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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미술관(박물관)을 찾는가. 가끔 그런 질문이 들 때가 있다. 대한민국에 있을 때도 가끔 각종 전시를 찾는 편이지만, 유독 해외를 나가게 되면 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 미술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다. 그림을 잘 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말하라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굳이 답을 하라면 말 그대로 '그냥 좋다'는 것인데,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라든지 그 공기의 질감, 무게가 좋다. 혹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라고 할까.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도슨트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그림 앞에서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열혈 미술학도의 모습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특히, 해외의 미술관인가. 그건 자유로움 때문인 것 같다. 극도의 조심스러움이 가득한 우리네 미술관과 달리 해외의 미술관에는 자유로움이 넘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관과 그 안에 전시된 미술 작품들을 즐긴다. 

접근을 막는 빨간 줄이 쳐져 있지도 않고,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검열하는 시선도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 같은 곳은 촬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해외 미술관들은 관람객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다. 이쯤이면 설명이 됐을까.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밟을 때나는 소리와 느낌이 좋아서랄까. 게다가 인공 조명 없이 자연 채광으로만 된 미술관(예를 들면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 미술관)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근사해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잡담이 길었다. 자, 계속해서 피카소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의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가령 루브르 박물관보다 오르세 미술관이 좋은 것처럼), 그보다는 피카소의 천재성 혹은 예술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피카소가 그린 저 선(線)들을 보고, 저 표현들을 보고 전율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예술의 문외한인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경지다. 

​<Farmer and Nude>, 1938

​<Bather Opening a Cabin>, 1928

'와,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지?', 와,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지?'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들을 보며 떠올렸던 질문들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그냥 감탄사다. 그저 놀랄 뿐이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마 피카소의 그림을 접한 사람들은 대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또 한 가지 느끼게 된 건 피카소가 의외로(?) 평범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피카소가 입체파 화가라는 틀로 많이 소개가 돼 있고, 우리도 피카소를 그 틀에 맞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그림들이 피카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까지 피카소가 그린 일반적인(?) 작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피카소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라든지, 그 극적인 변화의 양상들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기괴하고 독창적인 작품도 좋지만, 그의 평범한 그림들도 충분히 아름답다. 

​<인형을 든 마야>, 1938년

여기에서 '마야'는 피카소가 54세에 네 번째 연인 테레즈 발테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라고 한다. 

모든 작품의 제목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따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서, 그러기엔 너무 힘이 들었다) 아쉬운 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에만 제목을 달아 놓았다. (추가적으로 적어나갈 예정이다)

피카소 미술관은 파리 외에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말라가 등에서 있는데, 총 250여 점의 회화와 16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는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들도 제법 전시돼 있는데, 피카소가 인정하면서도 질투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4월까지 한가람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전을 열었는데,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자, 여기까지 피카소 미술관 사진전을 마치기로 하자. 사진만 나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번 글과는 달리 다음 사진전부터는 중간중간 좀더 많은 코멘트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여행을 가면 사진을 굉장히 많이 찍는 편이다. 이번 파리 여행(두 번째 방문이었음에도)에서도 약 2,500장을 가뿐히 넘었다. 여행기를 쓰면 (사진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으려 하지만) 아무래도 글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찍어둔 사진들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록'이라고 할까. '사진전'이라고 할까.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소개하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페이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하나에 약 30~40장의 사진을 넣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는 가벼운 형식이 될 것이다. 첫 번째 페이지는 '피카소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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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은 마레 지구(Quatier du Marais)에 위치해 있다.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에 나서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 두자. 


'LA PETITE PLACE'라는 카페(식당)다.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는 길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유명한 관광지 옆에 있는 식당은 대개 실망스러우니까.


버섯이 들어간 리조또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가게에는 남자 직원들만 있는데,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 살짝 언짢아질 즈음 음식이 나왔다. 우와, 비주얼과 맛이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다. 마레 지구의 '맛집'으로 추천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피카소 미술관으로 들어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는 게르니카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고, 군부가 이끄는 왕당파가 승리했다.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내전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를 돕기 위해 게르니카에 폭탄을 투하했고, 게르니카는 처참히 붕괴됐다. 이로 인해 민간인 1500명이 희생됐다. 끔찍한 일이었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분노에 휩싸였다. 얼마 뒤, 히틀러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요청이 있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구상해 그렸다. 세로 345.3cm, 가로 776.6cm의 대작이었다. 


<투우 : 투우사의 죽음>, 1933

<십자가(Crucifixion)>, 1930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소장 중인데, 아쉽게도 원작을 가져오진 못한 듯 했다. 


​​자, 본격적으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자. 


<애원하는 여인(La Suppliante)>, 1937

<우는 여인(Weeping Woman)> , 1937,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Wounded Bird and Cat)>, 1938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분개한 피카소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의 참상에 귀를 기울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신천군 학살 사건을 다룬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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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작품들을 넣다보니 벌써 30장을 훌쩍 넘겨 버렸다. 피카소의 일생이나 그 작품들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내용을 담지 못해 아쉽지만, 사진을 공유하는 것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작품의 수가 워낙 많아 어쩔 수 없이 다음 글에서 마저 싣기로 하자.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몽생미셸(Mont-Saint-Michel),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곳은 프랑스 어딘가에 붙어 있는 미지의 땅이었다. 여행 책자를 뒤적이면서 ‘와,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라며 감탄하면서도 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섬 전체가 수도원으로 이뤄져 있는 독특한 구조, 역시 섬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을 만큼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곳. 보는 이들을 전율하게 만드는 야경, 그곳에 가본 사람들의 기분은 어떤 것일까. 


