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 여행의 핵심은 아무래도 구시가지, 술탄 아흐메트 지역이다. 이 구역은 전체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찬란하고 아름다운 문화 유적지이자 지금도 치열하게 살아 숨쉬는 삶의 현장이다. 9월의 술탄 아흐메트 지역은 너무도 뜨거웠다. 쉼 없이 내려쬐는 햇볕과 수많은 여행객들이 뿜어내는 열기가 한데 엉겨 화끈하게 타올랐다. 그 와중에도 바닥에 엎드려 기도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의 타오르는 신앙심은 이스탄불을 또 한번 가열했다. 아찔할 정도로 열렬한 도시, 이스탄불은 그런 곳이었다.



술탄 아흐메트 역(트램)을 내려오면 거대한 문화 유적이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술탄 아흐메드 공원을 기점으로 왼쪽에는 블루 모스크(Blue Mosque)가 위용을 자랑하고, 오른쪽에는 아야소피아 박물관(Ayasofya Camii Müzesi)이 고귀한 자태를 뽐낸다. 두 건물은 넋을 잃고 쳐다볼 수밖에 없을 만큼 아름답고 훌륭해서 한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순간 엄청나게 고민했다. 블루 모스크와 아야소피아 박물관 중 어느 곳을 먼저 방문할 것인가. 선택은 결코 쉽지 않았다.


'동선(動線)'이라는 반갑고 명쾌한 해답이 없었다면 한참동안 헤맸을지도 모르겠다. 블루 모스크가 왼쪽 끝에 위치해 있으므로 그곳을 먼저 들린 후, 아야소피아 박물관과 톱카프 궁전(Topkapı Palace)으로 향하는 게 합리적이라 판단됐다. 그제서야 고민을 접고 방향을 왼쪽으로 꺾어 블루 모스크로 향했다. 걸어가는 내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탄성은 더욱 커졌다. 자연스레 입이 쩍 벌어졌다. 터키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히는 곳답게 정말이지 장관이었다. 





이곳이 왜 이슬람 신자들에게 성지순례의 출발점일 수밖에 없는지 알 듯 했다. 이슬람교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나조차도 1616년 완성된 그 압도적인 건축물을 마주하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졌으니 말이다. 직경 27.5m에 달하는 대형 돔 1개와 여러 개의 작은 돔으로 구성된 지붕 그리고 6개의 미나레(Minaret)는 위압적인 힘을 뿜어냈다. 일반적인 이슬람 사원들의 미나레가 4개인 반면, 블루 모스크의 미나레는 그보다 2개가 많은 6개라 강렬함이 더욱 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왜 블루 모스크의 미나레는 6개인 걸까? 그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분분하다. ① 건축가가 '황금'(알툰)을 '6개'(알트)로 잘못 알아 들었다. ② 사우디아라비아 메카(Mecca)에 있는 카바 모스크의 미나레가 6개였기 때문이다  건너편에 위치한 아야소피아 박물관(동로마제국의 그리스도교 성당으로 지어졌다)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맞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블루 모스크 건축을 명했던 제14대 술탄 아흐메트 1세가 비잔틴 제국이 세웠던 아야 소피아를 의식했던 건 분명해 보인다.



외부에서 느꼈던 감동은 내부로 들어가면 더욱 짙어진다. 안쪽은 무려 21,043장의 타일과 250개가 넘는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돼 있다. 푸른빛의 타일은 그곳의 이름이 블루 모스크였다는 걸 되새기게 만들고,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햇살은 화려하게 빛난다. 술탄 아흐메트 1세의 위세와 함께 이슬람교의 자긍심이 느껴진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신발을 벗어야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온갖 종류의 발냄새가 진동을 한다는 것이다. 어쩌겠는가. 알라의 힘으로 극복할 수밖에.   


블루모스크 앞쪽의 기다란 터가 있는데, 그곳의 이름은 히포드롬(Hippodrome)이다. 로마의 황제 세비루스(Severus) 시절에는 검투 경마장 터로 쓰였고, 나중에는 마차 경기장으로 활용되기도 했다고 한다. 지금은 유적의 대부분이 파괴돼 남아 있지 않고, 이집시안 오벨리스크(obelisk)만이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기원전 16세기 이집트에서 가져온 디킬리타스(Dikilitas)와 콘스탄티누스 7세가 940년에 만든 오르메 수툰(Orme Sutun)이 과거의 영광을 홀로 대신하고 있다. 


아야소피아 박물관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내부


블루모스크를 나와 반대편으로 쭉 걸어가면 사각형 모양의 아야소피아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예쁘게 가꿔진 공원을 지나가다보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진다. 흐드러지게 핀 협죽도(유도화)가 눈길을 잡아끈다. 그 꽃길은 셔터를 누르지 않을 수 없는 강렬한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아야소피아 박물관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성당인데, 360년 처음 만들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돼 532년 유스티니아누스 황제(483~565)가 재건축을 시작해 537년 12월 비로소 완공됐다. 


이스탄불이 그 지리적 특성 때문에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던 것처럼, 아야소피아 박물관도 역사의 부침을 몸소 겪었다. 애초에 성당으로 지어졌고 그 역할을 충실히 해왔지만, 762년 서로마 제국과 가톨릭이 분리되자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탈바꿈 됐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의 콘스탄티토플 점령(1453년) 이후에는 이슬람 사원이 되어야 했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랄까. 성당 내의 모자이크(mosaic)들은 회칠이 덧입혀져 세상에서 지워졌다. 


1. 대리석으로 된 '천국의 문'

2. 성모 마리아(왼), 예수(중앙), 세례자 요한(오른)

3. 여황제 조에(왼), 예수(중앙), 조에의 세 번째 남편 콘스탄티누스 9세(오른)

4. 콤네노스 황제(왼), 성모 마리아와 예수(중앙), 부인 이레인, 아들 알렉시스우스(오른)


본당으로 들어가면 그 웅장함에 압도 당하게 된다. 중앙 돔은 지름이 31m, 높이가 55m에 달한다. 당시에는 내부 공사 중이라 완전한 모습을 볼 순 없었지만, 부분적으로 가려진 그 모습만으로도 위엄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공사 중이라 건물의 크기가 더욱 와닿았는지도 모르겠다. 2층은 여성들이 기도하는 곳인데, 가마가 이동할 수 있도록 통로가 계단이 아니라 비탈길로 돼 있었다. 여기까지 가마를 지고 올라와야 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아야소피아 박물관의 하이라이트는 2층에 있는 모자이크다. '천국의 문'을 통과하고 나면 회칠로 가려졌던 모자이크를 만날 수 있다. 앞쪽만 보고 정신없이 걷다보면 발견하지 못할수도 있는데, 문을 통과하고 오른쪽을 돌아보면 모자이크를 향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을 테니 놓칠 염려는 없다. 혹시라도 가는 길에 보지 못했다면 돌아올 때 무조건 보게 되는 구조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훼손이 상당히 많이 됐지만, 그 자체로 아름답기만 하다.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됐던 곳에서 예수의 흔적이라니..


