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공간에 무수히 많은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공간 하나를 유심히 살핀다. 그곳이 어느 한적한 골목에 위치한 '카페'의 창가 쪽 테이블이라면 어떨까. 먼지는 청소를 하는 주인의 손길에 매일마다 지워질 테지만, '이야기'는 시간만큼 차곡차곡 쌓여 나갈 것이다. 그 이야기를 타이핑 해서 얇은 A4용지에 옮겨 적어 둔다 하더라도 카페의 지붕을 뚫고 나가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리라. 어쩌면 이미 달나라에 가 닿았을지 모를 일이다.

 

흐르는 건 시간뿐이라 그것만 변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시간이 스치고, 머물고, 할퀴고, 엉키고 지나가면 공간도 변한다. 아주 완연히, 그리고 현격히 변한다. 가끔 카페에 가게 된다. 대부분 사람들과 함께 있으므로 대화가 거의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내가 앉아 있는, 혹은 항상 붐비는 저 창가 쪽 테이블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쌓여 있을까. 또, 어떤 이야기들이 머물다 갔을까. 어쩌면 저 테이블은 모든 걸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더 테이블>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 같은 영화인데, 하루라는 시간동안 어느 한 카페의 테이블에 쌓인 4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테이블은 어김없이 창가에 있고, 그 위에는 꽃이 들어 있는 작은 유리컵이 놓여 있다. 특별대우(?)를 받고 있는 테이블이 분명하다. 간혹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가지만 결코 붐비진 않다. 카페의 분위기도 거리를 닮아 조용하고, 분위기가 있다. 카페 주인은 조용히 책을 읽으며 손님을 기다린다. 어쩌면 그도 귀를 쫑긋하며 이야기를 엿듣고 있는지도 모른다.

첫 번째 이야기는 스타배우가 된 유진(정유미)과 전남친 창석(정준원)의 대화다. 재회의 첫 순간엔 묘한 설렘이 감돌지만, 금세 관계의 끝이 보인다. 눈치없는 창석은 급기야 유진에게 연예계의 낯뜨거운 루머들이 담긴 '찌라시'의 내용들을 캐묻기 시작하는데, 유진의 표정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감정 변화가 흥미롭다. 두 번째는 과거 하룻밤을 보냈던 경진(정은채)과 민호(전성우)가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만나 나누게 되는 대화다. 경진은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 민호에게 화가 나 있고, 그 감정은 시선과 목소리를 통해 고스란히 전달된다.


세 번째 이야기는 더욱 묘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결혼사기를 계획하고 있는 은희(한예리)는 결혼대행 업체를 통해 숙자(김혜옥)를 만난다. 은희의 역할은 숙자의 엄마인데, 두 사람은 완벽한 사기, 아니 결혼을 위해 입을 맞춘다. 네 번째 이야기는 서로에게 미련이 남은 남녀의 대화다. 다른 사람과 결혼을 앞둔 혜경(임수정)은 노골적으로 운철(연우진)의 마음을 떠보지만, 운철은 끝내 비겁한 태도로 일관한다. 헤어지기 직전, 그가 보여준 모습은 혜경에게 '최악의 하루'라 기억될 만큼 형편 없었다. 


 


정유미, 정은채 ,한예리 ,임수정 네 명의 배우는 각자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런닝타임에 70분에 불과하다) 속에서 극 속의 캐릭터를 설명할 뿐 아니라 자신의 매력도 분명히 표현한다. 이들이 작은 영화임에도 <더 테이블> 흔쾌히 출연을 결정했던 이유는 획일화된 한국영화 속에서 느꼈던 질식감 때문이었으리라. 최근 상영된, 그리고 상영되고 있는 한국영화들의 라인업을 살펴보라. 답답한 건 배우들만이 아니다. 다양한 캐릭터를 연기하고 싶은 마음이 강렬했을 그들이 <더 테이블>의 시나리오를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또, 김종관 감독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로 데뷔를 했던 정유미와 김 감독의 전작인 <최악의 하루>에 출연했던 한예리는 선택이 좀더 쉬었을지도 모르겠다. (참고로 <최악의 하루>에서 한예리가 맡았던 역의 이름도 '은희'였다.) 지금부턴 포스터에 나오는 네 명의 배우 말고 다른 배우 이야기를 해보자. 바로 김혜옥이다. <더 테이블> 속의 인물들은 '거짓'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눈앞의 상대방을 속이려 든다. 하지만 그 거짓 속에 '진실'이 언뜻 보이고, 때로는 상대방에게 간파당한다.  

 

 

거짓이 난무하는 대화 속에서 '진심'이 우러나오는데, 그 조화가 가장 강렬하게 두러나는 이야기가 바로 세 번째, 그러니까 숙자와 은희의 대화다. 김종관 감독의 뮤즈로 떠오른 한예리의 연기도 훌륭하지만, 김혜옥의 그것은 순식간에 관객의 시선을 사로잡고 감정을 움켜쥔다. 특히 은희로부터 어릴 적 집에서 불린 별명이 '거북이'였다는 말을 들은 숙자가 은희의 시부모 앞이라 가정하고 '딸을 잘 부탁한다'는 내용의 대사를 연습하는 장면은 여운이 길게 남는다.


1978년 연극배우로 무대에 데뷔하고, 1980년 MBC 특채 탤런트로 방송에 출연하기 시작한 김혜옥은 연기 인생 초반에는 그리 이름을 떨치지 못했다. 꾸준히 연기 활동을 이어왔지만, 주인공의 엄마를 비롯한 주변 인물을 맡아 스포트라이트에서 몇 걸음 비껴 있었다. 하지만 김혜옥은 자신만의 독특한 연기 스타일을 제한된 캐릭터 속에 녹여냈고, 시청자들에게 김혜옥만의 무언가를 꾸준히 각인시켰다. 가령, 엄마 역을 맡더라도 '푼수 같은 엄마', '엉뚱한 엄마'처럼 특화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이런 차별화는 그의 가치를 높이는 전략이자 시청자들로부터 사랑받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김혜옥이 비로소 스포트라이트를 받기 시작한 건 그의 나이 40대 후반 무렵인데, KBS2 <올드미스 다이어리>(2004~2006)에서 건망증 심한 셋째 할머니 역을 맡아 전환점을 마련했다. 여세를 몰아 영화 <가족의 탄생>(2006), <육혈포 강도단>(2010)에 출연해 스크린에서도 역량을 뽐냈다. 김혜옥의 진가가 더욱 또렷하게 드러난 작품은 <내 딸 서영이>(2012)였는데, 서영이(이보영)의 시어머니 차지선 역을 맡아 시청률 47.6%를 기록하는 데 기여했다. 