여전히 몽생미셸은 상상의 영역이었다. 일단 (파리에서) 너무 멀었다. 차로 이동해도 4시간 30분~5시간이 걸리는 먼 거리였다. 쉬지 않고 달려야 그 정도였다. 렌트를 하긴 버거우니 결국 기차와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얼마나 걸릴 지 계산조차 되지 않았다. 피로도를 산출하는 건 더 어려웠다.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너무 빠듯했고, 환상적이라는 야경을 볼 수 없다면 뭔가 김이 샐 것 같았다. 



게다가 하절기를 향해 가는 유럽은 밤 10시가 돼야 겨우 어두워지기에 야경을 보고나면 대중교통은 끊어졌다. 정리하자면 (야경을 볼 거라면) 몽생미셸은 당일치기가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숙박을 하자니 과연 몽생미셸에 1박 2일의 일정을 배정하는 게 맞는지 의문스러웠다. 이 모든 고민을 한번에 해결해 준 건 ‘여행 업체’였다. 자존심(?)은 좀 상했지만, 몽생미셸을 가기 위해선 불가피하면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파리 크레파스, 유로 자전거 나라, 인디고 트래블 등 다수의 여행 업체가 검색된다. 대표적인 곳을 몇 개 골라 일정과 가격을 비교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온다. 화, 목, 토만 출발하는 업체도 있으니 여행 일정에 맞춰 선택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파리 크레파스와 계약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어떤 업체를 선택하든 무방하다. 일정이야 거기서 거기이고, 제공되는 서비스도 모두 비슷하다. 


야경이 일정에 포함돼 있는지, 어느 쪽이 가격 면에서 경쟁력이 있는지만 고려하면 된다. 이벤트를 하고 있는 업체가 있다면 좀더 저렴히 다녀올 수 있다. 나의 경우는 야경 포함 12만 5천 원이었는데, 여기에 수도원 입장료(와 로컬 예약비) 15유로와 저녁 식사비가 추가된다. 파리에 새벽에 도착하기 때문에 숙소까지의 샌딩 비용도 따로 지불해야 한다. 역시 업체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다. 



오히려 중요한 건 가이드인데, 복불복이라 방도가 없다. 20대 여성부터 40대 아재까지 폭이 굉장히 넓은데, 2명씩 팀을 이뤄 움직인다. 아무래도 성심성의껏 열정을 갖고 가이딩을 해주는 가이드가 고맙기 마련이다.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설명을 재미있게 해준다면 더할나위 없다. 나의 경우에는 40대 아재 팀이었는데, 중구난방식의 설명과 맥이 빠지는 분위기 때문에 애를 먹었다. 


일정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07:00 파리(개선문)에서 출발, 10:00 에트레타 도착, 12:00 옹프뢰르 도착, 16:00 몽생미셸 도착, 19:30 저녁, 22:00 야경, 22:30 파리로 출발, 02:00 파리 도착’이다. 아침 7시에 시작해 다음날 02:00(라고 돼 있지만, 그 시간에 도착하는 건 어렵다. 실제로는 02:30이 훌쩍 넘었다.)에 끝나고 총 3곳(에트레타, 옹플레흐, 몽생미셸)을 들리는 강행군이다. 


프랑스에서는 법적으로 운전기사의 운전시간을 제한함으로써 장시간 운전을 막고 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운전기사들은 2시간마다 15분 가량의 누적 휴식을 취해야 하고, 4시간 이상 운전을 하게 되면 15분과 30분(누적)을 더해 2번 휴게소를 들러야 한다고 한다. 시간은 다소 지체되겠지만, 운전기사의 컨디션이 보장돼야 안전한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필수적인 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전 설명이 길었다. 본격적으로 몽생미셸 투어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해 보자. 첫 번째로 도착한 곳은 에트르타(Etretat)였다. 아침부터 먹구름이 밀려 오더니 어느새 추적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폭우처럼 쏟아붓는 게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에트르타는 해안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사랑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모네는 이곳을 7차례 방문한 끝에 <에트르타의 거친 바다>라는 작품을 그려냈다. 


조그만 마을을 통과해 해안가로 나오면 양쪽으로 절벽이 펼쳐진다. 에트르타에는 코끼리 절벽이 유명한데, 정말 신기하게도 그 형세가 코끼리를 꼭 닮았다. 큰 절벽을 엄마 코끼리, 작은 쪽은 새끼 코끼리라 부른다. 절벽 위로 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금세 숨이 차는데, 갑자기 웬 등산인가 싶다가도 뒤돌아서면 펄쳐지는 장관에 입을 다물 수 없게 된다. 절벽 위에 서서 바닷가를 바라보면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갈 길이 멀어 에트르타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다. 1시간 남짓의 자유 시간 후 버스에 올라야 했다. 그렇게 다시 4, 50분을 갔을까? 빗방울은 조금씩 굵어졌고, 공기는 더욱 촉촉해졌다. 작은 항구 도시 옹플뢰르(Honfleur)에는 안개가 살포시 내려앉아 있었다. 작고 아담한 항구에는 보트들이 옹기종기 정박해 있고, 건물들은 저마다 형형색색 매력을 뽐냈다. 