블루 모스크(위)와 아야소피아 박물관(아래)


블루모스크, 아야소피아 박물관. 단지 두 곳을 둘러보는 데만도 제법 많은 시간이 지나갔다. 이질적인 두 공간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구도가 참으로 흥미로웠다. '내가 더 아름답고 웅장해!'라고 기싸움을 하고 있는 듯 보였다. 그 대치(對峙) 아닌 대치가 이스탄불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지 가려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열을 가리는 건 불필요했다. 그저 공원 한 가운데의 벤치에 앉아 양쪽을 한번씩 바라보며 그 팽팽한 긴장감을 맛보는 걸로 행복할 따름이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톱카프 궁전을 비롯해서 모자이크 박물관, 터키-이슬람 미술 박물관, 고고학 박물관, 아야이레네 박물관, 예레바탄 사라이 등 둘러봐야 할 곳이 산더미다.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진 말자. 어차피 하루만에 끝낼 수 있는 일정이 아니었다. 잠시 한숨 돌리고 이스탄불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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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누가 처음 그리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터키 요리를 세계 3대 요리로 손꼽는 모양이다. 대개 중국, 프랑스와 함께 거론되곤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공신력 있는 기관의 검증을 받은 타이틀은 아니다. 어디에선 태국을 포함시키기도 하고, 누군가는 이탈리아를 넣어 그리 부르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는 제외하는 경우가 없지만, 다른 두 나라를 고를 땐 상당히 개인적인 취향이 개입되는 듯 하다. 애시당초 '입맛'이라는 게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 탁심 광장의 케밥 식당 -



이 글에서 터키 요리가 진짜 세계 3대 요리에 포함되는지 가려낼 생각은 없다. 물론 그럴 능력도 없을 뿐더러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건 입맛의 자의성을 얘기했을 때 결론이 난 듯 싶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는 음식은 없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맛을 칭찬한다면 그 정도의 가치를 존중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다.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중동을 연결하는 길목에 자리잡은 지리적 특성에서 기인한 역사적 특수성 그리고 문화적 다양성은 터키의 요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었으리라. 


이렇게까지 이야기를 해놓고보니 뭔가 엄청난 음식들을 소개할 거라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가령, 이스탄불의 맛집을 소개한다던가 감명 깊었던 별미를 언급한다든지 말이다. 애석하게도 음식(혹은 맛)에 대한 호기심이 전혀 없는데다 심지어 입맛이 까탈스럽기까지 한 필자는 애시당초 터키의 요리에 일말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해외 여행을 가게 되면 맥도날드의 위치부터 확인하는 터라 이스탄불에도 맥도날드가 (많진 않지만) 있다는 사실에 안심했을 뿐이었다.


아침은 숙소에서 제공하는 조식으로 든든하게 채우고, 나머지 두 끼 가운데 한 끼는 맥도날드에서 해결하는 터라 고작 한 끼만 입맛에 맞는 음식으로 때우면 될 일이었다. 음식에 호기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현지 음식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굳이 먹으려 하지 않는 편이다.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땐 슈니첼(Schnitzel)의 맛에 빠져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이스탄불에선 그런 음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그저 몇 가지 길거리 음식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실망스럽더라도 어쩔 수 없다.


블루모스크 입구 앞에서 옥수수를 판매하고 있는 아저씨가 포즈를 취해주고 있다.


이스탄불(아마도 터키 전역이 그럴텐데)을 가면 어디서나 쉽게 옥수수, 밤, 시미트(simit) 등의 길거리 음식을 맛볼 수 있다. 시미트는 고리 모양처럼 생긴 빵인데, 깨가 잔뚝 뿌려져 있다. 가격은 1~2리라 정도로 저렴한 편이라 부담없이 사먹을 수 있다. (11월 17일 기준으로 1리라는 284원인데, 9월 여행 당시에는 320원 정도였다.) 맛은 특별할 게 없다. 밤도 마찬가지다. 구운 밤이 터키라고 다를 게 있겠는가. 가격은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100그램에 10리라, 250그램에 20리라 정도다.


오히려 좀 색다른 건 옥수수 쪽이다. 이스탄불의 길거리에서 판매하는 옥수수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먹는 것처럼 찌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굽는 것이다. '색다르다'고 말한 건, 이렇게 조리된 옥수수에 소금을 뿌리기 때문이다. 소금을 넣어 찌는 게 아니라 눈앞에서 소금을 듬뿍 치는데, '저걸 짜서 어떻게 먹나?'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데 옥수수를 사먹는 사람들마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게다가 엄지 손가락을 내밀기까지 했다.


엄지 손가락을 믿고 용기를 내서(?) 도전을 해봤다. 이게 웬일인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맛이 있었다. 잔뜩 뿌려진 소금이 미각을 돋우는 역할을 하는 것 같았다. 정신 없이 옥수수 하나를 먹어치웠다. 가격도 1~3리라 정도로 저렴한 편이었다. 블루 모스크 등 주요 관광지에서는 3리라까지 올라가지만, 외곽으로 벗어나면 조금 더 싼 가격에 옥수수를 맛볼 수도 있다. 옥수수를 먹다보면 이에 잔뜩 껴서 곤혹스럽다는 점만 제외하면 최고의 간식거리가 아닐 수 없다.



길거리 음식을 얘기하면서 돈두르마(Dondurma)를 빼놓을 수 없다. 터키에선 아이스크림을 돈두르마라고 부르는데, 주걱이나 국자 등에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붙이거나 줄듯 말듯 하는 익살스러운 쇼가 주요 볼거리이기도 하다. TV에서 방송되는 여행 프로그램 등에서 봤던 그대로인데, 그 수작(!)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유쾌한 장난에 속게 되고 어느새 빠져들게 된다. 다만, 일행이 있다면 덜 뻘쭘할 테지만, 혼자라면 조금 민망할 수 있다. 


제대로 된 돈두르마 쇼를 경험하고 싶다면 장난기가 얼굴에 가득한 베테랑 판매원을 찾아야 한다.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가게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탄성과 웃음이 터지는 곳이 있다면 놓치지 말자. 아이스크림을 통째로 들어올리는 과감한 장난은 돈두르마 특유의 끈기 때문에 가능한데, 전분질 다당류가 함유된 살렙과 유향수지를 넣어 쫄짓한 질감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가격은 5리라 정도로 부담이 없다. 터키의 불볕 더위에는 역시 아이스크림, 아니 돈두르마다.


- 갈라타 교를 따라 이어지는 케밥 식당들 -


- 고등어와 빵의 조합이 과연 맛있을까? -


- 카리예 박물관 맞은편에 위치한 카페 -



이스탄불 전역에서 맛볼 수 있는 되네르 케밥(Döner kebab)이나 에미뇌뉘(Eminönü) 선착장 근처의 명물인 고등어 케밥 등 터키의 대표적인 음식인 케밥 종류는 도저히 먹을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길거리 음식만 전전했던 건 아니다.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에 들렀을 땐, 입구 건너편에 있는 카페를 찾아 터키식 피자를 맛보기도 했다. 물론 기대했던 맛이 아니라 절반도 먹지 못하고 자리를 떴지만 말이다. 역시 가장 만족스러웠던 건 세계 어디를 가나 공통적인 맛을 안정적으로 제공하는 맥도날드였다. 