 


MBC <투윅스>(2013)는 김혜옥의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최대치로 뽑아냈던 작품이었다. 그가 맡은 역할은 악역이었지만, 평면적이지 않은 복잡한 캐릭터였다. 조서희는 겉으로는 대중들의 사랑을 받는 인기 정치인이지만, 실제로는 조폭과 결탁해 온갖 이권을 챙기는 탐욕적인 인물이었다. 김혜옥은 분노와 절제를 섞어가며 그동안 쉽사리 보지 못했던 여성 악역을 완성시켰다. 그 뒤로도 김혜옥은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쌓아왔는데, 2014년에는 <왔다! 장보리>로 대박을 터뜨렸고, 현재는 <황금빛 내 인생>에 출연 중이다. 

한예리는 김혜옥이 상대배우라 은희 역이 더 매력적이라 생각했다고 밝히기도 했는데, 그만큼 두 배우의 호흡은 기대 이상의 긴장감과 감동을 만들어냈다. <더 테이블>의 네 가지 이야기 중 남녀 관계가 셋이나 되는데, 그래서인지 은희와 숙자의 대화는 더욱 특별하게 다가온다. <더 테이블>은 개봉 11일 만인 지난 9월 3일 7만 관객까지 돌파했고, 9월 4일까지 73,333명을 동원했다. 이 작은 영화가 보여주고 있는 저력이 놀랍고 반갑기만 하다. 아마도 그 공은 포스터를 장식한 네 명의 배우와 숨겨진 히든 카드 김혜옥에게 돌려야 할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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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로드무비, 전쟁영화, 웨스턴 영화, 대서사적 어드벤처이기도 하다. 그 중심에는 우리가 사랑하는 리더 시저의 정서에 대한 탐색이 자리한다
" (제작자 딜런 클라크)


20년 전, 과학자 윌 로드만(제임스 프랭코)은 유전자 치료제 ALZ-112를 개발하는 데 성공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버지(존 리스고)를 위한 치료약이었다. 결과의 안전성을 확보해야 했던 월은 임상 시험에서 유인원을 이용했고, 그 과정에서 부작용으로 인간을 능가하는 지능을 지닌 시저(앤디 서키스)가 탄생하게 된다. 인간에게 길러진 시저는 인간에 대한 유대를 바탕으로 신뢰를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인간과는 다른 존재(종)라는 사실을 자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유인원들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가 그들만의 사회를 구성한다.


그로부터 5년 뒤, 과학 실험의 실패로 인해 '시미안 플루'라는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유포돼 인간의 대다수가 죽어 나간다. 이로써 인간은 사실상 멸종의 단계에 진입한다. 반면, 유인원은 진화를 이어가며 점차 발달하는데, 짧은 기간 내에 놀라울 만큼 인간을 따라잡기 시작한다. 멸종 위기에 처한 인간들은 유인원을 공존의 대상이 아닌 전쟁의 대상으로 인식했고, 호전적인 유인원 코바(토비 켑벨)를 필두로 반격의 서막이 열리게 된다. 그야말로 처절한 종의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진화의 시작(2011)'과 '반격의 서막(2014)'를 잇는 <혹성탈출> 프리퀄 3부작의 마지막 편이다. 시기적으로 따지면, '반격의 서막'을 열었던 코바 체제로부터 2년 후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인원의 진화와 인간의 퇴화는 더욱 선명해졌다. 겨우 살아남은 인간들은 말을 하지 못하게 되는 등 퇴화를 거듭한다. 유인원의 자신감이 커지는 만큼 인간은 불안감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유인원에 의해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생겨나고, 그에 따른 공포가 점점 커져가는 것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어느 편에 서 있는가에 따라 보는 시각이 달라진다. 인류 문명의 파괴를 지켜보는 일부 관객에겐 희망의 상징처럼 보일 수도 있다. 나는 대령이 악인이 아닌, 꼭 필요한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느꼈다" (우디 해럴슨)


특수 부대 대령(우디 해럴슨)은 유인원을 적대시하는 가장 극단적인 캐릭터다. 그는 두려움과 공포가 혼재된 상태에서 유인원을 전멸시키기 위한 전쟁에 돌입한다. 평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시저는 자신의 믿음을 지켜나가려 애쓴다. 동료들이 희생당한 후에도 포로들을 풀어주는 등 관용을 베풀어 자신의 의지를 표현한다. 하지만 대령은 시저의 뜻을 받아들일 생각이 추호도 없다. 유인원의 증가는 곧 인간의 죽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국 대령에 의해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시저는 대령을 죽이기 위한 자신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관객들에게 여러가지 질문을 던진다. 작게는 개인적인 분노와 리더로서의 역할 사이의 갈등에 대해 묻고, 크게는 인간(사피엔스)의 자격과 조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인간의 공격에 맞서 유인원 사회를 이끌어야 할 시저는 가족에 대한 복수를 위해 개인적인 싸움에 돌입한다. 그 누구보다 냉철했던 그는 증오심에 휩쓸려 버리고 만다. 그의 모습은 '코바'나 '대령'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과연 그것이 인간의 본질인 것일까. 그렇지 않다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은 그 반대편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에 대한 답은 '노바(어마이어 밀러)'라는 인간 소녀와 그를 지켜주기 위해 손을 내민 유인원들에게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인간은 과연 다른 어떤 종들보다 우월하고 위대한 존재일까. 그건 혹시 착각이 아닐까.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유인원'을 통해 인간만의 것이라 여겼 지능과 언어, 고차원적 문화 등이 인간 고유의 것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유인원의 경계를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모호하게 그려낸 <혹성탈출: 종의 전쟁>은 더욱 강렬하게 '인간'이라는 종에 대해 묻고 있다. 