큰 교회를 중심으로 얼키설키 뻗어있는 골목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웠다. 골목을 따라 상점과 갤러리가 늘어서 있었는데, 그 아기자기함이 마레 지구와 로지에르 거리에 못지 않았다. 오히려 로지에르 거리는 평범하다고 여겨질 만큼 옹플뢰르의 골목들은 개성 넘쳤다. 곳곳에 위치한 작은 갤러리들은 옹플뢰르가 인상파 화가들의 도시이자 예술의 도시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 



인상파의 탄생을 알린 모네의 역사적인 작품인 <인상, 해돋이>의 배경이 된 곳이 바로 르아브르와 옹플뢰르의 앞바다인데, 그만큼 옹플뢰르는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몽생미셸보다 오히려 더 기억에 남는 곳이다. 한번 더 가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주저없이 옹플뢰르를 선택할 것이다. 다만 그때는 날씨가 화창했으면 좋겠다. 


자, 이제 우리의 최종 목적지를 향해 출발할 시간이다. 또, 한참을 달려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잠이다. 그러나 내부가 생각보다 쾌적하지는 않다. 좁고 불편하다. 그래도 대부분 잘 잔다. 잔다기보다 골아떨어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예정보다 좀 늦은 17시 무렵 드디어 몽생미셸에 도착했다. 멀찌감치 시공간을 초월한 듯한 기묘한 건축물이 보이기 시작한다. 잠에 취했던 사람들이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한다.



노르망디 해안에 위치한 몽생미셸 섬. 몽(mont)이 산[山]을 뜻하니, 성 미카엘의 산인 셈이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원형인 이곳은 섬 전체가 수도원으로 이뤄져 있다. 8세기 무렵 아브랑슈의 주교인 성 오베르가 꿈에서 대천사 성 미카엘의 명을 받아 작은 예배당을 세웠는데, 그 때부터 몽생미셸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한다.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었던 건 아니고, 800년에 걸쳐 조금씩 업그레이드 과정을 거쳤다. 


몽생미셸은 조수 간만의 차가 매우 심한데, 만조일 때는 완전한 섬이 된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야경이 아름다운 관광의 명소쯤으로 여기고 있지만, 실제로 이 곳은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성지순례 장소이다. 지금에야 자동차를 통해 손쉽게(?) 올 수 있게 됐지만, 중세 시대에는 이 곳에 접근하는 것 자체가 굉장한 도전이었을 게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인들이 저마다의 염원을 갖고 몽생미셸을 찾고 있다.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이 섞인 몽생미셸 수도원은 보고 또 봐도 굉장히 아름답고 경이롭다. 한편으로 매우 이질적인 건축물이기도 하다.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무언가를 본 느낌이랄까. 건물 자체도 감탄을 자아내지만, 수도원 위에 오르면 내다 보이는 풍광은 소름이 돋을 정도다. 그 아름다움은 즐거움과 흥분을 넘어 경건함에 이른다. 이곳에 몸을 담은 수도사들은 매일같이 이런 풍경을 보며 마음을 가다듬었을 게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며(수신기를 통해 듣는데 음질이 썩 좋지 않다. 또 집중이 잘 되지도 않는다.) 수도원을 한바퀴 훑고 나서, 저녁을 먹기 위해 셔틀 버스를 타고 다시 몽생미셸 수도원을 빠져 나왔다. 앞서도 설명했지만, 10시가 돼야 겨우 해가 지기 때문에 저녁을 먹고 나서도 한참이나 시간이 남는다. 그 시간은 휴식 등 개인 정비를 해도 좋고, 함께 투어에 참여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보내도 좋다.



길고 길었던 기다림이 끝나고, 드디어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했다. 어둠이 잔잔히 깔리고 있었다. 드디어 몽생미셸의 야경을 보는 것인가. 기대를 품고 셔틀버스에 몸을 실었다. 아, 그런데 이게 무슨 하늘의 장난이란 말인가. 잠시 그쳤던 비가 세차게 쏟아지는 게 아닌가. 결국 사진을 몇 장 찍지도 못하고, 불어닥친 강풍과 소나기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서둘러 셔틀버스에 올라 빠져나오면서도 눈은 몽생미셸에 고정돼 있었다.


길었던 하루가 끝나고, 다들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몽생미셸에서 파리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파리에 당도할 무렵, 가이드가 파리 오페라 가르니에 공연장 근처에서 흉기 테러가 발생해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알려줬다. 파리 시내는 비상사태였다. 덩달아 여행자들의 마음도 싱숭생숭해졌다. 그날 몽생미셸을 다녀오기로 한 걸 다행이라 생각하면서도 씁쓸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여행은 계속돼야 하는 것을..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솔직히 '파리 여행기'를 다시 쓰게 될 줄은 몰랐다. 


(예외가 없는 건 아니지만) 한번 본 영화는 다시 보지 않고, 한번 읽은 책은 다시 읽지 않는 이상한 고집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한번 갔던 여행지를 다시 들리는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경제적 사정이나 일정 등 이런저런 조건이 갖춰지고, 단단히 마음을 먹어야 떠날 수 있는 해외여행인지라 굳이 갔던 곳을 또 갈 여유가 없었다. 난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수두룩한 여행끈 짧은 여행자에 불과하니까. 


2016년 11월에 처음 프랑스 파리에 다녀왔으니 불과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파리에 가게 됐다. 그 사이 체코 프라하, 오스트리아 빈, 헝가리 부다페스트를 한번에 묶어 다녀왔고, 뜨거운 햇볕이 작열하는 터키 이스탄불을 다녀왔다. 이번엔 내심 이탈리아 로마를 염두에 뒀지만, 최종적인 선택은 결국 파리였다. 물론 벨기에를 세트로 묶는 보험(?)도 들어뒀다. 일종의 절충이라고 할까. 



