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렘이 한가득이다. 일기예보에도 없었던 비가 내리고, 남자는 우산을 하나만 구입해 펼쳐든다. 여자는 묻는다. "너, 근데 왜 우산 하나만 사왔어? 그것도 빨간색으로?" 남자는 능청스럽게 둘러댄다. "몰라? 우산이랑 라이터 사는 돈이 제일 아까운 거?" 여자는 남자의 넉살이 싫지 않다. "이걸로 가다간 둘이 반은 다 젖겠다." 여자의 힌트 섞인 불평에 남자는 슬그머니 어자의 어깨를 끌어 안는다.
우산 하나에 남녀가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다. 술기운 때문일까. 남자는 장난을 빙자해 용기를 냈고, 여자는 어깨를 감싼 남자의 손길이 새삼스레 설렌다. 우산 아래 웃음이 만발한다.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어느새 봄비처럼 느껴진다. 그들은 이 시간이 좀더 오래 지속되길 바란다. 걷고 또 걷는다. 배경음악으로 깔린 카를라 브루니(Carla Bruni)의 'Stand By Your Man'이 참 달콤하다.
JTBC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이하 <예쁜 누나>)는 '그냥 아는 사이로 지내던 두 남녀가 사랑에 빠지게 되는 이야기'다. 윤진아(손예진)에게 서준희(정해인)는 20년지기 절친 서경선(장소연)의 남동생이자 친동생의 오랜 친구이다. 준희의 입장에서도 진아는 누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절친의 누나다. '그냥 아는 사이'로 뭉게긴 훨씬 친근한 사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애틋한 감정이 싹튼 관계도 아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3년 만에 해외 파견 근무를 마치고 돌아온 준희는 진아가 여자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더 이상 '그냥 아는 누나'로 보이지 않는 것이다.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그의 일거수 일투족이 신경 쓰인다. 괜히 밥을 사달라고 하고, 저녁에는 맥주를 마시며 장난을 친다. 또, 진아가 연인 이규민(오륭)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다양한 감정에 휩싸인다.
진아도 알고 있다. 준희가 자신의 일상 속에 불쑥불쑥 들어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자신을 '곤약'에 비유하는가 하면 '어린' 여성과 바람을 피웠던 연인과의 관계를 정리하면서 느꼈던 허무함, 그 빈 공간에 준희가 들어와 있음을 느낀다. 그의 짓궂은 장난이 싫지 않고, "누나가 더 예뻐."라는 말에 마음이 설렌다. 준희가 더 이상 친구의 남동생이 아님을 진아는 알고 있다.
진아가 알고 있는 것이 또 있다. 어쩌면 그건 시청자들이 알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준희가 진아를 선택하는 것보다 진아가 준희를 선택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이라는 것 말이다. 준희에겐 잃을 게 없어 보인다. 큰 고민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무엇이 됐든 덤벼들 수 있는 나이다. 자유분방한 듯 보이는 그에겐 더욱 그럴 것이다. 기껏해야 친누나의 반응이 걱정되는 정도랄까.
반면, 진아는 30대 여성의 고된 삶을 견뎌내고 있다. 남성이 40대에도 '아재'라는 귀여운 별명을 얻는 것과 달리 여성은 30대만 돼도 패널티를 부과 받는다. '연애 시장'에서 밀려나고, '결혼 적령기'라는 사회적 억압의 대상이 돼야 한다. 가족도 그 짓누름의 대열에 합류한다. 진아의 엄마 김미연(길해연)은 딸의 결혼에서 자신의 위신을 따진다. 남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조건'들을 우선적으로 강요한다.
그뿐인가. 여성으로서 그의 회사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다. 사회 속에서 여성들은 '능력'뿐만 아니라 '여성성'도 요구받기 때문이다. 커피 전문 기업의 매장 총괄팀 슈퍼바이저인 진아는 성실함과 꼼꼼함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게다가 까칠한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고, 후배들을 살뜰히 챙긴다. 거기에는 모종의 합의, 여성들은 업무 능력뿐만 아니라 조직에 봉사하고 희생하는 모성적 존재의 자세를 갖춰야 한다는 논리가 숨겨져 있다.
애사심(愛社心)이라는 명목하에 회식 참여가 강제되고, 친화력과 동료애라는 미명하에 성차별과 성희롱이 묵인된다. 지극히 남성 중심적인 사회 구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듯한 진아의 회사는 30대 여성으로서 진아가 견뎌내야 할 무거운 짐이자 삶의 굴레다. 이런 참담하고 꿉꿉한 상황 속에서 연하 남성의 대시는 실로 상큼하고 설렌다. 낭만적 도피처라고 할까.
그런데 이러한 연애 양태를 과연 도피처라 부를 수 있을까. 진아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이 주는 갑갑함은 물론 연애에서조차 '누나'로서 상대방을 보살펴야 하는 모성적 역할을 부여받게 됐다. 물론 준희는 규민에 비해 훨씬 더 괜찮은 남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아와 준희, 두 사람의 관계에서 누가 더 높은 장벽에 부딪칠지, 그 수많은 난관 속에서 고통을 감내하고 이겨내는 주도적 역할을 누가 담당할지는 뻔하다. 그건 '누나'일 수밖에 없다.
그나마 진아는 사정이 나은 편일까. 이 판타지의 주인공이 되려면 드라마의 제목처럼 밥을 잘 사줘야 하고(그만큼의 경제적 능력이 갖춰져야 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예뻐야 하는데, 진아는 그 조건을 충족시키고 있으니 말이다. "남자들은 예쁘면 그냥 마냥 좋냐?"라는 질문은 핵심적이고, "누나가 더 예뻐."라는 준희의 대답은 결국 '여자는 예뻐야 한다'는 남성들의 욕망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예쁜 여자>는 대한민국 사회, 정확히는 남성들이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적시한다. '밥을 잘 사준다'는 말은 '밥을 잘 해준다'는 말과 그리 달라보이지 않고, '예뻐야 한다'는 외모적 조건은 한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손예진이기에 가능한 판타지'라고 할까. 드라마의 완성도, 배우들의 탁월한 연기와는 별개로 <예쁜 여자>를 보면서 씁쓸함이 묻어나는 건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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