이런 질문도 가능하다. 유인원과 인간의 공존은 불가능한 것일까. '희망'을 던져주고 싶지만, 사실 그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아마도 그건 성사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유발 하라리가 쓴  <사피엔스>를 통해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유발 하라리는 "관용은 사피엔스의 특징이 아니"라면서 "현대의 경우를 보아도 사피엔스 집단은 피부색이나 언어, 종교의 작은 차이만으로도 곧잘 다른 집단을 몰살하지 않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러면서 5만 년 전 공존했던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 가운데 사피엔스만 남게 된 이유를 설명한다.


그는 "사피엔스가 네안데르탈인과 마주친 결과는 틀림없이 역사상 최초이자 가장 심각한 인종청소였을 것"이라 단언한다. 그것이 사피엔스가 기술과 사회적 기능이 우수한 덕분이든 아니면 자원을 둘러싼 경쟁 때문이든 간에 말이다. 지난 1만 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호모 사피엔스는 유일한 인간의 종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가능성에 대해 매우 폐쇄적이지만, <혹성탈출> 시리즈는 그에 대해 열린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다. 물론 공존의 가능성은 부정적이다. 

 

 

"어쩌면 우리 조상들이 네안데르탈인을 전멸시킨 이유가 바로 이것인지 모른다. 그들이 우리가 무시하기에는 너무 친숙하고 관용하기에는 너무 달랐다는 것."


아마도 유발 하라리의 저 추측이야말로 <혹성탈출> 시리즈에서 그려진 인간과 유인원 간에 벌어진 전쟁의 근본적인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지구의 지배자였던 인간의 입장에서 유인원은 너무 친숙하면서 너무 다른 존재였기 때문에. 그렇다고 해서 <혹성탈출: 종의 전쟁>에서 '노바'를 통해 보여주고자 했던 뜨거운 '가치'까지 부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인간과 유인원의 전쟁, 그리고 혹한의 계절 속에서 피어난 '노바'라는 꽃은 '종'을 떠나서 모두가 지켜내고자 했던 '인류의 희망'이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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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민망한 일이지만, 최근 영화관에서 깜빡 '조는' 일이 부쩍 늘었다. 순간적으로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일정한 리듬에 고개를 자연스레(?) 맡기는 것이다. 그래도 '코를 고는' 최악의 매너로 영화관을 경악으로 몰고가진 않았으니 그나마 천만다행이다. 혹시 잔잔한 영화 위주로 선택해 감상을 했냐고? 더욱 민망하게도, 실은 그렇지 않다. 놀라지 마시라. 무려 우리의 톰 아저씨(톰 크루즈)가 주연을 맡은 <미이라>를 보면서도 졸음을 이기지 못했으니.. 


나름대로 영화를 제법 많이 보는 편인데, 이 불가항력의 힘에 무릎을 꿇었던 경험은 극히 적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장르'의 문제는 아닌 듯 하다. 아무리 시끌벅적한 사운드와 액션이 쏟아져도 이야기 자체가 단조롭거나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지 않는 영화에는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또, 뻔한 '합'을 맞추고 있다는 생각(의심)이 들면 지루함이 몰려온다. 액션과 이야기, 혹은 기존의 액션을 뛰어넘는 파격적 액션. 이 두 가지 특별함을 갖추지 못한 액션은 관객을 졸리게 만든다.



"올해 가장 놀라운 액션 시퀀스"(Quiet Earth)

"역동적인 액션 스릴러의 발견"(Screen daily)


분명 <악녀>는 달랐다. 감히 졸음이 찾아 올 틈이 없었다. 슈팅 게임을 연상케 하는 1인칭 오프닝 시퀀스는 (이미 여러 매체를 통해 정보를 접한 상태였음에도) 가히 압도적이었다. 숙희(김옥빈)의 칼, 도끼, 총을 사용한 과감한 액션과 뒤이어 전개되는 맨몸 액션도 감탄스러웠다. 리허설만 2회차가 소요됐고, 촬영에 총 4일이 걸렸다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아 보였다. 제70회 칸 영화제 미드나잇 스크리닝 부분에 공식 초청된 이 영화를 향해 쏟아졌던 찬사가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싶었다. 


물론 초반의 경탄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오프닝 스퀀스의 그 화려하고 강렬했던 숙희의 '죽임'에 대한 이유와 설명이 지나치게 빈약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숙희가 그토록 많은 살육을 저질러야만 했는가. 물론 영화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실(?)하게 제시한다. 다만, 그 성실함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고 진부하다. '액션'에 있어서만큼은 기존의 틀을 깨는 데 성공했지만, 그 액션과 함께 빛나야 할 '이야기'에서는 틀 안에 갇힌 채 한계를 드러냈다고 할까.



숙희의 운명은 참으로 기구하다. 조선족 출신의 그는 어린 시절 아버지의 죽음을 코앞에서 목격한다. '보호자'이자 '울타리'였던 존재를 상실한 아픔, 그것도 '배신'에 의한 잔혹한 죽음은 뇌리에 깊이 박힐 수밖에 없을 터. 숙희는 복수의 칼날을 갈며 때를 기다린다. 킬러인 중상(신하균)은 숙희에게 우상과도 같은 존재다. 중상으로부터 구제받고, 그로부터 훈련받고, 그로부터 길러진다. 아버지를 대신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또 다른 '전부'가 숙희 위에 무겁게 내려앉았다. 


숙희는 중상과 결혼하게 되지만, 신혼여행을 떠난 날 끔찍하게도 남편을 잃는다. 그를 보호하던, 그의 전부였던 또 한 명의 '남자'를 잃어버린 트라우마는 숙희를 또 다시 어둠 속에 가두고 내팽개친다. 나락에 빠진 숙희를 끄집어올린 건 또 다른 '국가'라고 하는 또 다른 '남자'였다.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에서 '국가'가 갖고 있는 상징과 이미지가 어떤지 연상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닐 게다. 숙희는 국정원에 의해 살인 병기로 길러진다. 국가는 숙희의 '모성'을 이용해 그를 포섭하고, 그를 억압한다. 



