위해선 24시간 권(혹은 48시간 권이나 72시간 권)을 구입해 활용하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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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활자'를 통해 묘사된 '곳'이나 '것'을 '상상' 속에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만나 '실체적'으로 '경험'하는 것. 여행이 주는 매력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와 같은 상상과 기대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소설 속에 등장했던 장소, 예를 들면 도시나 마을, 더 세밀하게는 특정한 거리 속에 '나'를 두는 건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굳이 활자가 아니더라도 좋다. 영화나 다큐멘터리, 혹은 누군가의 여행 사진 속에서 본 '장면'들에 나를 대입하는 일은 어떠한가. 쇼핑의 도시 홍콩의 '하버시티'를 둘러본다거나,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청와대의 거울의 방이 아니다)에서 그 호화로움을 만끽하고, 프라하 성에서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 시내를 바라보며 커피(스타벅스가 있다)를 한잔 마시는 건 어떠한가. 


츠빙거 궁전


슈탈호프의 벽화 '군주의 행렬'


아무리 정교한 묘사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영상'과 '사진'이라 할지라도 '실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TV 속 먹방에서는 그리 맛있게 '연출'됐던 음식들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맛을 선사하지 못하는 경험이 허다하지 않던가. 그 경험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대상을 '내'가 실제로 느낀다는 게 중요하다. 그 자체로 소중하다. 또, 그래야만 진짜 '내 것'이라 할 만 하다. 


우리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생각보다 훨씬 작은 그림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앎'은 제한적이다. 77cm x 55cm라는 설명을 보고서 그 크기를 짐작해 보지만, 직접 루브르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그 압도적인 크기에 짓눌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 속을 헤매다가 모나리자」를 마주한 순간의 경험이야말로 진짜 '앎'이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


알베르티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림'으로 넘어왔는데, 드레스덴의 알베르티눔(Albertinum)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서론이 길어졌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레지던츠 궁(Residenzschloss), 츠빙거 궁전(Dresdner Zwinger)에 한참 못 미치겠지만, 드레스덴의 '대표' 박물관(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알베르티눔에 다녀와야 드레스덴을 보고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츠빙거 궁전에도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베르메르의 「편지 읽는 소녀」 등 거장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지만, 알베르티눔이 소장하고 있는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산 위의 십자가」 쪽에 좀더 무게가 실렸다. 무엇보다 알베르티눔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오토 딕스(Otto Dix)'라는 화가의 그림들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웬만한 여행 책자에는 그런 정보가 수록돼 있지 않다.)


댄서 아니터 베르버 사진, 오토 딕스 「댄서 아니타 베르버 초상」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이 실은 역사적 ·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오토 딕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이라는 책을 통해서 였다. 서경식은 그 책에서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라며 '미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미의식이란 마냥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미(美)라고 하고 무엇을 추(醜)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미술 작품들은 기존의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답습할 뿐, 그것이 왜 예쁘고 아름다운지 혹은 그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느껴도 괜찮은지에 대한 '고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못한 한국 근대미술에 대해 서경식은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양한 작가들을 거론하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오토 딕스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했던 오토 딕스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했다. 1915년 9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서부전선의 참호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수년 동안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는데,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들 사이로 난 길을 포복을 하여 벗어나려 애쓰지만 결국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꿈이었다"고 회고했는데, 그 경험을 녹여 낸 그림이 바로 「전쟁 제단화」(1929~1932)이다.


오토 딕스는 그의 전장 일기에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넌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라고 적어 두었는데, 그만큼 그에게 전쟁과 그로 인한 죽음은 중요한 모티프(motif)이자 소재였다. 그래서 오토 딕스의 그림에는 전쟁이 휩쓸고 간 사회의 공포와 혼란, 절망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일견 '추'하다. 




군인이 수녀를 강간하려는 순간을 담기도 하고(「군인과 수녀」), 늙고 지친 모습의 창녀들을 그림으로써(「세 여자」, 「거울 앞에서」, 「뚜쟁이」) 독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도 한다. 또, 성냥팔이를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상이군인의 모습은 전쟁 이후 군인들이 겪고 있는 박탈감을 표현한다. 이러한 그림들 때문에 오토 딕스는 나치 정권에서 탄압을 당한다. 그림이 압수되기도 하고,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토 딕스의 그림은 마주 하기 힘들다. 그의 작품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미의식'을 계속해서 건드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이름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의 그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접하지 않았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드레스덴에 갔다면, 그 도시의 아픔을 느끼기에, 그래서 그 곳을 경험하기에 '오토 딕스'만한 매개가 또 있을까. 


