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61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61)

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서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 나희덕, 「너무 많이」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60)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과연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떻게 본체적 타자-사물에 조응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되고 차라리 "이 타자-사물은 우리에게 명령을 퍼부으며 진정 저 바깥에 서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순진한' 사람은 우리가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상의 현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완벽한 자족적 전체로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순진한' 사람이다. -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9)

이런 유사 스타벅스들이 파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하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절대로 동일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의 복합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공간들이 보여주는 것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요소들을 하나의 세계로 응축, 환원시켜버리는 자본의 힘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혁명을 외치는 밥 말리의 목소리가 커피향과 뒤섞여 토익 책에 머리를 박은 유니클로 차림의 여자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 역 앞 가난한 노인들의 풍경을 매그넘 사진첩처럼 펼쳐놓은 창을 등진 채 공정무역에 관한 모토가 적힌 테이블 앞에 앉아 조지 오웰의 『1984』를 원서로 읽는 남자의 모습 따위의 아이러니한 풍경을 끝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오직 냉담한 관조자만이 이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칠..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8)

절실함이 더해지고 희생이 전제되어야 원하는 물건은 내 것이 됩니다.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 저질러 놓고 나주에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내 방식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식이 욕망과 현실을 외려 중화시켜 놓더라 이겁니다. 저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간절한 욕망부터 해결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욕망 충족법을 지켜 오니 이제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도 별로 없게 되고 외려 욕망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군요. 뭐든 대체하면 된다는, 대치의 관점에서 사는 인생이 쓸쓸하다는 얘기는 이래서 가능한 거죠. 난 스스로 선택한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명품을 의식한 게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나..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7)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새로운 시각이나 연구도 '일본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역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똑같은 진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진실에는 값어치가 있고, 어떤 진실에는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런 사고 구조로 무장하고 이견을 틀어막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 - 장정일, 『장정일, 작가』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5)

모든 이야기는 하다 말고 모든 생각은 하다 말고 모든 삶은 살다 마는 것이므로, 그것 또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너무 많은 생각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풀지 못한 오해와 사과하지 못한 잘못과 좀 더 용감하게 굴지 못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으나 대체로 괜찮은 삶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요, 하고 나는 묻지 않는다. 조금만 더 여기 매달려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소유한다. -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4)

왜 나는 구멍이 있는 옷을 입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왔는지, 왜 남에게 흉하게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왜 흉하게 보이는 것이 심지어는 예의에 어긋난다는 인상을 주는지, 그리고 더 나아가서 왜 구멍이 있는 옷은 흉하게 보이는 것이고 구멍 모양의 장식이나 무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인지. 나에게 가장 최초로 그런 계율을 주입한 사람은 누구였는지. 나의 정신은 이렇듯 오직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만 구성되었는데, 나 자신은 지금껏 그 사실을 모르면서 스스로를 자유인이라고 생각해왔던 것인지. 칼리의 티셔츠 구멍은 내 눈앞에서 점점 더 크고 또렷하게 인식이 되면서, 내 안에서 나를 차지하고 있는 텅 빈 공간의 존재를 각인시켜 주었다. 도시의 삶. 혹은 문명, 그 모든 도그마가 형성해놓은 구멍. - 배수아, 『처음 보..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3)

그럼엽서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비전 중에서도 가장 초라하고 빈약한 비전에 속할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예상치 못한 불행이며, 당황스러운 기분을 야기하기도 한다. 이곳은 분명 의심 없이 아름다운데, 놀랍게도 아무런 감동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 배수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2)

글을 쓰는 것은 즐겁지 않다. 괴롭고 고단하며 매 순간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며 좌절감을 느낀다. 그러므로 만족이나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가 없다. 문제는 글을 쓰지 않을 때가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이다. 글을 쓰지 않으면 자신이 낙오자로 느껴질 뿐만 아니라 인생에 대한 의미를 상실하기 때문이다. - 프란시스 아말피, 『불멸의 작가들』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1)

마지막으로, 잘 잊히는 집도 있다. 그 집들은 절대 과거의 치욕이나 오랜 원한 등을 담지 않는다. 그 집의 계량기는 늘 '0'을 가리키고 그 안에 놓인 기억의 수첩은 여려 때마다 첫 페이지가 펼쳐진다. 그곳에서는 매일 삶이 시작되고, 여전히 모든 것이 가능하며, 틀에 박힌 일상이란 하나도 없다. 그렇게 그 집에는 과거도, 우울도 없고, 어쩌다가 그 집에 살았던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그 집에 살았다는 기억도 없다. - 페르난도 레온 아라노아, 『여기 용이 있다』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50)