자꾸 '숙희'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니까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속의 숙희가 떠오른다. <아가씨> 속의 숙희가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되바라짐을 마구 발산해 관객들에게 '청량감'을 줬던 것과 달리 <악녀> 속의 숙희는 체제 속에 철저히 종속된다. 거침없이 칼을 휘두르고, 스스럼없이 눈앞의 적을 죽여버리는 숙희지만, 그의 '액션'에는 주체성이 결여돼 있다. 정병길 감독이 <악녀>의 숙희를 두고 "나쁜 여자는 아니다. 착한 여자의 슬픈 이야기다"라고 말했던 건, 그 한계를 여실히 보여준다. 


비록 '여성 (원톱) 액션 영화'를 표방했지만, 그 타이틀에 적극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정확히 말하면, '여성을 앞세운' 액션 영화라고 칭하는 게 맞지 않을까. 특히 숙희와 현수(성준)의 로맨스는 불필요하다 여겨질 만큼 '지루'해 순간 졸음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는 또 다시 숙희를 우리에게 친숙한, 그래서 '옳다'고 여기는 '가족 형태' 속으로 밀어넣으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마치 숙희에게 '남편'이 있어야만 '완전한' 가족이 되고, 또한 행복할 수 있다는 강박이라고 할까. 



그럼에도 김옥빈이 보여준 연기는 탁월하다 못해 경이롭다. 오토바이 장검 액션, 시내버스 안 액션 등 유려한 액션은 말할 것도 없고, 워낙 다양한 표정을 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쉽사리 잊히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피칠갑을 한 김옥빈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아우라는 우리에게 이런 배우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인상적이다. 2009년 박찬욱 감독의 <박쥐>를 통해 '각성'한 것으로 보이는 그의 연기력은 JTBC <유나의 거리>(2014)를 통해 한층 성숙해졌고, 마침내 <악녀>를 통해 만개한 듯 보인다. 


<악녀>는 지난 22일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 개봉한 지 15일 만이다.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의 핸디캡을 안고 거둔 성과라 더욱 값지다. 또,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가 위세를 떨치고 있는 박스오피스에서 <하루>, <미이라>에 이어 4위를 기록하는 중이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매드맥스>와 <원더우먼>의 그것에 훨씬 못 미치는 여성에 대한 '인식'을 내재하고 있는 영화에 '여성 액션 영화'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뭔가 어색하다. 그렇지만, <악녀>가 거둔 기술적 성취와 그 속에서 오롯이 빛나는 김옥빈의 존재감에는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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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영화의 성패를 가르는 기준에 '흥행'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1차(원)적인 지표를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아니, '상업 영화'로서 얼마나 많은 관객을 스크린 앞으로 불러 모았는지는 가장 결정적인 성적표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까지 <대립군>은 '완전히' 실패했다. 현재(6월 7일)까지 누적 관객 수 74만 6,787명. 마케팅 비용을 포함해 총 제작비가 110억 원을 넘는 대규모 영화가 얻은 성적이라기엔 너무 처참하다. 이대로라면 순익분기점인 '330만'까지는 까마득해도 너무 까마득하다.


혹시 '역주행'이라도 기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이 녹록치 않다. 산 넘어 산이라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다. 같은 날(5월 31일) 개봉했던 <원더우먼>이 158만 7,731명을 동원하며 2배 이상 앞서 가고 있고, 한 주 앞서 개봉했던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도 271만 2,467명을 기록하며 <대립군>의 위에 자리잡고 있다. 여기에 톰 크루즈를 앞세운 <미이라>의 공습은 결정타라 할 만 하다. <미이라>는 개봉 이틀만에 1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돌풍을 일으키고 있으니 말이다. 


할리우드에서 불어닥친 태풍들이야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다큐멘터리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밀린 건 치명적이다. <대립군>에 앞선 5월 25일 개봉했던 <노무현입니다>는 140만 5,529명의 눈시울을 적시며 기적의 역주행을 이뤄내고 있다. 이쯤되면 변명의 여지가 없다. <대립군>의 정윤철 감독은 자신의 SNS에 "승자독식, 1등만 살아남는 사회는 정글이지 사람 사는 곳이 아닙니다. 다양한 영화를 골라 볼 관객의 권리는 처참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라며 스크린 독점을 성토하는 글을 게시했지만, 그다지 공감을 얻진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위한 '변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듦새에 상투적인 느낌이 있긴 하지만, '누가 왕을 일깨우고, 나라를 세우는가'라는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대립군>은 분명 이 시대에 필요한 영화가 분명하다. 제목 그대로 <대립군>은 '대립군(代立軍)'에 대한 이야기다. 생존을 위해 남의 군역(軍役,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모든 정남들에게 주어진 의무), 요즘으로 말하면 '국방의 의무'를 대신 치르던 대립군 말이다. 물론 법도에 어긋나는 행위다. 처음에는 '편법'으로 시작했을 것이다.


일부가 저지르던 '편법'이 차츰 성행하게 되고, 어느덧 사회적으로 묵인되는 단계에 이른다. 먼저 생각해봐야 할 것은 어째서 '대립'이 통용되게 됐냐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 정부는 왜 이런 불법을 묵인했던가. 착취의 대상이었던 농민들을 가장 힘들게 했던 건 '요역(徭役)'이었다. 국가의 필요에 따라 '대가 없이' 정기 혹은 부정기적으로 백성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수취체제의 하나였던 요역은 농사에 지장을 주기 때문에 농민들은 당연히 이를 기피하게 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사람'이 부족할 때, 가장 용이하게 '끌어' 쓸 수 있는 노동력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군대다. 국가는 자연스레 농민 대신에 군인을 각종 토목공사에 동원했다. 누군들 상관이 있었겠는가. 일만 시키면 그만인 것을. 그러나 군인도 차츰 요역 동원을 꺼리기 시작했고, 그리하여 다른 사람을 사서 대역을 시키는 '대립'이 성행하게 된다. 누군들 상관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이 불법을 묵인했다. 15세기 내내 평화가 지속됐던 것도 이런 상황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한 장정의 한 달의 대가가 면포로 3필이니, 1년의 대가는 거의 30여 필이나 됩니다. 대립을 하고서도 대가를 받지 못한 자는 증명서를 받아 가지고 가서 독촉하게 됩니다. 독촉을 받은 사람은 전토를 팔고 혹은 우마를 팔게 돼 몰락하게 됩니다. 직접 군에 가면 비용이 훨씬 줄어들 텐데 우선 한때의 편한 것만 생각하고 후일의 폐해를 염두하지 않고 대립을 시키는 것이 풍속이 됐는데 그 폐단을 금하기가 어렵습니다."


