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도서정가제, 너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책이니?

너의길을가라 2014. 11. 13. 0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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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탄 지경에 이른 동네 서점을 살리자! 출판 산업 생태계를 복원하자! 장기적으로는 출판 문화의 융성의 디딤돌이 될 것이다! 뭔가 그럴듯한 긍정적인 취지로 도입된 '도서정가제('출판문화산업진흥법' 시행령 개정안)'는 시행되기 전부터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정가제 적용 대상 도서들을 대폭 줄였지만, 할인율은 현행 19%에서 4%를 낮추는 데 그쳤다. 법안은 여전히 허점 투성이고, 결국 소비자 부담만 가중시키는 '제2의 단통법'이 될 것이라는 부정적 평가가 지배적이다.






도서정가제가 전면 시행되는 11월 21일을 앞두고 대형 온라인 서점은 '마지막 파격할인(YES24)', '비정상가격(반디앤루니스)', 반값도서, 세트특가(알라딘), '세상에서 가장 절박한 도서 할인전(인터파크)' 등 이른바 폭탄 세일에 돌입했다. 위와 같은 광고 문구를 보고 있노라니, 이참에 나도 책을 좀 왕창 구입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쇼핑을 좀 해볼까나?


지난 12일, CBS 라디오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에 출연한 한기호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장은 도서정가제가 "출판업자도 아니고 온라인 서점도 아니고 오프라인 서점도 아니에요. 오히려 독자를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소비자들의 불만에 대해) 한 몇 달 정도는 그렇겠죠. 그래서 그걸 좀 참아주셔야 장기적으로 좀 더 봐서 출판의 전체적인 어떤 출판물의 질적인 어떤 상승을 생각하신다면 저는 이 도서정가제가 완전히 독자를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 세게일보


하지만 그 역시 현행 도서정가제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뾰족한 해법을 내놓지 못했다. 가령, 무료 배송과 카드통신사 제휴할인, 출판사들이 책을 유통할 때 대형서점에 더 싸게 공급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걸 제대로 바로잡지 못한 것은 큰 문제가 있지만 모든 제도가 궁극적으로 다 문제가 있"다며 "합의를 해서 잘 지켜나가야 되지 않을까 싶"다고 답했다. 결국 도서정가제의 허점에 대해서는 '지켜보는 것'밖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을 자인한 셈이다.


우선, 책값 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소비자들에게 불편한 소식일 수밖에 없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은 "도서정가제 도입 후 도서 한 권당 평균 가격이 현재의 1만4678원보다 220원가량 늘 것"이란 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가격에 있어 소비자의 부담이 늘어날 것이라는 것이 확실시됐다. 일반 소비자뿐만 아니라 참고서 값이 오르게 됨에 따라 학부모 역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책값이 순식간에 10% 넘게 오른 게 아니고 뭐냐"고 항변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 한겨레


단통법에서 분리공시제도가 빠지고, 통신비 인하 정책이 병행되지 못하면서 휴대폰 가격을 인하하기는커녕 '전국민의 호갱화'를 이룩(?)했다면 '도서정가제'도 시행령과 관련한 핵심 쟁점들이 문화체육관광부(이하 문체부)의 미온적 태도 때문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면서 사실상 실패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그렇다면 어떤 부분들이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무엇보다 카드사 · 통신사 제휴를 통한 도서 할인과 무료 배송 등 온라인 서점의 우월적 지위를 갖게 하는 요소들이 계속적으로 허용되면서 추가 할인의 여지를 남겼다. 백원근 한국출판연구소 책임연구원은 "카드사 제휴 할인만 해도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이고 있는 카드사들이 자사 부담으로 10~20%씩 할인해주는 건 일도 아니"라며 결국 온라인 서점의 경우 판매가를 더 낮출 수 있다고 지적했다.


