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공허한 땅 위에 내린 흑임은 깊고 무거웠다. 그때 창조자는 ‘빛이 있으라’ 명했고, 세상은 낮과 밤으로 구분지어졌다. 정말 신이 ‘빛’을 창조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태양의 유무에 따라 삶을 살아왔다. 빛은 생활을 의미했고, 어둠은 수면을 뜻했다. 불이 사라지면 무력한 인간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닥불은 최소한의 방편일 뿐이었다.


어둠은 순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 극복의 대상이었다. 시야를 잃은 인간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어둠을 정복했다. 밤이 내린 도시는 더 이상 어둡지 않다. 흑암은 얕고 가볍다. 빛은 차고 넘친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낮의 도시’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밤의 도시’를 창조한 셈이다. 


파리 에펠탑 


신의 창조물만 경이로운 건 아니었다. 2016년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간 후 넋을 잃었고, 인간의 발명품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불빛 따위가 뭐가 멋있다고 야단법석이야’라고 무시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서울이나 도쿄, 홍콩의 야경(도 감탄을 자아냈지만)과는 다른 ‘낭만’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었다. 대도시의 야경의 온도가 차갑기만 하다면, 파리의 그것은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터키 이스탄불, 벨기에 브뤼셀을 여행하면서 그 생각은 확고해졌다. 낮의 도시와 밤의 도시는 확연히 달랐고, 그 차이를 경험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야경은 여행의 꽃이었고, 은은함을 간직한 유럽 도시들의 밤은 특히 아름다웠다. 밤의 도시를 둘러보고, 그 야경을 감상하는 건 여행 일정 중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프라하의 야경 


부다페스트의 야경 


그동안의 여행지 가운데 ‘밤의 도시’가 가장 낭만적이었던 곳을 꼽으라면 역시 파리와 프라하, 부다페스트가 삼대장이다. 더 이상 순위를 매기는 건 불가능한데, 세 곳은 그마다 분명한 특색이 있었다. 파리는 ‘에펠탑’ 때문인지 몰라도 강렬하면서 낭만적인 느낌이었고, 프라하는 프라하성과 카를교의 조명 때문에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부다페스트는 발광하는 국회의사당의 풍족한 빛 때문에 풍만감을 줬다. 


한편, 브뤼셀의 야경도 그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이어 마그리트 미술관까지 빠르게 둘러봤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18:00까지 개관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파리와 몽생미셸에서도 경험했다시피 하절기의 유럽은 해가 늦게 진다. 늦어도 너무 늦다. 오후 10시가 지나야 겨우 어둑어둑해진다. 맙소사!


늦은 일몰 시각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여행 일정을 넉넉하게 짤 수 있다는 점에서 여유로웠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어두워지지 않자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도, 아직 밖은 밝기만 했다. 여행에서 마지막 일정은 대개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감하기 마련인데, 밤이 되지 않으니 난감했다. 체력은 고갈돼 갔고, 결국 버티기 모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브뤼셀의 경우에는 숙소와 '(야경을 봐야 할 장소인) 그랑플라스'가 도보로 5~10분 거리였다. 그 말인즉슨 재정비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우선,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미리 검색해뒀던 맛집 '르 비스트로(Le Bistro), Porte de Hal Boulevard de Waterloo 138, 1000 Bruxelles'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왕립 미술관에서 애매하게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워 택시를 탔다.


식당 1층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남은 자리도 대부분 예약석이라 2층으로 안내 받았다. 안내를 하던 직원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잔뜩 흐리고 차가운 날씨 덕에 굳어있던 얼굴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메뉴판을 받아들었지만, 차분히 단어를 번역해가며 주문을 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해 홍합탕을 보여주고, 파스타는 감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감자튀김도 빼베드포드 호텔놓을 수 없었다. 홍합은 벨기에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꼭 먹어보고 싶었다. 또, 싸늘한 날씨에 위축된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감자튀김(프렌치 프라이)는 그 이름 때문에 프랑스가 원조라 알려져 있지만, 벨기에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여왔다는 설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그들만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벨기에의 감자튀김을 워낙 높이 쳐주는 터라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합탕은 C, 파스타는 B, 감자튀김은 A였다. 홍합탕은 좀 짠 편이었는데, 해감의 문제인지 짠맛을 강조하는 유럽식 조리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국물이 따뜻하긴 했지만, 그 음식을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감자튀김은 확실히 달랐다. 풍성한 식감이 우리네 것과는 차이가 뚜렷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숙소(베드포드 호텔, Bedford Hotel)로 돌아왔다. 소화도 시킬 겸 브뤼셀 시내를 걸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오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7시나 됐을까. 아직 해가 지려면 3시간이나 남아 있으니,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뒤척이기라도 했을 텐데,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단계였다. 여행은 숙면과 동의어라 해도 틀릴 게 없다.





