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그러니까 정신과 의사 정혜신을 처음 만난 건, 2001년 출간된 『남자 VS 남자』라는 책을 읽으면서부터였다. 대한민국의 소위 '유명한' 남성 21명을 소환해놓고, 각각의 키워드로 2명씩 묶어 링 위에 올리는 방식은 매우 신선했다. 특히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어준 딴지일보 총수를 '자기 인식(내맘대로 왕자. 니맘대로 독재자)'이라는 키워드로 엮은 대목과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과 가수 조영남을 '열등감(완벽하지 못한 황제. 망가지지 않는 광대)'이라는 관점에서 들여다 본 건 흥미로움 그 자체였다.



책에는 '심리분석'과 '인물평전'이 적절히 섞여 있는데, 여기에서 그가 갖고 있는 전문가로서의 능력과 소양(素養)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각각의 인물에 대한 끈기 있는 조사(調査)와 날카로운 분석이 돋보인다. 자연스레 독자들은 수긍을 하게 되고, 이를 넘어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깊이가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시선을 잃지 않는 그의 접근은 전혀 의도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건 '작가'로서의 소질일까, 아니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일까.  


당시 정혜신에겐 "한국 남성을 이보다 더 잘 이해하는 여자는 없다"는 평가가 뒤따라다녔는데, 그 '목적어'는 2005년 『사람 VS 사람』이라는 책이 나오면서 '사람'으로 대체됐다. 책에 등장하는 인물의 성비는 남성 쪽이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여성'의 출현이 사회의 억압에 가려져 있던 2005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살짝 고려하기로 하자. 무엇보다 '아버지'라는 키워드로 박근혜 대통령과 문성근 씨를 묶은 대목은 그야말로 탁월했다. 그리하여 정혜신은 그 누구보다 '사람'을 잘 이해하는 사람으로 읽혔다.


후속편이 나오길 손꼽아 기다렸지만, 그 이후로 '정혜신'이라는 이름은 '신문'에서 더 많이 눈에 띠기 시작했다. 2008년에는 1970~80년대 군사독재정권에서 고문을 당했던 피해자를 돕기 위해 '진실의 힘'이라는 재단을 만들어 집단상담을 이끌었고, 2011년에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공간으로 심리치유센터 '와락'을 만들었다.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사건이 발생한 후에는 안산에서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진료실'에서 환자를 만났던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안락한 공간을 벗어나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고. 『창작과비평』 창간 5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강연 '공부의 시대'에 참여한 본인의 강의를 엮은 『정혜신의 사람 공부』는 그가 터득한 '사람 공부'에 대한 결론이 담겨 있는 책이다. (참고로 '공부의 시대' 시리즈엔 강만길, 김영란, 유시민, 진중권도 참여했다.) 과연 정혜신이 깨달은 '사람 공부'가 무엇인지 살짝 들여다보기로 하자.


정혜신은 "내가 의사가 아니고 '사람'에 가까워질수록 의사로서의 실력은 폭발적으로 늘었다. '사람'이 될수록 탁월한 치유자는 절로 된다"고 고백한다. 무슨 말일까? 그는 진료실은 '철저하게 의사를 위한 공간'일 뿐, '환자를 위한 공간이 아니'라고 말한다. '의사라는 절대적 권위가 보장된 곳에서 나는 사람에 대한 입체적인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료실을 벗어나면서부터, 그리하여 사람의 속마음을 만나게 되면서 '더 섬세하고 더 과감한 상담도 가능해졌'고, '훨씬 더 용한 의사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가령, 이런 것이다. 세월호 참사 직후, 진도 팽목항에 수십 개의 천막이 세워졌다. 피해자들의 가족들과 유가족을 위해 심리 상담 부스가 차려진 것이다. 기사로도 수 차례 보도됐지만, 그 누구도 이 공간을 찾지 않았다. 언론과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며 심리 상담이 절실하다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심리 상담소는 계속해서 텅 비어 있었다. 이후 안산에서 장례식이 치러졌고, 정부합동분향소를 비롯해 안산 지역 곳곳에 상담 센터가 차려졌다. 여전히 유가족들은 상담을 받으러 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문가적인 시선'으로 보면 말이다. 혹은 '일반인의 시각'에서도 그러했다. 그들은 왜 그토록 괴로워하면서도 심리 상담을 받지 않는 것일까.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으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텐데 말이다. 공개된 장소를 찾아가는 게 부담스러웠기 때문일까? 정부가 정신과 의사와 상담사들로 꾸려진 상담 팀을 유가족들을 일일이 방문했지만, 유가족들의 반응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전문가들에게 문을 열어주지 않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 역정을 내기도 했다고 한다.


정혜신은 그것이 '치유의 교과서적인 방식'이라고 꼬집는다. 책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 정작 '현장'에서는 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혜신은 이렇게 되묻는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지만, 이것이 과연 2014년 대한민국의 세월호 현장에도 맞는 이야기였을까요?" 바닷속에서 내 아이를 아직 찾지 못한 상황, 부모의 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내 자식의 생사 여부에 온몸의 신경이 빨랫줄처럼 팽팽하게 곤두서 있'고, '아이를 찾을 때까지는 자신에게 최소한의 이완도 허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내 마음이 편하자고 상담을 받을 수 있었을까?



죄의식과 자책감에 사로잡혀 있을 그들에게 속 편하게 '상담'이나 받으라고 말하는 건,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밀려오면서 부끄러워진다. 정혜신은 "세월호 트라우마 피해자들에게 치유 전문가라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공부나 많이 했지 내 마음은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정혜신은 달랐다. 그는 '정신과 의사'라는 '전문가'로서 '환자'를 대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그의 상담 내용을 살펴보자.


"선생님, 제가 미친년 아닌가요?"

"미치면 어때요. OO가 갑자기 없어졌는데 OO 엄마가 잘 지내면 그게 엄마예요? OO가 없는데 어떻게 잘 살 수가 있어요. 그러면 OO가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그렇죠? 내가 미친 게 아니죠? 제가 엄마라서 그런 거죠?"


정혜신이 '교과서'에 어긋나는 상담을 거침없이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십여 년을 넘게 현장에 머물면서 체득한 치유의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깔려 있다. 사람에겐 저마다의 '자기 통제력'과 '자기 치유력'이 있다는 확신이다. 또, 교과서를 통해 배우게 되는 치유의 이론이나 일반적인 상식보다 더 우선하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사람은 모두 똑같지 않다는 당연한 진리'이다. 이 사실을 간과한다면 어떤 이론이나 학문도 누군가에겐 칼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와 같은 사례를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그는 '치유를 공부하는 건 치유가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이고, 그렇기 때문에 '화려한 지식이나 버젓한 자격증이 아니라 필요한 사람에게 꼭 필요한 도움을 줄 수 있어야만 제대로 된 공부'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한다. 묻지 않을 수 없다. 자격증과 학위로 자신만의 높은 탑을 쌓을 것인가, 아니면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개별적인 사람들을 만날 것인가. 당신의 지향점은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정혜신의 당부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전문가를 이상화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삶에 그닥 관계 없는 분야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과 우리 일상에 더 집중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우리 삶이 전문가의 도움 없어도 빛날 수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개별적 존재다, 그걸 아는 게 사람 공부의 끝이고 그게 치유의 출발점입니다. 그게 사람 공부에 대한 제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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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하나의 분야에 천착(穿鑿)해 경지에 이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드는 일은 매우 설렌다. 몸으로 부딪쳐 얻은 생생한 경험들이 세월을 통해 깊이 숙성(熟成)되면 보편적인 견해를 얻는 동시에 일반론을 뒤집는 개별적 인식이 생겨나기도 한다. 그런 성취를 이뤄낸 '장인(匠人)'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말은 '탁견(卓見)'이라 이름붙여도 무방하다. 



