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 저녁에도 관객들이 꽉 들어찼다. <리틀 포레스트>는 사이즈가 큰 블록버스터도 아니고, 멀티플렉스에서 작정하고 밀어주는 영화도 아니다. 순 제작비 15억 원의 저예산 영화다. 이 작은 영화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한 사람들, 애정이 가득한 그들 속에 함께 있는 기분이 제법 좋다. 게다가 영화관을 나서는 사람들의 표정도 밝다. 영화를 보고 머리가 맑아진 건 나뿐이 아니었나 보다. 


지난 7일, <리틀 포레스트>가 손익 분기점(80만 명)을 넘겼다는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누적 관객 수는 860,572명(8일 기준). 100만 돌파는 시간 문제로 보인다. 별다른 경쟁작이 없는 비수기라는 점도 한몫 했겠지만, 역시 영화의 만듦새가 뛰어나다. 좋은 영화는 입소문을 타기 마련이고, 관객들이 찾게 돼 있다. <리틀 포레스트>는 언제 개봉했더라도 관객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을 영화가 분명하다.



"다들 바쁘게 시간을 보내니 사는 의미를 잘 느끼지 못해요. 내일도 모레도 계속 바쁘죠. 이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보리밭을 거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보리밭에 부는 바람을 맞으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평온함을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보리밭에 앉아도 보고 그 사이를 걷기도 하면서 자신의 삶을 생각해보고 이를 계기로 (삶이) 나아질 수 있길 바라요." <조이뉴스24>, '리틀 포레스트' 임순례 감독, 도시 속 현대인에 전하는 선물


<리틀 포레스트>는 김태리의 영화다. 그가 연기한 혜원은 이야기의 중심에 자리한다. 카메라는 줄곧 혜원의 동선을 좇는다. 시험, 연애, 취업. 청춘의 무게인지 청춘을 짓누르는 이 시대의 무게인지 알 수 없지만, 혜원은 그 압박감에 숨막혀 한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지만, 삶의 색채는 바래져만 간다. 제대로 된 음식을 먹고 싶어서, 그 허기 때문에 혜원은 고향인 의성으로 돌아간다.


그곳에서 엄마(문소리)와의 기억들을 떠올리고,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한다. 또, 오랜 친구인 재하(류준열)와 은숙(진기주)을 만나 특별한 시간들을 만들어 나간다. "태리 씨 말고는 다른 배우들이 많이 생각나지 않았"다는 임순례 감독의 말처럼, 김태리는 꾸밈없는 연기와 포장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혜원이라는 캐릭터와 완벽한 일체감을 보여 준다.



영화에서 가장 돋보이는 건 (형형색색 빛나는 자연과 음식을 제외하면) 단연 김태리지만, 흔들림없이 듬직하게 <리틀 포레스트>를 지탱하고 있는 류준열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연기한 재하라는 캐릭터는 결코 튀어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존재감이 약해서도 안 되는 중요한 인물이다. 한순간에 강렬하게 빛나는 연기보다 힘을 배분해서 전체적인 분위기 속에 스며드는 연기가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은숙이 처음부터 고향에 남아 있었다면, 재하는 서울에서 생활을 하다가 귀농했다. 그가 경험했던 회사 생활은 인격 모독에 가까웠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는 수동적인 것이었다. 피동적인 삶에 환멸을 느낀 재하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스스로의 삶에 주체성을 부여한다. 자연의 섭리를 이해하고, 인간의 의지와 몫을 명확히 알고 있는 굉장히 강인한 인물이기도 하다. 



"모든 온기가 있는 생물은 다 의지가 되는 법이야." 영화 속 재하의 대사

 

한번의 과도기를 겪어냈기에 재하는 혜원에게 든든한 친구가 되어 준다. 물론 끈적이지 않는 삼각관계의 중심축이기도 하다. 류준열은 "쉬는 기분으로 촬영했고, 그런 마음을 관객들이 함께 느끼길 바랐다"고 말했지만, 임순례 감독은 그에 대해 "자신의 역할에 굉장히 프로페셔널하게 임하고, 연기에 있어서는 열정과 애착을 가진 발전 가능성이 큰 배우"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2015년 tvN <응답하라 1988>을 통해 혜성처럼 나타나 '어남류' 열풍을 이끌었던 류준열은 끊임없이 자신을 발전시켜 나갔다. 인기에 안주하거나 특정한 캐릭터에 머무르기보다 과감하게 연기 변신을 시도했다. MBC <운빨 로맨스>에서 로맨틱 코미디에 도전했고, <더 킹>에서는 조직 폭력배 최두일 역을 맡아 들개와 같은 카리스마를 과시했다. 그런가 하면 <침묵>에서는 찌질한 스토커 연기를 실감나게 보여주기도 했다.



놀라운 건 어떤 역할을 맡아도 거북함 없이 자연스러웠다는 점이다. 생각해보라. <택시운전사>에서 류준열은 영락없는 80년대 대학생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질감 없이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해낸다는 건 류준열이라는 배우가 지닌 역량이 뛰어나다는 방증이다. 또,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착이 그만큼 뜨겁다는 뜻이리라. 더욱 경이로운 사실은 젊디 젊은 그가 '분량', '타이틀' 같은 부차적인 것에서 자유로워보인다는 것이다.


사계절의 아름다움과 식감과 소리까지 놓치지 않고 고스란히 전달하는 <리틀 포레스트>. 오감을 만족시키고 따뜻한 힐링을 선물하는 이 영화에 류준열이 있음을 기억하자. 아니, 영화를 보면 그를 쉽사리 떨쳐내기 어려울 것이다. 잔잔하게 그리고 깊이 스며드는 그의 연기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류준열의 시대는 이제 막 시작됐는지도 모르겠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아니나 다를까. 가슴이 뜨거워지는 영화였다. 뜨겁다 못해 끓어 넘치게 만들었다. 그럴 만도 했다.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가장 격동적이었던 시절의 이야기가 아닌가. <1987>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1987년 1월)'으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어처구니 없는 거짓 발표로 잘 알려진 사건 말이다. 그리고 시위 도중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의 죽음'을 다루고, 마침내 6 · 10 민주 항쟁까지 이어진다. 스물 두 살 대학생의 죽음으로부터 시작된 광장의 거대한 함성, 그 역사의 흐름을 다뤘다.