동독 정부는 종전 후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초토화된 드레스덴을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그래서 지금의 드레스덴은 1945년 이후의 드레스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재건된 드레스덴의 역사적 건물들도 찬란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기엔 뭔가 찜찜하다. 드레스덴에 갔다면, 알베르티눔을 찾아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 곳에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오토 딕스가 있기에.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산 위의 십자가 (The Cross in the Mountains, Oil on canvas, 1808)


폴 고갱(Paul Gauguin), 「parau Api」, 1892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Two Men Contemplating the Moon」, 1819~1820


빈센트 반 고흐, 「Still life with Quinces」, 1888~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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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프라하를 훑어본 나에게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첫 번째는 체코의 다른 소도시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가령, 플젠(Plzeň)이나 체스키 크룸로프(Ceský Krumlov) 같은 곳 말이다. 만약 내가 맥주를 좋아했다면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의 본고장인 플젠을 선택했을 테고,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힐링'을 하고 싶었다면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1992년)으로 지정돼 있는 체스키 크룸로프로 발걸음을 옮겼을 것이다. 솔직히 후자는 끌리긴 했다. 


드레스덴 중앙역(Dresden Hauptbahnhof)


하지만 당시의 우선순위는 체코의 다른 소도시가 아니었다. 바로 두 번째 선택지, 인근의 다른 국가(의 분위기)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독일 작센(Sachen) 주의 주도(主都)인 드레스덴(Dresden)은 최적의 장소였는데, 프라하에서 약 2시간 거리(플젠은 1시간, 체스키 크룸로프는 약 3시간)로 당일 코스로 여행하기 딱 좋았다. 교통 수단은 기차든 버스든 별다른 차이가 없다. 편한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 어차피 드레스덴 중앙역(Dresden Hauptbahnhof)까지 버스가 운행되고, 돌아올 때도 중앙역 인근의 버스 정류장을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드레스덴 왕복 버스 티켓


나의 경우에는 오스트리아 빈(Wien)으로 이동할 때 기차를 이용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드레스덴까지는 버스를 타기로 했다. 그 유명한 스튜던트 에이전시(Student Agency) 버스를 이용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했더니 버버스가 1~2시간 간격으로 있었다. 소요 시간은 1시간 55분. 가격은 300코루나(한화로 약 13,800원)였다. 드레스덴 중앙역에서 구시가까지는 도보로 15분~2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 구시가 쪽으로 나 있는 큰 도로를 따라 걸으며 주변의 풍경을 구경하다보면 금세 첫 번째 명소인 크로이츠 교회(Kreuzkirche)가 나타난다.


드레스덴 하면 몇 가지 떠오르는 연관 검색어가 있다. 첫 번째는 나폴레옹(Napoléon)의 드레스덴 전투(Battle of Dresden, 1813. 8. 26~27)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와 카를 필리프 슈바르첸베르크 공(Karl Philipp Fürst zu Schwarzenberg)이 지휘한 오스트리아 · 프로이센 · 러시아 동맹군이 작센 공국의 수도였던 드레스덴의 외곽에서 벌인 전투로, 나폴레옹이 기동성을 앞세워 승리를 거뒀는데, 이는 그가 독일에서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싸움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드레스덴 폭격(bombing of Dresden)이다. 연합군, 정확히는 영국 공군 (RAF) 소속 중폭격기 722대와 미국 육군 항공대 (USAAF) 소속 중폭격기 527대가 1945년 2월 13일부터 사흘 동안 4차례에 걸쳐 드레스덴에 대규모 폭격을 가했다. 소이탄 65만 개와 3,900개의 고폭탄이 투하됐다. 도심은 초토화됐고, 7만 8,000채의 집이 파괴됐다. 폭격 후 시 당국은 공식 보고서를 통해 전체 사망자 수가 약 2만5000명이라 발표했다. '숲속의 사람'이라는 뜻(슬라브 어)의 드레스덴은 철저히 붕괴됐다. 


드레스덴 시의회(City council City of Dresden)


아마 몇 년 전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연관 검색어'가 떠올라야겠지만, 이젠 '드레드센 선언(Dresden Declaration)'이 아마 1순위가 아닐까 싶다. 지금은 탄핵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14년 3월 28일 드레스덴의 공과대학교에서 발표한 대북 3대 제안, 정확히는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구상> 말이다. '드레스덴 선언'이 지금의 엄청난 '유명세'를 타게 된 건, 박 전 대통령이 '읽었던' 드레스덴 연설문이 최순실 소유의 태블릿 PC에서 발견됐고, '수정'한 흔적이 확인됐기 때문이다. 


통일부는 "최순실의 개인적 구상이라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지만, 이러한 반박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눈길이 부드러울 리 없다. 또, '통일은 대박'이라는 문구가 최순실의 작품이라는 장시호의 주장도 이러한 '찜찜함'을 더욱 짙게 만든다. 이처럼 최근에는 '드레스덴'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드레스덴 선언?', '최순실?' 이라는 연상 과정이 자연스레 진행되는 터라 '드레스덴'과 그 곳에 살고 있는 시민들에게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든다. 웃음거리가 되기엔 아픈 역사를 지닌 곳이고, 또 그 아픔을 이겨낸 아름답고 강한 도시인데 말이다.