이스탄불의 맥도날드 빅맥 세트는 11.5리라였는데, 당시 환율로 3,500원 안팎이었다. 지금 환율로 치면 3,200원 정도일 텐데, 5,500원 쯤 하는 우리에 비해 훨씬 저렴한 가격이다. 전체적으로 물가도 싼 편이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물(500㎖ 기준)은 1리라 정도에 판매되고 있는데, 마트(sok market)에서 구입하면 0.35리라에 불과하다. 콜라도 캔은 1.25리라, 패트병은 2.75리라밖에 하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갈 때 콜라와 간식을 사들고 가는 편인데, 터키에선 전혀 부담이 되지 않았다.


이 정도로 터키의 길거리 음식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마치기로 하자. 아무리 터키 음식이 세계 3대 요리로 손꼽힌다고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음식 궁합'이 잘 맞지 않았던 기억만 남아있다. (음식을 먹기 위해 여행을 가는 게 아니라 큰 의미를 두지 않기에 그 때문에 여행에 대한 전체적인 인상을 좌우하진 않는다.)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가(?) 귀국길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제공된 비빔밥이 어찌나 맛있던지. 내게 세계 3대 요리를 꼽아보라 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대한민국 요리를 1위 자리에 올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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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터키의 최대 도시 이스탄불(Istanbul)은 '묘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그건 아무래도 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역사적 특수성) 때문일 것이다. 이스탄불은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와 흑해(Black Sea)를 연결하고 있는 보스포루스(Bosporus)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과 아시아 양 대륙에 걸쳐 있다. 달리 말하면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통로이자 열쇠이기도 하다. 자연스럽게 이스탄불은 '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놓일 수밖에 없는 지리적 특성을 지닌 것처럼, 이스탄불 역시 그러했으리라.


이스탄불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324년)이자 그리스도교의 중심지로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는데, 제4차 십자군(1202~1204년)에 의해 점령을 당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지배 하에 놓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 무자비한 약탈과 유린을 겪었고, 수많은 문화재와 유물들이 파괴됐다고 한다. '종교'라는 이름을 빌려 '성전(聖戰)'이라 불린 전쟁이었지만, 실제로는 '돈'이라고 하는 세속적 욕망이 투영된 씁쓸한 약탈에 지나지 않았다. 



'호텔 아카디아 블루 이스탄불'에서 펼쳐지는 뷰


1261년 팔레올로고스 왕조에 의해 침략을 받았고, 이로써 지배권이 다시 넘어가기도 했다. 그로부터 약 2백 년 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자신의 숙원이었던 콘스탄티노플 점령을 위해 온갖 열의를 쏟았고, 포위 작전에 이은 총공격을 통해 마침내 함락(1453년)시키고야 말았다. 메메드 2세는 성소피아 대성당을 찾아 그곳을 모스크(mosque, 이슬람 사원)로 바꾸며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고,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세계적 도시로 재건하는 데 온힘을 쏟았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수도가 앙카라(Ankara)로 이전됐고, 콘스탄티노플은 공식적으로 이스탄불이라는 이름으로 개칭(1930년)됐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덕분에 이스탄불은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 로마와 비잔틴, 오스만의 문화가 섞여 있을 수 밖에 없는 문화의 보고(寶庫)가 됐다. 지금에야 이슬람 문화가 압도적으로 우위에 서있지만, 이스탄불의 곳곳에 과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다양한 문화적 유산들이 새겨져 있다. 이스탄불으로부터 '묘하다'는 인상을 받는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이스탄불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가득한 구시가지, 과거와 현대가 조화를 이루고 있는 신시가지, 그리고 서민적인 느낌이 강한 아시아 지역이다. 일반적으로 이스탄불을 여행하게 되면 아시아 지역을 제외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둘러보게 되는데, 여행 기간이 지나칠 정도로 넉넉하지 않은 이상 그 정도로도 충분하다. 굳이 아시아 지역까지 가지 않더라도 워낙 볼거리가 많기 때문이다. '서민적인 모습'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의 구석구석을 돌아나니더라도 알 수 있기에 큰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따라서 여행 일정을 짤 때, 자연스레 아시아 지역은 제외하게 됐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이 두 구역만 충실히 보고 오자는 것이 계획의 시작이었다. 첫 번째 고민은 (원활한 여행을 위해) 숙소를 잡는 것이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중간 지점에 잡아두는 것도 염두에 뒀지만, 역시 한 번쯤 숙소를 옮기는 게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짐을 한번 옮기는 게 번거롭긴 하겠지만, 숙소를 거점삼아 좀더 깊이 있는 여행을 하기 위해선 숙소를 옮기는 편이 나았다. 번거로움으로 치자면, 한번 나가면 재정비가 어려운 전자가 훨씬 컸으리라.


아타튀르크 국제 공항은 도심에서 서쪽으로 24㎞ 떨어진 곳에 위치(M1 지하철을 타고 제이틴부르누까지 이동한 다음 T1 트램으로 환승하면 곧장 구시가지로 올 수 있다.)하고 있다. 이동 경로와 여행 동선 등을 고려했을 때 첫 번째 숙소로 최적지는 구시가지였고, 그 중에서도 술탄 아흐메트 지역이었다. 블루 모스크를 비롯해 아야 소피아 박물관, 톱카프 궁전 등 이스탄불 하면 떠오르는 여행지들이 밀집해 있는 가장 찬란한 공간이므로 가장 빨리 만나고 싶었다. 또, 여행객들이 워낙 많이 모이기 때문에 치안 면에서도 안심이 됐다.






1. 호텔 아카디아 블루 이스탄불(Hotel Arcadia Blue Istanbul) 

주소 : Dr. Imran Oktem Cad. No:1, Istanbul, 34440 Turkey

기간 : 2017. 9. 12~9. 15. (3박) 

결제 금액 : 257,639원

평가 : 교통(★★★★★), 시설(★★★★)


앞선 여행기에서도 밝혔지만, 숙소를 정하는 원칙은 간단하다. 위치, 시설, 가격. 공항에서 무거운 짐을 들고 이동해야 하는 고난을 최소화 할 수 있어야 하며, 여행 동선을 짜는 데 있어 최적의 지점에 있어야 한다. 깔끔하고 안락한 숙소는 하루종일 헤매고 다니느라 녹초가 된 여행자에게 '위로'가 된다. 따라서 약간의 지출은 감안해야 한다. 이걸 '출혈'이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숙소 비용을 아끼려다 애를 먹은 경험이 있는 터라 '좋은' 숙소를 고르는 데 주저하지 않게 됐다. 


첫 번째 숙소로 선택한 '호텔 아카디아 블루 이스탄불'은 술탄 아흐메트 광장(트램 역)에서 느긋한 걸음으로 5분 거리에 있다. 위치만으로 보면 최상이라 할 수 있다. 주요 관광지가 모여 있기 때문에 일정을 짜기에도 수월했다. 9월의 이스탄불은 워낙 뜨거웠는데,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씻고 재충전을 하기에도 더할나위 없었다. 무엇보다 블루 모스크를 밤낮 가리지 않고 볼 수 있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또, 숙소 꼭대기 층에서 감상할 수 있는 뷰는 감동 그 자체였다. 