- <세종실록> -


군역과 요역의 혹독함을 외면한 채 '한때의 편한 것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백성이라 탓하는 저 기득권의 사고방식을 보라. 불법적인 군역 면제는 더욱 성행하게 되고, 포를 받고 군역을 면재해 주는 방군수포(放軍收布)의 폐단이 발생하자 정부는 더 이상 배겨내지 못하고 아예 이를 합법적인 틀 안으로 수용한다. 그것이 바로 군적수포제(軍籍收布制)의 실시(중종 36년, 1541년)다. 관청의 군포 요구가 늘어나면서 기피 현상은 더욱 심화된다. 갈수록 군대는 부실해지고, 임진왜란(1592년)이 발생했을 당시에는 군사가 부족한 실정에 이른다.



한편, <대립군>은 '대립군(代立君)'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전쟁이 터지자 저 혼자 살겠다고 백성을 버리고 명나라를 향해 떠난 임금 선조를 대신해서 임시 조정이라 할 수 있는 '분조(分朝)'를 이끌었던 세자 광해군 말이다. 생계를 위해 다른 사람의 군역을 대신 살았던 대립군(代立軍)들과 마찬가지로 광해군도 도망간 임금을 대신해 백성들의 마음을 어르고 달래는 역할을 수행한다. 실제로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을 거점으로 삼아 왜군을 교란하고,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 군량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는 공을 세웠다.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의 광해군을 '각성 이전'의 모습으로 그려 나간다. 궁궐에서 나고 자란 왕자는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전쟁통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가마를 타고 이동해야 하고, 궁녀들의 수발을 받으며 생활한다. 이 어처구니 없는 장면들이 바껴가는 촉매제는 대립군(代立軍) 토우의 자극이다. 산골짜기에서 가마를 밀어 떨어뜨리는 장면은 광해군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대표적인 장면이다. 광해군은 점차 자신의 처지를 직시하기 시작한다. 


또, 전쟁의 포화로 신음하고 있는 백성들을 마주하고 내면의 성장을 이뤄간다. 그 과정이 단기간에 속성으로 진행된다. 그만큼 '전쟁'이라는 건 극적인 상황이니 말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스스로 나서 춤을 추는 장면은 제법 감동적이기도 하다. 물론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혹자들은 광해군과 대립군, 그리고 백성들 간의 '화해'가 지나치게 쉽게 그리고 뭉툭하게 그려졌다고 말한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무능한 왕의 목을 베어버리지 못하고, 다시 조선 왕조를 받아들였던 그 당시 백성들에게 화가 나기도 한다.



또, 왕에 대한 분노를 사그라뜨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광해군이 못내 밉기도 하다. 일찌감치 무너졌어야 할 조선 왕조가 지속돼 변화의 시류를 타지 못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이다. 하지만 지금의 생각으로 당시를 재단하는 건 위험한 일일 수 있다. 결국 백성들의 선택은 (광해군과 함께) '조선'을 위해 싸우는 것이었고, 그건 오로지 자신의 터전과 삶, 그리고 가족들을 위한 선택이었지 '선조'를 위한 싸움은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할 밖에. 그리하여 <대립군>에서 강조하는 '교룡기'는 매우 큰 울림을 준다. 


이처럼 대립군은 대립군(代立軍)들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한편으로 대립군(代立君)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나' 스스로를 위해 싸우지 않고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는 수많은 '대립군'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정윤철 감독은 '더 이상 다른 누군가로 살지 말고, '나'의 존재를 자각한 상태에서 싸워나가자'고 외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대립군>을 보면서 얼마 전 뜨겁게 타올랐던 '촛불'을 떠올리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연상일 것이다.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놓인 나라를 구하는 건 언제나 '민중'이 아니었던가.


한편, 광해군 역을 맡은 여진구는 캐릭터의 성장 과정을 충실히 연기해 냈다. 또, 토우 역의 이정재는 인상적인 연기를 펼치며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채웠고, 곡수를 연기한 김무열의 연기도 단연 돋보인다. 이쯤에서 이상한(?) 변명을 하나 더 해보자. <대립군>이 흥행을 하지 못했던 '외부적인' 요인 말이다. 광해군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연상시키는 역사 속 인물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우리는 이미 <광해, 왕이 된 남자>라는 영화를 통해 그 향수를 충분히 느끼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이번에는 진짜 노무현이 영화로 등장한 게 아닌가. <노무현입니다>라고 하는 '진퉁'이 영화관에서 상영 되고 있는데, 굳이 그를 빗댄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영화 <대립군>을 선택할 리가 있겠냐는 말이다. 어쩌겠는가, 이렇게라도 위로를 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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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우먼>이 돌아왔다. 그 '귀환'을 기다려 온 기간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일 것이다. 누군가는 원더우먼(윌리엄 몰튼 마스턴이 탄생시킨 캐릭터)이 DC코믹스의 만화책에 처음 등장했던 1941년을 떠올릴 테고, 누군가는 <고스트 버스터즈>의 이반 라이트만 감독이 원더우먼을 영화화하겠다고 발표했던 1996년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또 어떤 이들은 <배트맨 대 슈퍼맨: 저스티스의 시작>에서 인상적인 활약을 했던 원더우먼(갤 가돗)을 만났던 짜릿함을 상기하며 2016년을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원더우먼>은 누군가에겐 평생을 손꼽아 기다려왔던 프로젝트이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숱하게 쏟아져 나오는 흔하디 흔한 '슈퍼 히어로물'이 하나 추가된 것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마침내(76년 만에) <원더우먼>이 '시작'됐고, 그리하여 우리는 앞으로 계속해서 <원더우먼>을 만나게 될 것이며, 또한 언젠가는 <언더우먼>의 매력에 빠져들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두고 보라, 당신은 결코 <원더우먼>을 피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이동안 DC가 제작했던 영화들이 '혹평'을 받으며 힘겹게 스타트를 끊었던 것과 달리 <원더우먼>은 출발이 매우 좋다. 영화 비평 사이트인 로튼 토마토에서 97%의 신선도를 기록할 만큼 전체적으로 호평이 압도적이었다. 현재는 수치가 조금 떨어져 93%라고 하지만, 마블 영화 가운데 최고라는 <아이언맨>의 94%에 필적하고, <어벤져스>의 92%보다는 높다. <배트맨 대 슈퍼맨:저스티스의 시작>이 28%,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25%를 얻었던 것과는 천양지차의 성적표라고 할 수 있다.