첫 번째 파리는 겨울이었다. 기온이 낮아 제법 쌀쌀했고, 체감온도 역시 낮았다. 아예 두꺼운 점퍼를 입었었다. 추위에 떨면서 여행을 하고 싶지 않았다. 비수기로 접어드는 시기이다 보니 여행하는 사람들이 적었다. 관광지는 가는 곳마다 거의 텅 비어있다시피 했다. 줄을 서지 않아 반가웠지만, 뜨거운 열기를 느낄 수 없어 심심했다. 그래도 저 유명한 명소와 예술품들을 독점했으니 불만은 없었다. 


두 번째 파리, 그러니까 5월의 파리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모든 것이 생동하고 있었고, 그 안에 있던 나도 덩달아 생기가 돌았다. 햇살은 밝고 따스했고, 하늘은 맑고 투명했다. 초록의 싱그러움으로 가득한 파리는 매 순간 빛났고, 스스로를 빛냈다. 마치 ‘이게 내 본연의 모습이야’라고 말하는 듯 했다. 어딜 가나 사람들로 북적였고, 어느 곳이나 활기가 넘쳤다. 5월의 파리는 완전히 다른 공간이었다. 


두 번째는 또 다른 의미의 첫 번째였다. 가보지 못했던 곳을 들릴 여유가 생겼고, 한번으로 충분하지 않았던 곳을 다시 챙길 꼼꼼함도 생겼다. 다시 들린 몽마르트르 언덕은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사크레쾨르 성당 주변 카페들은 손님들로 꽉 차 있었고, 그 앞은 거리의 화가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맑은 날의 베르사유 궁전은 화사함의 차원이 달랐다. 정원은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웠다. 루브르와 오르세의 분위기는 몇 곱절 뜨거웠다. 



생각지도 않게 미완의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를 이어가게 됐다. 번호는 13이다. 결국 불완전하게 끝나겠지만, 그래도 몇 개의 글을 더 보탤 수 있게 돼 개인적인 아쉬움이 씻기는 기분이다. 본론으로 바로 들어가자. '지베르니(는 파리의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이지만, 파리에서 시작해 파리로 돌아와야 하고, 파리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리라)'와 '오랑주리 미술관'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한다. 


지베르니(Giverny)와 오랑주리 미술관(Orangerie Museum)은 프랑스 인상파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라는 연결고리를 갖고 있다. 인상파라는 명칭이 그의 작품인 <인상, 해돋이>에서 비롯됐다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다. 지베르니는 파리에서 약 75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는데, 모네가 거주하며 작업을 했던 곳이다. 오랑주리 미술관에는 모네의 걸작인 <수련(les Nymphéas)> 연작이 전시돼 있다.


지베르니에 가게 위해서는 손쉽게 현지 투어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몽생미셸에 갈 때는 어쩔 수 없이 현지 투어를 신청했다. 차로 달려서 4시간 30분~5시간에 달하는 거리가 부담스러웠고, 대중교통으로 가기엔 워낙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지베르니는 기차로 50분~1시간 20분이면 갈 수 있어 부담이 적었다. 이 정도는 혼자 힘으로 해결하고 싶은 도전정신이 샘솟았다. 



출발점은 생 라자르 역(Gare saint-lazare)이다. 지베르니까지 바로 가는 기차가 있으면 좋겠지만, 베르농(Vernon) 역까지 가서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살짝 고생을 각오해야 하는 여정이다. 그 정도의 고생은 아무것도 아니라 생각될 만큼의 만족감을 느끼게 될 테니 섣부른 손익판단은 금물이다. 성수기 무렵에는 원하는 시간대에 기차표가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미리 끊어두는 센스가 필요하다. 


성수기 여행이 처음이었던 나의 경우에는 (결과적으로는 좋은 선택이었지만) 다음날 06:54 기차표를 예매해야 했다. 어떤 여행 책자에는 45분이면 된다는 설명도 있는데, 베르농까지는 1시간 20분 정도 소요됐다. 돌아오는 기차는 50분 정도 걸렸으니, 완전히 틀린 설명은 아니다. 베르농 역에서 내려 정문으로 나가면 소박한 풍경이 펼쳐지는데, 50m쯤 가면 마을 버스 타는 곳이 있다. 표는 버스 기사에게 사면 되니 당황하지 말자.


새벽에 기차를 타고 떠나왔건만, 버스 시간이 한 시간 이상 남은 상황이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여유는 배르농 아침 산책을 하는 걸로 채우기로 했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버스 기사가 출발할 생각을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 다른 기사들과 수다를 떤다. 다음 열차의 손님들을 기다렸다가 출발하려는 심산일까. 예정 시간보다 30분이 더 지났을까. 드디어 출발하는 버스, 앞쪽에 앉아있던 누군가가 외친다. ‘thanks god!’



바깥 풍경을 구경하느라 15분이 훌쩍 지났다. 지베르니에 도착했다. 버스를 타면서 이미 벌어졌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곳의 초록은 농도부터 다르다. 전날 밤 일기예보를 보며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녹아버린 지 오래다. 햇살은 더할나위 없이 따스하고, 하늘은 그 어느 때보다 푸르르다. '이래서 지베르니, 지베르니 하는구나!' 감탄이 그치지 않는다. 지베르니에 오다니, 스스로 믿기지 않는 걸음을 떼고 있었다. 