2. 머큐어 이스탄불 탁심(Mercure Istanbul Taksim) 

주소 : Omer Avni Mah Inonu Caddesi No 42 Gumussuyu Beyoglu, Istanbul, 34437 Turkey

기간 : 2017. 9. 15~9. 17. (2박) 

결제 금액 : 189,162원

평점 : 교통(★★★★), 시설(★★★★★)


구시가지에서 3박을 하며, 그곳을 샅샅이 훑은 뒤에야 신시가지로 이동했다.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한 곳에 숙소를 정하고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여행할 수도 있겠지만,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했을 때 오히려 큰 손해다. 또, 구시가지에 있는 숙소로 돌아오기 위해 신시가지에서 이동하는 데 소모되는 에너지도 만만치 않을 것이었다. 아무래도 숙소가 가까이 있어야 마음껏 돌아다니며 즐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뿐만 아니라 '익숙함'에 길들여진다는 점에서 마뜩지 않았다. 


두 번째 숙소는 돌마바흐체 궁전(Dolmabahce Palace)과 근거리에 있는 '머큐어 이스탄불 탁심'으로 결정했다. 40번 버스를 타면 탁심 광장(Taksim Square)으로도 이동이 수월하기 때문에 위치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물론 좀더 신시가지 중심 쪽에 숙소를 구하는 선택도 가능하다. 하지만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ı)나 베벡(Bebek)에 들릴 생각이었기에 이동거리를 생각했을 때 오히려 외곽 지역에 낫다는 생각이었다. 결과적으로 만족스러운 결정이었고, 특히 객실 내부가 환상적이라 더욱 마음에 들었다. 





'머큐어 이스탄불 탁심'에선 최고의 조식을 맛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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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터키는 위험하지 않아?'


최근 들어 해외 여행을 곧잘 다니다보니 주변 사람들이 으레 묻곤 했다. "다음 여행지는 어디야?" "응? 이번엔 터키, 이스탄불에 다녀오려고." 그렇게 대답하면 반드시 같은 질문이 되돌아 왔다. "터키는 위험하지 않아?" 당연한 반응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 이스탄불은 '황색 경보(여행 자제)' 지역으로 분류돼 있다. 지난 8월 22일을 기점으로 이스탄불을 제외한 터키의 전 지역이 황색 경보에서 남색 경보(여행 유의)로 하향 조정됐지만, 여전히 이스탄불은 황색 경보 지역으로 남아 있다. 


터키가 위험한 곳이라는 인식은 지리적 요소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터키는 수니파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인 IS(이슬람 국가, Islamic State)의 본거지였던(과거형으로 표현한 까닭은 지난 8일 BBS방송은 IS가 시리아의 거점을 모두 잃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시리아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게다. 지난 2016년 6월 이스탄불 아타튀르크 공항에서 테러가 발생해 무려 45명이 사망했던 사건에 대한 기억과 같은 해 7월 발생했던 쿠데타 미수 사건도 큰 몫을 할 테니 말이다. 


터키 이스탄불의 아타튀르크 공항

 

아타튀르크 공항의 보안 검색대. 공항으로 들어가기 전에 모든 짐을 검사 받아야 한다.


그래서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는 대답할 수 없지만, 바깥에서 바라보는 것만큼 불안하거나 공포가 잠재돼 있진 않다고 말할 순 있다. '테러'로 치자면 런던, 파리, 바르셀로나 등에서 계속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므로 안전 지역은 사실상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따라서 위험을 최소화하려면 대한민국에 머무는 게 최선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위험은 사실상 제로로 수렴한다. 그런데 세계인들은 북핵의 위협을 상시로 받고 있는 한반도의 상황을 가장 걱정하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닌가. 


확률을 따져보더라도 여행지에서 테러로 인해 죽게 될 확률은 교통사고로 인해 죽을 확률보다 훨씬 미미하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교통사고로 인한 사망자 수가 4,292명이라고 하니, 실질적으로 우리에게 위험이 되는 요소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애초에 여행에는 '위험'이 내포돼 있다. 달리 말하면 여행은 위험을 감수함으로써 무언가를 얻는 도전 행위다. 물론 가능하면 그 위험을 줄이는 방향으로 계획을 짜는 게 바람직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리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다. 


9월의 터키(뒤늦은 여행기다)는 엄청나게 뜨거웠다. 수직으로 내려꽂히는 뜨거운 햇볕이 그 주범이긴 했지만, 세계 각지에서 몰려온 수많은 여행객들이 내뿜는 열기도 제대로 한몫했다. 주요 관광지에는 어김없이 사람들이 가득 들어찼고, 트램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이스탄불은 '터키는 위험하지 않아?'라는 두려움의 만류를 과감히 떨쳐버린 사람들이 발산하는 호기심과 에너지로 가득했고, 그 속에서 묘한 쾌감이 느껴졌다. 여행은 그런 것이었다. 또 하나의 작은 깨달음이었다.


갈라타 탑


'위험'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으니, 그 화두를 좀더 이어나가보자. 실제로 이스탄불이 위험한 까닭은 다른 데 있었다. 첫날 공항에서 블루 모스크(Blue Mosque) 근처의 숙소로 이동한 후 간단히 짐을 풀어놓고 곧바로 밖으로 나갔다. 금세 저녁이 돼 주변은 어두워졌다. 비행기가 1시간 이상 연착된 탓에 생각했던 일정보다 늦어졌다. 예정대로라면 16시 10분에 도착했어야 했지만, '공항 사정'이라는 이유로 1시간 이상 지체됐다. 좀더 느긋하게 첫날을 보내려던 계획이 뒤틀어졌다. 


곧바로 숙소 밖으로 나간 까닭은 오로지 하나였다. 야경! 여행 첫날의 기대감과 흥분감을 가장 완벽하게 충족시킬 수 있는 방안은 바로 그 도시의 최고의 뷰포인트(viewpoint)를 찾는 것이다. 도쿄에 도쿄타워가 있고, 파리에 에펠탑이 있다면, 이스탄불엔 갈라타 탑(Galata Tower)이 있다. 갈라타 탑은 비록 높이가 67m밖에 되지 않지만, 신시가지의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 제법 괜찮은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트램(T1)을 타고 카라쾨이(Karaköy) 역에서 내리고 길을 건넜다. 


여기에서부터 '위험'이 시작된다. '밤'의 이스탄불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편이다. 어두침침하다는 표현이 좀더 정확할 것 같다. 스산한 느낌마저 감돈다. 갈라타 탑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술에 취한 노숙자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펴고 있었는데, 그 중 몇몇은 갑자기 다가와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랍인 남성 2명이 다가왔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더니 사진을 찍어달라는 게 아닌가. 어려운 일도 아닐 뿐더러 여행 첫날의 긍정적인 기분이 가득해 기꺼이 응해줬다.


사진을 찍어준 후 가던 길을 가려는데 따라붙으며 계속해서 말을 걸어왔다. "반갑다. 어디에서 왔냐?", "갈라타 탑으로 가는 거냐? 우리도 갈라타 탑에 올라가는 중이다.", "나는 OOO이고, 얘는 XXX이다. 너의 이름은 뭐냐?", "XXX은 두바이에서 놀러 왔다. 우리는 이스탄불에서 3일을 머물 예정이다. 넌 언제 여기 왔냐?", "혼자 왔냐, 그렇다면 같이 움직이자.", "한국과 터키는 형제의 나라다.", "갈라타 탑에 갔다가 이스티클랄 거리를 들리고, 뮤직 페스티벌에 갈 건데 같이 가는 게 어때?" 