얼마나 잤을까. 알람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커튼은 젖혀 시야를 확보했다. '와, 드디어 밤이구나!' 빛이 사라져 있었다. 브뤼셀의 밤은 어떨지 궁금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그랑플라스로 가는 길은 조금 음침했지만, 점차 강렬한 빛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뗐을 때,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동반사와 같은 감탄이었다.


밤의 그랑플라스는, 밤의 브뤼셀은, 밤의 벨기에는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광장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마치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발광(發光)하고 있다고 할까. 찬란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분명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광장은 사람들의 반응까지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웃으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양인이 신기했던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안도라'라는 나라에서 왔다며 그곳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그들은 또 한번 신기해 했다. 그리고 이내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다. 눈 속에, 발걸음 속에 차곡차곡 기억하고 싶었다. 그랑플라스의 풍만한 빛이 주는 느낌은 그 전에 봐왔던 야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이 창조한 '밤의 도시'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에트르타(Etretat)와 옹플뢰르(Honfleur)는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 14. 천공의 수도원 몽생미셸, 꿈엔들 잊으리오!’ 편에서 소개했다시피 몽생미셸 투어의 세트로 묶인다. 여행 일정은 파리에서 출발해 에트르타 > 옹플뢰르 > 몽생미셸을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식이다.



에트르타로 가는 길에 들린 휴게소의 폴(Paul) 빵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노르망디 지역의 해안도시인 에트르타는 알바트르 해안(Cote d'Albatre)을 끼고 있는 절벽(팔레즈 다발과 팔레즈 다몽)으로 유명하다. 모파상(Maupassant)은 팔레즈 다발(왼쪽 절벽)을 코끼리에 비유했는데, 이 ‘코끼리 바위’는 에트르타의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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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팔레즈 다발은 어른 코끼리라 불리고, 팔레즈 다몽 쪽은 아기 코끼리라 불린다. 마을의 큰길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해안이 나오는데, 양쪽으로 코끼리를 쏙 빼닮은 절벽이 신기하기만 하다. 자, 이제 팔레즈 다몽의 등산로(라고 하기엔 밋밋한 언덕길)를 따라 올라가보도록 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움직이자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경사가 커서 살짝 애를 먹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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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Chapelle Notre-Dame de la Garde)라는 작은 교회가 위치해 있고, 그 뒤편으로 프랑스 비행사를 기념하는 뾰족탑도 설치돼 있다. 비 오는 날의 바다는 왠지 모를 쓸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맑은 날의 에트르타는 어땠을까,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에트르타를 떠나야 했다.



항구도시 옹플뢰르를 정말 아름다웠다. 몽생미셸 투어의 주(主)는 몽생미셸이지만, 오히려 더 마음을 빼앗겼던 곳은 옹플뢰르였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과 노르망디 분위기 있는 목조 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트카트린 교회


교회 맞은 편의 종탑



생트카트린 교회 내부 모습

마을 중앙에 위치한 생트카트린 교회는 15세기에 건립된 고딕 양식인데,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교회라고 한다. 때마침 교회 주변에서 장(場)이 열리고 있었는데, 어느 곳이나 시장의 부산스러우면서도 정겨운 분위기는 똑같았다. 안타깝게도 비가 더 내리는 바람에 일찍 접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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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카트린 교회를 중심으로 골목들이 얼키설키 뻗어 있는데, 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갤러리들이야말로 옹플뢰르의 진정한 자산이다. 다양한 색깔로 디자인된 갤러리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는데, 그 안에 전시된 개성 넘치는 작품들은 발길을 계속 붙잡았다.




‘하루’를 꼬박 쓸 수밖에 없는 몽생미셸 투어를 또 갈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그렇다고 실망했다거나 별볼일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번이면 족하다’에 가깝다. 하지만 옹플뢰르에 다시 갈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YES’다. 맑은 날 한번 더 가보고 싶다. 하루쯤 묵고 싶기도 하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브뤼셀, 예술의 언덕 


“벨기에는 그냥 거쳐가는 나라 아니에요?”

“하루면 충분하지 않아요? 이틀은 많지 않나?”


벨기에를 간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관된 리액션이었다. 7박 8일의 여행 일정 가운데 고작 이틀이라고 설명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라리 그 이틀을 파리에서 더 보내는 게 낫지 않아?”였다. 질 수 없었다. 벨기에 때문이 아니라 내 여행을 수호하기 위해서. “벨기에도 볼 게 많은데, 왜 그래?” 도대체 뭐가 있냐는 반문, 나도 가봐서 아는데 별 게 없다는 확신 앞에 몇 가지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 가면 오줌싸개 동상도 있고, 왕립미술관에는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 전시돼 있어. 또, 마그리트 미술관도 있는데, 거기도 꼭 갈 거야.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뤼헤는 또 어떻고!”