<원더우먼>을 통해 DC는 그동안의 실패를 마감하고 새로운 반전의 계기를 잡았다. MCU(Marvel Cinematic Universe)에 처참히 '발려' 왔던 탓에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할 수 있게 됐다. 축배를 터뜨리기엔 아직 이르지만, 적어도 DCEU(DC Extended Universe)의 구원 투수이자 '저스티스 리그(Justice League)'를 이끌어 나갈 중심축으로 원더우먼이 성공적으로 안착했다는 점에 대해선 안도해도 될 것으로 보인다. 자, 이제부터 전 세계에 걸쳐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아왔던 여성 히어로 '원더우먼'을 만나보자. 



"넌 그들에게 과분해"


그는 제우스의 후손이자 아마존의 전사다. 여성들로만 구성된 왕국인 데미스키라의 공주로 태어난 다이애나(갤 가돗)는 어렸을 때부터 '전사'를 꿈꿨다. 어머니인 여왕 히폴리타(코니 닐슨)는 계속해서 만류하지만, 주어진 숙명을 어찌 피할 수 있겠는가. 결국 데미스키라 최고의 전사인 안티오페(로빈 라이트)로부터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고, 결국 그를 뛰어넘는 최강의 전사가 되기에 이른다. 준비가 끝났으니 숙명을 받아들일 차례이다. 전쟁의 신 아레스를 상대할 수 있는 '갓 킬러'의 운명 말이다. 


어느 날, 인간 세계의 트레버 대위(크리스 파인)가 데미스키라에 불시착하게 되고, 데미스키라의 전사들은 그를 뒤따라 온 독일군과 일전을 벌이게 된다. '현대의 무기'로 무장한 '백인' '남성' 군인들을 거뜬히 상대하는 데미스키라의 여성 전사들의 액션은 영화의 백미라 할 만 하다. 그들이 펼치는 화려하고 화끈한 전투 장면은 '아름답다'는 탄성을 자아낼 정도다. 신대륙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기존의 문명을 무자비하게 '파괴'해 왔던 서구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이애나는 트레버 대위로부터 인간 세계에 벌어지고 있는 전쟁(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고, 아레스로부터 지배를 받고 있는 인간을 구하고 '선(善)'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 세계로 떠나기로 결심한다. 전설처럼 아레스만 없애면 그로부터 해방된 인간들은 즉각 전쟁을 멈추고 '선'을 지향할 것이라 믿었지만, 여전히 인간이 서로를 죽이는 일에 몰두하자 다이애나는 혼란에 빠진다.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의문에 봉착한 그는 고뇌 끝에 '사랑'의 힘에 힘입어 인간에 대한 '믿음'을 이어나간다.


<원더우먼>이 구현하고 있는 '액션'의 진보와 달리 '인간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물음 자체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동안 수많은 '히어로물'이 답습했던 주제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원더우먼>이 갖고 있는 가치가 훨씬 크기 때문에 이 정도의 '흠'은 덮고 넘어갈 만 하다. '남성 일색'의 히어로물에서 '원더우먼'은 존재 자체로 청량감을 준다. 그건 통쾌함과도 연결된다. 가령, 여성은 출입할 수 없는 군 수뇌부의 회의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답답함을 자아내는 남성들을 향해 '일갈'을 하는 원더우먼의 모습처럼 말이다. 



"남자는 아기를 낳으려면 필요하지만 쾌락을 위해서는 필요없대요."


그건 원더우먼의 탄생이 '페미니즘'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해가 쉽다. 그 스스로도 페미니스트였던 윌리엄 몰튼 마스턴은 당대의 페미니스트들과 지속적인 교류(그의 아내 세이디 할러웨이도 여성 운동가였다)를 이어갔는데, 원더우먼이라는 캐릭터를 창조하면서 전설적인 여성 운동가들의 면모를 녹여냈다. "여자는 아이를 낳는 기계가 아니다"며 산아 제한 운동에 나섰던 마가렛 생어, 여성의 참정권을 획득하기 위해 투쟁했던 에멀린 팽크허스트, 최저 임금 운동에 앞장섰던 플로렌스 켈리가 그 대표적인 예다.


원더우먼이 봉착한 물음의 1차원적 성격은 <원더우먼>이 다이애나의 성장기이자 원더우먼의 탄생기라는 점에서 이해하면 충분히 납득이 된다.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두고 편을 갈라 피터지는 싸움을 벌이는 단계까지 진행된 마블의 히어로들이 하는 고민과는 달리 여전히 인간의 선악을 두고 번뇌하는 DC의 그것은 그야말로 '어린애' 수준이지만, 그것이 원더우먼이라고 하는 새로운 캐릭터의 근원을 파헤치는 과정이기에 오히려 '순수'하게 받아들여진다. 



"사랑과 진실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원더우먼은 마법 같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큰 강점이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우리 할아버지는 나에게 '삶에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내 안의 빛을 찾으라'는 가르침을 주셨다.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 메시지를 영화가 담고 있다." (갤 가돗)


앞선 시기에 원더우먼의 영화화가 기획되면서 산드라 블록, 안젤리아 졸리, 비욘세, 메간 폭스, 엘리자 더시쿠, 캐서린 제타존스 등 많은 배우들이 원더우먼의 후보로 거론됐지만, 결국 그 영광은 갤 가돗에게 돌아갔다. 178cm의 큰 키에 탄탄한 체격을 지닌 그는 이스라엘 출신으로 군 복무 경험이 있다. 게다가 원더우먼이 되기 위해 7개월 간의 집중적인 훈련을 거쳤다고 한다. 천부적인 신체 조건과 노력이 합쳐져서 갤 가돗이 펼치는 액션 장면들은 시원시원하고 환상적이다.


