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개성공단 폐쇄, 자해 그리고 국가주의.. 누구의 개성공단인가?

너의길을가라 2016. 2. 15.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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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6일 북한의 4차 핵실험. 그로부터 약 한 달여 뒤인 2월 7일 장거리로켓 '광명성4호' 발사. 그에 대한 대한민국 정부의 '조치'는 개성공단 전면 가동중단이었다. 이 결정을 두고 '제재(制裁)'인가, '자해(自害)'인가를 놓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에 들어가는 자금줄을 끊었다"는 것이 정부 측이 내놓은 제재의 변(辨)이고, 정작 피해는 우리 측이 훨씬 크다는 것이 자해론의 근거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우리 기업들의 피해가 더 크다는 지적에 대해 "단순 액수로 보면 우리 기업의 피해 더 크다고 볼 수 있으나 경제 영향으로 봤을 때, 남북 경제역량의 차이를 봤을 때 1억 달러가 북한으로 들어가는 것과 우리 기업의 피해는 큰 차이가 있다. 북한은 분명히 아파한다고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북한은 분명히 아파한다고 생각한다'는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말은 마치 '북한은 분명히 아파야만 한다'처럼 들려 애잔하다. 당장 대한민국은 아프다. 아파도 너무 아프다. <경향신문>에 따르면,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피해는 북측이 4,534억에 불과한 반면에 남측은 3조 9,429억에 달한다고 한다. "셀프로 제재를 당하는 것"이라며 "이게 무슨 자해공갈도 아니고"라는 진중권 교수의 비아냥이 나올 법 하다.


북한에 대한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하고 싶었던 정부의 심정(만 내세워 국가를 운영하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을 모르는 건 아니다. 설령 그것이 현재의 정부(의 사고의 한계를 최대한 이해해보자)가 내린 최선의 결단이었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남는다. 최소한 하루이틀 전에 '통보'를 했다면, 개성공단의 우리 기업들이 지금처럼 막심한 피해를 입진 않았을 것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는 "선진국에서 제재와 관련된 법안들이 왜 그렇게 복잡한지 아는가? 가능하면 손해를 보지 않으면서 상대에 고통을 주기 위해서다. 도대체 자기 나라의 중소기업을 탄압하는 정부가 어디에 있는가?"라고 따져묻는다. 개성공단의 폐쇄는 단지 개성에 입주한 기업들의 피해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5천 개의 협력업체와 12만 5천 명이 일자리를 잃는 일과 직결된다.


그뿐인가. '통일대박'의 꿈을 이룰 기반이 사라짐과 동시에 '피땀으로 키운 개성의 숙령공'을 '가만히 앉아 있는 중국'에게 넘겨준 꼴이 아닌가? 오로지 중국을 이롭게 만든 꼴이 아니냐는 것이다. 상대에게 고통을 주기 위해 우리 스스로를 더욱 아프게 하다니! 혹시 모르겠다. 정부에 '낭만주의자'가 있는걸까? 자해를 하는 우리를 보고, 북한이 더욱 마음 아파할지도 모르니까, 라고 생각한 것일까?



이쯤에서 우리가 진지하게 고민해봐야 하는 '코멘트'를 소개하고자 한다. 지난 13일 새누리당의 서청원 최고위원은 "정부가 대책을 세웠음에도 이것이 미진하다면 정당을 찾아다니면서 호소해야겠지만 아직 보상책도 발표하지 않은 순간에 정치권부터 쫓아다니는 것은 기업인들의 자세가 아니"라고 꾸짖으면서 "이는 잘못이다. 국가가 있고 기업이 있다"고 말했다. 


"개성공단 폐쇄는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이라고 강조한 걸 봐선, 그가 말하는 '국가'는 사실 '대통령'이라는 강한 심증이 든다. 어쨌거나 '국가가 있고 기업이 있다'는 그의 사고체계를 고스란히 변형시키자면, '국가가 있고 국민이 있다'로 이어질 것이다. 전형적인 국가주의적인 사고방식인데, 과연 그럴까? 그의 말은 맞는 것일까?



(물론 개성공단은 나름대로의 특수성이 있겠지만) 애초에 '자본'은 '국경'을 마음대로 넘나들고, '국가'를 초월한다는 점에서 그의 말은 틀렸다. 그렇다면 '국민'은 어떨까? 굳이 헌법 제1조 제2항(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국가를 비롯한 모든 것의 근간은 '사람'이다. 사람이 없는데, 무엇이 존재할 수 있겠는가.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보자. '내(우리)'가 없는데, 그 무엇이 의미가 있겠는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거대한 화두를 던지는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는 '정몽주'에 대한 재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국가'와 '사람'의 우선순위에 대한 고민을 던진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는 <단심가>로 널리 알려진 정몽주는 80~90년대만 하더라도 '충신' 중의 충신으로 추앙됐다. 



쓰러져 가는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그의 충절은 본받아야 하는 이상적 가치였다. 교과서가 그렇게 우리를 가르쳤고, '정몽주 키즈'를 양산해야 했던 국가는 끊임없이 그 충심을 우리에게 강요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 정몽주는 어떤 인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가. (물론 그의 충심을 높게 평가하지만) <육룡이 나르샤>에서 정몽주는 새로운 창업을 가로막는 방해물로 그려졌다.


도를 넘어선 관료들의 수탈로 인해 백성들의 삶은 피폐하기 그지 없다.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삶의 터전을 떠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많은 사람들이 절망 속에 죽어갔다. 이 처참한 광경을 목도한 정도전은 '고려에 희망이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이 썩은 국가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한다. 정도전의 그 결심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 



정몽주는 정도전과 함께 고려를 무너뜨리려는 이방원에게 말한다. "또 다시 백성들을 팔아먹을 셈이냐?" 이방원은 대답한다. "백성들에겐 오직 밥과 사는 기쁨 이거면 되는 것이지요" 정몽주에게 백성이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게 백성은 '고려'의 백성이어야만 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이방원에게 '백성'은 그저 '백성'이었다. 그리고 그 '백성'은 그 무엇보다 상위의 가치이자 목적 그 자체였다.


'국가가 있고 기업이 있다'는 서청원 최고위원은 생각은 '국가'가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였던 시대를 살아왔던 세대들이 공유하고 있는 전형적인 가치관일 것이다. 개성공단 폐쇄라는 극단적인 선택, 아무런 대책도 없이 폭력적으로 취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에게 '개성공단'은 '대한민국'의 개성공단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한가?



개성공단은 그곳에 입주한 124개 업체의 수많은 '나'들의 것이고, 그와 관련된 5천 개의 헙력업체에 소속된 (12만 5천 명이라는) 수많은 '나'들의 것이며, 혹은 개성공단이라는 존재로 인해 간접적으로 경제 성장의 혜택을 누리는 수많은 '나'들의 것이자, 그로 인해 남북관계의 긴장 완화라는 효과를 누리고 있는 5천만의 수많은 '나'들의 것이다.


이토록 많은 눈물과 아픔을 알고는 있을까. '국가가 있고, 기업이 있는' 거라고? '또 다시 사람들을 팔아먹을 셈이냐'고? 그것이 정몽주가 생의 끝자락까지도 붙들고 있었던 '대의'인지부터 의심스럽지만, '사람'이 그 무엇보다 우선이라고 담담히 말해주고 싶다. 그것보다 먼저인 것은 없다고, '개성공단'이 아니라 '개성공단'의 수많은 '나'들을 보라고, 거기에 답이 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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