"이게 뭡니까? 부장님? 아니, 자연 다큐멘터리라니요?"

"아무거나 다 할 수 있다며? 그냥 산으로 들로 놀러간다고 생각하고 만들어 봐! 재밌을지도 모르잖아!"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18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을 쓴 최삼규 PD는 자연 다큐멘터리에 자신의 인생을 건 사람이다. (그 시작은 느닷없이 찾아왔지만, 그렇게 맺어진 인연은 어느새 천직이 돼버렸다.) 첫 작품인 <곤충의 사랑>을 시작으로 <어미새의 사랑>, <DMZ는 살아 있다>, <황새>, <한국 표범>, <푸른 늑대>, <야생의 초원, 세렝게티> 등 지난 30여 년 동안 무려 50여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최삼규 PD에 대한 '홍보'를 좀더 하자면, 그는 '한국방송대상' TV부문 최우수상, '시카고 국제 TV 페스티벌' 우수상, 'ABU(Asia Pacific Broadcasting Union)' 특별상, '백상예술대상' TV 다큐멘터리 부문 대상을 수상하는 등 국내외에서 인정받은 유능한 다큐멘터리 PD다. 그가 인정받은 '유능'이란 원하는 영상을 얻을 때까지 끈기있게 기다리는 참을성과 인내, 생태계와 그 터전에 자리잡은 생명체들을 바라보는 '다른' 관점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최 PD가 제시하는 다른 관점이란 무엇일까? 힌트는 책의 표지에 잘 나타나 있다. 가젤과 누, 얼룩말 등의 초식 동물 무리가 어찌된 일인지 자신들의 '천적'이자 두려운 존재인 사자 주변에서 한가로이 휴식을 취하고 있다. 사자들이 보여주는 평온함이야 스스로를 강자로 인식하는 여유에서 나온다지만, '먹잇감'에 불과(!)한 초식 동물들이 저토록 느긋하다니! 기묘한 공존이 아닐 수 없다.


책을 '팔기 위해서' 아무래도 인기(?) 동물인 사자의 모습이 필요했겠지만, 표지의 저 사진은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의 내용을 가장 상징적이고 축약적으로 대변하고 있다. 또, 최삼규 PD가 지난 30여년 동안 관찰하고 탐구하면서 얻은 '동물의 왕국'에 대한 '탁견'이 담겨있기도 하다. 그가 말하는 동물의 왕국, 즉 '야생 생태'는 바로 이런 곳이다.



생물학자들은 야생 생태를 '약육강식', '적자생존', '자연도태'라는 세 단어로 살벌하게 표현하는데, 내가 세렝게티 초원에서 깨닫게 된 것은 이곳은 초식 동물과 육식 동물이 각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가점을 잘 살리면서 서로 균형 있게 생존해 나가는 '조화와 공존'의 세계라는 사실이다. 그런 자연에는 갑질 하는 강자도 없고, 그래서 당하는 약자도 없다. 오로지 섭리에 따르는 자연의 조화만 있을 뿐이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9 -


엄밀히 말하면 '약육강식(弱肉强食)'과 '적자생존(適者生存)', '자연도태(自然淘汰)'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약육강식이 문자 그대로, 약한 존재가 강한 존재에게 잡아 먹히는 냉혹한 '먹이사슬'을 의미한다면, 적자생존과 자연도태는 '적응력'을 뜻한다. 사막에서 살아남는 것은 '물리적인 힘'이 강한 사자가 아니라 낙타와 같이 며칠 동안 물을 마시지 않아도 버틸 수 있도록 '적응'된 동물이다. (관점에 따라서는 세 단어가 모두 '살벌'하게 다가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의미의 분리없이 혼용한 것은 다소 아쉽지만, 어찌됐든 최삼규 PD가 이해한 야생 생태는 '갑질하는 강자'와 당하기만 하는 약자'로 구성된 살벌한 공간이 아니라 '조화와 공존'의 세계였다. 비록 사자나 치타와 같은 육식 동물들은 초식 동물을 사냥해서 그 고기로 생명을 이어가지만, 인간과 달리 '배가 부르면 절대 다른 동물을 괴롭히지 않는다'고 한다.


 


사냥을 통해 배가 잔뜩 부른 치타(나 사자)는 몇날 며칠 잠만 자며 시간을 보낸다. 표지의 사진처럼 '느긋한' 오후의 한 때를 보내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가젤들이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인데, 단잠에 빠진 치타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가젤의 모습을 보고 불안해 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이 야생 생태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딱 자기가 생존할 정도의 먹이만을 구하는 것. 다른 측면에서 보자면, 자연은 딱 그 정도만의 살생, 육식 동물이 생존할 정도의 살생만을 허용하는 셈이다. 반면, 그 수많은 초식 동물은 딱 1마리만 육식동물에게 먹이로 희생됨으로써 무리 전체의 평온이 유지되는 것이다. 30퍼센트의 확률로 어렵사리 성공하는 사냥, 어쩌면 그것은 자연이 정해준 야생의 황금률일지도 모른다." 


-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 P. 9 -


그밖에도 이 책에는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을 담고 있다. 새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 2장과 인간의 발길이 끊어진 채 보존되고 있는 DMZ에서의 촬영 뒷이야기들이 담긴 4장도 흥미롭게 읽혔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덜한 침팬지에 대해 다루고 있는 5장은 분량이 가장 많았는데, 집중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에서 페이지를 넘기기에 급급했음을 고백한다. 




『다시 쓰는 동물의 왕국』을 통해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과 고생이 뒤따르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생각해보라. 다큐멘터리 안에는 수많은 '결정적 장면'들이 요구되는데, 그 순간을 포착한다는 게 과연 쉬운 일이겠는가. 사자가 사냥에 성공하는 그 순간을 생생하게 잡아낸다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차라리 큼직한 동물들은 쉽게 찾는다고 하지만, 작은 새들을 드넓은 땅에서 어떻게 찾아낸단 말인가. 무거운 장비를 들고 길도 제대로 나지 않은 DMZ를 탐험하는 건 또 어떨까. 수준 높은 자연 다큐멘터리를 TV 브라운관을 통해 편안하게 시청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란 생각이 든다. 적어도 그 장면들에 담긴 땀방울의 고단함을 한번쯤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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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이 책은 생텍쥐페리의 보석 같은 문장들과 내가 만나 '대화'를 나누는 듯한 구성으로 '생텍쥐페리의 모든 것'을 간결하고 압축적으로 담아냈다. 나는 책을 읽을 때 항상 작가와 보이지 않는 대화를 한다. 어떤 구절은 더 많은 사연을, 더 깊은 귀엣말을 걸어온다. 작가가 글자가 아닌 목소리로 말을 걸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럴 떄마다 나는 미처 작가에게 직접 전할 수 없는 고마움을, 감동을, 내 생각을, 종이 위에 쓴다. 그 보낼 수 없는 편지가 모여 한 편의 글이 된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생텍쥐페리와 정여울의 '대화'의 산물(産物)이다. 물론 고인(故人)인 생텍쥐페리와 현재를 살아가는 정여울이 직접 대화를 나눌 수는 없다. 그렇다고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독서는 그것을 무한히 가능케 한다. 문장의 층위 속에 켜켜이 쌓여 있는 '목소리'들은 '읽는 행위'를 통해 생생히 발현(發現)된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은 생텍쥐페리와 정여울이 나눈 '보이지 않는 대화'들의 모음집이다.