할 말이 많아지는 영화였다. 그래서 오히려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몰라 우물쭈물하게 됐다.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서사는 그 자체로 워낙 영화적이었다. 장준환 감독의 과장되지 않은 연출도 돋보였고, 배우들의 연기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윤석, 하정우, 유해진, 김태리, 박희순, 이희준 등 여섯 명의 주연 배우를 비롯해 특별출연을 한 설경구, 강동원, 여진구, 오달수, 김의성, 문성근, 우현, 문소리, 고창석 등 자발적으로 참여했던 수많은 배우들도 빛났다. 그들은 분량에 관계없이 뜨거운 열정을 보여줬다. 


영화가 주는 감동이나 배우들의 열연 혹은 이 영화가 담고 있는 가치 등에 대해선 이미 수많은 기사들이 이야기했을 테니, 이 글에선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1987>을 보면서 감동에 젖는 한편, 가슴 한켠에 계속해서 웅크리고 있던 불편함에 대해서 말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다. 구미유학단 간첩단 사건(1985)의 피해자인 강용주 씨가 <1987>을 두고 고문의 가해자인 안유가 미화된 영화라며 보이콧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고문가해자 교도관 안유가 의인으로 나오는 <1987>을 보지 않겠습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는 데 교도관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영등포 구치소 보안계장 안유는 조한경(박희순), 강진규가 가족 및 경찰관들과 면회하는 자리에 입회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알게 된다. 경찰이 명백한 물 고문으로 인한 사망을 단순한 심장 쇼크사로 조작하고, 그 대상자도 조한경과 강진규 두 사람으로 축소하려던 정황을 포착한 것이다. 안유는 당시 구치소에 수감 중이던 재야 민주투사 이부영에서 이와 같은 사실을 알린다.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 이부영은 친분이 있던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을 통해 '비둘기(감옥에서 몰래 보내는 편지)'를 부탁하고, 한재동은 그 편지를 재야에서 활동하던 민주화 운동가 김정남(설경구)에게 전달한다. 김정남은 성명서를 작성해 함세웅 신부에게 보냈고, 명동성당에서 열린 5 · 18 추도 미사가 끝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게 된다. 이 일련의 과정은 그 어떤 영화보다 극적이다.



"그는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줬어요. 그가 현직에 있을 동안에는 일체 얘기를 안 했다가 지난 2012년 25주년 때에야 얼굴을 공개했죠. 그 뒤 퇴직 간부들이 그를 왕따시킨다고 해요.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배신자라고 욕한다는 얘기를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프죠." (이부영) <한겨레>, 급히 적네, 박종철 사건이 조작됐네..6월 부른 '감옥 편지'


그 때문에 영등포 교도소 보안계장 안유(최강일)와 교도관 한재동(유해진)은 '의로운 교도관'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1987>은 '딥 스로트'(내부 고발자) 안유라는 인물을 철저히 의인으로 그려나간다. 그는 철저한 원칙주의자이고, 이를 위해서라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닌 대공수사처 박 처장(김윤석)과도 맞선다. 아무래도 그가 세웠던 공을 높이 샀기 때문이리라. 어쩌면 이부영 전 의원과 같은 '민주인사'들의 진술만을 토대로 캐릭터를 구성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강용주 의사의 이야기는 좀 다르다. 


"제게 인간 이하의 가혹행위를 가한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KBS 다큐멘터리(<시민의 탄생>)에 출연한 6월항쟁의 '딥스로트'입니다. 1992년은 87년 6월항쟁으로 독재정권의 야만적 전향공작이 사라졌다고 여겨진 시기였습니다. 광주나 전주로 이감 간 사람들은 징벌방 수용이나 전향 강요를 겪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대구교도소 보안과장의 손으로 전향공작을 당했습니다. '참 양심적이었고', '민주인사들에게 잘 대해 준' 바로 그 사람 손에서 말입니다." <경향신문>, [강용주의 안아픈 사회] '딥스로트'의 이중잣대



강용주의 폭로에 등장하는 '대구교도소의 그 보안과장'이 바로 안유다. 안유는 90년대 비전향 장기수들에게 전향 공작을 펼치며 고문을 가했다. "당시 재야인사와 대학생 등 공안 관련 사범들을 감시하고 회유하는 역할을 했다"(<오마이뉴스>, 25년만에 얼굴 드러낸 박종철 사건 폭로 주역들)고 스스로 고백했듯이, 그 이전에도 같은 일을 해왔던 사람이다. 그럼에도 <1987>은 그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안유라는 이중적인 인물을 단순히 의인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유라는 인물과 그가 했던 내부 고발의 중요성은 충분히 이해된다. 또, 그가 '변절자'로 불리며 교정계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처지가 안타깝기도 하다. 하지만 그가 '고문가해자'라는 것도 변함없는 객관적 진실이다. '안유=가해자'라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을 감추는 건 결국 '미화'인 셈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영화적으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여지지도 않는다. 잘 나가는 영화에 웬 트집이냐고? 감동적인 영화에 웬 태클이냐고? 그리 생각하지 않길 바란다. 


