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OECD와 대한상공회의소, 노동시간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

너의길을가라 2014. 11. 1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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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을 많이 하는 걸까, 적게 하는 걸까? '노동시간'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시각은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었다. 일각에서는 '어느 민족보다도 부지런하여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는 나라'라는 등 민족성과 연관지어 긍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장시간의 노동이 가져오는 폐해를 줄이고, 살인적인 노동강도를 낮춰야 한다는 데 사회적 합의가 이뤄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한편, 최근 '노동시간'과 관련한 조사 결과가 2가지 나왔는데, 매우 상반된 내용을 담고 있어 흥미롭다.

ⓒ 헤럴드경제


1. 대한상공회의소, "한국 근로자들은 경쟁국보다 일하는 시간도 짧고 생산성도 낮은데 월급을 많이 받는다"

2.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한국은 노동시간 2위, 노동생산력은 평균 이하"


어떻게 해서 한 쪽은 '노동시간이 짧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 쪽은 '노동시간이 2위'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조사 방법의 차이일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구체적인 수치에 있어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핵심은 '조사 대상'에 있다. OECD의 발표는 당연히 OECD 회원국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OECD 회원국인 우리나라는 그 기준을 받아드리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미 여러가지 지표들에 있어서 OECD 발표를 인용하고, 그에 맞춰 정책 방향을 결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일반적으로 유지되어 왔던 시각을 언급했던 것은 OECD의 노동시간 관련 발표가 우리의 기준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많다는 OECD의 발표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 앞으로 점차적으로 노동시간을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 재계와 산업계로서는 다른 결론을 도출할 수 있는 연구가 필요했을 것이다.


ⓒ 쿠키뉴스

결국 '아시아 경쟁국'이라는 타이틀 아래 한국(2193시간), 일본(1706시간)과 OECD 회원국이 아닌 대만(2154시간), 싱가포르(2287시간), 홍콩(2344시간)을 비교해서 '경쟁국에 비해 노동시간이 길지 않다'는 결과를 산출해냈다. 또, 이들 국가들과 비교해 "노동생산력은 낮은데 임금수준은 가장 높아(2005년 자료를 인용하는 무리수?) "경쟁국에 비해 노동시장의 경쟁력이 뒤처지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되면 '노동시간이 지나치게 길어서 노동생산성이 떨어진다'는 주장을 사전에 막을 수 있는 근거가 제시할 수 있고, '한국인들은 일은 덜하면서 월급만 많이 받아 간다'는 압박을 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대한상공회의소의 최후의 변론을 들어보면, "우리나라가 경쟁국 수준 이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노동규제 강화가 아닌 생산성 향상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근로시간을 단축하려면 한국이 경쟁국보다 노동생산성이 낮고 임금은 높다는 점을 고려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경쟁국'이라는 대상을 선정한 것에 대해 "도시국가이면서 금융산업 중심인 홍콩, 싱가포르와 제조업 기반이 강한 우리나라의 노동생산성을 단순 비교한 것이 어색해 보인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분이 나쁜 것은 노동자들을 '일은 적게 하면서 월급만 많이 받는' 파렴치한 사람들로 매도했다는 점이다. 정말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을 적게 하는 것일까? 대한상공회의소의 주장은 맞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부터는 OECD의 '노동시간' 관련 조사 결과를 확인해보도록 하자.



ⓒ 헤럴드경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대한민국 노동자들의 연간 노동시간은 2163시간으로 멕시코(2237시간)에 이어 2위다. (싱가포르와 홍콩을 포함시킨다고 하더라도 4위다)우리나라는 1980년부터 2007년까지 무려 27년 간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다가 2008년부터 멕시코에 1위 자리를 넘겨줬다. 참고로 연간 근로시간이 2000시간이 넘는 것은 OECD 회원국 24개국 중에서 멕시코, 한국, 그리스, 칠레뿐이다.


『한국 자본주의』를 출간한 장하성 고려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재 한국인의 노동시간은 미국의 초기 산업화 시기 노동시간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연간 노동시간을 하루 평균 노동시간으로 따져보면, (공휴일을 제외하고) 8.7시간이 나온다. 같은 기준을 적용했을 때 연간 노동시간이 가장 적은 네덜란드는 5.5시간이었고, 일본은 7시간, 미국인 7.1시간 정도가 나왔다.



노동 시간이 많다는 건 그만큼 수면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대한민국 사람들은 일 평균 수면시간이 7시간 49분으로 OECD 회원국 평균인 8시간 22분보다 약 30분 가량 적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통계 수치를 감안했을 때, 대한민국 노동자들에게 '일을 적게 한다'는 말은 감히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노동시간을 줄여가는 것이 세계적 추세라고 봤을 때, 이에 역행하고 있는 국가는 (OECD 회원국 중에서) 멕시코와 대한민국뿐이다.


물론 우리 정부도 '노동시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주당 68시간에서 52시간으로 줄이는 내용을 담고 있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고용부 관계자에 따르면 "이 법이 통과되면 우리 사회의 고질병인 장시간 근로 문제를 없애고 일 · 가장 양립과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사람이 우선인 세상', '저녁에 있는 삶' 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동시간을 단축하는 것은 필수적인 일이다. 눈 앞에 쌓여 있는 업무를 처리하는 데 치여 개인의 삶, 가족의 삶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는 더욱 절실한 문제다.



하지만 노동시간 단축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앞서 살펴봤던 것처럼 재계와 산업계를 대변하는 대한상공회의소에서 '경쟁국의 노동시간'을 조사해서 발표할 만큼 막아야 할 일일뿐더러 당장 노동계도 반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더 많은 인력을 채용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되는 기업에서 난색을 표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노동계가 마뜩지 않은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아무래도 현실적인 이유를 빼놓을 수 없다. 노동시간이 줄어들면 그만큼 임금이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당장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는(그렇지 않은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노동자들의 입장에서는 생활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임금 정상화가 필요하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우리나라의 실질임금이 높다면서 2005년 자료를 인용했지만, 이는 천정부지로 치솟은 부동산 가격이나 비정규직의 현실 등을 무시한 것이다.


장기간 노동은 노동자의 건강에 심각한 타격을 줄 뿐만 아니라 산재 발생 가능성을 높인다. 격무(激務)에서 해방된 노동자들의 업무 집중도가 높아지면 이에 따라 업무 생산성도 올라가게 될 것이다. 또, 갈수록 심해지는 취업난을 해결하기 위해서도 노동 시간을 줄여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이 필요하다. 궁극적으로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은 (대한상공회의소의 주장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은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임금 즉, '사람 값'을 정상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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