그럼에도 반응은 시들시들했다. 굳이 갈 거라면 하루면 충분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여행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괜히 섭섭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설명이든 설득이든, 사실 그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대답은 한마디면 충분했다. ‘가고 싶으니까. 그곳에 가보고 싶으니까.’ 천상병 시인의 방식대로 대답하자면 “그냥 벨기에,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곳이 가보고 싶었다” 정도일까. 


파리 북역 


일정상 벨기에는 3, 4일차(일, 월)였다. 파리에서 이틀을 보내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둘째 날 몽생미셸에서 출발해 파리에 도착할 시각이 새벽 3시 무렵이라 브뤼셀로 떠나는 기차 시간은 조금 여유있게 예약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무 여유를 부리게 되면 벨기에 왕립 미술관과 마그리트 미술관을 둘러볼 시간이 없으므로 12시25분 표를 끊었다. 그래도 강행군인 건 마찬가지였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는 탈리스(Thalys)라는 국제 고속철도로 이동하는데, 대략 1시간 22분 정도가 소요된다. 탈리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을 연결하고 있는데, 1996년 운행을 시작했다. 사실 일정에 여유가 조금 더 있었다면 암스트레담까지 가볼 욕심이 있었다. 현지에서 표를 끊어도 되지만,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두면 좀더 저렴하다. 토, 일에는 ‘주말요금’이 적용돼 더 싸게 표를 구할 수 있다. 


브뤼셀로 가는 기차는 파리 북역(Paris-Nord, Gare du Nord)에서 타야 한다. 지베르니에 가기 위해선 생 라자르 역(Gare Saint Lazare)으로 가야 하듯 역마다 노선이 다르다. 또, 브뤼셀 중앙역(Bruxelles-Central)이 아니라 브뤼셀 미디 역(Brussel-Zuid, Bruxelles-Midi)까지만 운행이 된다. 브뤼셀 중앙역으로 가야 한다면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으로 갈아타야 한다. 어차피 연결이 잘 돼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녕하세요? 아기가 정말 예뻐요. 이름이 뭐예요?” 

“고마워요, ‘스텔라’예요”


기차를 탔을 때 옆자리에 누가 탈지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일까. 갓난아기를 안고 탄 젊은 아빠였다. 통로를 끼고 그 옆에는 딸과 함께 엄마가 있었다. 표 예약을 잘못했는지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기꺼이 자리를 바꿔 주고 창가 쪽에 앉았다.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갓난아기는 이름이 스텔라였다. 표를 확인하던 승무원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동안 아기를 보며 부모와 대화를 나눴다. 


브뤼셀 미디 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인 ‘베드퍼드 호텔(Bedford Hotel)‘이동했다. 브뤼셀은 ‘그랑플라스(Grand-Place)’를 중심으로 볼거리가 모여 있기 때문에 그 근처에 숙소를 정하는 게 좋다.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그랑플라스는 브뤼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그리 넓지 않아서 웬만한 곳은 걸어서 다닐 수 있다. 



숙소에서 집을 풀고 그랑플라스를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미술관까지 둘러보려면 갈 길이 바쁘다. 가는 길에 브뤼셀의 명물이라는 ‘오줌싸개 동상’을 보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멀찌감치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었다. 저기다 싶었다. 그런데 이 ‘감흥 없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줌싸개 동상을 실제로 보고 실망했다던 수많은 관광객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심지어 볼품 없었다. 


오줌싸개 동상은 브뤼셀의 상징이다.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snoy)의 작품으로 60cm 크기의 청동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청동상이 굉장한 옷 부자라는 것이다. 무려 700벌 가령의 의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까닭일까. 동상이 직접 옷을 샀을 리 없으니 누군가 선물을 한 걸까? 그렇다. 오줌싸개 동상을 약탈했덩 루이 15세가 동상을 돌려주며 프랑스 후작의 의상을 입혀 보낸 일화가 그 유래다. 



이후 국빈들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 오줌싸개 동상을 위한 의상을 선물로 가져왔고, 그렇게 옷이 쌓이고 쌓여 700벌이나 된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 앞에 자연스럽게 식당가가 형성되기 마련인데, 오줌싸개 동상 주변에는 와플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벨기에의 명물인 와플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기왕에 먹는 거 과일과 데코가 왕창 들어간 것으로 주문했는데, 유럽의 단맛, 그 과한 달콤함에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오줌싸개 동상과 와플에 실망(나중에 와플은 다시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와플이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하고,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가로 70m, 세로 110m의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빅토르 위고가 왜 이 곳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는 없었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의 풍미가 멋스러웠다. 