그 누구도, 피해자의 상처와 고통을 가벼이 여겨선 안 된다. 자신에게 가혹행위를 저질렀던 사람이 버젓이 의인으로 나온다면, 과연 당신은 뭐라 말할 것인가. <1987>을 보며 마냥 감동에 젖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1987>도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이런 세심하지 못함에 더욱 불평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북한에서 쿠데타가 발생한다. 그 주체는 군부다. 쿠데타는 늘 그네들이 일으키니까. 이유는 간단하다. '핵 미사일'을 보유만 하고 있을 뿐 실질적으로 전쟁에 사용하지 않는 것에 불만을 품었기 때문이다. 군부의 입장에서 공화국을 위해 만든 핵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활용한 북한 1호(김정은 국방위원장)는 제거의 대상이다. 마침내 핵을 손에 넣은 군부는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킨다. 미국 등의 경제 제재로 인해 가만히 있어도 죽을 판이므로, 핵이라도 한번 쏴보고 죽자는 것이 그들의 입장이다. 



"분단국가 국민들은 분단 그 자체보다 분단을 정치적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자들에 의하여 더 고통 받는다." (곽철우)


한편, 북정찰국 최정예요원 엄철우(정우성)는 쿠데타로 인해 부상을 입은 북한 1호를 데리고 남한으로 피신한다.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곽철우(곽도원)은 엄철우로부터 정보를 얻어 국가 위기 상황에 긴밀히 대응한다. 남과 북의 두 철우가 힘을 합치는 이유도 간단하다. 그들에게 지켜야 할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이를 좀더 확장해 본다면, 결국 전쟁의 무대는 한반도가 될 수밖에 없고,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이 짊어져야 한다는 의미다. 그것이야말로 전쟁을 막아야 한다는 당위의 전부가 아닐까. 


그러나 상황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군부 측은 암살요원 최명록(조우진)을 보내 북한 1호와 엄철우를 사살하고자 애를 쓴다. 한반도의 정세는 더욱 녹록치 않다. 북한 군부는 선전포고를 하고, 이에 남한을 비롯한 주변국들엔 위기감이 감돈다. 당장 각국의 이해관계가 맞물려 정황은 더욱 복잡하기만 하다. 우리만 해도 그렇다. 현직 대통령(김의성)은 북한의 핵 시설에 대한 선제 타격을 원하고, 차기 대통령은 좀더 신중한 태도를 취하자고 주장한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인지 쉽사리 판단하기 어렵다. 



"<강철비>를 두고 이런 저런 말들이 많다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이게 바로 우리가 처한 엄정한 현실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이 이야기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하는 것, 그런 태도야말로 가장 허무맹랑한 행동이다." (양우석 감독)


혹자들은 실현 가능성을 들어 <강철비>를 깎아내린다. 애시당초 군부의 구데타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양우석 감독도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핵이나 쏘고 죽자'는 주장이 매우 극단적인 소수의 것이라 전제한다. 또, 북한의 핵이 '자위용'이라 못박는 쪽에서는 북한이 뻔한 공멸을 자초할 리 없다고 말한다. 결국 핵전쟁은 불가능한 시나리오란 것이다. 물론 타당한 이야기다. 우선, 북한에겐 중국이란 커다란 뒷배가 존재한다. 중국이 버티고 있는 한 북한의 기득권은 유지된다. 그건 군부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한들 분단(과 휴전)의 당사자인 우리가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라고 뒷짐을 지고 있을 순 없지 않겠는가. 양우석 감독이 <강철비>를 통해 구현한 영화적 상상력은 현실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고 있으며, 그가 던지고 있는 질문들은 이 땅에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할 지점임에 틀림없다. 당장 2,497,872명(23일 기준)의 관객들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고 있다는 건, 그만큼 남과 북의 적대적 긴장이 만들고 있는 근원적 공포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강철비>의 흥행 질주와 이 영화로부터 비롯된 여러 생상적 논쟁들은 일차적으로 <변호인>으로 데뷔한 양우석 감독의 공이다. 139분에 달하는 긴 영화지만, 결코 지루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이야기에 힘이 있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철비>는 양 감독의 철저한 준비 끝에 나온 작품이다. 그는 2011년부터 연재된 웹툰 '스틸 레인(STEEL RAIN)의 스토리 작가로 참여했는데, 당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을 예측하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양 감독은 웹툰의 스토리를 구상하던 약 10년 전부터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를 깊게 파고 들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이 <강철비>가 그려낸 북한의 급변 사태와 제2 한국전쟁 직전의 상황을 허황되다 치부하지 않는 까닭은 그 고민의 진지함 때문일 것이다. 물론 양 감독의 해법, 북한의 핵무기 절반을 남한에 넘긴다는 발상은 여전히 논란거리지만, 그조차도 현실적인 고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부인하기 어렵다. 이 단계에 와서 '한반도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가능한 주장인지 솔직히 의문스럽기 때문이다. 양우석 감독은 <강철비>를 통해 우리가 처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과 여러 선택지 중의 하나를 보여준 것이다. 


<강철비>의 성공에는 양우석 감독의 공 못지 않게 주연 배우들의 활약도 돋보인다. <아수라>(2016)에서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동갑내기 배우 정우성과 곽도원이 이번에는 '동지'로 만났다. 북의 최정예 요원 역을 맡아 탁월한 액션 연기를 선보인 정우성은 영화뿐만 아니라 영화 '밖'에서도 열일하고 있는 중이다. JTBC <뉴스룸>에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자격으로 출연해 품격 있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고, KBS 파업을 지지하는 영상을 SNS에 게시하기도 했다. 사회적 발언을 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그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우뚝 섰다.



"시나리오를 덮고 난 다음, 이게 만약 영화화되어서 관객에게 보여졌을 때 정말 많은 이야기들이 오갈 것 같다는 상상을 했다. 토론의 장이 이뤄질 거라 생각했다. 호기심이 강했다." (곽도원)


영화 속에서 엄철우가 돋보이는 건 당연하다. 또, 정우성의 연기도 발군이었다. 하지만 정우성은 워낙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으니 이 글에선 덜 얘기해도 괜찮으리라. 비교적 덜 강조되고 있는 포인트, 바로 곽철우 역을 맡은 곽도원이야말도 이 영화의 히든 카드라 할 수 있다. 진보와 보수라는 프레임에 갖혀 있지 않은 곽철우는 사실상 양우석 감독의 페르소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양 감독은 자신의 한반도 정세 분석과 그에 대한 해법을 곽철우의 입을 통해 관객에게 전달한다.