괜히 그곳의 별명이 '독일의 피렌체'이겠는가. 이제부터 드레스덴에 덧씌워진 멍에를 걷어내보도록 하자. 드레스덴 여행의 출발점인 중앙역은 구시가(알트슈타트, aldstdat)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참고로 '드레스덴 선언'이 발표됐던 드레스덴의 공과대학교는 중앙역의 아래쪽에 있다. 굳이 가볼 이유는 없을 듯하다. 알트슈타트로 뻗어 있는 프라거 거리(Prager strabe)를 따라 걷노라면, '체코'와는 확연히 다른 '독일'만의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깔끔하고 정돈된 느낌이다.


크로이츠 교회


상점(맥도널드도 있다)과 은행 등이 즐비한 거리를 5~10분 정도 걸었을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과 설렘은 시간을 금세 흘려 보낸다. 이윽고 카를(칼)슈타트 백화점(Karstadt Department Store)이 보이고, 큰길을 건너면 눈앞에 제법 큰 건물들이 시야를 압도한다. 드레스덴 시의회(City council City of Dresden)와 크로이츠 교회가 바로 그것이다. 면적이 4,800㎡에 달하는 대성당(Katholische Hofkirche)이 작센 주 최대의 '가톨릭' 교회라면, 크로이츠 교회는 작센 주 최대의 개신교 교회다. 3,000석 규모라고 하니 그 크기를 짐작할 수 있다.


엄청난 크기의 크로이츠 교회를 지나면 약간의 혼란이 온다. 왼편으로는 대성당, 츠빙거 궁전, 레지던츠 궁이 위치해 있고, 오른편으로는 프라우엔 교회와 알베르티눔 등이 자리하고 있다. '어디부터 가야 하지?' 배부른 고민이자 행복한 갈림길인데, 어떻게 동선을 짜는 게 가장 효율적일지는 역시 개인의 취향에 맡길 수밖에 없다. 우선, 프라우엔 교회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알베르티눔(Albertinum)은 관람을 하려면 제법 시간이 소요될 것이므로 점심을 먹은 후 천천히 구경하기로 하자.



바로크 양식의 대표격(바로크 양식의 대가로 불린 게오르크 베어가 설계)인 프라우엔(=성모) 교회는 드레스덴을 소개하는 사진으로 많이 채택되곤 하는데, 그만큼 아름다운 외양을 지녔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괴됐다가 1994년에야 복원이 시작됐고 2005년 완공됐다. 복원이 늦게까지 이뤄지지 않았던 이유는 전쟁의 아픔과 비극을 상기시키는 상징으로 남겨두기 위해서였다. 교회의 표면이 얼룩덜룩한 건 폭격 후 남은 파편을 찾아 복원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라우엔 교회를 방문했을 때, 교회 앞에 수직으로 세워진 대형 버스 3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건 뭐지?' 가지고 있던 여행 책자를 아무리 뒤져봐도 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도 그럴것이 지난 2월 6일에 세워졌으니 반영될 리가 없었다. 구조물 앞의 설명을 천천히 읽어보고, 인터넷을 검색해가면서 정보를 취합했다. 그제야 이 버스들이 왜 이곳에 세워져 있는지 알게 됐다. 시리아 출신 예술가 마나프 할부니의 작품으로 제목은 '모뉴먼트(Monument)'. 




"알레포에서는 폭격을 막기 위해 버스를 이 같이 세워 길을 봉쇄하기도 한다. 알레포의 고통을 상징한다.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때 완전히 파괴됐다가 재건된 도시이다. 이 작품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알레포가 드레스덴처럼 재건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마나프 할부니)


시리아의 알레포는 내전의 최대 격전지였고, 그로 인해 도시는 철저히 파괴됐다. 정부군과 반군은 2012년 7월부터 2016년 12월까지 무려 4년 반 동안 전투를 벌였다. 알레포가 반군의 주요 거점지였던 만큼 정부군은 이 곳을 탈환하기 위해 무자비한 공격을 단행했다. 특히 정부군의 저격수가 쏘는 총알은 알레포 시민들에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알레포의 거리에 버스 3대가 세워졌다. 거리를 봉쇄해 저격수로부터 시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말이다. 


