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보다 실망스러운(워낙 기대치가 크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궁전 탐방의 아쉬움을 달래주는 건 역시 ‘거울의 방(La galerie des Glaces)’이다. 무려 578개의 거울이 이 넓은 방을 가득 채우고 있다.


거울도 거울이지만, 높은 천장에 매달린 화려한 크리스털 샹드리에에 먼저 눈이 간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셔터를 누르지 않을 도리가 없다. 또, 최고급의 황금 촛대와 화병 등의 장식품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만약 당신이 베르사유 궁전을 방문했을 때, 날씨가 화창하자면 더할나위 없는 행운이라 생각해도 좋다. 진심이다. 르 노트르(André Le Nôtre)가 1668년에 완성한 베르사유 정원을 만끽할 수 있으니 말이다.

물론 흐린 날(이 아니라 심지어 비가 와)도 그 나름대의 운치가 있지만, 아무래도 맑은 날의 파란 하늘과 대조를 이뤄야지만 초록의 베르사유 정원의 그 아름다움이 극대화된다.


기본 코스를 따라가다보면 궁전에서 나와 정원 쪽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정원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포인트에 서면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걸 보는 것만으로도 베르사유 궁전을 온 보람이 충분하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정원을 걸어보도록 하자. 물론 815ha의 넓디 넓은 정원 전체를 몽땅 둘러보는 건 하루 정도를 통째로 투자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게까지 머무를 필요는 없다.​


베르사유 정원의 핫플레이스 중 하나다. 미로처럼 이어진 정원 속에 간단한 간식 등을 판매하는 카페가 하나 있다. 궁전을 둘러보고 정원 산책까지 했으면 배가 출출해질 법 한데, 크라페 정도로 여기를 하는 건 어떨까?


푸른 하늘과 짝을 이룬 베르사유 정원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몇 장의 사진으로 충분히 설명이 되리라 생각한다. 어설픈 사진 실력으로도 이 정도다. 여유가 좀더 있다면 햇살과 함께 좀더 오래 머물고 싶은 곳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오랜만에 사진첩을 다시 들여다봤다. 여행 기간 동안 찍어둔 사진들에 먼지가 수북히 쌓여 있더라. (진짜 먼지가 쌓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 중 몇 장을 꺼내 사진전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봤다.



이미 여행기로도 쓴 적이 있듯이, 베르사유 궁전은 두 번째였다. 한번은 겨울 초입 무렵의 잔뜩 흐린 날씨였고, 이번에는 봄기운이 창연한 아주 맑은 날씨였다.

베르사유 궁전을 통해 날씨에 따라 특정 장소가 얼마나 다르게 느껴질 수 있는지 여실히 깨달았다. 역시 맑은 날, 해가 짱짱한 날 가는 게 최고다.

한번 갔던 곳인데도 이상하게 사진을 계속 찍게 된다. 그러다보니 사진이 제법 많아 한번에 담지 못하고 나눠서 싣게 된 점을 양해 바란다.




사실 베르사유 궁전은 그 이름이 갖는 아우라만큼 볼 거리가 많은 곳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오히려 작은 베르사유 궁전이라 불리는 퐁텐블로 성을 추천한다.

그런데 그건 베르사유 궁전을 다녀온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파리에 갔는데 어찌 베르사유 궁전을 가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갈 수밖에 없다.




베르사유 궁전을 다녀오면 왠지 모르게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처음에는 눈이 휘둥그레지고 탄성이 나오지만,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그건 궁전 내부의 보물들이 죄다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빈털털이 신세가 된 궁전이 주는 헛헛함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다. 베르사유 궁전의 하이라이트 거울의 방은 그리도 볼 만 하니까. 또, 궁전 내부보다는 오히려 정원이 훨씬 더 아름다우니까.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공허한 땅 위에 내린 흑임은 깊고 무거웠다. 그때 창조자는 ‘빛이 있으라’ 명했고, 세상은 낮과 밤으로 구분지어졌다. 정말 신이 ‘빛’을 창조했든 그렇지 않든 간에,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태양의 유무에 따라 삶을 살아왔다. 빛은 생활을 의미했고, 어둠은 수면을 뜻했다. 불이 사라지면 무력한 인간으로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모닥불은 최소한의 방편일 뿐이었다.