이스티클랄 거리


정말이지 쉴 새없이 말을 걸어 왔다. 만약 '터키 술값 사기'와 관련한 뉴스와 '호객꾼을 조심하라'는 여행 책자의 경고를 숙지하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경계를 풀었을지도 모르겠다. 이들의 수법은 다음과 같다고 한다. 친근하게 접근한 후 '함께 다니자'고 제안하는 등 쉴새 없이 대화를 걸어 정신을 사납게 만든다. 작업 대상의 경계심을 푸는 그들만의 사기 전략이기도 하다. 처음부터 작업 장소로 가기보다는 관광지를 진짜 '구경'하는 것처럼 연기를 한다. 사진을 찍기도 하고 찍어달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 다음에는 결국 '술집'으로 가게 되는데, 그 전에 카페나 식당에 들리거나 길거리 음식을 사먹으며 자신이 돈을 지불하는 경우도 있다. 이 역시 경계심을 풀게 만드는 전략의 일부다. 그렇게 술집에 따라가게 됐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적게는 수십, 많게는 수백 만원에 달하는 요금이 청구된다. 사기꾼들은 자신들이 절반 혹은 1/N을 하겠다고 나서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술값 지불을 거절하는 행동을 취하면 험악한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고 한다. 




갈라타 탑까지 맹렬하게 따라붙으며 말을 걸어오던 그 터키 사기꾼들을 떼어놓느라 제법 힘이 들었다. 갈라타 탑으로 가는 길이 워낙 음침해 재미삼아 몇 마디 나누긴 했지만, 사실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과 한마디도 섞지 않는 것이리라. '이스탄불의 명동'이라 불리는 이스티클랄 거리(Istiklal Avenue)도 한번쯤 가볼 만 하지만, 그곳의 밤문화를 깊이 체험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듯 싶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 정신도 없을 뿐더러 사기꾼들로 득실대는 곳이니 말이다.


'친절하게 다가오는 터키인'을 조심하자. 동양인을 향해 접근하는 그들은 사기꾼일 확률이 100%에 가깝다. 말도 받아주지 말고, 눈길도 주지 말자. 그렇다고 모든 터키인을 경계할 필요는 없겠지만, '형제의 나라'라는 듣기 좋은 말에 취해 마음을 활짝 열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그러다가 지갑까지 몽땅 열어야 할지도 모르니 말이다. 터키가 진짜 위험한 이유는 '테러' 때문이 아니라 동양인 남성을 타깃으로 잡고 접근하는 '사기꾼(호객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역시 위험은 거대하고 엄청난 것에서부터 오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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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맑고 화창한 날씨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비가 조금 내려도 감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우산을 가볍게 뒤집어버리는 강풍이 불어닥쳤고, 몸을 제대로 가누기가 어려웠다. 부디 다음 날 아침에는 잠잠해지기를 기대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뜨자마자 창가로 가 커튼부터 젖혔다. 물기를 머금은 자동차 바퀴소리가 불길했지만, 도로 위에 남아있는 빗물이길 바랐다. 


아, 이럴수가. 여전히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하늘은 고집스러웠다. 그칠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오스트리아 빈에 머무는 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만약 여행 일정에 여유가 (엄청) 많았다면, 인천 공항에서 사왔던 책을 들고 카페에 앉아 커피나 음료를 마시며 독서를 하는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만큼 시간이 넉넉지 않았다. 언제나 여행자에겐 시간이 부족하다.


원래 계획에 있었던 슬로바키아의 브라티슬라바(Bratislava)에도 흥미를 잃었다. 고작 1시간 거리에 있는 그곳의 날씨도 별반 다르지 않을 테니 말이다. 창밖을 바라보며 고민이 빠졌다. 빈의 박물관이나 미술관 위주로 일정을 짤 것인가, 비가 오더라도 브라티슬라바로 갈 것인가.. 순간 번뜩하고 제3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참에 아예 먼 곳으로 가볼까? 


부다페스트 역 내부


기차를 타고 이동하면 비를 피할 수 있을 테고, 먼 거리를 이동하면 날씨가 바뀌거나 이동하는 시간 동안 비구름이 사라질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기특하기도 하지. 당장 구글 지도를 보면서 적합한 장소를 물색했다. 음, 음, 음.. 여기 있다!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Budapest)! 지나치게 멀지도 않고,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그 곳. 3시간 정도면 적당하다 싶었다. 


부다페스트 역 외부 



"오길 정말 잘했다!"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했던 즉흥적인 선택이었다. 돌이켜 보면 지난 여행에서 가장 훌륭한 결정이었다. 부다페스트의 하늘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푸른 빛이 감도는 하늘과 새하얀 구름이 만들어 낸 풍경들이 경탄스러웠다. 놀라지 마시라. 하늘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예뻐졌다. 동유럽의 새파란 하늘을 만끽할 수 있었던 하루였다. 대견함은 뿌듯함으로 진화했고,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잠시 쾌적한 부다페스트 거리를 걷다가 지하철을 타기 위해 이동했다. 계획은 이랬다. 우선, 부다페스트를 가로질러 흐르는 도나우 강(Donau, 독일 남부에서 시작된 이 강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를 거쳐 헝가리에 이르고,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으로 이어진다)과 강변에 세워진 국회의사당 등 주변(페스트 지역) 풍경을 감상하고, '부다 왕궁(Budavári Palota)'에 올라 부다페스트의 전경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Hösök Tere)'를 비롯해 도심을 전반적으로 둘러보고, 저녁 무렵 '아경'을 보기 위해 다시 '부다 왕궁'에 오르기로 했다. 동선으로 보면 중복이라 비효율적이라 할 수 있지만, 도나우 강과 그 주변의 풍경을 낮과 밤, 중복으로 보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날씨가 좋았다. 또, 부다 왕궁의 낮과 밤도 궁금했다. 인공적인 빛이 발산하는 아름다움도 매력적이지만, '햇빛'이라는 천연 조명의 깊은 맛을 따라갈 수 있겠는가.


국회의사당


Calvinist Church


2호선을 타고 Keleti pályadvar 역을 출발해 Batthyány tér 역까지 이동했다. 지상으로 나오자 입이 떡 벌어졌다. 강 건너편으로 보이는 국회의사당 건물과 푸른 하늘이 그림처럼 빛났다. "이야, 진짜 오길 잘했다" 정말이지 이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중얼거렸는지 모른다. 강을 따라 이어진 도로를 걸으며 부다페스트의 낭만에 빠져들었다. 마냥 걷기만 해도 행복감이 솟구쳤다. 계획에 없던 즉흥성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자 쾌감은 더욱 커졌다. 


파리를 여행했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트램(Tram)이 도심 외각에서만 운행을 하고 있어 굳이 탈 일이 없었다. 하지만 체코 · 드레스덴 · 빈에서는 그 활용도가 훨씬 커졌다. 부다페스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버스는 노선이 복잡해 이용하기 어려운데, 트램은 훨씬 간단했다. 또, 애초부터 24시간 권(1,650 포린트 = 약 6,800원)을 끊어두었으니 대중교통을 마음껏 이용하기로 했다.