마나프 할부니는 이 끔찍한 참사에 착안해서 드레스덴 프라우엔 교회 앞 광장에 버스 3대를 세운 것이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재건의 도시 드레스덴처럼 알레포 역시 그러하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지역사회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 달리 극우단체는 마나프 할부니의 작품을 전시토록 허가한 드레스덴 시장 디르크 힐베르트를 협박했다고 한다. 극우단체들의 바람과는 달리 이 조형물은 오는 11월까지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마음이 무거워졌다.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전범 국가이나 그 잘못을 철저히 반성한 독일, 그리고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에 의해 파괴됐다가 재건된 아픔을 지닌 드레스덴, 그 도시의 한 가운데 시리아 내전의 참혹함을 표현하기 위해 세워진 구조물. 이를 설치토록 한 시장과 수용한 시민들, 이를 반대하고 나선 극우단체들. 많은 스토리들이 혹은 여러 갈등들이 목격됐지만, 그럼에도 '모뉴먼트(Monument)'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세계에 보여주고 있었다. 또, 드레스덴이 평화와 통일의 도시라고 말하고 있었다. 


드레스덴을 마저 여행하고 어두워진 밤에 다시 버스를 타고 프라하로 돌아가면서 상념에 잠겼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 곳에서 얻어야 했던 것, 얻을 수 있었던 것을 모두 끌어안고 돌아가는 것 같다고. 드레스덴에 참 잘 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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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國境) : 나라와 나라 사이의 경계


우리는 '국경'을 모른다.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한)반도라는 지형학적 위치, 거기에 유일하게 뚫려 있(다는 표현은 육지를 강조하는 고전적인 지리관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저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의미로 새기도록 하자)는 북쪽은 '휴전선'이라는 장벽이 엄중히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그 '선'에 가닿을 수 없다. 아주 멀리서나마 바라볼 수는 있지만, 실체적으로 경험할 수는 방법은 사실상 없다. 군인이 돼 철책을 지킨다면 모를까. 



그렇다고 해서 그 선을 국경이라 말하긴 어렵다. 회원의 자격을 '국가'로 규정한 유엔 헌장에 따르자면, 북한 정부도 하나의 국가로서 인정할 여지가 있지만, 이는 헌법적으로 볼 때 논란의 여지가 다분하다. 헌법 제3조에서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우리의 국경은 압록강과 두만강이 될 텐데, 북쪽을 통해 그 곳에 닿을 수 없으니, 그 '경계'를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물론 중국이나 러시아를 통해 그 '경계'를 확인할 수는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강을 건너 만주를 넘나들었던 선조들의 이야기는 글로 접할 수밖에 없는 그야말로 '무용담'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건, '국경'과 함께 쓰이는 표현들이다. 우리에게 국경은 '건너'거나 '넘어'야 하는 것이었다. 혹은 '통과'하거나. 아마도 앞서 살펴봤던 지형학적 위치, 또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 것이다. 



지금에 와서 사실상 아무런 제한 없이 마음껏 국경을 넘나들 수 있는 유럽을 떠올리면, 우리는 지나치게 제한적인 환경과 여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아니 그 실체조차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군사 분계선이라는 벽에 막히고 갇힌 채 말이다. 그만큼 사고의 유연성과 확장성도 '막혀'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무리한 유추는 결코 아니리라. 


그래서 궁금했다. 대중 교통, 이를테면 버스나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가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동안의 여행들이 대체로 한 (국가 속의) 도시를 탐험하는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일정 속에 4개국을 포함시켰다. 나름대로 큰 도전이기도 했다. '국경'이라는 개념을 실체적으로 경험하지 못한 내가 과연 그 '넘나듦'을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그것도 처음 들린 낯선 땅에서 말이다.


플로렌스 버스 터미널(Praha Florenc)




이번 여행에서 (체코) 프라하에서 (독일) 드레스덴,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 빈, 빈에서 (헝가리) 부다페스트까지 (돌아오는 여정까지 더하면) 총 6번 국경을 '넘었다'. 평생 한번도 넘지 못한 국경을 무려 6번 씩이나 넘었다니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 기차를 이용했지만, 프라하에서 드레스덴까지는 버스를 탔다. 스튜던트 에이전시(Student Agency)라는 체코의 버스 회사에 대한 호평을 익히 들어왔던 터라 꼭 한번 탑승해보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프라하에서 빈까지 버스를 타면 거의 5시간이 걸리는데, 그 노선은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래도 장거리를 이동할 때는 버스보다는 기차가 안락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플로렌스 버스 터미널(Praha Florenc)에 하루 먼저 들러 표를 예약했다. 모든 교통 편은 인터넷으로 예약이 가능하지만, 성수기가 아닐 때에는 현지에서 구입해도 충분하다. 또, 상황에 따라 일정이 어떻게 바뀔지 알 수 없는 게 여행이다보니 '여유'를 두기 위해 그리했다. 


어차피 위치를 정확히 파악둬야 당일 헤매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 발걸음이 헛되다 생각되진 않았다. 인터넷을 통해 미리 점찍어 뒀던 09시 30분 표를 예약했다. 프라하에서 드레스덴까지 소요 시간은 2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버스로) 이동할 만 했다. 가격은 300코루나, 한화로 13,000~14,000원 정도였다. 우리로 치면 '우등' 버스 쯤 되는 준수한 시설을 갖췄다. 