광장 주변으로 15세기 초반이 건축된 시청과 왕의 집, 길드 하우스 등이 있고, 상점을 비롯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광장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아쉽게도 왕립 미술관의 폐관 시간(토, 일은 18:00까지)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차피 그랑플라스는 숙소 옆이라 오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랑플라스는 밤이 되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신했다.


아쉬움을 안고 그랑플라스를 빠져 나와 벨기에 왕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세 정거장 거리였지만, 대중교통 1일권을 끊어둔 터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미술관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에 가급적 체력을 아껴둘 필요가 있다. 왕립 미술관 입구에 여러 언어로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반갑게도 한글도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한글이 표기돼 있는데, 브뤼셀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곳도 아닐 텐데 신기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입장했을 때가 16시쯤 됐던 것 같다. 마그리트 미술관(콤비 티켓을 끊었다)도 함께 둘러봐야 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시간을 각각 1시간씩 배정했다. 좀 빠듯한 시간이긴 하지만, 어차피 봐야 할 작품은 정해져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 말이다. 방대한 수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미술관에서 모든 작품에 동일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순 없다. 


<마라의 죽음>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림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오는듯 했다. 죽음을 맞이한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얼굴은 초연해 보였다. 마치 순교자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급진적 혁명가였던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당하자, 다비드는 마라의 장례에 쓰일 그림을 그린다. 물론 마라의 죽음을 통해 민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마라의 죽음>을 세 점이나 그린 건 그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확실히 다비드는 회화의 힘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영민한 화가였고, 그 힘을 매번 여실히 드러냈던 정치적인 화가였다. 왕립 미술관에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브뢰헬, 브뤼헐)의 그림도 다수 전시돼 있었다. 브뤼겔은 농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재치있는 풍속화(<농부의 결혼식>, <교수대 위의 까치> 등)로 유명하다. <바벨탑>도 빼놓을 수 없다.



왕립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브뤼겔의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은 <이카루스의 추락>이다. 자유를 갈망했던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된 날개를 단 채 너무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뜨거운 햇볕에 날개가 녹아 바닷속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카루스는 추락했지만, 그 주변에 있는 농부나 낚시꾼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은 채 무심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역시 브뤼겔다운 재치있는 표현이다. 



무심코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문득 이곳에 '(인공) 조명'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오로지 햇빛을 이용한 자연채광(自然採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분위기가 훨씬 더 근사했고, 왠지 모를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고대했던 왕립 미술관 관람이 끝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왕립 미술관이 주는 안락함과 따뜻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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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미술관(박물관)을 찾는가. 가끔 그런 질문이 들 때가 있다. 대한민국에 있을 때도 가끔 각종 전시를 찾는 편이지만, 유독 해외를 나가게 되면 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 미술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다. 그림을 잘 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말하라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굳이 답을 하라면 말 그대로 '그냥 좋다'는 것인데,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라든지 그 공기의 질감, 무게가 좋다. 혹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라고 할까.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도슨트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그림 앞에서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열혈 미술학도의 모습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특히, 해외의 미술관인가. 그건 자유로움 때문인 것 같다. 극도의 조심스러움이 가득한 우리네 미술관과 달리 해외의 미술관에는 자유로움이 넘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관과 그 안에 전시된 미술 작품들을 즐긴다. 

접근을 막는 빨간 줄이 쳐져 있지도 않고,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검열하는 시선도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 같은 곳은 촬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해외 미술관들은 관람객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다. 이쯤이면 설명이 됐을까.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밟을 때나는 소리와 느낌이 좋아서랄까. 게다가 인공 조명 없이 자연 채광으로만 된 미술관(예를 들면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 미술관)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근사해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잡담이 길었다. 자, 계속해서 피카소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의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가령 루브르 박물관보다 오르세 미술관이 좋은 것처럼), 그보다는 피카소의 천재성 혹은 예술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피카소가 그린 저 선(線)들을 보고, 저 표현들을 보고 전율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예술의 문외한인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경지다. 

​<Farmer and Nude>, 1938

​<Bather Opening a Cabin>, 1928

'와,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지?', 와,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지?'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들을 보며 떠올렸던 질문들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그냥 감탄사다. 그저 놀랄 뿐이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마 피카소의 그림을 접한 사람들은 대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또 한 가지 느끼게 된 건 피카소가 의외로(?) 평범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피카소가 입체파 화가라는 틀로 많이 소개가 돼 있고, 우리도 피카소를 그 틀에 맞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그림들이 피카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까지 피카소가 그린 일반적인(?) 작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피카소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라든지, 그 극적인 변화의 양상들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기괴하고 독창적인 작품도 좋지만, 그의 평범한 그림들도 충분히 아름답다. 