슈퍼 히어로물의 '역사'에 있어 <원더우먼>의 가치는 단연 돋보인다. 여성 감독(패티 젠킨스)이 연출을 맡은 여성 슈퍼 히어로 영화의 등장이 반갑다. 다만, '재미'보다 '가치'에 방점을 둬야 하는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기존 DC 영화 특유의 묵직한 분위기를 잃지 않으면서 원더우먼이 인간 세계에 적응하는 과정에서의 유머를 잘 녹여넣었다. 무엇보다 참호를 넘어 적진으로 뛰어드는 원더우먼의 과감한 돌진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잊히지 않는다. 마치 여성 히어로의 시대를 활짝 열어젖히는 위대한 출발을 마주한 느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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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입하(立夏)가 지나고 '여름 기분'이 돌기 시작한다는 소만(小滿)도 지났다. 바야흐로 여름이 돌아왔고, 그에 맞춰 <캐리비안의 해적>도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6년 만의 귀환이다. 잭 스패로우 선장(조니 뎁)과의 재회가 반갑기만 하다. 무려 2003년부터 시작된 인연이 아니던가. '여름'이야말로 그를 만나 찬란한 모험담을 전해 듣기에 적절한 계절이라 할 수 있다. 전설이 깃든 바다를 배경으로 해적들의 삶과 죽음, 어드벤처를 담고 있는 <캐리비안의 해적>은 철저히 여름 시즌을 공략해왔다. 


1편인 '블랙펄의 저주'만 9월에 개봉을 했을 뿐, 2편 '망자의 함'은 더위가 한창인 7월에 개봉했고, 3편 '세상의 끝에서'와 4편 '낯선 조류'은 5월에 관객들을 찾았다. 5편인 '죽은 자는 말이 없다'도 3, 4편과 마찬가지로 5월을 개봉 시기로 잡았다. 오프닝 스코어는 만족스럽다. 206,529명을 동원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2위인 <겟 아웃>의 71,895명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25일 <노무현입니다>가 개봉하지만, <캐리비안의 해적>의 독주에 맞설 정도는 아니다. <원더우먼>과 <대립군>이 개봉하는 다음 주까지는 적수 없는 1위를 질주할 예정이다.



5번째 편을 맞이한 <캐리비안의 해적>은 '초심'으로 돌아갔다. 시리즈의 탄생을 알렸던 1편의 스토리 구조를 다시 가져온 것이다. '블랙펄의 저주'에서 윌 터너(올랜도 블룸)과 엘리자베스 스완(키이라 나이틀리)의 러브 스토리는 그들의 아들인 헨리 터너(브렌튼 스웨이츠)와 카리나 스미스(카야 스코델라리오)가 대신 한다. 플라잉 더치맨 호의 저주에 걸려버린 아버지 윌 터너를 구하기 위해 헨리 터너는 잭 스패로우 선장을 찾아나서고, 이 과정에서 마녀로 오해를 받는 여성 천문학자 카리나 스미스를 만나게 된다. 


헨리 터너와 카리나 스미스는 저주를 풀 열쇠인 '포세이돈의 삼지창'을 찾기 위해 마법의 나침반을 가진 잭 스패로우와 힘을 합친다. 세 사람은 과거에 윌 터너와 엘리자베스 스완, 잭 스패로우가 그랬듯 서로 티격태격하며 관계를 형성해나가고, 그 장면들은 1편의 향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하다. 또,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가 워낙 큰 존재감을 형성하고, 압도적 사랑을 받게 되면서 무너졌던 캐릭터 간의 균형이 5편에서는 어느 정도 맞춰졌다. '망자의 함'에서 아예 잭 스패로우만을 내세웠던 '실수(?)'를 바로잡은 셈이다.



한편, 잭 스패로우는 자신이 어린 시절(의 모습이 CG로 구현됐다!)악마의 삼각지대에 가둬버렸던 바다의 학살자 살라자르(하비에르 바르뎀)의 추격을 받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바르보사 선장(제프리 러쉬)이 합류한다. 하비에르 바르뎀은 악의 축을 맡아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극의 무게를 한층 더하고, 또 다른 해적 제프리 러쉬는 기존의 모습뿐만 아니라 새로운 면모를 선보이면서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를 사랑해 왔던 관객들에게 또 다른 재미를 선물한다. 


여전히 잭 스패로우 선장이 보유하고 있는 캐릭터의 힘은 강렬하다. 짙은 눈 화장과 붉은 머리 수건, 땋아 내린 수염. 독특한 걸음거리 등은 여전하고, 특유의 능글 맞은 행동들과 재치있는 입담도 그대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낙천성을 잃지 않는 무한 긍정주의자 잭 스패로우 선장은 정말이지 미워할래야 미워할 수 없는 독보적인 캐릭터다. 아직까지는(?) 그 활약이 미비한 헨리 터너와 카리나 스미스의 부족한 캐릭터 매력을 조니 뎁이 상쇄해 가득 채우는 느낌이다. 



일각에서는 '울궈먹기'라는 비판이 제기되고, '조니 뎁이 예전의 그가 아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일견 타당한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리즈'가 울궈먹기라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사실이고, <캐리비안의 해적>의 경우에는 여전히 캐릭터의 매력이라든지 이야기의 변주 가능성이 많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시리즈가 구현하고 있는 해상 전투신의 박진감과 화려함은 여전히 관객들의 입맛을 만족시킨다. 여름의 더위를 날려버리기에 이보다 좋은 볼거리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니 뎁이 기존에 형성해 놓은 캐릭터에 의존해 다소 방만한 연기를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잭 스패로우라는 캐릭터와 조니 뎁의 상성은 부정할 수 없고, 조니 뎁 이외의 다른 배우를 떠올릴 수조차 없는 밀착성을 보인다. 게다가 유리병 속에 갇혔던 '블랙 펄'이 다시 등장하고, 올랜도 볼룸과 키이라 나이틀리가 카메오로 출연하는 것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놓칠 수 없는 이유다. 엔딩 크레디트 후의 쿠키 영상은 의미심장한데, 6편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키기에 충분하다.