지베르니는 굉장히 작은 시골 마을이다. 버스 정류장에서 걸어서 넉넉히 10분이면 인상주의 미술관에 닿고, 거기에서 또 10분이면 모네 생가에 다다른다. 가는 길목마다 꽃과 나무로 이뤄진 천상의 풍경들이 펼쳐져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대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다. 골목이 하나같이 예쁘고, 그 골목의 터잡은 집들은 하나같이 아름답다. 이런 곳에서 살면 그 어떤 걱정도 없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져든다.  



인상주의 미술관은 굳이 들리지 않아도 좋다. 그때마다 특별전을 열어 전시를 하는 곳인데, 내가 방문했을 때는 일본의 인상주의라는 주제로 전시가 한창이었다. 어차피 목적은 모네이기 때문에 가볍게 패스했다. 자, 드디어 모네의 생가다. 아침이라 줄이 그리 길지 않다. 앞쪽에 선 가족들의 수다가 귓가를 파고들지만, 상쾌한 기분에 이조차도 용납하기로 한다. 입장료는 9.5유로. 


계단을 내려가면 곧바로 기념품 샵이 나온다. 특이한 구조다. 밖으로 나가면 드디어 모네의 정원과 집이 나타난다. 그가 43세인 1883년 지베르니를 발견하고 가족들과 함께 정착해 여생을 보냈던 곳. 1926년 폐암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모네는 이곳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목조로 된 생가와 정원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연못으로 가는 길이 나타난다. 설렌 가슴이 또 한번 설레기 시작한다. 




연못은 또 다른 세계였다. 모네의 그림 속에 실제로 들어온 느낌이랄까. 마치 풍경의 일부가 된 듯 하다. '아, 이런 곳에서 살았구나.' 예술적 영감이 떠오를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마저 든다. 좀더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면 좋았겠지만, 오후에 접어든 지베르니는 이미 관광객들로 가득 차 버렸다. 한걸음 내딛기도 버거울 정도였다. 어차피 미리 예매해둔 기차 시간이 다가와 더 이상 머무를 수도 없었다. 


만약 여행 기간이 넉넉하다면 하루를 온종일 지베르니에 할애하는 것을 추천한다. 좀더 느긋하게 모네의 공간을 거닐어 본다면, 마치 잠시나마 모네가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파리로 돌아와서 곧바로 오랑주리 미술관으로 향했다. 지하철을 타고 콩코르드(Concorde) 역에서 내렸다. 걸어서 5분이면 된다. 첫 번재 여행에서 이미 들렀던 곳이지만, 지베르니를 다녀온 그 감각을 살리고 싶었다.




두 눈에 가득 담았던 광경, 두 발로 직접 거닐었던 그 공간을 담은 그림을 빨리 보고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불과 몇 시간 전까지 머물렀던 정원과 연못이 그림 속에 펼쳐져 있었다. 그 연속성이 작품에 대한 감동을 확장시켰다. 이곳에 있는 <수련> 연작 패널은 모네가 76세부터 백내장으로 작업이 어려워진 81세까지 그린 것이다. 어떤 마음으로 그렸을까.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그는 어떤 심정으로 그 풍경을 담았을까. 


어떤 소설가가 그랬다. 여행을 가면 그 곳과 관련된 책을 읽으라고. 역시 '스토리'가 중요하다. 파리를 가면 (책도 좋지만) '그림'을 봐야 하고, 그 그림을 더욱 잘 느끼려면 그 배경이 되는 장소에 가보는 게 좋다. 첫 번째 여행에서 그런 시도를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곳이 파리라면 더욱 그렇다. 시내에만 해도 볼거리가 차고 넘치니까. 그래서 파리는 두 번 가면 더 좋은 곳이다. 아니, 어쩌면 가면 갈수록 좋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이번 겨울은 유독 춥다. '춥다'는 말로 그 차가움을 모두 담아내기 어려울 정도의 매서운 한기다.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북극의 온도가 올라가면서 벌어진 사달이라고 한다. 북극의 차가운 공기를 가두는 역할을 하던 제트기류가 약해져 그 한기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MBC <무한도전>의 유재석, 정준하, 조세호는 '이한치한'으로 추위와 맞서싸웠지만, 방송인도 아닌 우리가 그리 할 필요까진 없으리라. 


이럴 때 이스탄불을 여행했던 기억이 조금은 도움이 된다. 한여름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터키의 9월 햇볕은 엄청나게 강렬했다. 정수리로 쏟아지는 그 뜨거움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했고, 그 따가움은 살갗이 익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그래서 지하궁전 예레바탄 사라이를 피난처로 삼아 더위로부터 벗어나곤 했다. 당시에는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던 그 햇볕이 이제는 그리워지는 걸 보면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간사하다. 



베벡(Bebek)을 소개하려고 한다. 이곳은 흔히 '유럽풍의 낭만이 숨쉬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유럽풍의 낭만이 정확히 설명하긴 어렵지만, 어쨌든 아기자기한 가게들이 즐비하고 여유가 넘치는 공간인 건 분명하다. 최근에 들어 유명해진 탓에 사람들이 제법 많이 찾게 됐지만, 주요 관광지만큼의 북적임은 아니다. 그래서 여행의 복잡함에서 벗어나 조금 한적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를 원한다면 베벡으로 가길 추천한다. 


혹시 베벡이라는 지명을 듣고서 젖병 브랜드의 하나인 ‘베벡’을 떠올린 사람이(흔치는 않겠지만) 있을지도 모르겠다. 미국의 유아용품 전문기업 씨케이디커머스가 런칭한 브랜드인데,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냐 하면 터키어로 베벡(bebek)이 '아기, 유아, 젖먹이 아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흥미롭지 않은가? 여담은 이쯤에서 그만하고, 본격적으로 유럽의 낭만이 살아 숨쉬는 베벡으로 가보도록 하자. 