​<인형을 든 마야>, 1938년

여기에서 '마야'는 피카소가 54세에 네 번째 연인 테레즈 발테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라고 한다. 

모든 작품의 제목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따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서, 그러기엔 너무 힘이 들었다) 아쉬운 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에만 제목을 달아 놓았다. (추가적으로 적어나갈 예정이다)

피카소 미술관은 파리 외에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말라가 등에서 있는데, 총 250여 점의 회화와 16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는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들도 제법 전시돼 있는데, 피카소가 인정하면서도 질투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4월까지 한가람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전을 열었는데,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자, 여기까지 피카소 미술관 사진전을 마치기로 하자. 사진만 나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번 글과는 달리 다음 사진전부터는 중간중간 좀더 많은 코멘트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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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면 사진을 굉장히 많이 찍는 편이다. 이번 파리 여행(두 번째 방문이었음에도)에서도 약 2,500장을 가뿐히 넘었다. 여행기를 쓰면 (사진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으려 하지만) 아무래도 글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찍어둔 사진들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록'이라고 할까. '사진전'이라고 할까.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소개하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페이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하나에 약 30~40장의 사진을 넣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는 가벼운 형식이 될 것이다. 첫 번째 페이지는 '피카소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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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은 마레 지구(Quatier du Marais)에 위치해 있다.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에 나서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 두자. 


'LA PETITE PLACE'라는 카페(식당)다.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는 길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유명한 관광지 옆에 있는 식당은 대개 실망스러우니까.


버섯이 들어간 리조또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가게에는 남자 직원들만 있는데,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 살짝 언짢아질 즈음 음식이 나왔다. 우와, 비주얼과 맛이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다. 마레 지구의 '맛집'으로 추천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피카소 미술관으로 들어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는 게르니카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고, 군부가 이끄는 왕당파가 승리했다.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내전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를 돕기 위해 게르니카에 폭탄을 투하했고, 게르니카는 처참히 붕괴됐다. 이로 인해 민간인 1500명이 희생됐다. 끔찍한 일이었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분노에 휩싸였다. 얼마 뒤, 히틀러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요청이 있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구상해 그렸다. 세로 345.3cm, 가로 776.6cm의 대작이었다. 


<투우 : 투우사의 죽음>, 1933

<십자가(Crucifixion)>, 1930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소장 중인데, 아쉽게도 원작을 가져오진 못한 듯 했다. 


​​자, 본격적으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자. 


<애원하는 여인(La Suppliante)>, 1937

<우는 여인(Weeping Woman)> , 1937,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Wounded Bird and Cat)>, 1938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분개한 피카소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의 참상에 귀를 기울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신천군 학살 사건을 다룬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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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작품들을 넣다보니 벌써 30장을 훌쩍 넘겨 버렸다. 피카소의 일생이나 그 작품들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내용을 담지 못해 아쉽지만, 사진을 공유하는 것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작품의 수가 워낙 많아 어쩔 수 없이 다음 글에서 마저 싣기로 하자.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몽생미셸(Mont-Saint-Michel),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곳은 프랑스 어딘가에 붙어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여행 책자를 뒤적이면서 ‘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라며 감탄하면서도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섬 전체가 수도원으로 이뤄져 있는 독특한 구조, 역시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 보는 이들을 전율하게 만드는 야경, 그곳에 가본 사람들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여전히 몽생미셸은 상상의 영역이었다. 일단 (파리에서) 너무 멀었다. 차로 이동해도 4시간 30분~5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쉬지 않고 달려야 그 정도였다. 렌트를 하긴 버거우니 결국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얼마나 걸릴 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피로도를 산출하는 건 더 어려웠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너무 빠듯했고, 환상적이라는 야경을 볼 수 없다면 뭔가 김이 샐 것 같았다. 



게다가 하절기를 향해 가는 유럽은 밤 10시가 돼야 겨우 어두워지기에 야경을 보고나면 대중교통은 끊어졌다. 정리하자면 (야경을 볼 거라면) 몽생미셸은 당일치기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숙박을 하자니 과연 몽생미셸에 1박 2일의 일정을 배정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이 모든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 준 건 ‘여행 업체’였다.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몽생미셸을 가기 위해선 불가피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파리 크레파스, 유로 자전거 나라, 인디고 트래블 등 다수의 여행 업체가 검색된다. 대표적인 곳을 몇 개 골라 일정과 가격을 비교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화, 목, 토만 출발하는 업체도 있으니 여행 일정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파리 크레파스와 계약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떤 업체를 선택하든 무방하다. 일정이야 거기서 거기이고, 제공되는 서비스도 모두 비슷하다. 