어둠은 순응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또, 극복의 대상이었다. 시야를 잃은 인간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는 어둠을 정복했다. 밤이 내린 도시는 더 이상 어둡지 않다. 흑암은 얕고 가볍다. 빛은 차고 넘친다.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신이 ‘낮의 도시’를 창조했다면, 인간은 ‘밤의 도시’를 창조한 셈이다. 


파리 에펠탑 


신의 창조물만 경이로운 건 아니었다. 2016년 파리의 에펠탑에 올라간 후 넋을 잃었고, 인간의 발명품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불빛 따위가 뭐가 멋있다고 야단법석이야’라고 무시했던 과거를 반성했다. 서울이나 도쿄, 홍콩의 야경(도 감탄을 자아냈지만)과는 다른 ‘낭만’이 있었다. 그건 단순한 불빛이 아니었다. 대도시의 야경의 온도가 차갑기만 하다면, 파리의 그것은 따뜻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다.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터키 이스탄불, 벨기에 브뤼셀을 여행하면서 그 생각은 확고해졌다. 낮의 도시와 밤의 도시는 확연히 달랐고, 그 차이를 경험하는 건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야경은 여행의 꽃이었고, 은은함을 간직한 유럽 도시들의 밤은 특히 아름다웠다. 밤의 도시를 둘러보고, 그 야경을 감상하는 건 여행 일정 중에서 매우 중요한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프라하의 야경 


부다페스트의 야경 


그동안의 여행지 가운데 ‘밤의 도시’가 가장 낭만적이었던 곳을 꼽으라면 역시 파리와 프라하, 부다페스트가 삼대장이다. 더 이상 순위를 매기는 건 불가능한데, 세 곳은 그마다 분명한 특색이 있었다. 파리는 ‘에펠탑’ 때문인지 몰라도 강렬하면서 낭만적인 느낌이었고, 프라하는 프라하성과 카를교의 조명 때문에 은은하고 감미로웠다. 부다페스트는 발광하는 국회의사당의 풍족한 빛 때문에 풍만감을 줬다. 


한편, 브뤼셀의 야경도 그에 못지 않은 아름다움을 뽐냈다. 벨기에 왕립 미술관에 이어 마그리트 미술관까지 빠르게 둘러봤다. 그날이 일요일이라 18:00까지 개관하지 않았다면 둘 중 하나는 포기해야 했을지도 몰랐다. 그 이후부터는 오히려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 파리와 몽생미셸에서도 경험했다시피 하절기의 유럽은 해가 늦게 진다. 늦어도 너무 늦다. 오후 10시가 지나야 겨우 어둑어둑해진다. 맙소사!


늦은 일몰 시각은 여행자의 입장에서 좋은 일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고생스러운 일이기도 했다. 여행 일정을 넉넉하게 짤 수 있다는 점에서 여유로웠지만, 아무리 돌아다녀도 어두워지지 않자 오히려 당황스러워졌다. 시간을 보내고 또 보내도, 아직 밖은 밝기만 했다. 여행에서 마지막 일정은 대개 야경을 보는 것으로 마감하기 마련인데, 밤이 되지 않으니 난감했다. 체력은 고갈돼 갔고, 결국 버티기 모드로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브뤼셀의 경우에는 숙소와 '(야경을 봐야 할 장소인) 그랑플라스'가 도보로 5~10분 거리였다. 그 말인즉슨 재정비가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우선, 벨기에로 떠나기 전에 미리 검색해뒀던 맛집 '르 비스트로(Le Bistro), Porte de Hal Boulevard de Waterloo 138, 1000 Bruxelles'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왕립 미술관에서 애매하게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는데,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어려워 택시를 탔다.


식당 1층은 벌써부터 사람들이 제법 들어차 있었다. 남은 자리도 대부분 예약석이라 2층으로 안내 받았다. 안내를 하던 직원은 장난기가 가득했다. 농담을 하면서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애를 썼다. 잔뜩 흐리고 차가운 날씨 덕에 굳어있던 얼굴이 덕분에 한결 편해졌다. 메뉴판을 받아들었지만, 차분히 단어를 번역해가며 주문을 하기엔 너무 지쳐 있었다. 