또, 곽도원은 전반적으로 무거울 수밖에 없는 영화 속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어주면서 웃음을 전달한다. 일종의 (영화의) 숨구멍이라 할 수 있는데,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가 빛을 발한다. 뿐만 아니라 깜찍한 연기까지 넉넉하게 소화한다. SBS <유령>(2012)에서 소녀시대의 '트윙클'을 깜찍하게 불렀다면, 이번에는 G-DRAGON의 'Missing You'와 '삐딱하게'를 앙증맞게 불러낸다. 그러면서 고위 공직자의 포스까지 풍기는 다양한 매력을 선보인다. 전방위적인 활약이다.



곽도원의 연기는 변화무쌍하다. 또, 전형적이지 않다. <변호인>(2013)에서는 고문 경감 차동영 역을 맡아 극악한 연기를 펼쳐 관객들을 소름끼치게 만들었고, <곡성>(2016)에서는 순박한 경찰인 종구 역을 맡아 나약한 인간의 내면과 뜨거운 부성애를 보여주기도 했다. <아수라>에서는 독종 검사 김차인 역을 맡았는데, 정의 구현을 외치면서 온갖 불법을 자행하는 악인을 생동감 있게 표현해냈다. <특별시민>(2017)에서도 권력욕에 사로잡힌 노련한 정치인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연기했다. 


극단적인 악역에부터 순박한 캐릭터까지, 그러면서 캐릭터의 내면에 자리한 고민까지 드러낼 줄 아는 그의 연기는 가히 탁월하다. <강철비>에서도 공적인 곽철우와 일상의 곽철우를 분리해 다른 색깔로 연기한 부분은 관객들의 공감대를 불러 일으켰다. 그는 영화의 현실감을 부여하면서 몰입감을 높이는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곽도원이라는 배우의 '끝'은 어디일까. <강철비>라는 논쟁적 영화가 반가운 동시에 곽도원이라는 배우의 만개(滿開)도 기쁘기만 하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중세의 몰락과 함께 근대가 태동했다. 변화는 서서히, 그러나 급속히 진행됐다. 신 중심의 세계관은 인간 중심으로 옮겨갔고, 해방된 이성은 과학의 진보를 가져 왔다. 놀라운 성취였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고가 세계를 뒤덮었다. 모든 것이 명쾌하게 구분되고, 모든 문제가 선명한 답을 찾을 듯 했다. 햇살에 쫓겨 사라지는 안개처럼 모호함이 물러가는 것인가. 옳고 그름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고, 인간의 지성은 타협 없이 '중간은 없다'고 선언할 수 있으리라 자신했다. 



하지만 일직선 상의 선(線)에 구분점이라 할 만한 건 분명치 않았다. 어쩌면 답은 더욱 흐릿해졌다. 그것이 어디 근대뿐이랴. 근대에서 출발한 기차는 오랜 시간을 달려 현대에 이르렀지만, 종착점이 어디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추리소설의 여왕' 아가사 크리스티는 오리엔트 특급 살인(1934년)을 통해 '옳고 그름, 선과 악에 분명한 구분이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졌고, 케네스 브래너는 소설을 각색한 영화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 그 질문이 현대에도 유효하다고 외친다. 


이스탄불 시르케지 역(Sirkeci)에서 출발해 부다페스트, 빈, 뮌헨 등을 거쳐 파리까지 가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에서 승객 한 명이 잔인하게 살해 당한 채 발견된다. 피해자는 사업가 라쳇(조니 뎁)인데, 그의 몸에선 무려 12개의 자상(刺傷)이 발견됐다. 도대체 누가 이토록 끔찍한 살인을 저질렀단 말인가. 완벽한 밀실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의 용의자는 총 13명이다. 물론 그들은 저마다 빈틈없는 알리바이를 가졌다. 이대로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것일까. 



"살인자는 이 안에 있다!" 


공교롭게도 그 열차에 에르큘 포와로(케네스 브래너)가 탑승해 있었다. 그가 누구인가. 벨기에 태생에 경찰 출신인 포와로는 천재적인 두뇌를 뽐내는 '세계 최고의 탐정'이다. 양쪽으로 대칭을 이루고 있는 굵은 콧수염은 그를 상징하는 포인트이자 균형을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성격을 잘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포와로는 아침마다 먹는 달걀의 크기가 똑같아야 직성이 풀린다. 영화엔 나오지 않았지만, 토스트도 9등분이 된 것만 먹을 만큼 괴짜스럽다. 사람들에게 "넥타이 좀 똑바로 매주겠나?"고 요구할 만큼 비틀어진 건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포와로의 추리 방식은 어떨까. 일반적으로 '탐정'이라 하면 셜록 홈즈처럼 사건 현장을 누비면서 증거를 수집하리라 생각되지만, 포와로는 '면담' 방식을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는다. 이를테면, 용의자를 직접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특이점을 발견하는 식이다. 표정과 말투에서 거짓말을 포착하거나 악센트나 발음에서 어색한 부분을 찾아내곤 한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에서도 마찬가지다. 포와로는 용의자 선상에 오른 13명과 개인 면담을 실시해 사건의 본질을 추적하는 한편 범인을 찾아낸다.