 


부다 왕궁으로 올라가는 트램


사람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


믿을 건 두 다리뿐, 걸어 올라가기로 했다






19번과 41번 중 빨리 오는 트램을 타고 Batthyány tér 역과 부다 왕궁을 왕복했고, 다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Deák Ferenc tér 역까지 이동한 후 1호선으로 환승해 Hösök Tere 역으로 이동했다. 처음에는 낯설었던 일들이 점차 익숙해는 게 느껴졌다. 여행지의 대중교통을 헤매지 않고, 제법 능숙하게 이용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오)는 데에서 오는 만족감이랄까.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



부다페스트 영웅 광장(회쇠크 광장)은 헝가리의 건국 1,0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광장인데, 그 좌우에 부다페스트 미술관과 또 다른 미술관인 뮈처르노크가 위치해 있다. 광장 중앙에 있는 코린트 양식(Corinthian order)의 기념비는 그 높이가 36m에 달하고, 헝가리 민족의 수호신인 천사 가브리엘이 날개를 편 채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서 있다. 


기념비 아래에 아르파드(Árpád, 845년 경-907년 경)를 비롯한 헝가리 민족 초기 부족장 7명의 기마상이 있고, 기념비 양 옆으로 헝가리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했던 인물 14명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미욱한 중생이 헝가리의 역사를 어찌 알겠는가. 그저 푸르스름한 동상과 한없이 푸르른 하늘의 '깔맞춤'에 감탄을 한 후 서둘러 뒤편의 공원으로 이동할 밖에.


버이더후녀드 성






영어로 'City Park'라는 뜻의 시립 공원(Városliget)은 제법 규모가 컸다. 공원 내부에 동물원과 세체니 온천, 버이더후녀드 성(Vajdahunyad vára) 등이 있었고, 호수와 인공 분수 주변에는 휴식 장소가 마련돼 있었다. 부다페스트의 시민들이 찾고, 많은 여행객들이 머무는 장소답게 깔끔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왠지 모르게 동화 속의 나라에 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호수의 벤치에 앉아 따뜻한 햇살을 담뿍 맞으며 여유를 즐겼다. 어두워지기 전까지는 제법 시간이 남았다. 지도를 보면서 다음 동선을 머릿 속으로 그렸다. 가고 싶은 곳은 많았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야속하게 느껴졌다. 우선, 도시의 중심부로 들어가서 부다페스트만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극장이라는 'Corvin Mozi'에 들어가보기로 했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도 가보기로 하자. 








도심의 중앙부는 활력이 넘쳤다. '동유럽', 특히 '헝가리'라는 이름이 갖고 있는 '노후한'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었다. 패션 거리의 'C&A'라는 의류점 앞에서 만난 '브레이킹 댄스'는 헝가리라는 나라에 대한 생각을 180도 바꿔 놓았다. 그곳은 젊고, 힘차고, 에너지가 넘쳤다. 다만, 영화관은 생각보다 소박했는데, 예스러운 분위기가 남아 있어 멀티플렉스가 휩쓸기 전의 영화관이 떠오르기도 했다. 


다람쥐마냥 재빠르게 돌아다녔지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센터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입장 시간이 지난 뒤라 건물 밖에서 사진만 몇 장 찍고 돌아서야 했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흘렀던가. 슬슬 해가 지고 있었다. 이제 때가 됐다. 부다페스트의 진정한 '하이라이트'를 만나러 갈 타이밍이다. 하루종일 돌아다닌 탓에 두 다리는 한껏 지쳐 있었지만, 다시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녹초가 된 두 다리도 살려내는 법이다.


아래의 사진은 부다 왕궁에서 내려다 본 부다페스트의 야경이다. 이 글을 읽어준 당신에게 보내는 아주 작은 선물이다. 비록 부족한 사진이지만, 마음껏 감상하길.. 마음껏 빠져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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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10시 52분에 프라하를 출발한 기차가 14시 50분이 돼서야 빈(Wien)에 도착했다. 거의 꼬박 4시간이 걸렸다. 체코는 평지와 산지의 비율이 7:3 정도인데, 기차로 이동하는 내내 푸른 초원을 만끽할 수 있었다. 간혹 건물들이 눈에 띠긴 했지만, 워낙 간헐적이라 '밋밋해진' 풍경들에 지루해져 어느덧 잠이 쏟아졌다. 인간이란 이토록 간사한 것이다. 어떻게 유럽의 풍경들이 밋밋하고 지루할 수 있단 말인가. 


한참을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도착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다. 중간중간 몇 번의 스트레칭을 거듭한 끝에 결국 국경을 넘고 빈에 당도하게 됐다. 맙소사, 오스트리아라니, 그것도 빈이라니! 빈 중앙역 (Wien Hauptbahnhof)의 근처(도보로 5분)에 있는 숙소로 이동해 짐을 풀고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할 채비를 했다. 우선, 숙소에서 걸어서 5분이면 도착하는 벨베데레 궁전(Belvedere Palace)부터 가 볼 예정이다.





1. 벨베데레 궁전

- 입장 시간 : 10시부터 18시까지 

- 입장료 : 14유로


벨데베레 궁전은 상궁(Oberes)과 하궁(Unteress)로 나뉘어져 있는데, 아무래도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의 작품을 만날 수 있는 상궁 쪽이 보다 핫한 곳이라 할 수 있다. 숙소가 인근에 있어서 산책 겸 총 3번 방문했는데, 역시 한국 관광객들의 방문이 잦았다. 패키지 여행의 필수 코스로 지정돼 있는 듯 했다. 도심 속에 있는 궁전이라는 점에서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Jardin du Luxembourg)'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구스타프 클림트, 「유디트 I(1901)」, 「키스(1907-8)」

에곤 실레, 「포옹(1917)」, 「가족(1908)」

자크 루이 다비드, 「생 베르나르 고개를 넘는 나폴레옹(1908)」

빈센트 반 고흐, 「오베르의 들판(1890)」

클로드 모네, 「지베르니 정원길(1902)」


벨베데레 상궁이 보유하고 있는 컬렉션은 매우 훌륭한 편이다.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실부터 향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처음부터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는 것도 좋다. 유럽의 어느 미술관을 가더라도 한 점씩 포함돼 있기 마련인 고흐나 모네의 그림이야 그렇다치더라도 자크 루이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의 '기개'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긴 아깝지 않은가. 





아쉬운 점은 '사진'을 찍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유럽을 여행하면서 미술관을 찾았을 때 가장 '놀랐던' 건 관람에 있어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다시 말하면 관람객 친화적 분위기라고 할까. 접근을 불허하는 라인을 만들어 놓지도 않았고, '조용히 하라'는 암묵적 억압도 없었다. 또, 사진 촬영도 허용됐다. (다만, 플래시와 셀카폰은 금지였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그림'과 마주했고, 대화를 나눴으며, 그 순간을 만끽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벨베데레 상궁은 사진 촬영을 불허했고, 이 때문에 재미있는(?) 장면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금지된 욕망은 그만큼 유혹적이라 했던가. '카메라'로만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휴대전화가 '카메라'를 대신하는 시대가 아니던가. 저마다 휴대전화를 꺼내드는데, 일일이 그들이 사진을 찍는지 아닌지 확인을 하는 건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당연히 틈을 봐서 몰래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띠었다. 