인터넷으로 사진을 검색해 홍합탕을 보여주고, 파스타는 감으로 주문했다. 그리고 감자튀김도 빼베드포드 호텔놓을 수 없었다. 홍합은 벨기에의 대표적인 음식이라 꼭 먹어보고 싶었다. 또, 싸늘한 날씨에 위축된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감자튀김(프렌치 프라이)는 그 이름 때문에 프랑스가 원조라 알려져 있지만, 벨기에의 이민자들이 미국에 들여왔다는 설도 상당한 지분을 갖고 있다. 


그들만의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벨기에의 감자튀김을 워낙 높이 쳐주는 터라 주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홍합탕은 C, 파스타는 B, 감자튀김은 A였다. 홍합탕은 좀 짠 편이었는데, 해감의 문제인지 짠맛을 강조하는 유럽식 조리법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국물이 따뜻하긴 했지만, 그 음식을 또 먹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감자튀김은 확실히 달랐다. 풍성한 식감이 우리네 것과는 차이가 뚜렷했다. 


식사를 모두 마치고, 숙소(베드포드 호텔, Bedford Hotel)로 돌아왔다. 소화도 시킬 겸 브뤼셀 시내를 걸었는데, 방안으로 들어오니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오후 7시나 됐을까. 아직 해가 지려면 3시간이나 남아 있으니, 잠시 눈을 붙이기로 했다. 평소 같으면 뒤척이기라도 했을 텐데, 침대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단계였다. 여행은 숙면과 동의어라 해도 틀릴 게 없다.





얼마나 잤을까. 알람소리에 겨우 눈을 뜨고, 커튼은 젖혀 시야를 확보했다. '와, 드디어 밤이구나!' 빛이 사라져 있었다. 브뤼셀의 밤은 어떨지 궁금했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그랑플라스로 가는 길은 조금 음침했지만, 점차 강렬한 빛이 눈앞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 한 걸음을 뗐을 때, 자연스럽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자동반사와 같은 감탄이었다.


밤의 그랑플라스는, 밤의 브뤼셀은, 밤의 벨기에는 낮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건물들로 둘러싸인 직사각형의 광장은 온통 빛으로 가득했다. 마치 빛을 내뿜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스스로 발광(發光)하고 있다고 할까. 찬란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게 분명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광장은 사람들의 반응까지 완전히 바꿔 놓았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방식대로 그 야경을 즐기고 있었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보였다. 다 같이 노래를 부르고 웃으며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양인이 신기했던 걸까. 그들은 자신들이 '안도라'라는 나라에서 왔다며 그곳을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고 대답했고, 그들은 또 한번 신기해 했다. 그리고 이내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만의 세계로 돌아갔다.


꿈을 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걷고 또 걸었다. 그 순간을 잊고 싶지 않았다. 눈 속에, 발걸음 속에 차곡차곡 기억하고 싶었다. 그랑플라스의 풍만한 빛이 주는 느낌은 그 전에 봐왔던 야경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그 밤을 잊을 수 없다. 인간이 창조한 '밤의 도시'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에트르타(Etretat)와 옹플뢰르(Honfleur)는 ‘[버락킴의 파리 여행기] 14. 천공의 수도원 몽생미셸, 꿈엔들 잊으리오!’ 편에서 소개했다시피 몽생미셸 투어의 세트로 묶인다. 여행 일정은 파리에서 출발해 에트르타 > 옹플뢰르 > 몽생미셸을 거쳐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식이다.



에트르타로 가는 길에 들린 휴게소의 폴(Paul) 빵집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었다.