프라하 중앙역(Hlavni nadrazi) 플랫폼



빈 중앙역(Wien Hauptbahnhof)


프라하에서 빈까지는 기차로 4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버스 표를 예약하던 날 프라하 중앙역(Hlavni nadrazi) 들러 역시 미리 표를 구입했는데, 갈 때(17일)와 돌아올 때(20일)의 표 '가격'이 달랐다. 빈으로 가는 기차는 800코루나(29유로)였는데, 프라하 행 기차는 662코루나(24유로)에 불과했다. '왜 차이가 나는 걸까?' 처음엔 신기했지만, 생각해보니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화폐를 쓰고 있는 국가에서 (같은 동선이라 하더라도) 기차 표 가격이 다른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빈에서 부다페스트로 이동할 때도 왕복 티켓의 가격이 달랐다. 다만, 한 국가 내에서만 이동을 해왔던 경험 때문에 그것이 생소하게 느껴졌던 것이었다. 누군가는 매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실마저도 제한된 환경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겐 낯설게만 느껴질 수밖에.. 


부다페스트 역(Keleti St.)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진 3시간이 좀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한국에서 3시간을 이동한다고 생각하면 손사래를 쳤을 텐데, 이미 4시간 넘는 시간을 기차로 이동해보니 3시간은 이미 아무것도 아니었다. 가격을 체크해보면, 빈에서 부다페스트까지는 25유로(약 31,000원), 부다페스트에서 빈까지는 10,230포린트(33유로, 약 40,000원)였다. 사실 부다페스트로 떠났던 건 말 그대로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강풍과 비가 흩날리는 빈의 날씨는 워낙 변덕스러워서 정상적인 여행이 불가능했다. 하루는 미술사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 Wien, Wien Museum of Art History)에서 어찌어찌 버텼지만, 그 다음부턴 일정을 짤 수 없는 지경이었다. 빈의 일정은 물론 원래 예정돼 있던 (슬로바키아) 브라티슬라바 행도 과감히 접었다. 고작 1시간 거리를 이동해 봐야 날씨의 변화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럴 바에는 아예 멀리 가보자'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차피 기차에선 비를 맞을 일도 없으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그래서 지도를 살펴보다 (빈으로부터 적당히 멀리 있는) 부다페스트를 골랐던 것이다. 처음이 어렵다고 했던가. 한번 해보니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표를 구입하는 것도, 교통 수단에 몸을 싣고 이동하는 것도 제법 익숙해졌다. 이제야 뭔가 진짜 '여행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조금, 여행자 같았다. 



아, '국경'을 넘어 본 소감이 어땠냐고? 솔직히 말하면 '모르겠다'. 왜냐하면 대부분(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이동하는 동안 '잠'에 빠져버려서 국경이라는 걸 볼 수도 없었고, 당연히 국경을 넘는 순간을 경험할 수도 없었다. 중간에 잠에서 살짝씩 깨긴 했지만, 여기가 어디쯤인지 확인하는 건 '잠결'에 무리(?)한 일이었다. (와이파이가 연결되지만 인터넷 연결이 원활한 편은 아니라서 현재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하기가 힘들었던 탓도 있다.) 


다시 말해서 그곳에서는 '국경'이 큰 의미가 없었다. 그곳은 검문소를 두고 일일이 여권과 비자를 확인하는 살벌한 지역이 아니었다. 달리던 기차가 멈춰 서지도 않았다. 누구도 국경이라는 (애초에) 비실체적 개념을 인식하지 않았고, 그 보이지 않는 '선'을 설명하지도 이해시키지도 않았다. 특별한 기분 따윈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쉬운 일이었다. 아무 일도 아니었다. 이토록 쉽게(잠이 들어 있었을 테니까) 국경을 넘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했다. 


당연히 '넘는다[越]'는 표현을 쓸 여지조차 없었다. 그저 끊임없이 연결된 땅덩어리, 그 연속면의 계속일 따름이었다. 이쯤에서 불순하게도 한 가지 생각이 더 떠오른다. 앞서 헌법 제3조를 살펴보면서 '영토'의 개념을 짚어봤는데, 바로 그 다음인 제4조의 내용은 이러하다. '대한민국은 통일을 지향하며,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입각한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이를 추진한다.' 