영화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범인을 찾는 데 모든 걸 쏟아붓지 않는다. '누가 범인인가?'라는 질문에 '범인은 바로 너야!'라고 답하는 명쾌함이 추리의 카타르시스라 할 만 하지만,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그 쾌감을 전달하기에 급급하지 않는다. 난항을 겪어야 마땅한 추리 과정은 손쉽고, 사건의 해결도 일사천리다. 신이라 해도 무방할 만큼 완벽한 탐정은 용의자'들'의 연막을 간파하고, 사건의 본질에 성큼성큼 다가간다. 오히려 뻔한 '반전'이 밝혀진 뒤에 이 영화는 더욱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가해자와 피해자 간의 도덕적 우위가 전혀 의미 없어지고, 명백했던 옳고 그름의 경계가 허물어진다. 선명하리라 여겼던, 그래서 손쉽게 가려낼 수 있을 것 같았던 선과 악의 구분이 허무해진다. 추리를 끝낸 후 13명의 용의자를 한 곳에 모아둔 자리에서 포와로는 주저한다. 진실을 밝힌 것인가, 아니면 눈 감을 것인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중간 지대'의 발견은 그의 논리적 사고를 멈추고, 이성적 판단을 마비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연상케 하는 이 장면에서 배우들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가히 명품이다.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유럽 대륙을 횡단하는 오리엔트 특급 열차를 배경으로 고급스럽고 우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성공했다. 세계에서 4대밖에 없는 65mm 필름 카메라로 촬영해 환상적인 영상미를 선사했다. 고전의 향취를 뒤살리면서 낭만적인 느낌을 전달하기까지 한다. 또, 페넬로페 크루즈, 주디 덴치, 미셸 파이퍼, 윌렘 대포, 데이지 리들리 등 명배우들은 극의 무게감을 더할 뿐 아니라 캐릭터 내면의 복잡한 감정들을 섬세하게 표현해 몰입감을 높였다. 



하지만 영화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에르큘 포와로라는 인물의 매력이 부족했던 점은 안타깝다. 섹시함으로 무장한 셜록 홈즈(베네딕 컴버배치)의 아성을 넘기엔 너무 아저씨스러웠다고 할까. 또, 살인 사건의 이면을 파헤치고, 진실을 추리해가는 과정이 상당히 불친절했다. 원작을 읽지 않은 관객들에겐 상당히 급작스럽고 심지어 엉뚱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소설과는 달리 시간의 제약을 받는 영화에서 13명의 용의자를 모두 담아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부족한 인물 설명 탓에 관객들은 포와로에 의지한 채 수동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게 된다.


도덕적 딜레마를 파고들어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 점은 훌륭했지만, 역시 긴장감이 빠진 영화가 주는 지루함은 아쉬울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리엔트 특급 살인>은 영국과 중국, 러시아, 스페인 등 세계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제작비 5,500만 달러의 4배에 가까운 흥행 수익(약 2억 260만 달러)을 거둬들였다. 또, 속편인 <나일 강의 죽음> 제작도 확정됐다고 한다. 속편에선 포와로가 좀더 매력적인 인물로 그려질 수 있을까. 또, 잃어버렸던 긴장감을 살려내 쫄깃한 추리 영화를 그려낼 수 있을까.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오늘은 네 남은 인생의 첫 날이다."


트리 겔브만(제시카 로스)은 화끈한 파티를 좋아하는 캠퍼스 최고의 퀸카다. '교과서'적인 윤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의 삶은 비틀어져 있다. 오로지 즐기고 탐닉하는 삶을 추구한다. 여러 남자를 무분별하게 만나고, 심지어 유부남인 교수와 은밀한 관계를 맺는다. 룸메이트는 그런 트리에게 '경고'를 보내지만, 트리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뿐인가. 가족의 중요성을 모르고, 친구의 소중함도 모른다. 자신이 잘난 맛에 제멋대로 살아가는 철부지 대학생이랄까. 



어김없이 뜨거운 파티로 밤을 보냈던 트리는 '평범한' 남학생 카터 데이비스(이스라엘 브루사드)의 기숙사 방에서 눈을 뜬다. 이윽고 아빠의 전화가 걸려오는데, 벨소리가 생일 축하 노래로 바껴 있다. 과음을 한 탓에 머리가 깨질듯이 아파오고, 두통약을 먹으며 상황을 파악한 트리는 '똥을 밟았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내가 왜 여기, 그것도 이렇게 별로인 남자의 방에 있는 거야?' 트리는 허겁지겁 소지품을 챙겨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고, 다시 강의실, 파티장으로 이어지는 일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당혹스럽게도 트리는 아기 얼굴 가면을 쓴 누군가에게 살해 당한다. 더욱 놀라운 건 그 다음이다. 죽음을 맞이한 순간, 그 고통을 간직한 채 트리는 잠에서 깨어난다. 다시 카터의 방이다. 악몽이라도 꿨던 걸까? 이상하게도 똑같은 일들이 반복된다. 단순한 기시감일까. 이미 경험했던 하루를 반복해서 살아가던 트리는 가면을 쓴 정체불명의 사람에게 또 한번 살해 당하게 되고, 그제야 조금씩 깨닫게 된다. 자신이 기묘하고 끔찍한 '오늘'에 갇혔다는 사실을 말이다. 



<해피 데스데이>는 주인공이 세상에 태어난 날인 생일날 죽음을 당하는데, 그 하루가 계속해서 반복된다는 설정을 취하고 있다. 이제는 흔하디 흔한 '타임 루프'를 소재로 하고 있지만, 공포라는 장르에 예상 밖의 유머가 버무려지면서 톡특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의 각본을 맡았던 크리스토퍼 랜던이 감독을 맡았는데, "이번 영화에서 유머와 공포, 두 장르를 똑같이 중요하게 다뤘다"던 그의 선언은 헛되지 않았다. 영화는 적어도 영화적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지루하지 않다.