"나는 생텍쥐페리의 작품 중 『어린 왕자』만 널리 읽히는 것이 안타깝다. 사막의 무어인은 물론 카멜레온까지 길들이는 그의 다정함이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인간의 대지』, 『성채』, 『전투 조종사』 등이 더 널리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어린 왕자』는 무려 270개 이상의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어린 왕자 백과사전』)돼 1억 5천만 부 이상 판매됐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번역(및 판매)된 문학 작품이다. 지구인이 사랑하는 소설이라고 불러도 무방하리라. 이쯤되면 '생텍쥐페리=『어린 왕자』'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둘은 따로 떼어내서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론 『어린 왕자』가 생택쥐페리 문학의 '정수(精髓)'라고 할 만하지만, 정여울은 이와 같은 지나친 편중이 못내 안타까웠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생텍쥐페리와의 '보이지 않는 대화'에 야간비행』,  『남방 우편기』,  『인간의 대지』,  『성채』,  『전투 조종사』를 모두 포함시켰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가 『어린 왕자』를 다룬 여타의 책들과 '차별'되는 포인트는 생텍쥐페리의 전(全) 작품으로 시야를 확대했다는 것이다.


'나무위키(namu.wiki)'에서 발췌 


"어린 왕자는 간결하고 서정적인 언어로 '길들임의 철학'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따스한 마음으로 서로를 길들일 수만 있다면, 세상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야간비행』은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속으론 조종사들과 하늘에 대한 사랑으로 똘똘 뭉친 멋진 남자 리비에르가 어린 왕자의 여우처럼 따뜻한 현자의 역할을 한다. 『남방 우편기』는 생텍쥐페리의 장품 중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이며, 『인간의 대지』는 생텍쥐페리의 모든 것이 응축된, 아포리즘의 보물 창고다. 전쟁 속에 깊어가는 동료애와 작가의 일상을 논픽션적으로 그린 『전투 조종사』, 미완성 유작 『성채』 또한 지혜의 샘 같은 작품이다."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의 분명한 공적은 『어린 왕자』에 국한돼 있던 사람들의 시선을 생택쥐페리의 다른 작품들에까지 '확장'시켰다는 것이다. 더불어 생텍쥐페리의 순수한 마음과 따스한 시선이 녹이 있는 '보석 같은 아포리즘(aphorism)'을 소개하고, 그 옆에 자신이 나눴던 '대화'를 조곤조곤 덧붙여 독자로 하여금 사유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  



『남방 우편기』

"다정한 우정을 포기하는 것은, 이별할 때 마음에 상처를 남기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어딘가에 묻혀 있을 보물에 대한 호기심까지 포기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그녀의 전부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을까? 사람들은 그녀의 일부만을 사랑하고 다른 부분은 어둠 속에 방치한다. 사람들은 음악이나 사치품을 대하듯 그녀를 사랑한다."

"우리는 지금 밤 속으로 들어간다. 담배 한 개비의 불빛에 의지해. 그러면 세계는 그것의 진짜 차원을 다시 찾는다." 

"준비에브가 차라리 욕심이 아주 많았으면 좋겠다. 물건 때문에 속상해하고, 물건 때문에 상처 입고, 어린애처럼 물건 때문에 칭얼거리면서 졸라대면 차라리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내가 이토록 가난할지라도,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많았을 텐데. 하지만 전혀 배고프지 않다는 이 여인 앞에서 그는 힘없이 무릎 꿇을 뿐이었다. 


『전투 조종사』

"나와 다른 사람은 나를 가난하게 만들지 않는다. 그 사람은 나를 풍요롭게 한다. 그 사람과 나의 만남으로 우리는 인간으로서 각자의 존재일 때보다 더 높은 무언가가 된다. 자신의 목소리만을 듣는 사람이나 유리에 비친 자신만을 찾는 사람에게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는다"


『야간비행』

"불운조차 우리가 가진 자산의 일부다"


『성채』

"사랑이란 결국 사랑에 대한 끝없는 갈증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에 희망이 없다면 소리 내어 밝히지 마라. 그 사랑이 침묵 속에 있다면, 당신 내면의 불꽃이 그 사랑을 보호하여 견딜 수 있을 것이다." 

"고통이나 갈등을 회피하기 위해 점점 무감각해지거나, 평화롭게 살아가기 위해 마음속에 있는 깊은 갈망을 외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나는 경멸한다. 그대는 잊지 말아야 한다. 풀리지 않는 갈등과 모순은 오히려 당신의 마음을 더 크고 깊게 만든다는 것을."


『인간의 대지』

"우리 모두는 세상 무엇도 그것이 오고 있다고 말해주지 않을 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기쁨을 겪어봤다. 그 기쁨은 너무나 황홀해서, 만약 그것이 비극 속에서 찾아온다면 우리는 비극조차 사랑으로 기억할 것이다."

"인간다움이라는 것. 그것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스스로의 책임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이다."


생텍쥐페리는 조종사였다. 야간 비행의 선구자로, 위험천만한 항로를 개척하며 수만 통의 우편물을 실어 날랐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수만 통의 우편물에 수많은 사람들의 '절실한' 사연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목숨을 건 비행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일을 사랑했다. 무엇보다 '비행(飛行)'을 사랑했다. 비행은 생텍쥐페리의 작가로서의 밑거름이 됐고, 창작력의 원천이었다.


특히 생텍쥐페리의 대표작인 『어린 왕자』는 '발췌'를 한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모든 문장들이 '반짝반짝' 빛난다. 기본적으로 그의 작품들은 체험에서 우러나온 것들이었는데, 『어린 왕자』에는 사막에 불시착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다가 유목민에게 구출된 체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또, 관절 류머티즘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난 남동생 프랑스아에 대한 그리움, 이해심 많은 아내 콘수엘로에 대한 미안함 등이 이야기 속에 스며들어 있다.


『어린 왕자』가 특히 각광받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한 '감동'을 선사하는 까닭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가 묻은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어린 왕자』를 읽다보면 '그것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 당장 눈앞에 있는 것들에 현혹돼 살아가는 나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어린 왕자』

"만약 누군가가 수없이 많은 별들 속에 있는 단 한 송이의 꽃을 사랑한다면, 그 사람은 그저 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을 거야." 

"가끔 폭풍, 안개, 눈이 너를 괴롭힐 거야. 그럴 때마다 너보다 먼저 그 길을 걸어갔던 사람들을 생각해봐. 그리고 이렇게 말해봐. '그들이 할 수 있다면, 나도 할 수 있어'라고." 