노르망디 지역의 해안도시인 에트르타는 알바트르 해안(Cote d'Albatre)을 끼고 있는 절벽(팔레즈 다발과 팔레즈 다몽)으로 유명하다. 모파상(Maupassant)은 팔레즈 다발(왼쪽 절벽)을 코끼리에 비유했는데, 이 ‘코끼리 바위’는 에트르타의 명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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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에 와서 팔레즈 다발은 어른 코끼리라 불리고, 팔레즈 다몽 쪽은 아기 코끼리라 불린다. 마을의 큰길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해안이 나오는데, 양쪽으로 코끼리를 쏙 빼닮은 절벽이 신기하기만 하다. 자, 이제 팔레즈 다몽의 등산로(라고 하기엔 밋밋한 언덕길)를 따라 올라가보도록 하자.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어 우산을 쓰고 움직이자니 여간 귀찮은 게 아니었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만만하게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경사가 커서 살짝 애를 먹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뒤를 돌아보는 순간 ‘와!’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노트르담 드 라 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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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는 ‘노트르담 드 라 가르(Chapelle Notre-Dame de la Garde)라는 작은 교회가 위치해 있고, 그 뒤편으로 프랑스 비행사를 기념하는 뾰족탑도 설치돼 있다. 비 오는 날의 바다는 왠지 모를 쓸쓸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맑은 날의 에트르타는 어땠을까, 궁금증을 뒤로 한 채 에트르타를 떠나야 했다.



항구도시 옹플뢰르를 정말 아름다웠다. 몽생미셸 투어의 주(主)는 몽생미셸이지만, 오히려 더 마음을 빼앗겼던 곳은 옹플뢰르였다. 항구에 정박해 있는 배들과 노르망디 분위기 있는 목조 건물들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생트카트린 교회


교회 맞은 편의 종탑



생트카트린 교회 내부 모습

마을 중앙에 위치한 생트카트린 교회는 15세기에 건립된 고딕 양식인데, 프랑스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교회라고 한다. 때마침 교회 주변에서 장(場)이 열리고 있었는데, 어느 곳이나 시장의 부산스러우면서도 정겨운 분위기는 똑같았다. 안타깝게도 비가 더 내리는 바람에 일찍 접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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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카트린 교회를 중심으로 골목들이 얼키설키 뻗어 있는데, 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 갤러리들이야말로 옹플뢰르의 진정한 자산이다. 다양한 색깔로 디자인된 갤러리들은 그 자체로 아름다웠는데, 그 안에 전시된 개성 넘치는 작품들은 발길을 계속 붙잡았다.




‘하루’를 꼬박 쓸 수밖에 없는 몽생미셸 투어를 또 갈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NO’다. 그렇다고 실망했다거나 별볼일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번이면 족하다’에 가깝다. 하지만 옹플뢰르에 다시 갈 생각이 있냐고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YES’다. 맑은 날 한번 더 가보고 싶다. 하루쯤 묵고 싶기도 하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브뤼셀, 예술의 언덕 


“벨기에는 그냥 거쳐가는 나라 아니에요?”

“하루면 충분하지 않아요? 이틀은 많지 않나?”


벨기에를 간다고 말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일관된 리액션이었다. 7박 8일의 여행 일정 가운데 고작 이틀이라고 설명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차라리 그 이틀을 파리에서 더 보내는 게 낫지 않아?”였다. 질 수 없었다. 벨기에 때문이 아니라 내 여행을 수호하기 위해서. “벨기에도 볼 게 많은데, 왜 그래?” 도대체 뭐가 있냐는 반문, 나도 가봐서 아는데 별 게 없다는 확신 앞에 몇 가지 모범답안을 내놓았다. 


“브뤼셀에 가면 오줌싸개 동상도 있고, 왕립미술관에는 다비드가 그린 마라의 죽음이 전시돼 있어. 또, 마그리트 미술관도 있는데, 거기도 꼭 갈 거야. 도시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브뤼헤는 또 어떻고!”


그럼에도 반응은 시들시들했다. 굳이 갈 거라면 하루면 충분하다는 여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몇 차례 여행 일정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괜히 섭섭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니 설명이든 설득이든, 사실 그건 불필요한 일이었다. 대답은 한마디면 충분했다. ‘가고 싶으니까. 그곳에 가보고 싶으니까.’ 천상병 시인의 방식대로 대답하자면 “그냥 벨기에, 가보지 못했던 새로운 곳이 가보고 싶었다” 정도일까. 