트리는 가면을 쓴 살인범을 찾아내지 않으면 이 반복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범인을 찾기 위해 주변의 의심스러운 인물들을 추적해 나간다. 만약 용의자의 뒤를 밟고 있는 중에 가면을 쓴 범인이 나타나면 추적하고 있던 이름을 용의자 목록에서 빼버리는 식이다. 이런듯 여자 주인공이 겁에 질려 있기보다 적극적으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태도는 굉장히 신선하다. 또, 누군가의 도움을 받기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범인과 맞서 싸우는 모습도 짜릿하다. 



한편, <해피 데스데이>는 '성장' 영화다. 트리는 무려 16번을 죽는다. 그 말은 17번 살아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트리는 똑같은 하루를 살아가는 경험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돌아보게 된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보다 깊이 생각하게 될 뿐 아니라 객관적으로 시선으로 판단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 되새겨보게 된 것이다. 죽음의 순간(죽음 그 자체는 트리에게 더 이상 공포가 아니다)은 매번 고통스럽지만,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생일'이라고 하는 날이 갖는 상징적인 의미 아닐까. tvN <알쓸신잡>에서 유현준 교수가 대나무의 마디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이 대나무가 가장 튼튼하고 높게 올라갈 수 있는 구조라는 설명을 한 대목이 떠오른다. 유 교수는 대나무의 마디 구조를 우리의 삶과 유비(類比)시켰는데, 끊김 없이 연속적으로 이어진 우리의 삶에 '1년' 등의 구분(마디)을 지어둔 까닭은 중간중간 새로움을 다져야 더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겠냐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주인공의 이름도 '나무'라는 뜻의 '트리'가 아닌가.



이제 트리는 과거와는 단절된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죽음 이후 다시 태어나는 과정이 그를 성장시킨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짚어봐야 할 부분은 '성장'이 자칫 잘못하면 '교정(矯正)'과 동의어일 수 있다는 점이다. 트리의 성장은 반가운 일이지만, 그의 삶이 잘못됐기 때문에 교정시키겠다는 개입은 불편한 일이다. 삶의 가치를 알고 사랑의 진실됨을 찾아가는 동시에 가족의 소중함과 친구의 중요함까지 깨닫는 전형적인 교훈은 너무 뻔하다. 영화적 번뜩임과 달리 내용적인 지루함은 그 때문이다. 


또, 개연성이 사라진 결말은 분노를 자극하기도 하다. '타임 루프'의 허술함이야 영화적 장치로 받아들이고 넘어간다고 하더라도 '범인'을 허투루 설정해둔 건 아쉽기만 하다. 뜬금없이 연쇄살인범이 등장한다거나 진짜 범인이 가진 살해 동기의 허무함은 짜증이 날 정도다. 그럼에도 <해피 데스데이>는 전반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는데, 1,127,392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 오피스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수익 1억 달러 돌파에 대한민국 관객들이 큰 기여(해외 시장 수익 1위)를 하고 있는 셈이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혼자서는 세상을 구할 수 없다.'


배트맨, 원더 우먼, 아쿠아맨, 사이보그, 플래시. DC의 슈퍼 히어로들이 뭉쳤다. DC 코믹스가 <저스티스 리그>를 통해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 


일찌감치 슈퍼 히어로 군단인 '어벤져스'를 영화로 구현하는 데 성공했던 마블 코믹스에 비해 DC 코믹스의 움직임은 한참 뒤쳐져 있었다. 마블 코믹스는 <아이언맨>(2008)의 성공을 토대로 지구 최강의 영웅들을 차례차례 불러 모았는데, 그 중심에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캐릭터 토니 스타크(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있었다. 아이언맨이 자리를 굳건히 잡자 이야기의 확장이 원활했고, 다른 히어로들도 무리 없이 어벤져스에 합류해 활약을 펼칠 수 있었다.

 

반면, DC 코믹스는 <배트맨> 시리즈의 실패로 최악의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크리스터포 놀란 감독의 '다크 나이트' 3부작만이 예외적인 대성공을 거뒀는데, 그 성취는 가히 경이로웠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DC 코믹스는 바람 빠진 풍선마냥 정신을 못 차리고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정점을 찍은 후 뒤따르기 마련인 하강이었지만, 그 속도가 너무 급작스러웠고 모양새도 매우 나빴다. 여기에 <어벤져스>(2012)의 개봉은 결정타였다. 두 회사의 격차는 점차 커지기만 했다.




이렇게 되자 DC 코믹스는 뒤늦게 '저스티스 리그' 카드를 만지작대기 시작했다. 원래 DC 코믹스의 '저스티스 리그 오브 아메리카'에 영향을 받은 마블 코믹스가 '어벤져스'를 탄생시켰던 역사와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진 셈이다. DC 코믹스는 자사의 대표적인 슈퍼 히어로인 배트맨과 슈퍼맨의 대결을 그린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2016)을 통해 DCEU(DC Comics Extended Universe)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엉성한 스토리와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가 패착이었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아든 DC 코믹스는 임원 교체를 단행했고, 조금씩 정신을 차리고 있는 듯 하다. <원더우먼>(2017)은 그 반격의 출발점이었다. 갤 가돗은 원더우먼 역을 맡아 자신의 매력을 확실히 드러내며 길고 긴 잠에 빠졌던 DC 코믹스의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저스티스 리그>가 개봉했다. <저스티스 리그>는 개봉 첫 날 3880만 달러(한화 약 426억 원)의 흥행 수익을 기록했는데, 기대했던 오프닝 성적은 아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출발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동안 DC 코믹스가 내놓는 영화들에 혹평을 쏟아냈던 대한민국 관객들의 반응도 괜찮은 편이다. >저스티스 리그>는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하며 18일까지 851,080명을 동원했는데, 19일에 100만 돌파는 기정사실이다. <토르 : 라그나로크>의 성취(4,526,907명)를 넘어설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DC 코믹스의 변화에 대한 의지와 노력을 높게 평가하는 반응이 많아 '입소문'을 기대할 수 있을 듯 하다. 과연 DC 코믹스가 마블 코믹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균형을 맞춰나갈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저스티스 리그>는 슈퍼맨이 빌런 둠스데이와의 전투 끝에 죽고 난 뒤의 세계를 그린다. 수호자를 잃어버린 지구는 혼돈 속에 놓인다. 시민들은 자신들이 추앙하던 영웅과의 이별을 슬퍼한다. 영원히 함께할 것만 같았던 존재의 상실은 형언할 수 없는 좌절감을 안긴다. 거리의 곳곳에는 다시 무법(無法)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배트맨(벤 애플렉)의 고민도 커지기 시작한다. 배경 음악으로 노르웨이의 싱어송라이터 시그리드(Sigrid)의 'Everybody Knows'가 깔리는 이런 장면들은 착잠함을 더한다. 


