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검찰의 지기 위한 항소? 공직선거법 제86조는 어디로 갔는가?

너의길을가라 2014. 10. 2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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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시나리오'가 정해졌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 정해진 '수순'을 밟는다는 소문이 은밀히 흘러나왔다. 보나마나한 판결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과 비아냥이 줄을 이었다. 그리고 세간이 파다했던 이야기와 소문은 반전 없는 '예고편'으로 드러났다. 한탄과 비아냥은 현실이 됐다.



ⓒ 한겨레


피고인은 오히려 국정원 직원들에게 국책사업이나 국정성과 등에 관한 홍보를 지시하는 한편 정부의 국정운영 방침에 반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을 반대하도록 지시함으로써 국가정보원 심리전단 직원들에 의한 조직적인 정치관여 활동이 이루어지도록 한 행위는 자신의 책무를 저버린 것으로서 비난가능성이 크다.


세훈이 국가정보원의 직무 범위에 관한 판단을 그르쳐 그와 같은 사이버 활동이 국가정보원의 적법한 직무 범위에 속한다고 오인함에 기인해 범해진 것으로 보일 뿐, 원세훈이 적극적으로 위법성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정치인에 대한 정치적 공작을 벌일 목적으로 범행을 지시했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세훈이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부적절한 비난 내지 비판 행위에 대한 법률상 책임을 지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더라도, 원세훈이 위와 같은 비난 또는 비판 행위의 구체적인 내용까지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거나 이를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지시했던 것으로도 보이지는 않는다.


지난 9얼 11일, 서울중앙지법 제21형사부(재판장 이범균 부장판사)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게 국가정보원법 유죄, 공직선거법 무죄 판결을 내렸다. '정치에는 관여했지만 선거 개입은 하지 않았다'는 희대의 궤변적 논리를 만들어냈다. 또, 트위터 · 댓글 등 국정원의 광범위한 사이버 활동이 선거법 위반이라고 하더라도 원 전 원장이 구체적으로 인지하거나 지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논리를 전개했다.



다음날(12일) 수원지법 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는 법원 내부 게시판(코트넷)에 '법치주의는 죽었다'는 제목의 글을 게시했다. 김 부장판사는 "정치개입이 선거개입과 관련이 없다는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으며, 기계적이고 도식적인 형식논리로는 국민을 납득시킬 수 없다"면서 서울중앙지법의 국정원 댓글판결을 '지록위마의 판결'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수원지법은 김 부장판사에 대한 징계를 청구한 상태다.


논리적 구성도 엉성하고, 미심쩍은 구석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일단 모두 접어두기로 하자. 그리고 '검찰'의 입장에 빙의해도록 하자. 최대한 감정이입을 해서 검찰의 심정을 헤아려보도록 하자. 검찰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무엇일까? 당연히 '무죄' 판결이다. 물론 검찰(사)은 공익의 대표자로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해야 할 의무가 있지만, 그건 교과서에나 나오는 이야기다.


'무죄' 판결이 나왔다는 것은 수사를 잘못했다는 뜻이거나 법 적용을 잘못했다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검찰이 졌다는 이야기다. 자존심이 강한 검찰에겐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며 재빨리 항소를 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면, 검찰은 당장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항소에 나섰어야 했다.



ⓒ SBS



하지만 검찰은 항소에 대한 명확한 입장 표명을 하지 않고 미루다가 시한을 하루 앞둔 9월 17일에야 항소장을 법원에 제출했다. 또, 지난 21일 항소이유서를 제출하면서 공직선거법 제86조를 적용해달라는 공소장 변경 신청을 하지도 않았다. 이미 언론은 1심에서 검찰이 공직선거법 제85조를 적용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왔었다. 항소심에서는 공소장 변경을 통해 공직선거법 제86조로 법리를 다퉈야 한다는 주장이 숱하게 나왔지만 검찰은 이를 무시했다.


제85조(공무원 등의 선거관여 등 금지)


① 공무원 등 법령에 따라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하는 자는 직무와 관련하여 또는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에 부당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할 수 없다.  <신설 2014.2.13.>

② 공무원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 이 경우 공무원이 그 소속직원이나 제53조제1항제4호부터 제6호까지에 규정된 기관 등의 임직원 또는 「공직자윤리법」 제17조에 따른 사기업체등의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선거운동은 그 지위를 이용하여 하는 선거운동으로 본다.


제86조(공무원 등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금지)


공무원(국회의원과 그 보좌관·비서관·비서 및 지방의회의원을 제외한다) (…) 은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된다.  


1. 소속직원 또는 선거구민에게 교육 기타 명목여하를 불문하고 특정 정당이나 후보자(후보자가 되고자 하는 자를 포함한다. 이하 이 항에서 같다)의 업적을 홍보하는 행위
2. 지위를 이용하여 선거운동의 기획에 참여하거나 그 기획의 실시에 관여하는 행위
3. 정당 또는 후보자에 대한 선거권자의 지지도를 조사하거나 이를 발표하는 행위
5. 선거기간중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시행하는 사업중 즉시 공사를 진행하지 아니할 사업의 기공식을 거행하는 행위
6. 선거기간중 정상적 업무외의 출장을 하는 행위
7. 선거기간중 휴가기간에 그 업무와 관련된 기관이나 시설을 방문하는 행위


도대체 공직선거법 제85조와 제86조는 무엇이 다른 것일까? 발췌한 법조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제85조는 공무원의 선거관여를 금지하는 조항이다. 한편, 제86조는 공무원의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이다. '선거에 관여'하는 것보다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더 포괄적인 개념 아닐까? 하지만 오히려 검찰은 "선거법 86조가 오히려 선거법 85조에 비해 적용범위가 더 좁은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공소장 변경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1심 판결문의 "(원 전원장의 행위가)'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할 여지가 있음은 별론으로 한다" 는 표현은 검찰이 공소장 변경을 한다면 판단해 볼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물론 이것은 법원의 비겁함이 드러난 대목이기도 하다. 검사가 공소장 변경을 신청하지 않더라도 법원은 직권으로 심판하거나 검사에게 공소장 변경 신청을 요구해야 한다. (법조문과 달리 판례는 이를 재량이라고 판시한 바 있다.) 물론 법원은 굳이(!) 총대를 메지 않았고, 제86조를 얼핏 언급하는 선에서 판결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검찰도 제86조 카드를 버렸다.


야당과 참여연대 등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고발하면서 제85조와 제86조를 모두 포함시켰다. 하지만 기소 단계에서 제86조는 빠졌고, 법원이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언급했음에도 검찰은 항소이유서에서 제86조를 언급하지 않았다. 한 변호사는 "검찰이 결국 자발적으로 공소장 변경에 나서진 못할 것"이라고 추측했다. 결국 재판부가 나서서 공소장 변경을 요구하지 않으면 검찰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그렇다고 1심에서도 나서지 않았던 법원이 이제 와서 총대를 메고 앞으로 나설까?


공직선거법 제85조라는 무기로 싸웠음에도 '무죄'가 내려졌다면, 다음에는 가능성이 있는 다른 무기를 끄집어내서 붙어봐야 하는 것 아닐까? 꼭 하나의 무기만 가지고 싸우라는 법도 없다. 제85조를 주위적 공소사실로 하고, 제86조를 예비적 적용 법조로 삼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럼에도 검찰은 애써 자신이 꺼내들 수 있는 무기를 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지기 위한 싸움'을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이미 게임은 끝났다. 아니, 어쩌면 게임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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