"밤이 되면 하늘의 별을 바라봐. 내 별은 너무 작아서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줄 수 없지만, 오히려 그 편이 더 나아. 내 별은 아저씨에게 수많은 별들 중 하나가 되는 거야. 그럼 아저씨는 어느 별을 바라보더라도 금세 행복해질 거야. 그 별들은 모두 아저씨의 친구가 되는 거니까."  

"사람들은 이 진실을 잊어버렸어. 하지만 넌 잊지 말아야 해. 언제나 네가 길들인 것에 책임을 느껴야 해. 넌 네 장미에 대해 책임을 느껴야 해."  


편협한 나에게 '정여울'은 몇 안 되는 '믿고 읽는 작가'다. 이른바 '정여울 유럽 시리즈(『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나만 알고싶은 유럽 TOP10』'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그림자 여행』 등에서 보여준 따스한 시선과 내면으로 침잠하는 '고민(성찰)'들은 위로와 함께 깊은 울림을 준다. 다만, 『마음의 눈에만 보이는 것들』는 애초에 한계가 뚜렷한 기획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더구나 『어린 왕자』에 '덧붙여진' 사색들은 '사족(蛇足)'처럼 느껴진다. 물론 그건 정여울의 책임은 아니다. 『어린 왕자』는 그 자체로 워낙 완전해서 어떤 글을 덧대더라도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신비로운 작품이다. 『어린 왕자』를 분석하고, 해석하고, 이해시키려는 수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독자들의 평가가 시원찮았던 까닭은 그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어린 왕자』 속 다음의 문장에 그 답이 있지 않을까?


나는 그림을 그릴 줄 모른다고 말하며 속이 보이지 않는 보아뱀을 그려주자, 놀랍게도 어린 왕자는 그동안의 모든 어른들과 달리 이렇게 말했다. 

"아니, 아니, 아니야! 난 보아뱀의 배 속에 들어 있는 코끼리는 싫어."

(…) 고장 난 비행기를 고치는 일이 우선 급했던 나는, 상자 하나를 대충 그려주며 이렇게 말했다.

"이건 상자란다. 네가 원하는 양은 그 안에 들어 있어."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어린 심판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내가 갖고 싶었던 게 바로 이거야! 이 양을 먹이려면 풀이 많이 필요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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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강남역 인근 공중화장실에서 발생한 이른바 '강남역 살인 사건'은 대한민국 사회에 큰 충격과 함께 명확한 화두를 던졌다. 온라인을 넘어 사회 전반에 만연해 있던 '여혐(여성 혐오, misogyny)' 현상을 또렷이 인지시켰고, 이 문제가 우리 사회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야 할 심각한 사안이라는 것을 각인시켰다.



경찰은 '강남역 살인 사건'을 '조현병(Schizophrenia, 調絃病) 환자의 묻지마 범죄'라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른 피의자 A(남, 34) 씨가 화장실에 들어가 대기하고 있다가 남성 6명은 그대로 보내고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고, 경찰 조사에서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많이 당해 왔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한 점을 미뤄볼 때 단순히 조현병 '탓'만 하는 건 사건의 부분적 진실만 쫓은 듯 하다.


이 사건을 '실체적으로 받아들인' 여성들이 남긴 '#나는 살아남았다'라는 해시태그에서 엿볼 수 있는 것처럼 여성들이 느끼는 불안감과 공포는 엄청나다. 그건 남성이 이해할 수 있는 범주의 것이 아닐 것이다. 물론 하나의 사건에 하나의 인과관계만 존재하라는 법은 없다. 아니, 그럴 수는 없다. 어떤 결과는 다양한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하나의 까닭'만을 찾기 위해 분주하기보다 다층적인 분석과 접근이 필요하다.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가장 나쁜 사람이 가장 아픈 사람이라고. 폭력적이고 괴팍하다고 손가락질 받는 사람들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가 성장기에 중요한 양육자로부터 그와 같은 것을 받았음을 확인하게 된다. 성장기 아이에게 단 한명의 어른이라도 따뜻한 눈길을 주고, 이야기에 귀기울여 주고, 잠재력을 믿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픈 사람이 나쁜 사람으로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마음의 문제를 인식하고 보살피기 시작한 지 십년이 조금 넘었다. 이즈음에는 남자들도 내면에 마음이라는 것이 있으며 그것이 가장 힘이 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듯하다. 아픈 남자가 나쁜 남자가 되지 않도록 개인의 인식과 사회 시스템이 함께 변화해야 할 것이다."


끔찍한 사건이 발생하고, 세상이 엄청나게 시끄러울 즈음에 나는 김형경의 『오늘의 남자』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2013년 출간된 『남자를 위하여』의 후속편인 이 책은 전작과 마찬가지로 '여자가 알아야 할 남자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살아가야만 하는(혹은 살아남아야 하는) 여성들의 '지침서'와 같은 역할이라고 할까? 


김형경이 계속해서 '남자'에 대해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한 인터뷰에서 "현실에서 만나는 여성들은 남자의 실체에 대해 놀라운 정도로 무지했다. 그들은 남자 인간을 보는 게 아니라 내면의 남자 환상을 원하고 있었다"면서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이 자존감으로 무장한 채 주체적으로 변해가는 동안 남자들은 자기 내면을 알지도 표현하지도 못한 채 여자들을 못 마땅해하는 상태로 머물렀"다고 설명했다.




"남자는 여자가 바깥세상에서 경쟁을 끝내고 돌아갔을 때 편안하게 쉴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가정에서 아내의 보살핌을 받으며 싸움에서 다친 심신을 회복하고 다시 세상으로 나갈 힘을 얻고 싶어한다. 아내가 자신보다 돈을 많이 벌면 가정의 패권을 두고 아내와 다투는 느낌을 갖게 되고, 아내가 일에서 자신보다 성공하면 상대적 열패감까지 안게 된다."


"남자들은 그것으로 모든 대화를 했다고 생각한다. 술을 따라주는 것이 안부를 묻는 일이고, 술잔을 부딪치며 상대를 위로하고, 각자 자기 잔의 술을 마시면서 슬픔을 느낀다. 술자리에서 마주 앉기, 함께 술 마시기, 함께 취하기,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서 남자는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서로 위로하는 말을 할 줄 모르고, 상대방을 감싸안아 편안하게 해주는 행동을 할 줄 모른다."


남자의 실체에 대해 무지한 여성과 자신의 내면을 알지도 못하는 남성이 만나 부부가 되고, 그들의 자녀에게 심리적 문제를 물려주는 악순환의 반복이 메워지지 않는 간극을 만든 것일까? 김형경은 "자와 여자는 서로 이해하지 못해 늘 갈등을 겪는다. 그 이해를 돕고 싶었다"고 말한다. 『사람의 풍경』에서부터 시작된 '정신분석학'에 기초한 '통찰력'은 이번 책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 김형경 -


1장 아픈 남자, 슬픈 남자

2장 가장과 아버지의 이름으로

3장 남자의 성과 사랑

4장 남자 속의 영웅들

5장 남자의 성장과 나이 듦


5장으로 구성된 『오늘의 남자』는 한국 사회를 살아가는 다양한 층위(層位)의 남성들이 보이는 태도와 심리를 절묘하게 포착한다. 그 층위는 '나이'이기도 하고, '직업'이기도 하고, '상황'이기도 한데, 김형경은 특유의 진솔한 접근으로 남성들을 불편하게 만들면서도, 따스한 시선을 통해 웅크린 채 '그르릉' 대는 남성들을 감싸 안는다.