이 틈을 빌런이 가만히 둘 리가 없다. 행성 아포콜립스(Apokolips)의 지배자 다크 사이드의 대장군 스테픈 울프는 '마더 박스'를 차지하기 위해 파라데몬 군대를 이끌고 지구로 온다. 마더 박스는 시공간, 에너지, 중력을 통제하는 초월적인 힘을 지닌 물체인데, 스테픈 울프는 세 곳(아마존 데미스키라 왕국와 아틀란티스, 인간계)으로 흩어져 있는 마더 박스를 합쳐 지구를 멸망시키려 한다. '인류의 멸망'을 좇는 빌런들의 뻔한 욕망이 지겹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구가 위기에 빠져야 슈퍼 히어로가 존재 의의를 얻게 되는 것을.





배트맨은 원더 우먼(갤 가돗)과 함께 스테픈 울프를 막기 위해 팀을 꾸리기 시작하는데, 아쿠아맨(제이슨 모모아) · 사이보그(레이 피셔) · 플래시(에즈라 밀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한다. 아틀란티스의 왕위를 계승한 아쿠아맨은 반신반인(半神半人)의 존재인데, 바닷속의 수많은 생물들과 조종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무기로는 삼지창을 사용한다. 사이보그(레이 피셔)는 몸 자체가 컴퓨터로 세상의 모든 컴퓨터와 연결할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번개를 맞고 초월적인 스피드를 얻게 된 플래시는 엉뚱한 모습으로 영화에 활력을 준다.


그런데 이들만으로는 부족했다. 결국 배트맨은 '슈퍼맨의 부활'을 모색하게 되고, 마더 박스를 이용해 슈퍼맨을 죽음에서 깨우게 된다. 이 과정에서 슈퍼 히어로 간에 의견 다툼이 발생하지만, 슈퍼맨을 되살리는 일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완전체가 된 '저스티스 리그' 멤버들은 스테픈 울프로부터 마더 박스를 지키고, 지구를 수호하기 위해 전투를 벌이게 된다. 물론 싸움 자체는 시시하기 짝이 없다. 슈퍼맨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저스티스 리그>의 가치는 '과정'에 있는 만큼 실망할 필요는 없다.


<저스티스 리그>는 '저스티스 리그의 창설'과 '멤버들의 소개'라는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러닝타임(120분)의 절반 가량을 팀 규합에 할애하지만 지루하다는 느낌은 없다. 액션신을 후반부에 집중적으로 배치하면서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배트맨 대 슈퍼맨>과 달리 초반에 캐릭터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액션 장면을 적절히 집어 넣었다. 아쿠아맨 · 사이보그 · 플래시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성공적으로 안착했고, 무엇보다 원더 우먼의 활약이 돋보인다. '원더 우먼이 없었으면 어떡할 뻔 했을까'라는 염려가 나올 만큼 훌륭하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다. 우선, 이야기의 엉성함은 고질병처럼 남아 있다. 배트맨이 뜬금없이 자살 특공대가 되려 하는 장면은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캐릭터의 힘이 아닌 스토리의 힘을 기반으로 했던 DC 코믹스로서는 힘을 잃어버린 이야기 구조가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또, 빌런인 스테픈 울프의 힘과 매력이 약했던 점도 아쉽다. 저스티스 리그의 결성과 멤버 소개에 치중하다보니 불가피했던 부분이라 생각한다면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긴 하다. 어차피 스테픈 울프는 거쳐가는 단계에 불과하니 말이다.


결정적인 문제는 배트맨의 역할이 지나치게 약해졌다는 것이다. 플래시가 배트맨에게 당신의 능력은 뭐냐고 묻자 "나 부자야"라고 대답하는 장면은 웃음을 유발하는 동시에 배트맨의 능력에 대한 아쉬움을 보여준다. 초인적 능력을 갖춘 슈퍼 히어로들의 등장으로 배트맨은 능력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그가 내세울 건 리더십과 돈이지만, 그마저도 마땅치 않아 보인다. 슈퍼맨의 절대적인 힘과 비교할 때 초라함이 더욱 커진 게 사실이다. 이는 앞으로 고민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DC 코믹스가 반격의 서막을 올렸지만, 이후의 행보가 더욱 중요해졌다. 


P.S. 쿠키 영상이 2개 있으니 섣불리 자리를 뜨지 않길..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우리는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지만 그것이 사실일 수는 있어도 진실은 아닐 수 있다. <침묵>을 통해 사실과 진실이라는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정지우 감독)


흔히 사실과 진실을 같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둘은 엄연히 다르다. 전자가 표면적이고 부분적이라면, 후자는 내면적이고 전체적이다. 단면적인 사실과 달리 진실은 통찰적이다. 둘의 관계를 쉽게 표현하자면, '보이는 사실 너머에 진실이 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사실들 가운데 진실을 찾아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이던가. 어쩌면 '재판'이라는 과정이 사실과 진실의 관계를 잘 설명하는 가장 좋은 예라는 생각도 든다. 유죄의 사실(증거)과 유죄가 아닌 사실(증거)들의 충돌 속에서 진실을 꿰뚫어 보는 선별이 곧 재판이 아니던가.