베벡은 이스탄불 중심지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져 있다. 가는 방법이 어렵진 않지만(오히려 간단하다), 시간이 제법 소요된다. 돌마바흐체 궁전 부근에서 루멜리 히사르 방향으로 버스(40, 40T, 42T)를 타고 약 40~45분 정도를 가야 한다. 차가 많은 저녁 시간대라면 1시간 이상을 각오하는 게 좋다. 오르타쾨이와 보스포루스 대교를 지나 한참을 더 이동해야 한다. 


이동 시간이 부담스러울 수도 있지만, 오른쪽으로 펼쳐져 있는 보스포루스 해협의 뻥 뚫린 풍경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또, 바다를 가르는 요트와 유람선 등이 가는 길을 심심하지 않게 한다. 버스에서 내리면 길 양쪽으로 쭉 늘어선 레스토랑과 카페들을 볼 수 있는데, 그 길을 따라 걷다보면 베벡만의 독특한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유럽풍의 낭만'이 무엇인지 알 듯하다. 



해안가로 나가면 낚시를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에미뇌뉘에서 워낙 많이 봐왔던 광경이라 더 이상 놀랍지는 않았다. 해안 인근에 공원도 있어 쉬어갈 수도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베벡의 백미(白眉)는 '스타벅스'다. 어딜 가나 있는 스타벅스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베벡의 스타벅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런 특급 별명을 가지고 됐을까. 궁금증이 생겨 가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베벡을 방문한 여러 이유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실제로 방문해보니 외관이라든지 내부, 그러니까 건물 자체가 특출나게 아름다웠던 건 아니었다. 어찌보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하긴 어려울 거라 생각됐다. 솔직히 처음에는 살짝 실망했다. 


베벡의 스타벅스가 이름을 드날리게 된 건, 아마도 카페 안에서 펼쳐지는 뷰(view)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일 것이다.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보스포루스 해협은 황홀할 정도의 장관을 연출했다. 건물 밖에서 내뱉지 못했던 탄성이 그제서야 터져 나왔다. '이래서 베벡의 스타벅스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하는 거구나!' 1층의 창가와 아래쪽의 테라스는 자리가 쉽게 나지 않지만, 한번쯤 작심하고 노려볼(?) 만하다. 



어느새 노을이 지고 순식간에 어둠이 몰려왔다. 저녁이 되면 베벡에는 사람들이 더욱 많이 몰려든다. 식당에는 음식과 술을 즐기는 손님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다. 거리가 제법 시끌벅적해지고, 분위기도 한층 더 뜨거워진다. 낮과 밤의 차이가 확연했다. 저 분위기에 함께 취해볼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역시 혼자서는 좀 어려웠다. 


타지에서 맞는 밤은 낭만적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두렵기도 하다. 어쩌겠는가.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올 수밖에. 이스탄불의 교통체증을 몸소 체험하면서 말이다. 여전히 혼자 가는 여행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만, 베벡은 친구나 연인과 함께 들린다면 더욱 좋을 곳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이스탄불 구시가지가 <인디애나 존스>의 느낌이라면, 신시가지는 <미션 임파서블>이랄까? 


물론 과장된 비유지만, 그만큼 두 곳의 분위기는 매우 다르다. 구(舊)시가지 여행은 사실상 유적 탐사에 가깝다. 고대와 중세 시대를 탐방하는 역사학자가 된 기분이다. 반면, 신(新)시가지는 그 이름에서도 나타나듯이 현대적인 느낌을 물씬 풍긴다. 톱카프 궁전을 대체하기 위해 지어진 돌마바흐체 궁전은 당연히 신식이고 훨씬 웅장하다. 이스탄불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갈라타 탑조차도 현대적인 구조물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여행의 성격도 판이하게 달라질 수밖에 없다. 


-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 내의 카페에서 바라본 보스포루스 해협 -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 책자와 구글 지도를 보면서 신시가지를 이리저리 살폈다. 그리고 '끌리는 곳'을 체크해 봤다.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군사 건축물 '루멜리 히사르'와 최근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베벡(Bebek)'은 빼놓을 수 없었다. 유럽풍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베벡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가 있다. 어차피 두 곳은 근거리에 있어 한꺼번에 다녀올 수 있을 듯 싶었다. (루멜리 히사르는 입구까지 갔지만, 일정과 체력적인 문제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밖에도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Istanbul Museum of Modern Art), 문화복합공간 솔트 갈라타(SALT Galata), 페라 박물관(PERA museum) 등이 눈에 띠었다. 이 세 곳은 (내가 구입한) 여행 책자엔 소개되어 있지 않았다. 당연히 패키지로는 갈 수 없는 장소였다. 주저할 이유가 없었다. 일정을 하루 통째로 비워두고, 나만의 '예술의 날'로 만들면 좋겠다 싶었다. 제법 근사한 하루가 될 거란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마침내 그날의 아침이 밝았다. 여유 있게 둘러보려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첫 번째 목적지는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으로 정했다. 숙소 근처인 카바타스(Kabatas) 역에서 T1을 타고 톱하네(Tophane) 역까지 간 후 도보로 이동했다. 가지고 있는 정보가 많지 않아서 구글 지도와 표지판에 전적으로 의지해야 해야 했는데, 가는 길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공장을 개조한 듯한 외관은 전혀 미술관스럽지 않아서 미술관을 찾는데 조금 헤맸을 뿐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외관이야말로 현대 미술관이라는 이름과 개념에 적확히 부합했는지도 모르겠다. 