오히려 문제는 디즈니 특유의 보수적인 색채의 '가족주의'가 등장한다는 것과 여성을 대상으로 한 시시껄렁한 농담들이 지나치게 반복돼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디즈니만의 색깔이라는 점에서, 또 나름대로 감동적인 드라마를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지만, 후자의 경우에는 굳이 넣지 않았어도 좋았을 부분이이었기에 만약 6편이 제작된다면 반드시 고려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럼에도 역시 <캐리비안의 해적: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2017년 여름, 최고의 오락 영화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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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아서(찰리 헌냄)가 성검(聖劍) 엑스칼리버(Excalibur)를 뽑는 건 '운명'이었다. 보티건 (주드 로)의 보호를 받고 있던 바이킹과 마찰을 빚으면서 쫓기는 처지가 된 아서는 체포를 당할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배를 타고 도주하려 한다. 하지만 운명의 굴레는 쉽사리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엑스칼리버를 뽑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했)다는 표식이 없는 아서는 검 앞으로 끌려가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신의 운명을 마주한다. 검을 뽑아야 하는, 그래서 왕이 되어야 하는 운명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아서가 엑스칼리버를 뽑는 건 '운명'이었다. 바위가 된 우서 왕(에릭 바나)의 등에 꽂힌 검을 그의 아들인 아서가 뽑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우서 왕과 그의 '혈통'만이 그 검을 사용할 자격이 있었으니 말이다. 마찬가지로 권력에 눈이 멀어 자신의 형을 죽이고 권좌를 탈취한 보티건에 맞서는 것, 백성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공포'를 통치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보티건의 극악무도한 폭정을 멈추고 새로운 왕이 되는 것도 아서의 운명이었다. 



백성들은 누구도 뽑지 못했던 엑스칼리버를 뽑아 든 아서를 추앙하기 시작한다. 암흑과도 같은 보티건의 시대를 끝낼 수 있는 영웅으로 여기고 그의 이름을 연호한다. 갑자기 너무 큰 기대의 중심에 서게 된 아서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다. '제발, 날 그냥 내버려 둬!' 처음에는 부정하려 했다. 외면하고 피하려 했다. 양손으로 검을 쥘 때마다 끔찍한 장면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매일 밤마다 악몽으로 다가왔던 그 견디기 힘든 슬픔과 아픔들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운명은 가혹했고, 운명을 감당할 힘을 기르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강 속으로 검을 던져 운명으로부터 벗어나려 했지만, 운명은 더욱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결국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보티건에 맞서 싸우기로 결심한다. <킹 아서> 속의 '아서'가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같은 이름을 떠올렸을 것이라 짐작한다. 지금은 대한민국 제19대 대통령이 된 사람, 공교롭게도 『운명』이라는 책을 쓰기도 했던 사람, 바로 '문재인' 말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


문재인은 자신이 쓴 책에서 참으로 의미심장한 문장을 남겼다. 이때 그는 확실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노무현의 '운명'을 이어받았다는 사실을, 그리고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노무현 대통령 혼자 외로울까봐" 청와대로 들어가 초대 민정수석과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던 그였지만, 한사코 현실 정치에 발을 들이는 것은 거부했다. 그랬던 문재인을 정치라는 잔혹한 무대의 한복판에 끌어들였던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2009년 노무현의 죽음이었다. 그가 '내 생에 가장 긴 하루였'다고 회상했던..


영결식을 찾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을 향해 "정치 보복'이라고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적개심과 분노가 공기를 가득 채웠다. 그 상황을 정리한 사람이 바로 당시 상주를 맡았던 문재인이었다. 예를 갖추고 머리를 숙여 사과를 하는 그의 성숙한 모습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것만 같은 얼얼함을 남겼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 깊은 위로를 받았고, 문재인을 새로운 '희망'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그라면 노무현의 운명을 이어 나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리라.


쉽지 않았다. 정치라는 게 어디 그리 만만한 것이던가. '권력 의지가 없다'는 비판은 꼬리표처럼 달라 붙었다. '등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정치를 시작했다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2012년의 실패는 뼈아팠다. 어찌 보면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그의 '혈육'을 통해 재현되는 것이 당시의 시대적 흐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2014년 세월호 참사는 또 한번 대한민국을 뿌리채 뒤흔들었다. 그 결과는 '촛불'로 이어졌고, 박근혜는 탄핵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은 대통령으로 선출된다.



사실 <킹 아서>를 통해 '문재인'을 떠올리게 되는 건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6세기 웨일스의 전설과 신화, 우서 왕의 아들인 아서만이 '엑스칼리버'를 뽑을 수 있고, 그 '혈통'만이 진정한 왕위의 승계자라는 건 '누구나'를 표방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밀어내야 할 유산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던 것처럼, 박정희의 '딸'이라는 후광 효과가 그를 지지하는 이유가 되는 안타까운 사례는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될 후진적 발상이 아닌가. 


그렇기 때문에 문재인은 노무현에 갇혀서는 안 된다. 아니, 엄밀하게 말하자면 문재인을 노무현에 가둬서는 안 된다. 아서는 보티건을 물리치고 왕의 자리에 오른 후, 그의 아버지 우서의 '그림자'를 좇지 않았다. 오히려 '원탁'을 만들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새로운 정치를 시작했다. 그 원탁에는 여러 의견을 가진 기사들이 둘러 앉게 될 것이고, 그들은 자신의 자신의 의견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히 피력할 것이다. 그리하여 아서 왕은 아서의 시대를 열었다. 19대 대통령 문재인도 그러하길 바란다. 


'누군가의' 운명을 이어받기보다 '자신만의' 운명을 걸어나가길 희망한다. 그를 지지하는(지키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그러하길 바란다. 그에게서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지 않게 되길 바란다. 아서의 시대에는 '혈통'과 '운명'이 삶을 결정했을지라도, 우리가 사는 지금은 다르다. 문재인이 뽑은 '엑스칼리버'는 '(정치적) 혈통'에 의해 결정된 '운명'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롯이 '민의' 그 자체였음을 기억하자. 그리고 거기에는 그를 지지하는 사람, 그에게 표를 던진 사람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모든 이들의 '의(意)'가 담겨 있음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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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