야경이 일정에 포함돼 있는지, 어느 쪽이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지만 고려하면 된다. 이벤트를 하고 있는 업체가 있다면 좀더 저렴히 다녀올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야경 포함 12만 5천 원이었는데, 여기에 수도원 입장료(와 로컬 예약비) 15유로와 저녁 식사비가 추가된다. 파리에 새벽에 도착하기 때문에 숙소까지의 샌딩 비용도 따로 지불해야 한다. 역시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건 가이드인데, 복불복이라 방도가 없다. 20대 여성부터 40대 아재까지 폭이 굉장히 넓은데, 2명씩 팀을 이뤄 움직인다. 아무래도 성심성의껏 열정을 갖고 가이딩을 해주는 가이드가 고맙기 마련이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설명을 재미있게 해준다면 더할나위 없다. 나의 경우에는 40대 아재 팀이었는데, 중구난방식의 설명과 맥이 빠지는 분위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07:00 파리(개선문)에서 출발, 10:00 에트레타 도착, 12:00 옹프뢰르 도착, 16:00 몽생미셸 도착, 19:30 저녁, 22:00 야경, 22:30 파리로 출발, 02:00 파리 도착’이다. 아침 7시에 시작해 다음날 02:00(라고 돼 있지만, 그 시간에 도착하는 건 어렵다. 실제로는 02:30이 훌쩍 넘었다.)에 끝나고 총 3곳(에트레타, 옹플레흐, 몽생미셸)을 들리는 강행군이다.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운전기사의 운전시간을 제한함으로써 장시간 운전을 막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운전기사들은 2시간마다 15분 가량의 누적 휴식을 취해야 하고, 4시간 이상 운전을 하게 되면 15분과 30분(누적)을 더해 2번 휴게소를 들러야 한다고 한다. 시간은 다소 지체되겠지만, 운전기사의 컨디션이 보장돼야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설명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몽생미셸 투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에트르타(Etretat)였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밀려 오더니 어느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트르타는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랑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모네는 이곳을 7차례 방문한 끝에 <에트르타의 거친 바다>라는 작품을 그려냈다. 


조그만 마을을 통과해 해안가로 나오면 양쪽으로 절벽이 펼쳐진다. 에트르타에는 코끼리 절벽이 유명한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형세가 코끼리를 꼭 닮았다. 큰 절벽을 엄마 코끼리, 작은 쪽은 새끼 코끼리라 부른다. 절벽 위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금세 숨이 차는데, 갑자기 웬 등산인가 싶다가도 뒤돌아서면 펄쳐지는 장관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절벽 위에 서서 바닷가를 바라보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갈 길이 멀어 에트르타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1시간 남짓의 자유 시간 후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다시 4, 50분을 갔을까? 빗방울은 조금씩 굵어졌고, 공기는 더욱 촉촉해졌다. 작은 항구 도시 옹플뢰르(Honfleur)에는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작고 아담한 항구에는 보트들이 옹기종기 정박해 있고, 건물들은 저마다 형형색색 매력을 뽐냈다. 


큰 교회를 중심으로 얼키설키 뻗어있는 골목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골목을 따라 상점과 갤러리가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아기자기함이 마레 지구와 로지에르 거리에 못지 않았다. 오히려 로지에르 거리는 평범하다고 여겨질 만큼 옹플뢰르의 골목들은 개성 넘쳤다. 곳곳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들은 옹플뢰르가 인상파 화가들의 도시이자 예술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상파의 탄생을 알린 모네의 역사적인 작품인 <인상, 해돋이>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르아브르와 옹플뢰르의 앞바다인데, 그만큼 옹플뢰르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몽생미셸보다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곳이다. 한번 더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없이 옹플뢰르를 선택할 것이다. 다만 그때는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겠다. 


자, 이제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시간이다. 또, 한참을 달려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잠이다. 그러나 내부가 생각보다 쾌적하지는 않다. 좁고 불편하다. 그래도 대부분 잘 잔다. 잔다기보다 골아떨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예정보다 좀 늦은 17시 무렵 드디어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멀찌감치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기묘한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에 취했던 사람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노르망디 해안에 위치한 몽생미셸 섬. 몽(mont)이 산[山]을 뜻하니, 성 미카엘의 산인 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형인 이곳은 섬 전체가 수도원으로 이뤄져 있다. 8세기 무렵 아브랑슈의 주교인 성 오베르가 꿈에서 대천사 성 미카엘의 명을 받아 작은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 때부터 몽생미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건 아니고, 800년에 걸쳐 조금씩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다. 