현대 미술관으로 가는 길답게(?) 중간에 작은 공원에서 설치 예술가 한 명을 만날 수 있었다. 판지로 집을 지어놓고 호기롭게 'Cardboard museum'이라는 이름을 써놓았다. 관심을 보였더니 굉장히 반가워하며 간단한 설명을 곁들였다. "내부를 볼 수 있냐?"고 묻자 흔쾌히 안쪽을 구경하게 해줬다. 언어적 한계 때문에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괴짜의 괴짜스러운 작품을 통해 현대 미술관으로 가기 전에 뭔가 독특한 경험과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었다. 



미술관 외부에는 다양한 설치 예술이 전시돼 있었다. 밭을 구현해 두고 소의 쟁기질을 표현한 작품도 있었는데, 역시 난해해서 이해가 어려웠다. 미술관 내부에는 다양한 미술 작품들이 펼쳐져 있었다. 전문적인 설명을 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전공자가 아니라 한계가 있다. 그저 '보는 것', 그 행위 자체에 만족한다. 어쩌면 잘 알지도 못하면서 왜 그런 곳에 가냐고 물을지도 모르겠다. 그저 좋아서, 라는 말이 대답이 될까. 잘 모르는 미지의 것을 접하는 순간에서 즐거움을 느끼는지도 모르겠다. 



페라 박물관은 갈라타 탑의 북쪽에 위치해 있는데, Meşrutiyet Cd. 에 위치해 있다. (참고로 Cd는 Caddesi의 약자로, 거리라는 뜻이다.) 이스티클랄 거리 쪽으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그곳을 기점으로 길을 찾아가는 게 좋다. 골목길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찾아가기 쉽진 않다. 아주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므로 큰 표지판이 있는 것도 아니라 자칫 잘못하면 길을 헤맬 염려도 있다. 실제로 그냥 지나쳐 버렸다가 '어? 여기 아니야?'라며 다시 돌아왔다. 그래도 신시가지의 구석구석을 누비는 재미가 있다. 


페라 박물관 앞에는 제법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1893년 건축돼 호텔(Hotel Bristol)로 사용됐던 건물이 지금은 박물관이 됐다. 『오리엔탈 특급살인사건』의 저자로 유명한 아가사 크리스티가 머물렀던 곳이라고 한다. 페라 박물관은 지하 1층부터 지상 6층으로 이뤄져 있다. 1~2층에는 이스탄불의 과거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회화, 공예품 등이 전시돼 있는데, 오리엔탈 회화를 비롯해 소아시아 지방의 저울과 저울추 등을 볼 수 있다. 3~5층은 기획 전시실로 활용되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과 연령으로 시끌벅적였던 구시가지와는 달리 신시가지(의 갈라타 탑과 같은 유명 관관지를 제외하면)는 확실히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스탄불 현대 박물관이나 페라 박물관에선 훨씬 더 도드라졌다. 당연히 한국인들을 만날 기회는 없었다. 완벽히 낯선 곳이 주는 자유로운 느낌을 좋아하는 터라 더할나위 없이 만족스러웠다. 해외 여행이 주는 해방감이라고 할까. 같은 세대의 기운을 많이 받을 수 있었고, 관광지의 느낌에서도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어서 더욱 좋았다. 


테마를 정해 여행의 일정을 짰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 나만의 '예술의 날'은 내가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었다. 그리고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과 페라 박물관을 들리기 전에 솔트 갈라타(SALT Galata)를 방문했었는데, 그 곳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에 할 기회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 에미뇌뉘 선착장 -


이스탄불 여행기의 전반전이 끝났다. 지금까지 소개했던 곳들은 굳이 자유 여행이 아니더라도 '갈 수 있는 곳'이자 '가게 되는 곳'이다. 구시가지에 밀집한 주요 관광지들과 신시가지의 갈라타 탑, 돌마바흐체 궁전은 워낙 유명한 명소라서 패키지 여행의 필수 코스에 포함돼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어를 구사하는 사람들을 제법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아직 아야이리네 박물관, 예레바탄 사라이 등 구시가지에서 소개하고 싶은 곳이 몇 군데 남아 있지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제부터는 그 틀을 벗어나보기로 하자. 

자유 여행의 묘미는 '선택권'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잠깐동안 주어지는, 일정한 제한이 있는 옵셥이 아니라 완전한 선택권 말이다. 주체적인 권한이랄까. 쉽게 말하면 '내 마음대로' 쯤 될 것이다. 이미 일정과 숙소, 음식 등에서 그 권한을 제법 누렸지만, 장소적인 면에서 좀더 과감한 선택을 해보고 싶었다. 나는 그 선택권을 대중교통을 이용해 중심지로부터 제법 멀리 떨어진 곳을 다녀오는 데 쓰기로 했다. 그리하면 그 곳이 좀더 잘 보이고, 좀더 깊이 보인다. 이스탄불도 예외가 아니리라. 



그리하여 고른 곳이 바로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이다. 지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카리예 박물관은 구시가지로부터 상당히 떨어져 있다. 드디어 베이스캠프를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모험심이 조금은 발현되는 듯 하다. 그때부터 여행이 좀더 생동감을 띤다. 선택을 하면 그때부터 '고민'이 시작된다. 이동 수단은 무엇으로 할 건지, 돌아오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은 어느 정도일지, 인근 지역에 가볼 만한 곳이 더 있는지.. 이것이야말로 자유 여행이 주는 행복한 두통이다. 게다가 매우 중독적인 통증이다. 