ⓒ 머니투데이, 이승현 디자이너


통일을 지향하되, 평화적 통일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한다. 지난 보수 정권 하에서는 지켜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남북한이 극단적 갈등 국면에 빠지면서 발생한 현실적 피해와 통일이 미뤄지면서 생긴 잠재적 피해는 산술이 불가능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의 몫이었다. 다음 정부는 부디 헌법 제4조의 원칙을 지켜나가는 대통령이 이끌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러한 지향을 가진 후보들이 더욱 약진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또, 모르지 않겠는가. 우리도 국경을, 그 경계를 인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시절이 오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과거 경성에서 평양으로, 또 신의주로 그리하여 저 드넓은 시베리아로 나아갔던 선조들의 '무용담'이 현실 속의 일이 되는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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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어째서 여행을 가면 부지런해지는 걸까. 그것도 '극도로' 말이다. 새벽 5시가 조금 지나면 저절로 눈이 떠지고, 어느새 몸은 침대를 벗어나 있다. 알람에 의존해야만 했던 평소의 아침이 아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지개를 켜고, 미리 사뒀던 물을 시원하게 들이킨다. 아, 호텔의 냉장고에 비치된 (물을 포함한) 음료는 워낙 비싸니까 손을 대지 않도록 하자. 숙소로 돌아오기 전, 인근의 슈퍼(가 없다면 자판기)에서 물을 사오는 센스가 필요하다. 


곧바로 아침 샤워를 하고, 가벼운 트레이닝 복을 입는다. 조식이 제공되는 시간(보통 07:00에서 08:00 사이에 제공된다. 호텔을 예약할 때 체크하도록 하자.)까진 제법 시간이 남아 있다. 뭘 하려고 그러냐고? 낯선 곳에 여행을 와서 대관절 할 일이란 게 무엇이겠는가. 걷는 것, 바로 산책이다. 등잔 밑에 어둡다고, 아직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는 숙소 주변을 샅샅이 훑을 시간이다. 


바슬라바 교회(Kostel svatého Václava, Saint Wenceslas church)


여행 일정을 짜다보면 매번 욕심이 생겨서 빡빡한 계획을 짜게 되는데(그러지 않으려고 의식해도 이상하게 늘상 그러하다), 그러다보면 '주요 관광지' 위주로 동선이 짜이기 마련이다. 가령, 프라하를 여행한다고 치면 당연히 프라하 성, 카를 교, 구시가 광장, 바츨라프 광장, 유대인 지구가 포함될 테고, 어쩌면 이게 전부가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런 여행이라면 주요 관광지만 후루룩 훑고 지나가는 패키지 여행과 다를 게 무엇이라 말인가.


그래서 '아침 산책'이 중요하다. 도시가 미처 깨어나기 전, 그 어떤 구애(拘礙) 없이 그저 발길 닫는 대로 마음껏 걷는다. 아직 단장을 채 마치지 않은 도시는 신선하고 또 거짓이 없다. 그 준비되지 않은 모습이 좋다. 그래서 아침 산책이 소중하다. 여행을 위해 방문한 도시(都市)와 보다 밀착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 그 도시의 좀더 내밀한 모습을 만나기 위해서 말이다. 


방문자를 위해 깔끔하게 차려입고서 훈련받은 예의와 매너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라 격식이나 경계 없이 그저 1:1로 마주하고 싶어진다. 대우받는 게 아니라 그저 '경험'하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정의이자 여행을 통해 얻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내가 왜 여행을 가면 부지런해지는지 알 것 같다. 체력이 모두 소진될 때까지, 왜 그토록 걷고 또 걷는지 알 것 같다.



숙소가 있는 안델 역 인근에 인상적인 외관의 교회가 하나 있다. 붉은 빛을 띠는 벽과 쌍둥이처럼 솟아 있는 두 개의 첨답이 인상적이다. 바슬라바 교회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건물은 낮에도 품위가 있지만, 어둠이 깔린 뒤에 훨씬 분위기가 있다. 은은한 조명에 포근히 감싸인 외관을 지나치노라면, 하루의 고된 여정으로 지친 발걸음이 숙소로 향하던 속도를 줄이고 이내 멈춰선다. '종교'를 초월한 위안이 느껴졌다.


법원(Obvodní soud pro Prahu 5)


바슬라바 교회를 지나 큰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약 600m 정도 올라가다보면 오거리가 나오는데, 그곳에 늠름한 자태의 건물이 위치하고 있다. 바로 프라하의 법원(法院)이다. 건물 중앙 부분에 'justiční palác'라고 씌어져 있는데, 'justiční'는 체코어로 '법의', '법에 관련된'이라는 뜻이고, 'palác'는 '궁전', '전당'이라는 뜻이니 이 곳이 법원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체코어를 알고 있었냐고? 얼핏 봐도 'justiční'라는 요상한(?) 글자가 정의(正義) 또는 사법, 재판을 뜻하는 영어인  'justice'와 닮아 있지 않은가. 간단히 말해 때려맞힌 것인데, 'justice'의 어원이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치아(Justitia)에서 비롯된 것을 감안하면, 그와 비슷한 꼴의 글자를 같은 뜻으로 유추하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게다.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물(Pomník obětem komunismu, Memorial to the Victims of Communism)





이미 제법 걸었지만, 조금 더 욕심을 내서 북으로 전진해보자. 법원으로부터 약 3, 400m쯤 더 걸어가면 '공산주의 희생자 기념물'이 나온다. 언덕 위쪽으로 계단이 이어지고, 청동상들이 늘어서 있다. 체코의 공산 정권(1948~1989) 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이 기념물은 체코의 조각가 올브람 주벡(Olbram Zoubek)의 작품이다.