사실과 진실, 그 미묘한 간극을 이야기한 영화라고 본다면 <침묵>은 분명 수작이다. 정지우 감독은 사건과 인물에 대한 단편적인 사실들을 영화 곳곳에 영리하게 배치함으로써 진실이 궁금한 관객들을 혼란에 빠뜨린다. '범인은 누구인가?', '임태산(최민식)의 진심은 무엇일까?', '유나(이하늬)는 정말 태산을 사랑했을까?' 스크린 밖의 관객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처럼 영화 속의 인물들도 혼돈을 겪는다. 각각의 인물들은 자신들이 진실이라 믿는 사실들에 의지한 채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각자(가 믿은 진실)의 몫을 챙긴 채 살아간다.



또, <침묵>을 한 인물의 내면 속 감정을 이야기한 영화라고 보더라도 수작임에 틀림없다. 범인을 찾아간다는 점에서 법정극의 틀을 가지고 있지만, <침묵>은 단순히 거기에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얽히고설킨 인물들 간의 감정선을 강조하고 부각시킨다. 특히 임태산 역을 맡은 최민식은 중심적 역할을 완벽히 수행한다. 그가 보여주는 연기의 깊이는 <침묵>에 묵직함을 더하는데, 이 영화를 수작이라 말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힘의 8할은 최민식으로부터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영화는 임태산의 로드 무비 구조를 취하고 있다. 사랑하는 약혼녀 유나가 살해당했지만, 그에겐 슬픔을 온전히 느낄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유력한 용의자로 자신의 딸 임미라(이수경)가 지목됐기 때문이다. 애초에 사이가 좋지 못해 반목했던 두 사람이 사건이 발생하던 날 만났다는 것이 검찰이 제시한 정황 증거였다. 사랑하는 연인을 딸이 살해했다? 이 상황적 딜레마에 빠진 임태산의 다양한 얼굴, 즉 최민식이 표현하는 다양한 감정들을 감상하는 재미가 정말이지 쏠쏠하다. 



임태산은 딸을 무죄로 만들기 위해 자신이 가진 재력과 권력을 총동원한다. 불법과 편법도 서슴지 않는다. 돈이 최고의 가치이며,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다고 믿는 임태산에게 도덕은 하등 중요치 않다. 인맥을 동원해 담당 검사를 회유하고자 시도하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고 있는 검사를 직접 찾아가 '검찰총장 자리를 사주겠다'고 유혹하기도 한다. 이러한 임태산의 모습들은 대한민국 재벌들의 민낯을 보여주는 듯 한데, 최민식은 그 뻔뻔스럽고 역겨운 얼굴을 누구보다 '열받게' 잘 소화해낸다.


그런가하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던 중 '실체'를 맞닥뜨린 순간, 감정의 균열과 붕괴를 매우 섬세하게 표현했다. 사랑하는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한데 엉겨붙어 묘한 색채를 발한다. 매우 이질적이면서도 충분히 납득이 된다. 또, 딸을 향한 지극한 '부성애'를 드러내는 장면들은 감동을 이끌어내기도 한다. 관객들이 임태산을 '악인'이라 여기면서도 그를 마냥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지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만큼 최민식의 연기는 설득력 있게 파고 든다.



"<침묵>은 소중한 것을 잃은 한 남자의 뒤늦은 참회, 인생에서 진짜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최민식)


이처럼 <침묵>은 얽개와 연기 등의 측면에서 봤을 때 충분히 수작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정지우 감독이나 최민식의 말처럼, '소중한 것을 잃은 한 남자의 뒤늦은 참회'라고 해석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임태산은 딸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딸의 죄를 덮기 위해 진실을 조작한다. 그리고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임태산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감옥에 갇히는 것으로 자신의 역할을 다하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참회'라고 볼 수 있을까?


대신 감옥에 갇힌 만큼 극진한 '부성애'를 보여줌으로써 중년 남성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침묵>은 여전히 '그들만의' 해결책만을 강조하고 있다. 딸을 독립적인 존재로 인식하기보다 '보호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기는 가부장제를 답습하고 있고, '목적이 정당하다면 옳지 않은 수단을 써도 된다'는 그릇된 윤리관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정당한 죗값을 치르고, 진정한 반성을 하는 게 아니라 아빠의 대속(代贖)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생각은 그 자체로 오만한 것 아닐까. 



'미안하면 잘 살아'라고 말하는 아빠의 속 편한 생각과는 달리 딸은 얼마나 많은 죄책감에 시달릴 것인가. 아빠가 자신을 대신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미안하니까 잘 살아야지'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또, '혹시 진실이 밝혀지는 건 아닐까'라며 매일 밤 전전긍긍하며 보내지 않을까. 단 하루라도 마음 편히 발을 뻗고 잠들 수 있을까. 과연 제대로 된, 건강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이쯤되면 과연 이 '참회'가 누구를 위한 참회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아니, 그것을 참회라고 부를 수 있기는 한 걸까.


<침묵>이 제시한 '반전'은 충분히 흥미로웠지만, 임태산이 꺼내든 카드에 재판정의 모든 사람들이 쉽사리 동조해버리는 부분은 다소 의아했다. 치밀한 법정극을 쌓아왔던 영화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긴장감을 허무하게 놓아버린 느낌이다. 물론 자신이 믿고 싶었던 '진실'을 추구했던 이들이 임태산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다고 본다면 불만은 없다. 하지만 임태산의 행동에 대해 해석의 여지를 제거하고 '참회'로 못박은 부분은 동의하기 어려울 뿐더러 이 영화의 가치를 대폭 떨어뜨렸다. 그래서 감히 수작이라 말할 수 없다.


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