김형경은 "이 지면의 글이 남자를 불편하게 했다면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내가 의도했던 일이다. 모든 문제를 외부로만 투사하는 남자들의 마음을 들쑤셔 어떻게든 내면으로 시선을 돌리게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조금 불편했다. 남자인 나도 몰랐던 남자에 대해 '이건 좀 아니지 않아?'라고 부정하고 싶은 부분들이 있었다.


대한민국 사회에 뿌리깊은 가부장(家父長)에 비판적이고, 과도한 남성성에 소름 돋아하며 '괜찮은 남자'인 척 하는 자신에 대해 되돌아보게 됐다. 결국 나도 '남자'였음을 깨닫게 됐다고 할까? 그러나 무엇보다 '불편'했던 것은 서두에서 언급했던 '강남역 살인 사건'이 촉발한 성 의식에 대한 논제들 때문이었다. '여혐' 현상이 극단으로 치닫고 있고, 각종 범죄로까지 번지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들이여, 남자들을 이해해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진짜 불편했던 부분은 김형경이 취하고 있는 '과도한 이해'였다. 그는 남자의 실체를 드러내는 한편 여자들에게 '이해'를 촉구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남자와 여자가 공존하는 방법은 '이해'라고 말하는 그의 논조가 나이브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내게 소망이 있다면 '여자, 소설가'로서 이 남성 중심 세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라는 마지막 문장을 읽고나서야 또 다른 이해가 싹트기 시작했다.


여자의 시선으로 '남성의 실체'를 폭로하는 데 그 이상의 태도를 취하기는 어려웠으리라. '남자들의 마음을 들쑤'시는 것, 그리고 여전히 남성 중심 사회에서 '생존'해야만 하는 여성들에게 '이해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쯤되니 '이해'라고 하는 태도는 방어적이라기보다는 '불가피'한 것이고, 여자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인 생존 수단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남자가 변해야 한다. 불편함을 넘어 불쾌함을 느껴야 한다.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되돌아보고 깨져야 한다. 『오늘의 남자』는 '남성 중심 세상에서 추방당하지 않고 무사히 살아가'야 하는 여자가 보여줄 수 있는 '최전선'이다. 남성들이 만들어가는 여혐 현상과 여성에 대한 일상적 폭력이 만연한 '현실'에서 그 이상을 요구한다는 것은 얼마나 무리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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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그룹 '방탄소년단'이 지난 2일 오후 10시(한국 시각) 스페셜 앨범 '화양연화 Young Forever'로 전세계 최대 차트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아이튠즈 차트 18위를 차지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비단 '방탄소년단'뿐만 아니라 많은 가수(혹은 팀)들이 세계를 무대로 K-POP의 위상을 떨치고 있다. K-POP이 세계를 호령하는 날이 머지 않았다. 



흔히 (문제의식 없는) 언론사들이 즐겨 쓰곤 하는 '위상을 떨치고 있다?'라는 표현을 써봤다. 좀더 오버해서 '세계를 호령하는'이라고도 써봤다. 이런 표현들은 역시 '시대착오적'인 코멘트가 아닌가 싶다. 다소 '희미하게' 드러나긴 하지만,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의 뉘앙스가 묻어있지 않은가. CGV 극장에서 틀어주는 '국뽕' 광고처럼 세계로 뻗어가는 한국 문화에 대해 자긍심을 느끼라는 억지 감동처럼 말이다.


"한류가 없다는 건 확실하다. 류(流)라는 건 하나의 흐름인데, 결국은 왔다갔다 것 아닌가. 한류는 붐이었지만 이젠 사라졌고 K-POP이라는 장르로 일본 시장에서 자리를 잡았다고 본다." 


한류 관련 사업을 오랫동안 해왔던 한 여행사 대표의 예리한 진단은 우리의 구린 사고방식을 교정해준다. 한때의 '붐'을 잊지 못하고, 아직도 '한류' 타령을 하고 있진 않은지 자문해보자. <겨울연가>의 배용준이 몰고 왔던 그 '한류'는 신기루처럼 사라진 지 오래다. 오히려 그런 공격적인 접근이 '혐한류(嫌韓流)'를 잉태한 것 아니겠는가. 물론 K-POP '산업'의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업계의 전문가들은 이미 그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 


'한류 콘텐츠의 세계화를 어떻게 보는가'라는 질문에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는 "한류 콘텐츠의 세계화라는 말은 너무 거창하다. 한국의 많은 여자 골프선수가 우승을 하다고 해서 한국골프의 세계화라는 말은 잘 안 쓰는 것처럼 이미 세계화된 콘텐츠 시장에서 경쟁이라는 말이 더 이상적이다. 차별화된 콘텐츠로 경쟁력을 갖추는 게 더 중요하다"고 답한다.





한편, 오리콘 회장 코이케 코우는 '한류의 분위기가 많이 침체된 거 같은데 어떻게 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무슨 소리인가"라며 반문하면서 "일본 음반 시장의 30퍼센트를 K-POP이 차지하고 있다. 이제 K-POP은 하나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 사람들은 너무 붐(한류)에만 신경을 쓰는데, 그것보다는 좋은 콘텐츠를 가지고 오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90%의 팬이 10대인 탓에 그 이름조차 잘 모르는 사람들이 수두룩하겠지만, 앞서 살펴봤던 '방탄소년단'의 성공은 '현지화'가 거둬들인 성과였고, 그것은 곧 그들만의 차별화된 콘텐츠와 전략이 경쟁력을 갖췄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를 두고 여전히 '한류 열풍'이라든지, 'K-POP의 위상'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건 제대로 된 분석이라 할 수 없다. 한마디로 구리다.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은 트렌드에 가장 빨리, 예민하게 반응하는 K-POP을 통해 대중문화의 전반적인 흐름을 짚어보는 분석서이다.  음악계, 언론계, 방송계에서 잔뼈가 굵은 전문가(박영웅, 임희윤, 엄동진, 김윤하)들이 자신들이 쌓아올린 전문성을 고스란히 글로 담아냈다. K-POP의 현실과 전망뿐만 아니라 K-POP이 선도하는 혹은 K-POP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중문화의 흐름을 파악할 수 있는 책이다.


Part 1(K-POP 핫 트렌드)

스낵 컬처, 더 빠르게 더 간단하게

걸 크러쉬, 여자는 여자를 좋아해

힙스터, 그들을 움직여라

길티 플레저, 음악 포르노에 빠지다

힙합, 대중음악이 되다


Part 2(K-POP 크리에이티브 트렌드)

쪼개기, 짤아야 듣는다

음악 예능, 리얼리티 킬드 더 K팝스타?

자기 위로, 루저들을 위한 노래

팬덤과 SNS, 그 위대한 만남

레이블, 적과의 동침


Part 3(K-POP 스테디 트렌드)

시즌 송, 봄에는 벚꽃 말고 다른 꽃은 없나

류레이션, 콘텐츠 플랫폼의 핵심

장르명 K-POP 스타, 일본 한류의 2막

레퍼런스, 열린 시대 피해갈 수 없는 논란

월드뮤직, 국악으로 가능할까?