카리예 박물관까지 가는 방법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에미뇌뉘(Eminönü)에서 버스를 타고 이동하면 되는 간단한 이동 경로였다. 에미뇌뉘는 여행 기간 중 밤마다 들렀던 곳이라 익숙했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골든혼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데, 에미뇌뉘는 두 곳을 연결하고 있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길다란 다리 아래에는 케밥 가게들이 즐비했고, 해협을 따라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인파의 북적거림은 밤낮을 가리지 않았다. 그 중의 한 명이 되는 일을 어찌 마다하겠는가. 


에미뇌뉘까진 트램(T1)을 타고 세 정거장만 이동하면 되니 어려울 게 없었다. 문제는 버스를 타는 일이었다. 지도를 보고 찾는데도 제법 헤맸다. 다리 아래로 들어가 지하의 통로를 돌아다닌 끝에야 버스 정류장을 찾을 수 있었다. 37E버스에 올랐다. '터키 하면 케밥? 진짜 명물 따로 있었네'라는 글에서 소개했던 구운 밤을 사서 버스에 올랐다. 외곽 지역으로 빠지는 버스라 승객 중에 관광객은 없는 듯 보였다. 현지인들로 가득한 공간, 그런 느낌을 좋다. 마침내 그들의 한 명이 된 기분을 만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를 달렸을까. 에디르네카프(Edirnekapı)에서 하차했다. 핵심 관광 지역을 벗어나자 벌써 공기가 달랐다. 왠지 모를 상쾌함이 느껴졌다. 이제부터 약 5분이면 카리예 박물관이다. 목적지가 근거리에 있는 만큼 좀더 여유를 가지기로 했다. 이스탄불 거리와 사람들을 좀더 느긋하게 경험하고 싶어졌다. 일단, 슈퍼에서 콜라를 사서 마시고 가던 길을 계속 걸었다. 골목길을 누비는 아이들이 보였다. '메르하바!' 반갑게 인사를 건네자 쾌활한 웃음소리와 함께 인사가 돌아왔다. 아이들만이 줄 수 있는 그 천진난만함이 발걸음을 더욱 가볍게 해줬다. 




카리예 박물관(Kariye Museum)
- 주소 : Dervişali Mahallesi, Kariye Cami Sk. No:8, 34087 Fatih/İstanbul, 터키
- 관람료 : 15TL(뮤지엄 패스 사용 가능)

코라 구세주 성당라는 또 다른 이름을 가진 카리예 박물관은 1081년 완공됐다. 건설 당시에는 동방 정교회 수도원 부속 교회였다고 한다. 14세기까지 증축과 개축이 반복됐다고 하는데, 여행을 하던 당시에도 외관 공사가 한창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발견하지 못한 채 지나칠 뻔 했다. '어라, 저긴가?' 여러 번의 의심 끝에야 그곳이 카리예 박물관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먼지가 올라오던지 건너편의 식당에서 피자를 먹는데 아주 곤혹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카리예 박물관은 세 개의 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현관 역할을 하는 나르텍스(narthex)와 성당 내부, 보조 교회당인 파레클레시온(parecclesion)으로 구분된다. 내부에는 14세기에 제작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가 아름답고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리스도와 동정녀 마리아의 일생을 담아놓은 작품을 비롯해 예수의 12제자, 천지창조, 최후의 심판 등도 묘사돼 있다. 가히 비잔틴 예술의 걸작이라 할 만 하다. 특히 신비로운 분위기와 어우러져 더욱 강인한 인상을 남긴다. 




성당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 시절에는 예쁨을 받지 못했고, 15세기에 다른 성당들과 마찬가지로 이슬람교 사원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아이소피아 박물관의 모자이크들이 그랬듯, 카리예 박물관의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들은 회칠로 가려지게 된다. 그러다가 1947년 미국의 비잔틴 연구소가 회칠을 벗기기 시작하면서 카리예 박물관의 수많은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 세상의 빛을 보게 됐다. 그래서 군데군데 훼손된 작품들이 눈에 띠어 보는 내내 안타까웠다.


한참을 머무르며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를 눈에 담았다. 관람객이 많지 않아 마치 전세를 내고 박물관을 구경하는 기분이었다. 동영상도 (스스로 생각하기에) 멋들어지게 찍을 수 있었다. 서늘한 공간이 주는 쾌적함도 좋았다. 밖으로 나가면 또 다시 땡볕 더위와 전쟁을 벌어야 하니 말이다. 그렇게 환상적인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식당에서 피자로 배를 채운 뒤, 다시 이스탄불의 골목길을 이리저리 누볐다. 애초의 진짜 목적은 그것이었으니 말이다. 걷고 또 걸었다. 



그러다가 근처의 놀이터에서 엄마와 함께 놀고 있는 터키 소녀를 만났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말(을 알아들었을지 의문이다)에 밝은 미소로 응답했다. 수줍은 손짓이 어찌나 사랑스럽던지. 덩달아 웃음이 났다. 피로가 싹 가셨다. 누군가 여행을 왜 가느냐고 묻는다면 (여러 대답을 할 수 있겠지만) 바로 이 순간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 짧지만 강렬한 교감 때문이라고 말이다. 낯선 여행자를 향해 건네는 아이들의 경계심 없는 밝은 미소 때문이라고 말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