호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괴한 느낌이 드는데,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몸에 금이 가 있고, 신체의 일부가 사라져 가는 모습이 표현돼 있다. 바닥에는 공산 정권에서 희생당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숫자가 기록돼 있다. 205,486명 체포, 248명 처형, 4,500명 감옥에서 사망, 327명 탈출 시도하다 총격 사망, 170,938명 망명. 구글 번역기를 돌려가며 이 숫자들의 의미를 새기는데, 절로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이번에는 블타바 강(Vltava River)변으로 가보자. 안델 역에서 블타바 강까지의 거리는 불과 500m에 불과하다. 체코에 여러 날 머물 예정이라면 하루는 북쪽으로, 하루는 동쪽으로 산책을 떠나보자. 강변에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는데, 이른 아침에도 제법 사람들이 눈에 띤다. 강변을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아침 해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붉은 빛이 사라져가는 석양의 쓸쓸함과는 달리 붉음이 더욱 짙어지는 아침의 풍경은 걷는 이의 몸 속에 '힘'을 불어넣는다. 


댄싱 하우스(Tančící Dům, Dancing Building)



블타바 강은 파리의 세느 강(Seine River)보다는 폭이 넓지만, 한강에 비하면 훨씬 좁은 편이다. 그래서 다리를 건너 반대 편으로 이동하는 게 그리 버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유이라스쿠프 다리(Jiráskův Most)를 건너가면 댄싱 하우스(혹은 댄싱 빌딩)라는 이름이 기묘한 건물이 시야에 들어온다. 독특한 형태의 유리 타워는 마치 물결치는 듯한 형태이고, 콘크리트로 된 건축물에는 불규칙한 모양의 창문이 인상적이다. 


프랭크 게리(F.O.gehry)와 블라디미르 밀루닉(V.Milunic)의 작품인 댄싱 하우스는 아방가르드 건물이라 눈에 확 띠지만, 주변과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어색하지 않다. 낙천적이고 유희적인 이 건물은 1996년 타임(Time)이 선정한 최고의 디자인 작품인 만큼 매우 높은 수준의 건축 기술로 지어졌다. 또, 프라하라는 도시의 이미지가 낙천적인 자유 도시'로 자리매김하는 데 상징적인 역할을 한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의 아침 산책을 마무리 할 시간이다. 산책의 동선은 1시간 안팎으로 자연스레 맞춰졌는데, 그 정도면 본격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앞선 '예열'로 딱 적당했다. 그러고나면 밥(이 아니라 빵)맛도 훨씬 좋았다. 이 좋은 산책을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계속 했냐고? 흠, 삶과 여행이 판박이마냥 같다면, 우리가 굳이 여행을 떠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정도면 대답이 됐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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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낯선 곳을 지리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점(起點)을 잡는 게 중요하다. 갑자기 낯선 건물과 도로 사이에 덩그러니 놓여지면, 아무리 '구글 지도'라는 마스터 키가 있다고 하더라도 길을 찾는 데 제법 시간을 많이 쓰게 된다. 물론 길을 헤매다가 계획에 없었던 곳에 당도하게 되거나 지도나 여행 책자에는 나와있지 않은 (나만의) 장소를 찾는 '재미'가 여행의 묘미라고 하겠지만, 기본적인 지리적 정보는 숙지하고 있어야 '미아(迷兒)'가 되는 혼란을 피할 수 있다.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


프라하에서는 그 중심축이 아무래도 '카를 교(라기보다는 블타바 강이겠지만)'가 될 텐데, 이 아름다운 석조 다리의 한쪽은 프라하 성이 있는 말라스트라로 이어지고, 또 다른 한쪽은 구시가 광장(Staroměstské Náměstí Praha)과 연결돼 있다. 구시가 광장은 프라하의 '심장'이라 불릴 만큼 핵심적인 여행 코스이다. 당연히 수많은 여행객들이 운집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발 디딜 틈 없는 '밀집도'를 느껴보고 싶다면, 구시가 광장으로 가보자.


매시 정각마다 종소리와 함께 인형들의 퍼포먼스가 펼쳐지는 천문시계(Astronomical Clock) 앞은 늘 사람들로 붐빈다. 정각이 되면 해골이 오른손으로 줄을 잡아 당겨 모래시계를 (절반 쯤) 뒤집는다. 그러면 두 개의 창문이 열리는데, 12사도가 돌아가며 얼굴을 빼꼼히 내민다. 행렬이 모두 끝난 후에는 닭이 울고, 이윽고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1338년에 건축된 구시청사 남쪽 벽의 천문시계(1410년) 세계에서 세 번째로 만들어졌고, 

현재 작동되는 것 가운데는 가장 오래됐다고 한다.