그 비양심적인(?) 행동들은 대체로 어쩔 수 없이 용납됐지만, 구스타프 클림프 전시실에서만큼은 절대로 용납되지 않았다. 그 곳에 상주하고 있는 직원은 잔뜩 날을 세운 날카로운 눈빛으로 오로지 사진을 찍으려는 행동을 취하는 듯한 관람객들을 예의주시했다. 앞서 몰래 사진을 찍어왔던 사람들은 이번에도 같은 기술을 시전하려 했지만, '감시'를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을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깨갱'하는 모습이 왠지 통쾌했다.






2. 성 슈테판 대성당


성 슈테판 대성당은 빈의 상징이자 심장이라 할 만한 곳이다. 하늘 높이 뽀죡하게 솟아 있는 첨탑이 '내가 성 슈테판 대성당이다'라고 외치는 듯 하다. 1137년에 착공해 1160년에 완공됐는데, 여러 차례 공사를 거쳤다.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양식의) 성당이다. 다양한 색상으로 꾸며진 지붕 타일은 빛을 받으면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데, 그 압도적인 외관은 보는 이의 입을 쩍 벌어지게 만든다. 덩달아 카메라 셔터를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성당 내부는 무료로 구경이 가능한데, 전망대에 올라가려면 입장료(남탑 : 4.5유로, 북탑 : 5.5유로)를 내야 한다. 북쪽 탑에 오르면 형형색색의 지붕 타일을 볼 수 있다. 성 슈테판 대성당 주변에는 케른트너 거리, 그라벤 거리 등 쇼핑 거리가 펼쳐져 시선을 끄는데, 모차르트하우스(Mozarthaus), 페터 성당(Peterskirche), 로스하우스(Loos haus) 등 관광 명소가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자.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Notre-Dame de Paris)에서도 그랬지만,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도 알 수 없는 위안을 얻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에서는 지친 발걸음을 이끌고 휴식을 취하면서 얻은 안식이었다면, 이번에는 인근의 슈니첼(Schnitzel)로 유명한 '피그뮐러(Figlmueller)'라는 식당에서 한껏 음식을 섭취한 다음이라 다소 '배부른' 안식이었다는 차이점이 있다. 그래도 유서 깊은 종교 시설이 주는 위안은 다르지 않았다.


수많은 여행객들이 예의를 갖춘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성당 안을 구석구석 누볐고, 내부를 가득 채운 오르간 소리는 속세로부터 온 사람들의 다소 시끄러울 수 있는 소음을 완벽히 제압한 채 울려 퍼졌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조용히 그 공간을 느끼고, 그 공간에 나 자신을 맡겼다. 여전히 알 수 없는 위로였고, 여전히 풍성한 채움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성당을 나왔을 때, 갑자기 쏟아진 비에도 짜증이 나지 않았던 이유가?








3. 미술사 박물관 

- 입장 시간 : 10시부터 18시까지 

- 입장료 : 15유로


사실 빈(Wien)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여러모로 충분하지 않았다. 우선,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고, 게다가 날씨마저 도와주지 않았다. 성 슈테판 대성당을 나서던 저녁 무렵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다음 날까지 계속해서 쏟아졌다. 아침에 숙소의 창문을 여는 순간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시간은 어김없이 흐르고, 그에 따라 여행은 계속될 수밖에. 


사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빗발이 사납게 날렸고, 상상을 초월하는 강풍이 불어닥쳤다. 우산은 걸핏하면 뒤집어졌고, 옷은 마를 틈이 없었다. 사실 넉넉히 생각하면, 그 또한 여행이다. 언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몸을 가누기 힘든 바람을 맞아내며 걸어가는 경험을 해보겠는가. 오히려 사람들은 웃음을 터뜨렸고, 도로 곳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은 잠시나마 그 상황을 즐기게 만들기도 했다. 나도 질러볼 걸 그랬나?


'미술사 박물관'이라는 도피처가 있었기에 '반나절'은 어찌 보낼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궂은 날씨는 여행에 있어 결코 반가운 조건이 아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미술사 박물관(Kunsthistorisches Museum)은 10시부터 개관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비바람이 몰아쳐 관람객들이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눈빛 공세를 보냈지만 얄짤 없었다. 미술관 직원들은 정확히 10시가 되어서야 문을 열어주었다.


자꾸 파리와 비교를 하게 되는데, '미술사 박물관'은 루브르 박물관에 필적하는 컬렉션을 갖췄다. 괜히 유럽 3대 미술관(또 다른 한 곳은 '마드리드의 프라도'이다.)의 하나로 꼽히는 게 아니다. 그만큼 합스부르크 왕가(The House of Habsburg)가 16세기 이후 유럽의 상당 영역을 지배하며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지 보여준다. 과거 프랑스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라파엘로, 「초원 위의 성모(1505-6)」

아르침볼도, 「여름(1563)」

브뢰헬, 「바벨탑(1563)」, 「농가의 결혼식(1568)」

벨라스케스, 「왕녀 마르가리타 테레사 초상화 시리즈(1653-4/1659)」

렘브란트, 「자화상(1652)」

루벤스, 「1636-1640)」


0.5층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조각, 그리고 이집트의 유물이 전시돼 있고, 1층에는 유럽 각국의 주요 회화들이 자리하고 있다. 2층에는 동전과 메달 등이 있다. 아무래도 관심은 1층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 라파엘로,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루벤스 등 거장들의 그림들도 심장을 벌렁하게 만들었지만, 무엇보다 브뢰헬 컬렉션은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은 설렘을 안겨줬다.


특히 인간의 오만함을 담아낸 「바벨탑」은 워낙 좋아하던 그림이라 실제로 봤을 때의 감격스러움은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책이나 컴퓨터를 통해서만 봤던 작품을 현실에서 내 '눈'으로 볼 수 있다니..! 역시 가장 많은 관람객들이 머물렀다 가는 그림이기도 했다. 워낙 방대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어서 한 바퀴를 둘러보는 데 진이 빠질 정도였는데, 4시간의 관람에도 마지막까지 브뢰헬 컬렉션을 한번 더 둘러보고 퇴장했다. 









+ 링 도로의 야경


그밖에도 왕궁(Hofburg), 자연사 박물관(Naturhistorisches Museum), 무제움콰르티에 빈(MuseumsQuartier Wien), 레오폴트 박물관(Leopold Museum), 무목(mumok), 제체시온(Secession) 등 빈을 '예술의 도시'라 부르는 이유가 되는 명소가 수두룩하다. 또, 트램을 타고 링 도로를 이동하며 야경을 즐기는 것도 잊지 말자. 물론 낮에 링 도로를 돌며 <비포 선라이즈> 속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의 낭만을 떠올려보는 것도 좋다. 


국회의사당, 시청사, 빈 대학, 포티프 성당을 지나 도나우 강을 따라가는 트램에 몸을 맡기고 경치를 구경하다보면 그동안 쌓였던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짐을 느끼게 된다. 물론 한 번으로는 부족하고, 여러 번 왕복을 할 필요가 있다. 주요 스팟에 내려 야경을 감상하고, 다음 도착하는 트램을 타고 이동하는 식으로 즐기는 것도 좋다. 그러기 위해선 24시간 권(혹은 48시간 권이나 72시간 권)을 구입해 활용하는 게 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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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활자'를 통해 묘사된 '곳'이나 '것'을 '상상' 속에서 재현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만나 '실체적'으로 '경험'하는 것. 여행이 주는 매력 중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아닐까. 아니, 어쩌면 그와 같은 상상과 기대를 '경험'하는 것이야말로 여행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가령, 소설 속에 등장했던 장소, 예를 들면 도시나 마을, 더 세밀하게는 특정한 거리 속에 '나'를 두는 건 설레고 흥분되는 일이다. 