파리 북역 


일정상 벨기에는 3, 4일차(일, 월)였다. 파리에서 이틀을 보내고, 벨기에 브뤼셀에서 이틀을 보내고, 다시 파리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둘째 날 몽생미셸에서 출발해 파리에 도착할 시각이 새벽 3시 무렵이라 브뤼셀로 떠나는 기차 시간은 조금 여유있게 예약하기로 했다. 그렇다고 너무 여유를 부리게 되면 벨기에 왕립 미술관과 마그리트 미술관을 둘러볼 시간이 없으므로 12시25분 표를 끊었다. 그래도 강행군인 건 마찬가지였다. 


파리에서 브뤼셀까지는 탈리스(Thalys)라는 국제 고속철도로 이동하는데, 대략 1시간 22분 정도가 소요된다. 탈리스는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독일을 연결하고 있는데, 1996년 운행을 시작했다. 사실 일정에 여유가 조금 더 있었다면 암스트레담까지 가볼 욕심이 있었다. 현지에서 표를 끊어도 되지만, 인터넷으로 미리 예약해두면 좀더 저렴하다. 토, 일에는 ‘주말요금’이 적용돼 더 싸게 표를 구할 수 있다. 


브뤼셀로 가는 기차는 파리 북역(Paris-Nord, Gare du Nord)에서 타야 한다. 지베르니에 가기 위해선 생 라자르 역(Gare Saint Lazare)으로 가야 하듯 역마다 노선이 다르다. 또, 브뤼셀 중앙역(Bruxelles-Central)이 아니라 브뤼셀 미디 역(Brussel-Zuid, Bruxelles-Midi)까지만 운행이 된다. 브뤼셀 중앙역으로 가야 한다면 지하철 등의 대중교통으로 갈아타야 한다. 어차피 연결이 잘 돼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안녕하세요? 아기가 정말 예뻐요. 이름이 뭐예요?” 

“고마워요, ‘스텔라’예요”


기차를 탔을 때 옆자리에 누가 탈지에 대한 기대와 우려는 외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누구일까. 갓난아기를 안고 탄 젊은 아빠였다. 통로를 끼고 그 옆에는 딸과 함께 엄마가 있었다. 표 예약을 잘못했는지 떨어져 앉아 있었는데, 기꺼이 자리를 바꿔 주고 창가 쪽에 앉았다. 주름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갓난아기는 이름이 스텔라였다. 표를 확인하던 승무원도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동안 아기를 보며 부모와 대화를 나눴다. 


브뤼셀 미디 역에서 내려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인 ‘베드퍼드 호텔(Bedford Hotel)‘이동했다. 브뤼셀은 ‘그랑플라스(Grand-Place)’를 중심으로 볼거리가 모여 있기 때문에 그 근처에 숙소를 정하는 게 좋다. 1998년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록된 그랑플라스는 브뤼셀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그리 넓지 않아서 웬만한 곳은 걸어서 다닐 수 있다. 



숙소에서 집을 풀고 그랑플라스를 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 미술관까지 둘러보려면 갈 길이 바쁘다. 가는 길에 브뤼셀의 명물이라는 ‘오줌싸개 동상’을 보기로 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멀찌감치에 사람들이 제법 모여있었다. 저기다 싶었다. 그런데 이 ‘감흥 없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오줌싸개 동상을 실제로 보고 실망했다던 수많은 관광객의 증언은 사실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작았고, 심지어 볼품 없었다. 


오줌싸개 동상은 브뤼셀의 상징이다.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snoy)의 작품으로 60cm 크기의 청동상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이 청동상이 굉장한 옷 부자라는 것이다. 무려 700벌 가령의 의상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무슨 까닭일까. 동상이 직접 옷을 샀을 리 없으니 누군가 선물을 한 걸까? 그렇다. 오줌싸개 동상을 약탈했덩 루이 15세가 동상을 돌려주며 프랑스 후작의 의상을 입혀 보낸 일화가 그 유래다. 