몽생미셸은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데, 만조일 때는 완전한 섬이 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의 명소쯤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 이 곳은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성지순례 장소이다. 지금에야 자동차를 통해 손쉽게(?) 올 수 있게 됐지만, 중세 시대에는 이 곳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도전이었을 게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인들이 저마다의 염원을 갖고 몽생미셸을 찾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섞인 몽생미셸 수도원은 보고 또 봐도 굉장히 아름답고 경이롭다. 한편으로 매우 이질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본 느낌이랄까. 건물 자체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수도원 위에 오르면 내다 보이는 풍광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 아름다움은 즐거움과 흥분을 넘어 경건함에 이른다. 이곳에 몸을 담은 수도사들은 매일같이 이런 풍경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을 게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수신기를 통해 듣는데 음질이 썩 좋지 않다. 또 집중이 잘 되지도 않는다.) 수도원을 한바퀴 훑고 나서, 저녁을 먹기 위해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몽생미셸 수도원을 빠져 나왔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10시가 돼야 겨우 해가 지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은 휴식 등 개인 정비를 해도 좋고, 함께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내도 좋다.



길고 길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잔잔히 깔리고 있었다. 드디어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는 것인가. 기대를 품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잠시 그쳤던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게 아닌가. 결국 사진을 몇 장 찍지도 못하고, 불어닥친 강풍과 소나기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라 빠져나오면서도 눈은 몽생미셸에 고정돼 있었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다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몽생미셸에서 파리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파리에 당도할 무렵, 가이드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장 근처에서 흉기 테러가 발생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줬다. 파리 시내는 비상사태였다. 덩달아 여행자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졌다. 그날 몽생미셸을 다녀오기로 한 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여행은 계속돼야 하는 것을..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솔직히 '파리 여행기'를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번 본 영화는 다시 보지 않고,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는 이상한 고집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번 갔던 여행지를 다시 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경제적 사정이나 일정 등 이런저런 조건이 갖춰지고,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떠날 수 있는 해외여행인지라 굳이 갔던 곳을 또 갈 여유가 없었다. 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한 여행끈 짧은 여행자에 불과하니까. 


2016년 11월에 처음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으니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파리에 가게 됐다. 그 사이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한번에 묶어 다녀왔고,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터키 이스탄불을 다녀왔다. 이번엔 내심 이탈리아 로마를 염두에 뒀지만, 최종적인 선택은 결국 파리였다. 물론 벨기에를 세트로 묶는 보험(?)도 들어뒀다. 일종의 절충이라고 할까. 



첫 번째 파리는 겨울이었다. 기온이 낮아 제법 쌀쌀했고, 체감온도 역시 낮았다. 아예 두꺼운 점퍼를 입었었다. 추위에 떨면서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수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보니 여행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관광지는 가는 곳마다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줄을 서지 않아 반가웠지만,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없어 심심했다. 그래도 저 유명한 명소와 예술품들을 독점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두 번째 파리, 그러니까 5월의 파리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나도 덩달아 생기가 돌았다. 햇살은 밝고 따스했고,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파리는 매 순간 빛났고, 스스로를 빛냈다. 마치 ‘이게 내 본연의 모습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어느 곳이나 활기가 넘쳤다. 5월의 파리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의미의 첫 번째였다. 가보지 못했던 곳을 들릴 여유가 생겼고, 한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곳을 다시 챙길 꼼꼼함도 생겼다. 다시 들린 몽마르트르 언덕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크레쾨르 성당 주변 카페들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고, 그 앞은 거리의 화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맑은 날의 베르사유 궁전은 화사함의 차원이 달랐다. 정원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루브르와 오르세의 분위기는 몇 곱절 뜨거웠다. 



생각지도 않게 미완의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를 이어가게 됐다. 번호는 13이다. 결국 불완전하게 끝나겠지만, 그래도 몇 개의 글을 더 보탤 수 있게 돼 개인적인 아쉬움이 씻기는 기분이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지베르니(는 파리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파리에서 시작해 파리로 돌아와야 하고, 파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와 '오랑주리 미술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지베르니(Giverny)와 오랑주리 미술관(Orangerie Museum)은 프랑스 인상파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인상파라는 명칭이 그의 작품인 <인상, 해돋이>에서 비롯됐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을 했던 곳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모네의 걸작인 <수련(les Nymphéas)> 연작이 전시돼 있다.


지베르니에 가게 위해서는 손쉽게 현지 투어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몽생미셸에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현지 투어를 신청했다. 차로 달려서 4시간 30분~5시간에 달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고,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워낙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지베르니는 기차로 50분~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어 부담이 적었다. 이 정도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도전정신이 샘솟았다. 