ⓒ News1



프랑스의 경우에는 온라인서점의 무료배송을 금지하는 도서정가제를 시행(지난 7월)했지만, 대한민국의 도서정가제에선 도입되지 않았다. 문체부에서는 "배송료 등은 관계부처에서도 온라인서점의 마케팅 수단으로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시행령 규정 사항도 아니어서 필요한 법 개정을 하려면 온·오프라인 서점 간 합의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출판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외에도 출판 · 유통업계의 요구를 법제처나 규제개혁위에게 판단을 넘기는 등 문화부의 무책임한 태도가 도마 위에 올랐다. 윤철호 한국출판인회의 회장대행은 "이런 상황에서 문화부만 믿고 갈 순 없다"고 강력히 반발했다. 문제의 핵심이 '정가제'가 아니라 '공급과 정상화'에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출판업계가 대형서점이나 온라인 서점에는 정가의 절반 가격으로 책을 공급하고, 중소(동네) 서점에는 70~80%의 가격으로 공급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대책은 전무한 상황이다.


도서정가제 시행의 가장 확실한 결과 중 하나는 책값이 (다소) 인상된다는 것이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가장 보수적인 시나리오'에 의하더라도 (도서정가제 시행 이후) 책값 인상으로 이해 도서 수유가 7% 정도 줄어들게 된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출판시장이 빠르게 위축되고, 도서정가제의 가장 큰 혜택을 누려야 할 중소 출판사가 곧바로 직접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책이란 상품에서 가격이란 경쟁요소를 빼면 내용과 질로만 경쟁할 수 있을 것 같죠? 절대 안 그래요. 사실 지금은 출판사도 너무 많고 책도 너무 많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그 많은 책들이 고객들한테 잠깐이라도 노출되려면 온라인에서나 오프라인에서나 눈에 잘 띄는 자리에 보여야 되는데, 그건 작은 출판사에서는 하기 힘든 일이거든요. 도서정가제 이후 판매가가 고정되면 공급가를 낮추려고 서점들 사이의 경쟁도 더 치열해지겠죠. 지금 (도서정가제) 시행을 앞두고 할인해서 막 풀어젖히잖아요. 그건 지금도 그 가격에 책을 들여와 판다는 거고, 정가제 하더라도 출판사한테서 그런 낮은 가격으로 받는 건 다르지 않을 거라는 얘기죠."


<주간경향>은 '전체 직원 수가 10명이 채 안 되는 한 중소 출판사의 영업담당 김 모 씨(41)'를 인터뷰 했는데, 그가 내놓은 도서정가제에 대한 분석은 우려와 불안으로 가득차 있었다. 물론 희망적인 주장도 있다. 도서출판 박이정의 박찬익 대표의 경우에는 "도서정가제 자체로는 유통과정에서 출판사에 돌아오는 마진을 투명하게 할 수 있어 장기적으로는 현금 확보에도 도움이 된다"며 도서정가제가 효과가 있다고 주장했다.


오마이뉴스


그렇다면 동네서점들의 입장은 어떨까? 인문사회과학서점 책방지기인 양돌규씨(42)는 도서정가제 시행을 두고 "사후약방문이죠. 너무 늦게 나왔"다고 탄식하면서 "이미 동네서점들 다 죽었는데 이제 와서 살린다고 해봐야 얼마나 살겠습니까"라는 회의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또,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구체적인 시행령에서 구멍이 뻥뻥 뚫린 것을 두고 죽은 업계를 살리기엔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요즘 들어 '판도라의 상자'가 너무 자주 열리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문제의 원인에 대한 명확한 분석 없이 다소 주먹구구 식으로 정책들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일단 시행해보고, 상황을 봐서 조금씩 손을 보겠다는 식이다. 게다가 정책 시행의 실효성을 좌우할 주요한 부분들은 '로비' 때문인지 막판엔 죄다 빠져 있다. 이러한 무책임한 정책 시행으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소비자들이다.


단통법이 처음 국회를 통과할 때 이를 반대한 국회의원은 한 명도 없었다. 표결에서 반대가 0표가 나온 '완벽한 법안(!)'이었지만, 논란이 확산되자 여야가 앞다퉈 개정안을 내겠다고 나서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도서정가제의 경우에는 어떨까? 이번 '판도라의 상자'에는 희망과 불안 중 무엇이 더 많이 밖으로 튀어 나오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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