Part 4(K-POP 비즈니스 트렌드)

홍대, 다양성을 사수하라

멀티 비즈, 연계성과 전문성에 집중하라

중국 시장, 노다지인 듯 노다지 아닌 노다지 같은 너

차트 브레이커, 보이지 않는 손

아이돌 굿즈,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가?


 

'핫', '크레에이티브', '스테디', '비즈니스' 4가지로 나눠서 K-POP의 트렌드를 분석했는데, 목차만 훑어봐도 K-POP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이 든다). 실제로 읽어보면 인터넷의 가십기사와는 질적으로 차원이 다른 알짜배기 내용들로 가득하다. 분석이 예리할 뿐만 아니라 차분하게 정리되어 있어 이해하기에도 수월하다.



Part 1, 2, 3도 흥미로웠지만,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건 '산업'으로서 K-POP을 바라본 Part 4 였다. YG와 SM이 사업 안정화를 이루는 한편, 사업 다각화 전략을 펼치고 있고, 그 일환으로 YG는 패션, 의류, 외식, 게임 사업을 진행하고 있고 SM은 신기술을 앞세워 문화 사업에서 규모를 키워가고 있다. 여기에 대해 저자들은 "섣부른 사업 다각화보다 전문성에 집중하라"고 지적하기도 한다. 어떤 결론을 낳든지 간에 YG와 SM의 행보가 주목된다.

 

Q. 해마다 인기 가요 100곡씩을 조사한다고 들었다

A. 차트 분석을 한다. 2014년과 2015년에는 이별 노래보다 사랑 노래가 더 히트를 쳤다. 경제가 어렵고 사람들이 힘들면 처지는 이별 노래보다 밝은 노래를 찾는 것 같다. 독백체가 많은 해, 대화체가 더 많은 해가 있다. 어조나 문체도 우리의 분석 대상이다.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프로듀싱본부장)


중간 중간에 삽입되어 있는 '전문가'들의 인터뷰도 책에 대한 이해를 높여줬다. 가령, 양현석과 박진영의 인터뷰는 연예 기사를 통해 자주 접할 수 있지만, 언론에 잘 노출되지 않는 SM엔터테인먼트 이성수 프로듀싱본부장이나 CJ E&M 안석준 대표, 울림엔터테인먼트 이중엽 대표의 이야기를 통해 다양한 시각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은 도움이 많이 됐다.


위에서 인용한 것처럼, 가사의 어조나 문체도 분석 대상이라는 SM의 '치밀함'은 놀랍다. 전문 분야가 아니던 EDM과 힙합에 뛰어들고, 소위 'SM제국'을 꿈꾸는 야망과 자신감이 괜히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2016년 들어 기존의 '쇄국정책'을 (잠정) 폐기하고, 외부 아티스트들과 협업을 시도한 SM의 '변신'은 더욱 놀라웠다. 그 또한 끊임없는 분석과 자기반성이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너무 밝은 쪽만 비춘 건 아닌지 모르겠다.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에서도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홍대의 위기라든지 인디의 열악한 환경 등 대형기획사의 과감한 행보 때문에 피해를 보는 영역도 생겨나고 있다. 이를 지켜나가기 위한 자체적인 노력이 이어지고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대형 기획사들의 투자가 이어지고 있다. 이를 두고 부정적인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가령, 'YG가 이제 홍대 언더그라운드까지 건드린다'는 비아냥처럼 말이다. 이에 대해 양현석은 스스로가 홍대 지역을 기반으로 시작한 사람이라면서 "뭔가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생각을 오래 전부터 해왔다"고 대답했다. 또, "음악이 굳이 열악해야만 잘하는 건 아니지 않는가. 먹고 살 고민거리를 음악에 투자한다면 더 좋은 음악이 나올 거라고 생각한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꾸준히 고민하고 노력해 나갈 생각이라고 대답한다. 


K-POP의 트렌드를 분석하고, 그에 대한 전망과 더불어 '산업'적인 측면까지 짚어본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2016』를 통해 K-POP에 대해 혹은 대한민국의 대중문화에 대해 좀더 깊이 빠져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그리고 밝은 면과 더불어 '어두운 면'에 대한 고민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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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독선사회』는 '세상을 꿰뚫는 50가지 이론' 시리즈의 4번째 책이다. 강준만은 2013년부터 『감정 독재』, 『우리는 왜 이렇게 사는 걸까』, 『생각의 문법』을 연속으로 출간하며 대한민국 사회를 심층적으로 탐색했다. 한 사회를 수박 겉핥기 식이 아니라 '제대로' 들여다보고 분석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강준만은 해내고 있는 듯 하다. 아니, 강준만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걸까?



엄청난 독서량과 방대한 데이터,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다작(多作) 능력이다. 혹자는 강준만의 글쓰기는 '자기 복제'라고 비꼬기도 하지만, 그것이 '강준만식 글쓰기'인 것을 어쩌겠는가. 어떤 글쟁이들이 '필생의 역작을 내놓겠다'는 생각으로 책을 쓰겠다는 일념으로 책을 쓰지만, 강준만은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에 무게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누구보다 날카로운 시선으로 '정치'를 다루고, 그 누구보다 뜨거운 열정으로 '정치'를 이야기하고, 그 누구보다 직설적인 어조로 '정치'와 부딪쳤던 강준만이 어느 순간부터 '정치(와 정치인)'에 대한 평론을 멈췄다. 그리고 인문학의 저변을 어슬렁거리고, 사회문화적인 글쓰기에 매진했다. 고독한 싸움 속에서 내상(內傷)이 컸던 탓이겠지만, 오히려 그 노선 변경이 대한민국 사회로 봐선 '이득'이라는 생각도 든다.



직접적으로 '정치'를 다루진 않지만, 여전히 그의 글은 '정치적'이다. 협의(狹義)의 정치에 매몰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더 넓은 정치를 논한다. 물론 지난 대선에서 '안철수'를 대놓고 지지하는 등 협의의 정치로 잠시 발을 들여놓기도 했지만, 여전히 그의 글은 대한민국 사회로 향해 있다. 이번에 강준만이 착안한 포인트는 '독선(獨善)'이다. 그렇다면 왜 '독선'인가? 강준만은 '머리말'에서 그에 대해 자세히 써놓았다. 


그가 보기에 대한민국 사회는 이분법의 프레임에 빠져 '독선'의 지배를 받고 있다. '증오의 언어'가 판을 치고, 언론은 '증오 상업주의'에 탐닉하고 있다. "우리의 진정한 적은 좌도 우도, 진보도 보수도 아닌, 독선"이라는 강준만의 지적은 핵심을 찌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독선에 중독된 것일까? 강준만은 '다름'을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민국 특유의 사회문화적 동질성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다름'의 불인정은 물질이 아닌 정신 영역에선 재앙을 몰고 왔다. 우리는 각기 다른 생각과 소통하고 타협하면서 화합하는 삶을 살아오지 못했다. 물론 독재자들의 독선만이 독야청청했던 독재정권 때문이다. 폭력적 독선에 대항하는 길은 신념적 독선 이외엔 없었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가 온갖 갈등과 분란과 이전투구로 몸살을 앓고 있는 이유도 바로 그 후유증 때문"이라 주장하는 강준만은 소통과 타협과 화합을 모색하기 위해 애를 써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면서 "나 역시 '내가 옳고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에 기반한 독선적 글쓰기를 10여 년간 해오다가 2003년 내게 일어난 엄청난 행운 덕에 더 크고 넓은 안목을 갖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또, 강준만은 자신의 '한계'를 뚜렷이 인식하고 있었다. "나는 이미 '독선'이라는 때가 묻은 사람으로서 '화합'을 역설하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나는 그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이른바 '넛지' 방식에 눈을 돌리게 되었"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독선사회』이고, 이 책은 여러가지 이론과 개념을 통해 '옆구리를 쿡쿡 찌르'는 방식의 접근법으로 대한민국 사회의 '독선'을 진단한다.