출발점은 생 라자르 역(Gare saint-lazare)이다. 지베르니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있으면 좋겠지만, 베르농(Vernon) 역까지 가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살짝 고생을 각오해야 하는 여정이다. 그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될 만큼의 만족감을 느끼게 될 테니 섣부른 손익판단은 금물이다. 성수기 무렵에는 원하는 시간대에 기차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리 끊어두는 센스가 필요하다. 


성수기 여행이 처음이었던 나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다음날 06:54 기차표를 예매해야 했다. 어떤 여행 책자에는 45분이면 된다는 설명도 있는데, 베르농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됐다. 돌아오는 기차는 50분 정도 걸렸으니,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다. 베르농 역에서 내려 정문으로 나가면 소박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50m쯤 가면 마을 버스 타는 곳이 있다. 표는 버스 기사에게 사면 되니 당황하지 말자.


새벽에 기차를 타고 떠나왔건만, 버스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남은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여유는 배르농 아침 산책을 하는 걸로 채우기로 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버스 기사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다른 기사들과 수다를 떤다. 다음 열차의 손님들을 기다렸다가 출발하려는 심산일까. 예정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났을까. 드디어 출발하는 버스, 앞쪽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외친다. ‘thanks god!’



바깥 풍경을 구경하느라 15분이 훌쩍 지났다. 지베르니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면서 이미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곳의 초록은 농도부터 다르다. 전날 밤 일기예보를 보며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녹아버린 지 오래다. 햇살은 더할나위 없이 따스하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르다. '이래서 지베르니, 지베르니 하는구나!' 감탄이 그치지 않는다. 지베르니에 오다니, 스스로 믿기지 않는 걸음을 떼고 있었다. 


지베르니는 굉장히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넉넉히 10분이면 인상주의 미술관에 닿고, 거기에서 또 10분이면 모네 생가에 다다른다. 가는 길목마다 꽃과 나무로 이뤄진 천상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골목이 하나같이 예쁘고, 그 골목의 터잡은 집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그 어떤 걱정도 없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인상주의 미술관은 굳이 들리지 않아도 좋다. 그때마다 특별전을 열어 전시를 하는 곳인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일본의 인상주의라는 주제로 전시가 한창이었다. 어차피 목적은 모네이기 때문에 가볍게 패스했다. 자, 드디어 모네의 생가다. 아침이라 줄이 그리 길지 않다. 앞쪽에 선 가족들의 수다가 귓가를 파고들지만, 상쾌한 기분에 이조차도 용납하기로 한다. 입장료는 9.5유로. 


계단을 내려가면 곧바로 기념품 샵이 나온다. 특이한 구조다. 밖으로 나가면 드디어 모네의 정원과 집이 나타난다. 그가 43세인 1883년 지베르니를 발견하고 가족들과 함께 정착해 여생을 보냈던 곳. 1926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모네는 이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목조로 된 생가와 정원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연못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설렌 가슴이 또 한번 설레기 시작한다. 




연못은 또 다른 세계였다. 모네의 그림 속에 실제로 들어온 느낌이랄까. 마치 풍경의 일부가 된 듯 하다. '아, 이런 곳에서 살았구나.' 예술적 영감이 떠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좀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오후에 접어든 지베르니는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버렸다. 한걸음 내딛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어차피 미리 예매해둔 기차 시간이 다가와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다. 


만약 여행 기간이 넉넉하다면 하루를 온종일 지베르니에 할애하는 것을 추천한다. 좀더 느긋하게 모네의 공간을 거닐어 본다면, 마치 잠시나마 모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파리로 돌아와서 곧바로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콩코르드(Concorde) 역에서 내렸다. 걸어서 5분이면 된다. 첫 번재 여행에서 이미 들렀던 곳이지만, 지베르니를 다녀온 그 감각을 살리고 싶었다.




두 눈에 가득 담았던 광경, 두 발로 직접 거닐었던 그 공간을 담은 그림을 빨리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정원과 연못이 그림 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 연속성이 작품에 대한 감동을 확장시켰다. 이곳에 있는 <수련> 연작 패널은 모네가 76세부터 백내장으로 작업이 어려워진 81세까지 그린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 풍경을 담았을까. 


어떤 소설가가 그랬다. 여행을 가면 그 곳과 관련된 책을 읽으라고. 역시 '스토리'가 중요하다. 파리를 가면 (책도 좋지만) '그림'을 봐야 하고, 그 그림을 더욱 잘 느끼려면 그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보는 게 좋다. 첫 번째 여행에서 그런 시도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곳이 파리라면 더욱 그렇다. 시내에만 해도 볼거리가 차고 넘치니까. 그래서 파리는 두 번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아니, 어쩌면 가면 갈수록 좋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