언젠가 유투브에서 프라하와 관련한 동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는데, 그 중에 천문시계 앞에 모인 사람들이 이 퍼포먼스를 보면서 환호성을 지르고 감탄사를 쏟아내는 영상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까. 내가 저 곳에 있다면 어떨까' 그런 상상을 했었으리라. 지금 생각해보면, 그 기억이 무의식 중에 남아 있어서 '프라하'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현장 속에 있고 싶어서 말이다. 


천문시계 퍼포먼스는 프라하에 갔다면 꼭 봐야 할 이벤트(프라하 성 정문의 위병 교대식처럼)라고 할 수 있는데, 최소한 5분 전에는 도착해야 좋은 자리를 선점할 수 있다. 매 시간마다 반복되기 때문에 시간의 여유가 있다면 언제든지 볼 수 있어 부담은 없다. 아예 천문시계 앞의 카페나 광장 주변에 머물면서 정각이 될 때마다 천문시계로 가보는 것도 좋다. 



틴 성당


천문시계에서 눈을 오른쪽으로 돌리면, 제법 널찍한 광장이 펼쳐진다. 모든 공간들이 그러하듯이, 구시가 광장의 낮과 밤도 사뭇 다른 분위기를 띤다. 낮은 활기차고, 밤은 로맨틱하다. 비누방울이 광장 곳곳을 수놓고, 익살스러운 인간 동상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어? 여기 동상이 있었나?'라고 착각하게 할 만큼 섬세하다. 이 공간에 머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여유롭고 또 활기차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곳이다.


한편, 어둠이 그윽하게 깔리기 시작하면 카를 교에서 시작된(혹은 광장에서 시작됐는지도 모른다) 로맨틱함이 광장으로 스며든다. 밤이 되면 천문시계에 조명이 쏟아지는데, 일출과 일몰 시간, 태양과 달의 위치 심지어 별자리까지 표시된 이 경이로운 천문시계는 더욱 찬란히 빛나기 시작한다. 낮에 거쳐갔던 사람인지 새롭게 프라하에 도착한 사람인지 알 수 없지만, 또 다시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얀 후스 동상(Jan Hus Monument , Pomní Jana Husa)


아름답기는 틴 성당(Church of Our Lady Before Týn , Kostel Matky Boží před Týnem)도 마찬가지다. 높이가 80m에 달하는 이 성당은 14세기 중반에 지어졌는데, 나란히 솟은 두 개의 탑(아담과 이브라는 이름은 갖고 있다)과 첨탑은 낮밤을 가리지 않고 프라하의 '나침(compass)' 역할을 한다. 광장의 중앙에는 동상이 하나 서 있는데, 마치 구시가 광장의 건문들이 이 동상을 에워싸고 지켜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동상의 주인공은 바로 체코의 기독교 신학자인 얀 후스(Jan Hus)다. 


면죄부를 판매해 부를 축적하는 등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던 당시 가톨릭 교회의 부패를 참다 못한 얀 후스는 이를 강력히 비판하며 종교개혁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독일의 마틴 루터나 칼뱅보다 10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반대로 생각한다면, 얀 후스의 등장 이후에도 가톨릭 교회의 부패는 100년 이상 지속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 개혁을 주장했던 많은 신학자들이 이단으로 몰려 죽임을 당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얀 후스 역시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화형을 당하게 된다. 그를 지지하고 따르던 사람들이 '후스파'를 만들어 끈질기게 개혁을 요구했지만, 그들도 후스와 마찬가지로 처형당하게 된다. 구시가 광장의 얀 후스 동상은 1915년에 그가 사망한 지 500년 주년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구시가 광장은 카를 교, 프라하 성으로 이어지는 프라하 여행의 핵심이다. 뿐만 아니라 북쪽으로는 유대인 지구로 이어지고, 동쪽으로는 화약탑과 시민회관, 팔라디움이 위치하고 있으며, 남쪽으로는 바츨라프 광장까지 연결되는 중심지다. 다시 말해서 프라하 여행의 '출발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틴 성당을 비롯해서 르네상스 양식, 바로크 양식, 아르누브 양식 등 서양 건축의 역사를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낮과 밤의 이질적인 모습은 결국 '로맨틱'으로 연결되는데, 동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건물과 풍경들은 여행자들의 마음을 순식간에 매혹시킨다. 누군가 구시가 광장을 한마디로 설명을 해달라고 요청한다면, 이렇게 대답하겠다. 프라하라는 동화를 완성시키는 장소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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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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