이후 국빈들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 오줌싸개 동상을 위한 의상을 선물로 가져왔고, 그렇게 옷이 쌓이고 쌓여 700벌이나 된 것이다. 유명한 관광지 앞에 자연스럽게 식당가가 형성되기 마련인데, 오줌싸개 동상 주변에는 와플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벨기에의 명물인 와플을 어찌 그냥 지나칠 수 있겠는가. 기왕에 먹는 거 과일과 데코가 왕창 들어간 것으로 주문했는데, 유럽의 단맛, 그 과한 달콤함에 고개를 흔들어야 했다. 


오줌싸개 동상과 와플에 실망(나중에 와플은 다시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가장 기본적인 와플이 고소하고 맛이 있었다)하고, 그랑플라스로 향했다. 가로 70m, 세로 110m의 광장 안으로 들어서자 빅토르 위고가 왜 이 곳을 두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했는지 알 것 같았다. 프라하의 구시가 광장 같은 낭만적인 분위기는 없었지만,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의 풍미가 멋스러웠다. 



광장 주변으로 15세기 초반이 건축된 시청과 왕의 집, 길드 하우스 등이 있고, 상점을 비롯해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광장의 여유로움을 만끽하며 식사를 하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 아쉽게도 왕립 미술관의 폐관 시간(토, 일은 18:00까지)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차피 그랑플라스는 숙소 옆이라 오고 싶을 때마다 올 수 있었다. 실제로 그랑플라스는 밤이 되면 전혀 다른 공간으로 변신했다.


아쉬움을 안고 그랑플라스를 빠져 나와 벨기에 왕립 미술관으로 향했다. 세 정거장 거리였지만, 대중교통 1일권을 끊어둔 터라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미술관은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시키기 때문에 가급적 체력을 아껴둘 필요가 있다. 왕립 미술관 입구에 여러 언어로 글씨가 쓰여 있었는데, 반갑게도 한글도 있었다. 루브르 박물관에도 한글이 표기돼 있는데, 브뤼셀은 한국인들이 그리 많이 찾는 곳도 아닐 텐데 신기하게 느껴졌다. 




드디어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입장했을 때가 16시쯤 됐던 것 같다. 마그리트 미술관(콤비 티켓을 끊었다)도 함께 둘러봐야 했기 때문에 마음 속으로 시간을 각각 1시간씩 배정했다. 좀 빠듯한 시간이긴 하지만, 어차피 봐야 할 작품은 정해져 있었다.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마라의 죽음> 말이다. 방대한 수의 작품이 전시돼 있는 미술관에서 모든 작품에 동일한 시간과 에너지를 쏟아부을 순 없다. 


<마라의 죽음>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그림 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뿜어져 나오는듯 했다. 죽음을 맞이한 장 폴 마라(Jean-Paul Marat)의 얼굴은 초연해 보였다. 마치 순교자의 모습을 보는 듯 했다. 급진적 혁명가였던 마라가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당하자, 다비드는 마라의 장례에 쓰일 그림을 그린다. 물론 마라의 죽음을 통해 민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도 포함돼 있었다. 그가 <마라의 죽음>을 세 점이나 그린 건 그 때문이다. 



그림 앞에서 한동안 떠날 수 없었다. 의자에 앉아 한참을 바라봤다. 확실히 다비드는 회화의 힘이 무엇인지 명확히 알고 있는 영민한 화가였고, 그 힘을 매번 여실히 드러냈던 정치적인 화가였다. 왕립 미술관에는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브뢰헬, 브뤼헐)의 그림도 다수 전시돼 있었다. 브뤼겔은 농민들의 생활상을 그린 재치있는 풍속화(<농부의 결혼식>, <교수대 위의 까치> 등)로 유명하다. <바벨탑>도 빼놓을 수 없다.



왕립 미술관에서 꼭 봐야 할 브뤼겔의 작품은 그리스 신화의 내용을 담은 <이카루스의 추락>이다. 자유를 갈망했던 이카루스는 밀랍으로 된 날개를 단 채 너무 높이 날아올랐고, 결국 뜨거운 햇볕에 날개가 녹아 바닷속으로 떨어졌다고 한다. 이카루스는 추락했지만, 그 주변에 있는 농부나 낚시꾼은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은 채 무심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역시 브뤼겔다운 재치있는 표현이다. 