나는 떠난다.내 삶의 속도를 다른 이와 비교하기 시작할 때,마음에 감기가 걸렸을 때,힘차게 뛰어오르기 전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내 안의 상처를 더 깊이 들여다보기 위해,낯선 사람들에게서 받는 친절을 경험하기 위해,스스로 쌓은 벽을 빠져나와 다시 한번 깨어지기 위해,떠나고 싶을 대는 주저하지 않고 떠나야 한다는 걸지금까지의 여정이 증명해주었기에, 그래서나에게 여행은 그리움의 몸짓이다.잃어버린 나에 대한, 잊어버린 나에 대한,그것은 열정의 몸짓이다.흘러간 시간을 쫓아 내일을 마중 나가는. -이애경, 『떠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서』-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9)

만약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거든.많이 먹지 말고 속을 조금 비워두라.잠깐의 창백한 시간을 두라.혼자 있고 싶었던 때가 있었음을 분명히 기억하라.어쩌면 그 사람이 누군가를 마음에 둘 수도 있음을,그리고 두 가운데 한 사람이사랑의 이사를 떠나갈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라.다 말하지 말고 비밀 하나쯤은 남겨 간직하라.그가 없는 빈집 앞을 서성거려보라.우리의 만남을 생의 몇 번 안 되는 짧은 면회라고 생각하라.그 사람으로 채워진 행복을다시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함으로써 되갚으라.외로움은 무게지만 사랑은 부피라는 진실 앞에서 실험을 완성하라.이 사람이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감과 함께 맡아지는운명의 냄새를 모른 체하지 마라.함께 마시는 커피와 함께먹는 케이크가이 사람과 함께가 아니라면 이런 맛이 날 수 없다는 사실..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7)

크놀프가 말했다."모든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자신의 영혼을 다른 사람의 것과 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다가갈 수도 있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가까이 함께 서 있을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내리고 있는 꽃과도 같아서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고자 한다면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느데 그것 역시 불가능하지. 꽃들은 다른 꽃들에게 가고 싶은 마음에 자신의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앗이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도록 꽃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야. 바람은 자신이 원한느 대로, 자신이 원하는 곳에서 이곳저곳으로 불어댈 뿐이지." - 헤르만 헤세, 『크눌프』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6)

그녀는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연약한 소녀와 다를 바 없는 이 여자에게서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면 안 된다. 물론 그는 '당신에게 자유를 돌려주겠소.'라는 식의 한심한 문장은 내뱉을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지, 자신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가 계획하고 있던 삶속에서 그녀는 포로가 아니었다.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녀는 작은 손을 그의 팔에 얹었다. "당신은 내 전부예요.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내 전부예요." 그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말을 듣고, 자신들이 서로 인연이 아님을 깨달았다. - 생텍쥐페리, 『남방우편기』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5)

린토트 선생님 : 자, 역사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럿지 군?럿지 : 정말 제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해도 되나요, 선생님? 그래도 안 때리실 거죠?린토트 선생님 : 약속할게.럿지 : 저한테 역사를 정의하라고 하신다면 … 빌어먹을 일 하나 일어난 다음 또 빌어먹을 일이 이어지는 그런 빌어먹을 일의 연속이지요. - 앨런 베넷, 『히스토리 보이즈』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4)

"남성적이라는 것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라는 질문에, "당연하지요. 세상에 그것밖에 없으니까요."라고 답한 프랑스의 철학자 뤼스 이리가레의 말대로, 세상에 하나의 목소리만 있을 때는 다른 목소리는 물론이고, 그 한 가지 목소리마저도 알게 어렵다. 의미는 차이가 있을 때 발생하며, 인식은 경계를 만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3)

그녀는 유태인 대학살 전인 열다섯 살 적 사진을 한 장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진의 주인공이 오늘날의 로자 아줌마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지금의 로자 아줌마가 열다섯 살의 사진 속 주인공이었다는 사실 역시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들은 서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였다. 열다섯 살 때 로자 아줌마는 아름다운 다갈색 머리를 하고 마치 앞날이 행복하기만 하리라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열다섯 살의 그녀와 지금의 그녀를 비교하다보면 속이 상해서 배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생이 그녀를 파괴한 것이다. 나는 수차례 거울 앞에 서서 생이 나를 짓밟고 지나가면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를 상상했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양쪽으로 입을 벌리고 잔뜩 찡그려가며 생각했다. 이런 ..

버락킴의 오래된 공책 (142)

"가장 아름다운 것이란 사람들로 하여금 즐거운뿐만 아니라 슬픔이나 두려움도 항상 함께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왜 그렇지?""무슨 말이냐면, 정말로 아름다운 소녀가 하나 있다고 해봐. 만일 지금이 그녀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고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그녀가 늙을 것이고 죽게 될 것이라는 점을 모른다면, 아마도 그녀의 아름다움이 그렇게 두드러지지는 않을 거야. 어떤 아름다운 것이 그 모습대로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도 기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럴 경우 난 그것을 좀 더 냉정하게 바라보면서 이렇게 생각할걸. 이것은 언제든지 볼 수 있는 것이다. 꼭 오늘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이야. 반대로 연약해서 오래 머물 수 없는 것이 있으면 난 그것을 바라보게 되지. 그러면서 난 기쁨만 느끼는 것이 아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