굳이 활자가 아니더라도 좋다. 영화나 다큐멘터리, 혹은 누군가의 여행 사진 속에서 본 '장면'들에 나를 대입하는 일은 어떠한가. 쇼핑의 도시 홍콩의 '하버시티'를 둘러본다거나,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청와대의 거울의 방이 아니다)에서 그 호화로움을 만끽하고, 프라하 성에서 울긋불긋 아름답게 물든 시내를 바라보며 커피(스타벅스가 있다)를 한잔 마시는 건 어떠한가. 


츠빙거 궁전


슈탈호프의 벽화 '군주의 행렬'


아무리 정교한 묘사라 할지라도, 그러니까 '영상'과 '사진'이라 할지라도 '실제'에는 미치지 못한다. TV 속 먹방에서는 그리 맛있게 '연출'됐던 음식들이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맛을 선사하지 못하는 경험이 허다하지 않던가. 그 경험의 결과가 어떻든 간에 그 대상을 '내'가 실제로 느낀다는 게 중요하다. 그 자체로 소중하다. 또, 그래야만 진짜 '내 것'이라 할 만 하다. 


우리는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가 생각보다 훨씬 작은 그림이라는 걸 안다. 그러나 그 '앎'은 제한적이다. 77cm x 55cm라는 설명을 보고서 그 크기를 짐작해 보지만, 직접 루브르 박물관 안에 들어가서 그 압도적인 크기에 짓눌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들 속을 헤매다가 모나리자」를 마주한 순간의 경험이야말로 진짜 '앎'이라 할 만 하지 않겠는가.


알베르티눔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그림'으로 넘어왔는데, 드레스덴의 알베르티눔(Albertinum)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게 서론이 길어졌다. '유명세'로 따지자면 레지던츠 궁(Residenzschloss), 츠빙거 궁전(Dresdner Zwinger)에 한참 못 미치겠지만, 드레스덴의 '대표' 박물관(미술관)이라 할 수 있는 알베르티눔에 다녀와야 드레스덴을 보고왔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츠빙거 궁전에도 라파엘로의 「시스티나의 성모」, 베르메르의 「편지 읽는 소녀」 등 거장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지만, 알베르티눔이 소장하고 있는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의 「산 위의 십자가」 쪽에 좀더 무게가 실렸다. 무엇보다 알베르티눔을 꼭 가야겠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오토 딕스(Otto Dix)'라는 화가의 그림들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웬만한 여행 책자에는 그런 정보가 수록돼 있지 않다.)


댄서 아니터 베르버 사진, 오토 딕스 「댄서 아니타 베르버 초상」


"'미의식'이란 '예쁜 것을 좋아하는 의식'이 아니다. '무엇을 미라고 하고 무엇을 추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다. 자신의 '미의식'을 재검토한다는 것은 자신이 무언가를 '예쁘다'고 느꼈을 때,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라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렇게 느껴도 좋은 건지 되물어 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미의식이 실은 역사적 · 사회적으로 만들어져온 것임을 깨닫게 된다." - 서경식, 『고뇌의 원근법』-


오토 딕스라는 이름을 처음 알게 된 건, 서경식의 고뇌의 원근법』이라는 책을 통해서 였다. 서경식은 그 책에서 "왜 내가 본 모든 한국 근대미술 작품은 그렇게도 예쁘게 마감되어 있는 것일까"라며 '미의식'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에게 미의식이란 마냥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엇을 미(美)라고 하고 무엇을 추(醜)라고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의식"이었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미술 작품들은 기존의 예쁜 것, 아름다운 것을 답습할 뿐, 그것이 왜 예쁘고 아름다운지 혹은 그 예쁘고 아름다운 것을 그대로 느껴도 괜찮은지에 대한 '고뇌'가 빠져있다는 것이다. '추한 현실 속에서 발버둥치는 인간이 창작하는 미술은 추한 것이 당연'한데, 그렇지 못한 한국 근대미술에 대해 서경식은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다양한 작가들을 거론하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오토 딕스였다.



제1차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했던 오토 딕스는 전쟁의 참혹함을 몸소 체험했다. 1915년 9월부터 1918년 12월까지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서부전선의 참호에서 시간을 보냈던 그는 "전쟁이 끝나고 수년 동안 같은 꿈을 반복해서 꾸었는데, 폭격으로 폐허가 된 집들 사이로 난 길을 포복을 하여 벗어나려 애쓰지만 결국 그 길을 벗어나지 못하는 꿈이었다"고 회고했는데, 그 경험을 녹여 낸 그림이 바로 「전쟁 제단화」(1929~1932)이다.


오토 딕스는 그의 전장 일기에 "이, 쥐, 철조망, 벼룩, 유탄, 폭탄, 구멍, 사체, 피, 포화, 술, 고양이, 독가스, 캐넌포, 똥, 포탄, 박격포, 사격, 칼, 이것이 전쟁! 모두 악마의 짓거리!"라고 적어 두었는데, 그만큼 그에게 전쟁과 그로 인한 죽음은 중요한 모티프(motif)이자 소재였다. 그래서 오토 딕스의 그림에는 전쟁이 휩쓸고 간 사회의 공포와 혼란, 절망 등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그림은 일견 '추'하다. 




군인이 수녀를 강간하려는 순간을 담기도 하고(「군인과 수녀」), 늙고 지친 모습의 창녀들을 그림으로써(「세 여자」, 「거울 앞에서」, 「뚜쟁이」) 독일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기도 한다. 또, 성냥팔이를 하며 생계를 겨우 이어가는 상이군인의 모습은 전쟁 이후 군인들이 겪고 있는 박탈감을 표현한다. 이러한 그림들 때문에 오토 딕스는 나치 정권에서 탄압을 당한다. 그림이 압수되기도 하고, 히틀러를 암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기도 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오토 딕스의 그림은 마주 하기 힘들다. 그의 작품들이 기존에 갖고 있는 '미의식'을 계속해서 건드리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이름을 미리 알지 못했다면, 그의 그림에 대한 정보를 미리 접하지 않았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수많은 작품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드레스덴에 갔다면, 그 도시의 아픔을 느끼기에, 그래서 그 곳을 경험하기에 '오토 딕스'만한 매개가 또 있을까. 


동독 정부는 종전 후 연합군의 폭격에 의해 초토화된 드레스덴을 대대적으로 복원했다. 그래서 지금의 드레스덴은 1945년 이후의 드레스덴일 수밖에 없다. 물론 재건된 드레스덴의 역사적 건물들도 찬란하지만, 그 아름다움에 취해 있기엔 뭔가 찜찜하다. 드레스덴에 갔다면, 알베르티눔을 찾아야 하는 까닭은 그 때문이다. 그 곳에 전쟁의 참상을 그려낸 오토 딕스가 있기에.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산 위의 십자가 (The Cross in the Mountains, Oil on canvas, 1808)


폴 고갱(Paul Gauguin), 「parau Api」, 1892


카스퍼 데이비드 프리드리히, 「Two Men Contemplating the Moon」, 1819~1820


빈센트 반 고흐, 「Still life with Quinces」, 1888~18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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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