무심코 작품들을 감상하다가 문득 이곳에 '(인공) 조명'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오로지 햇빛을 이용한 자연채광(自然採光)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분위기가 훨씬 더 근사했고, 왠지 모를 포근함마저 느껴졌다. 고대했던 왕립 미술관 관람이 끝나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왕립 미술관이 주는 안락함과 따뜻함 때문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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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미술관(박물관)을 찾는가. 가끔 그런 질문이 들 때가 있다. 대한민국에 있을 때도 가끔 각종 전시를 찾는 편이지만, 유독 해외를 나가게 되면 더욱 그런 경향이 짙다. 미술을 공부한 것도 아니고, 예술에 조예가 깊은 것도 아니다. 그림을 잘 보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말하라면 대답이 궁색해진다. 

굳이 답을 하라면 말 그대로 '그냥 좋다'는 것인데, 미술관이라는 공간이 주는 분위기라든지 그 공기의 질감, 무게가 좋다. 혹은 미술관을 찾은 사람들이 주는 에너지라고 할까. 열심히 설명을 하는 도슨트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 그림 앞에서 열심히 스케치를 하는 열혈 미술학도의 모습들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그렇다면 왜, 특히, 해외의 미술관인가. 그건 자유로움 때문인 것 같다. 극도의 조심스러움이 가득한 우리네 미술관과 달리 해외의 미술관에는 자유로움이 넘친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술관과 그 안에 전시된 미술 작품들을 즐긴다. 

접근을 막는 빨간 줄이 쳐져 있지도 않고,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검열하는 시선도 없다. 물론 예외적으로 오스트리아 빈의 벨베데레 궁전 같은 곳은 촬영을 금지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해외 미술관들은 관람객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허락한다. 이쯤이면 설명이 됐을까.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무로 된 마룻바닥을 밟을 때나는 소리와 느낌이 좋아서랄까. 게다가 인공 조명 없이 자연 채광으로만 된 미술관(예를 들면 벨기에 브뤼셀의 왕립 미술관)의 분위기는 정말이지 근사해서 잊을 수 없는 감동을 선사한다.

잡담이 길었다. 자, 계속해서 피카소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피카소의 작품들을 살펴보도록 하자. 


사실 피카소의 작품을 보고 엄청난 감동을 느끼진 못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겠지만(가령 루브르 박물관보다 오르세 미술관이 좋은 것처럼), 그보다는 피카소의 천재성 혹은 예술성에 대한 이해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는 피카소가 그린 저 선(線)들을 보고, 저 표현들을 보고 전율을 느끼기도 하니 말이다. 예술의 문외한인 우리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경지다. 

​<Farmer and Nude>, 1938

​<Bather Opening a Cabin>, 1928

'와, 어떻게 저런 그림을 그렸지?', 와, 어떻게 저런 표현을 할 수 있지?' 피카소 미술관에서 그의 그림들을 보며 떠올렸던 질문들이다. 사실 질문이라기보단 그냥 감탄사다. 그저 놀랄 뿐이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아마 피카소의 그림을 접한 사람들은 대개 그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 미술관을 방문하면서 또 한 가지 느끼게 된 건 피카소가 의외로(?) 평범한(?) 그림들을 많이 그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피카소가 입체파 화가라는 틀로 많이 소개가 돼 있고, 우리도 피카소를 그 틀에 맞게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그림들이 피카소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피카소 미술관에서는 정물화, 인물화, 풍경화까지 피카소가 그린 일반적인(?) 작품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하다. 피카소의 작품 세계가 변화하는 과정이라든지, 그 극적인 변화의 양상들은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기괴하고 독창적인 작품도 좋지만, 그의 평범한 그림들도 충분히 아름답다. 

​<인형을 든 마야>, 1938년

여기에서 '마야'는 피카소가 54세에 네 번째 연인 테레즈 발테르와의 사이에서 얻은 딸이라고 한다. 