나의 메시지는 한결같다. 자신의 확신을 의심하라!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부분 우리 인간이 똑똑함과는 거리가 먼 감정적 · 습관적 판단에 얼마나 취약하고 허약한가 하는 걸 말해준다. 즉, 우리가 독선을 범해선 안 될 충분한 이유가 있다는 걸 깨닫자는 것이다.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이 마비되니, 정치 아닌 다른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한계와 모자람을 인정하자고 꼬드기는 것이다. 그런 우회적 설득 시도를 정치에 접목시킨다면, 다음과 같은 메시지가 될 것이다.


한국 정치의 개혁과 사회적 진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똑똑해지는 게 아니라 자신의 똑똑함과 확신의 한계를 깨닫는 것이다. 자신이 싫어하는 정치 세력을 쓰레기로 매도하면서 면책 심리를 키우고 반대 세력을 악마화하는 '증오 마케팅'으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버릇을 버리자. 정치적 판단을 할 때 인간의 뇌는 이성이 아니라 감정 영역이 작동한다는 걸 인정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소통과 타협과 화합의 길로 갈 수 있게끔 해보자.


강준만이 전달하고 싶은 핵심적인 메시지는 위와 같다. 물론 이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될지는 의문스럽다. 얼핏 전달이 됐다고 한들, 막상 '정치 이야기만 나오면 이성이 마비되'는 사람들이 자신의 '독선'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당장 나부터 그럴 수 있다고 자신하지 못하는 걸 보면, 끊임없는 각성과 노력이 필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책에 담겨 있는 50가지 소주제가 모두 매력적이었고, 죄다 공부 대상이자 '인용 덩어리'였지만,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강준만이 '독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고 언급한 소주제가 아니라 뻘쭘하긴 하지만) '세월호'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책의 뒷부분에 배치된 '왜 우리는 재앙의 수많은 징후와 경고를 무시하는가?', '왜 사고는 반드시 일어나게 되어 있는가?', '왜 재난은 때로 축복일 수 있는가?'는 추천하고 싶은 글이다.


애석한 것은 전국민이 함께 가슴 아파하며, 풀어나가야 할 숙제였던 세월호 참사마저도 '진영논리'에 휘말려 '진영 간 싸움'으로 비화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 값비싼 희생을 치르고서도 긍정적인 변화는커녕 아무런 교훈조차 얻지 못한 채 이대로 표류해야만 하는가?"라는 강준만의 '한탄'이 뼈아프게 들린다. 세월호 2주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한걸음'도 내딛지 못한 대한민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수많은 '독선'들이 하루빨리 걷히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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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산문집(散文集)을 고를 때, 아무래도 우선하게 되는 요인은 '작가'이다. 물론 굳이 산문집이 아니더라도 그렇겠지만, '가짜 이야기'가 아니라 좀더 내밀한 '자신'을 드러내게 마련인 산문집은 작가가 더욱 중요하다. '편협'하다 여길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읽게 되는' 산문집은 대개 제한적이다. '아는 작가'가 없어 손이 닿는, 아무 책이나 집어 들어 '탐독(耽讀)'하던 시기가 지나고 나면 그런 시기가 오게 된다. 



론 '가끔' 예외가 있다. 진열되어 있는 책 중에서 몇 권을 '후루룩'넘겨보다가보면 '이 글들은 잃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을 만나게 되는 드문 순간이 있다. 표지나 편집, 또는 제목이 그런 '매력'을 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역시 '글'이고, 스냅사진처럼 넘겨지는 페이지 속에서 '문장의 밀도'가 느껴지는 책들이 있다. 김사과의 『0 이하의 날들』은 바로 그런 산문집이었다.


약간의 주저함은 있었다. 책의 속 표지를 통해 '김사과'라는 작가가 '젊은', 심지어 '또래'라는 것을 대략 눈치챌 수 있었고, 차분하고 담담하게 쓰여진 '서문'을 통해 이 산문집의 정체가 그의 '20대'를 담아낸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우선, 불완전하고 불안전한 '20대' 시절의 '생각'을 굳이 다시 들추어 읽는다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이다. 



무엇보다 또래의 글을 읽는다는 건 (또 다시 편협하게도)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나이가 훨씬 많은 작가들이 밀도 있는 글 솜씨를 뽐내고, 깊이 있는 고민과 그로부터 나오는 혜안(慧眼)을 보여줄 때는 '그래, 저 나이라면 그럴 수 있지'라고 위안을 삼을 수 있다. 그로부터 마음껏 배우고, 스스럼 없이 깨달음을 전수받아도 부끄럽지 않았다. 무작정 빠져들어도 심지어 괜찮았다.


하지만 '또래'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물론 또래의 글을 읽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님에도, '괜찮은' 또래의 글은 '질투'를 불러일으킨다.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저들은 나보다 깊이 사유하고 훨씬 더 농도 깊은, 치열한 고민들을 하고 살고 있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나를 지체하게 만든 요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또래'와 '20대'라는 두 가지 조건은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만약 그것이 '별개'로 존재했다면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또래'가 쓴 '20대'라면 다르다. 비슷한 '또래'가 경험한 '20대'는 어떤 것이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윗세대'들이 '나의 20대는 이러했다'고 휘갈겨 놓은 글들을 숱하게 읽었지만, 같은(혹은 비슷한) 세대의 그것을 '생생하게' 듣고 경험할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기에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20대 땐 혈기는 있었는데 포커스를 잘 맞춰 글을 썼다는 느낌은 적어요. 지금 보면 명확하지 않은 부분이 많거든요. 이제는 좀 더 날카롭게 무언가를 쌓아가야 되지 않을까 해요."


어쩌면 이제 '시작'된 건지도 모르겠다. 갓 20대를 지나온 우리들이 당시를 회고하는 글들이 쏟아지는 일 말이다. 『0 이하의 날들』은 김사과가 20대에 펴냈던 몇 편의 소설로는 풀어내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담아낸 책으로, 2009년부터 2014년까지 여러 매체에 발표했던 글들의 모음집이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20대가 오롯이 담긴 글"이면서 "뭐라도 해보겠다고 허우적거리다가 결국 0 이하로 주저앉고 만, 그 궤적이 적나라하게 담긴 기록"이다.



쓰는 것밖에 잘 하는 게 없었다고 말하는 그에게 '쓴다'는 것은 혹은 '기록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서문에서 그는 "쓴다는 것은 기록한다는 것이고 기록한다는 것은 잊지 않겠다는 뜻이다. 잊지 않겠다. 망각되지 않겠다. 온 힘을 타해 시간에 저항한다. 쓴다. 시간 속에서 멀어지는 모든 것들, 사라지는 목소리들, 보서지는 모든 것의 잠을 깨윅 위해, 나는 쓴다."고 밝히고 있다. 


