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나를 내리친 것이 빗자루방망이였을까 손바닥이었을까 손바닥에서 묻어나던 절망이었을까. 나는 방구석에 쓰레받기처럼 처박혀 울고 있었다. 창밖은 어두워져갔고 불을 켤 생각도 없이 우리는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 침침한 방의 침묵은 어머니의 자궁 속처럼 느껴져 하마터면 나는 어머니의 손을 잡을 뻔했다.


그러나 마른번개처럼 머리 위로 지나간 숱한 손바닥에서 어머니를 보았다면, 마음이 마음을 어루만지는 소리를 들었다면, 나는 그때 너무 자라버린 것일까. 이제 누구도 때려주지 않는 나이가 되어 밤길에 서서 스스로 뺨을 쳐볼 때가 있다. 내 안의 어머니를 너무 많이 맞게 했다.


- 나희덕, 「너무 많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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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우리는 "어떻게 이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가?"라고 묻지 말고 차라리 "이 일상의 현실이 과연 그토록 확고하게 실존하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어떻게 본체적 타자-사물에 조응했음을 확신할 수 있는가?"라고 물어서는 안되고 차라리 "이 타자-사물은 우리에게 명령을 퍼부으며 진정 저 바깥에 서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순진한' 사람은 우리가 일상의 현실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일상의 현실을 이미 주어진 것으로, 존재론적으로 완벽한 자족적 전체로 여기는 사람이야말로 '순진한' 사람이다.


- 슬라보예 지젝, 『전체주의가 어쨌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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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유사 스타벅스들이 파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 하지만 사실 더 놀라운 것은 그것들이 절대로 동일한 하나의 세계관으로 환원될 수 없는 요소들의 복합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런 공간들이 보여주는 것은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요소들을 하나의 세계로 응축, 환원시켜버리는 자본의 힘이다. 이 공간에서 우리는 혁명을 외치는 밥 말리의 목소리가 커피향과 뒤섞여 토익 책에 머리를 박은 유니클로 차림의 여자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 역 앞 가난한 노인들의 풍경을 매그넘 사진첩처럼 펼쳐놓은 창을 등진 채 공정무역에 관한 모토가 적힌 테이블 앞에 앉아 조지 오웰의 『1984』를 원서로 읽는 남자의 모습 따위의 아이러니한 풍경을 끝없이 발견할 수 있다. 오직 냉담한 관조자만이 이 모든 것을 무심히 지나칠 수 있을 것 같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미치거나 기절하지 않고 이 모순적 풍경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 김사과, 『0 이하의 날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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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절실함이 더해지고 희생이 전제되어야 원하는 물건은 내 것이 됩니다. 좋아하는 물건이 있다면 우선 저질러 놓고 나주에 해결 방법을 찾는 게 내 방식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방식이 욕망과 현실을 외려 중화시켜 놓더라 이겁니다. 저질러 놓은 것을 수습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간절한 욕망부터 해결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해결된다는 지론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식의 욕망 충족법을 지켜 오니 이제 절실하게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도 별로 없게 되고 외려 욕망의 크기가 줄어들기 시작하더군요. 뭐든 대체하면 된다는, 대치의 관점에서 사는 인생이 쓸쓸하다는 얘기는 이래서 가능한 거죠. 난 스스로 선택한 고립의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혼자 노는 법을 터득했습니다. 명품을 의식한 게 아니라, 좀 더 세밀하게 나만의 기준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해체하는 놀이 도구가 바로 물건이었던 셈입니다. 기왕이면 좋은 물건을 선택하려는 노력은 정당했고 좋은 물건은 그만큼의 대가를 내게 돌려주었습니다.


- 장정일, 『장정일, 작가』 中 사진작가 윤광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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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어떤 새로운 시각이나 연구도 '일본은 나쁜 놈'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역설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똑같은 진실이라 하더라도, 어떤 진실에는 값어치가 있고, 어떤 진실에는 값어치가 없다'고 생각한다. 저런 사고 구조로 무장하고 이견을 틀어막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진실'에는 '진실'이라는 값어치가 있다.


- 장정일, 『장정일, 작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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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이미 처리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정보로 넘치고, 그 결과 세계에 관한 (정보가 아니라) 이야기는 더욱 빈약해졌다. 이야기가 빈약하면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폭넓은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빈약해진다.


- 지그문트 바우만, 『사회학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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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이야기는 하다 말고 모든 생각은 하다 말고 모든 삶은 살다 마는 것이므로, 그것 또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것 자체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것이므로, 너무 많은 생각에 마음을 묶어두지 않으려 한다. 풀지 못한 오해와 사과하지 못한 잘못과 좀 더 용감하게 굴지 못해 잃어버린 것들이 있으나 대체로 괜찮은 삶이다. 그래서 이제 어디로 가요, 하고 나는 묻지 않는다. 조금만 더 여기 매달려 있게 해달라는 기도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 사랑하고 소유한다. 


- 황경신,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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