모든 작품의 제목을 알 수 있으면 좋겠지만, (따로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서, 그러기엔 너무 힘이 들었다) 아쉬운 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들에만 제목을 달아 놓았다. (추가적으로 적어나갈 예정이다)

피카소 미술관은 파리 외에도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말라가 등에서 있는데, 총 250여 점의 회화와 160여 점의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는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알베르토 자코메티(Alberto Giacometti)의 작품들도 제법 전시돼 있는데, 피카소가 인정하면서도 질투했던 인물이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굉장히 중요한 존재였다. 지난해 말부터 올해 4월까지 한가람미술관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전을 열었는데, 당시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르기도 했다. 

자, 여기까지 피카소 미술관 사진전을 마치기로 하자. 사진만 나열할 수밖에 없었던 이번 글과는 달리 다음 사진전부터는 중간중간 좀더 많은 코멘트를 할 수 있을 듯 하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여행을 가면 사진을 굉장히 많이 찍는 편이다. 이번 파리 여행(두 번째 방문이었음에도)에서도 약 2,500장을 가뿐히 넘었다. 여행기를 쓰면 (사진을 최대한 많이 집어 넣으려 하지만) 아무래도 글 위주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럴 때마다 찍어둔 사진들이 아쉽기만 하다.

그래서 '부록'이라고 할까. '사진전'이라고 할까. 여행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소개하고, 그 느낌을 공유하는 페이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 하나에 약 30~40장의 사진을 넣고, 간단한 설명을 곁들이는 가벼운 형식이 될 것이다. 첫 번째 페이지는 '피카소 미술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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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 미술관(Musée Picasso)은 마레 지구(Quatier du Marais)에 위치해 있다.


본격적인 미술관 투어에 나서기 전에 배를 든든히 채워 두자. 


'LA PETITE PLACE'라는 카페(식당)다. 피카소 미술관으로 가는 길의 모퉁이에 자리잡고 있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갔다. 유명한 관광지 옆에 있는 식당은 대개 실망스러우니까.


버섯이 들어간 리조또와 파스타를 각각 하나씩 주문했다. 가게에는 남자 직원들만 있는데,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 살짝 언짢아질 즈음 음식이 나왔다. 우와, 비주얼과 맛이 기대를 훌쩍 뛰어 넘는다. 마레 지구의 '맛집'으로 추천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피카소 미술관으로 들어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방문이었는데, 이번에는 게르니카 특별전이 진행 중이었다. 

1936년 7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됐고, 군부가 이끄는 왕당파가 승리했다. 프랑코(Francisco Franco)의 독재가 시작된 것이다. 내전 당시 히틀러는 프랑코를 돕기 위해 게르니카에 폭탄을 투하했고, 게르니카는 처참히 붕괴됐다. 이로 인해 민간인 1500명이 희생됐다. 끔찍한 일이었다. 

뉴스를 통해 이 소식을 접한 피카소는 분노에 휩싸였다. 얼마 뒤, 히틀러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리고자 했던 스페인 공화국 정부의 요청이 있었고, 피카소는 <게르니카>를 구상해 그렸다. 세로 345.3cm, 가로 776.6cm의 대작이었다. 


<투우 : 투우사의 죽음>, 1933

<십자가(Crucifixion)>, 1930


<게르니카>는 스페인 마드리드의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서 소장 중인데, 아쉽게도 원작을 가져오진 못한 듯 했다. 


​​자, 본격적으로 피카소의 작품들을 감상해 보자. 


<애원하는 여인(La Suppliante)>, 1937

<우는 여인(Weeping Woman)> , 1937, 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작품

<새를 잡아먹는 고양이(Wounded Bird and Cat)>, 1938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in Korea)>, 1951

게르니카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에 분개한 피카소가 1950년 발발한 한국 전쟁의 참상에 귀를 기울인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서의 학살>은 신천군 학살 사건을 다룬 그림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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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작품들을 넣다보니 벌써 30장을 훌쩍 넘겨 버렸다. 피카소의 일생이나 그 작품들에 대해 좀더 깊이있는 내용을 담지 못해 아쉽지만, 사진을 공유하는 것에 좀더 집중하고자 한다. 작품의 수가 워낙 많아 어쩔 수 없이 다음 글에서 마저 싣기로 하자.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