최고은 작가의 죽음을 '잠에서 깨어나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접한 그가 회상하는 스무살 안팎의 삶은 '질투'를 느낄 수 없을 만큼 처절했고 막막했다. '생리통이 아니라 생리대를 살 돈이 걱정'어있고, 시간당 천오백원을 받고 사장에게 성희롱을 당하며 돈까스집에서 일했던 상황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악화'되어 갔다. 


'경제적 궁핍을 경험해본' 그는 '예술이 위대하다거나 고귀하다는 명제를 지지할 수 없었'고, 그가 다닌 예술학교와 예술계에 대한 위화감은 그가 쓴 글의 밑바탕이 되었다. 그쯤되자 밀도 높은 그의 글들이 이해가 됐다. '고통'을 부러워한다는 건 말도 되지 않는 위선이지만, 지극히 평탄한 삶을 살아왔던 내가 감히 흉내낼 수 없는 고민들이었다. 또, 삐딱하면서도 날카로운 시선은 감탄을 자아냈다.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적의가 있다. 더 나은 글을 쓰기 위해,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똑똑한 말을 늘어놓기 위해 벼랑 끝에 설 것을 강요하는 사람들을 향한. 대체 뭘 위해서 그런 식으로 거듭 나아져야 하는 걸까? 나는 삶을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은데, 이런저런 것들을 위해 삶을 제물로 바치라는 이야기만 들려온다."


글 전체를 흐르는 기조는 '비관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가운데 꿈틀거리는 대표적인 감정은 '화(분노)'이다. "절망 앞에서 화를 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는, 자신의 '화'를 스스로를 비롯해서 그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와 국가로 쏘아댄다. 스테판 에셀이 『분노하라』는 제목을 달긴 했지만, 그의 태도가 '분노해주세요'라고 애걸복걸하는 것처럼, 이 시대의 청년들에게 '분노'는 당연한 선택지가 아니다.


그건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에 완벽히 길들여진 세대로 자라온 당시의(또 지금의) 20대에겐 놀라운 일이 아니다. '분노'가 '삶 그 자체'였던 과거의 386세대가 지금의 청년들을 한심하다 여기곤 하지만, 지금은 '유사 스타벅스'라는 공간에서 "혁명을 외치는 밥 말리의 목소리가 커피향과 뒤섞여 토익 책에 머리를 박은 유니클로 차림의 여자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과 같은 "모순적 풍격 속으로 자연스럽게 녹아"드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래서 글자 하나하나에 인이 박힌 김사과의 '화'는 의미심장한 것이다. 저항하기보다 '무관심'해지고, 냉소적으로 바뀌었던 시대에서 그는 내면의 '화'를 지켜냈던 것이다. 그 응축됐던 감정들은 '글'이 되었고,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것이다. 『0 이하의 날들』에 담긴 산문들을 통해 그가 어떤 '소설'을 써왔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되기 시작했다. 


김사과를 두고 "1980년대생 작가군에서 가장 개성적이고 문제적인 작가"라고 칭하는 건 어쩌면 당연해보였다. 문학평론가 양윤의 씨는 "2000년대 김사과의 출현은 단순히 그가 한국문학에 있어 희소한 캐릭터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넘어 새로운 정념의 표현 방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제적"이라 평하기도 했다. 또, 문학평론가 김영찬은 "그간 한국문학에서 억압되어왔던 '분노 자본'의 폭력적 귀환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라 말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의 이영경 기자는 김사과 소설의 구성성분을 '분노 30%, 폭력 30%, 공포 20%, 자아분열적 광기 20%'라고 분석했는데, 이쯤하면 그의 소설들이 어떤 모양새를 취하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예외 없이 극단적인 폭력'이 등장한다는 그의 소설들을 굳이 '찾아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진 않을 것이다. 아무래도 김사과는 불편한 텍스트가 분명하다. 



『0 이하의 날들』에서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작가가 대한민국의 현실을 '모멸감'이라는 시선으로 읽어낸 부분이다. 고등학교를 자퇴 하고 편의점에서 시급 천사백원짜리 아르바이트를 했던 그는 고등학교 체육 선생이 '무너져내린 빌딩의 잔해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순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면서 '모멸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서로 모멸감을 주고받으며, 더 이상 모멸받지 않는 위치에 올라서기 위해서 애를 쓴다. 모멸받지 않으려고 공부하고, 성형수술을 하고, 대학에 간다. 모멸받지 않으려고 연애를 하고, 돈을 쓴다. 다들 그게 자기가 진짜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항변하고 피곤해하고 치를 떨지면 도무지 그 게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서 다른 무엇만큼이나 자기가 속한 집단 내에서의 평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사회느 구성원에게 요구하는 것이 너무 많고,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가혹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도움을 요청하느니 자살해버린다. 그러는 사이 사람들은 모멸 없는 삶이 뭔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듯하다. 아니 모멸감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되어 버렸다.


타인의 모멸 섞은 눈초리에 반응하는 방식으로만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믿지 못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모멸감을 통해서만이, 써바이벌 프로그램의 심사자나 독설을 늘어놓는 힐링멘토들처럼, 타인을 움직일 수 있다가 여기는 것을 결국 타인을 전혀 믿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런 식으로 쌓아올린 것이 위태로운 모래성이 아닐 리 없다. 거리에 늘어선 신식 건물들과 그 안에 속한 사람들의 위태로운 표정이 그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파도는 밀려온다. 우리는 어쩌다 나와 너, 우리를 믿지 못하게 되어버린 걸까?


이렇듯 '모멸감'으로 가득찬 삶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는 "구토를 멈춰야 한다"고 말한다. 과거의 구토(구역질)는 '위태로운 실존이 필연적으로 동반하는 멀미'를 상징했고, 그건 '역겨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자아를 가진 인간다운 인간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하지만 지금의 구토는 그저 '식이장애 환자의 구토'일 뿐이라고 선을 긋는다.


'자본의 식욕은 한계가 없'지만, 인간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그럼에도 인간은 '한계를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먹어치우고 토하는 것을 반복'하고 '토사물'을 만들어내는 '병'에 걸려있다. 결국 방법은 멈추는 것뿐인데, 김사과는 "세계 전체가 토사물에 휩쓸려버리기 전에, 아니 세계 전체가 거대한 토사물이 되기 전에, 최대치로 부풀어오른 자본의 욕망에 대해 그만, 이라고 말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당부한다.


스물 한 살에 등단했던, 자신과 세상에 대해 품었던 '화'를 '폭력'을 통해 거칠게 표현해냈던 소설가 김사과는 한국 문학의 첨단에 서 있는 '문제적 작가'다. 『0 이하의 날들』이라는 산문집을 통해 발견한 또래의 작가가 써왔던 소설들이 궁금해지는 동시에 앞으로 그가 어떤 작가로 거듭날지 귀추가 주목된다. 그건 제대로 '화'를 표출하지 못했던 나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 탓이기도 하고, 내가 되지 못한 어느 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에 대한 질투 때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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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버락킴 너의길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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