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심신미약 주장하던 이경실 남편 실형, 만취한 상태의 죄는 용서받을 수 있는가?

너의길을가라 2016. 2. 5. 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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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滿醉, 술에 몹시 취함)한 상태에서 저지른 죄는 용서(容恕, 지은 죄나 잘못에 대하여 꾸짖거나 벌을 주지 않고 너그럽게 보아줌)받을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용서받아야 하는 것일까? 


최근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한 사건을 떠올려보자. 지난 2015년 10월 8일 개그우먼 이경실(49)의 남편 최 씨(58)는 경기도 성남시 분당에서 지인의 아내인 김 씨(36) 등과 술을 마신 후 집까지 바래다준다는 이유로 김 씨를 자신의 차 뒷좌석에 태웠다. 처음에 조수석에 탑승했던 최 씨는 이후 뒷좌석으로 자리를 옮겼고, 김 씨의 옷을 젖히고 목 부분을 혀로 핥고, 손으로 가슴을 만지는 등 강제추행(强制醜行)을 저질렀다. 이와 같은 혐의로 최 씨는 불구속 기소됐다.




'발뺌'은 가장 일반적인 심리적 반응이다. 최 씨 측은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안타깝게도) 이경실은 "우리 남편은 내가 가장 잘 안다. 다른 건 몰라도 그런 일을 할 사람은 절대 아니"라고 남편의 결백을 주장했다. '누군가를 안다'는 말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애초에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의 말은 스스로를 더욱 처절하게 만들었지만, 그저 절박함의 발현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남편과 나는 결백을 위해 재판까지 갈 거다. 진실은 곧 밝혀질 거다. 지금 가장 힘든 사람은 남편이다. 난 끝까지 남편의 곁에 있을 것"이라던 이경실은 곧 자신의 굳은 신뢰에 제 발등을 찍고 말았다. 이경실에서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자신을 향해 그런 적이 없다며 억울함을 호소했을 남편을 철석같이 믿었던 것뿐인 것을. 




형법 

제10조(심신장애인)

① 심신장애로 인하여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 없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자의 행위는 벌하지 아니한다. 

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한다. 

③ 위험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전2항의 규정을 적용하지 아니한다.


'결백을 위해 재판까지 갈 것이라던' 이경실과 그의 남편 최 씨는 지난 2015년 11월 5일 열렸던 첫 공판에서 성추행 혐의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최 씨가 당시 술에 만취해 '심신미약(心神微弱) 상태'였다고 주장했다.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전략을 바꾼 것이다. 심신미약을 주장한다는 것은 죄를 인정하되 형량을 최소화하겠다는 법률적 판단을 한 것이다. 


형법 제10조 제2항에 명시된 것처럼, 심신미약자(심신장애로 인하여 전항의 능력이 미약한 자)의 행위는 형을 감경(필요적 감경)하도록 되어 있다. 심신미약에는 정신박약과 정신병질의 경한 경우, 노이로제(신경쇠약), 충동장애가 포함되고, 최 씨가 주장하는 것처럼 만취 상태와 같이 술에 취해 사물 변별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한 경우가 해당된다.



'심신미약'은 형법에 버젓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피의자 측이 이를 주장한다면 법원으로서는 이에 대한 판단을 할 수밖에 없다. 이번 사건에서 재판부의 판단은 무엇이었을까? 서울서부지법 형사9단독 이광우 판사는 지난 4일 열린 선고 공판에서 최 씨가 주장한 심신미약을 인정하지 않고 징역 10월, 40시간 성폭력치료프로그램 이수를 명령하며 최 씨를 법정구속했다. 


"피고인이 공소사실을 인정한 점, 4차에 걸친 폭음으로 만취상태였고 심신미약 상태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제출된 증거에 의하면 피고인이 술에 취했던 것은 인정되지만 범행 경위, 범행 전후 피고인의 행동을 보면 직접 술값을 계산하고 자리를 옮긴 점, 목적지를 호텔로 옮기자고 한 점 등을 고려했을 때 당시 사물분별, 의사결정에 있어서 미약상태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다가 재판에서 범행을 자백했다. 피해자와 합의하거나 피해자 손해를 배상한 바 없고 피고인의 행위는 10여년간 알고 지낸 지인의 배우자를 성추행한 점에서 죄질이 무겁다. 또 재판과정에서 피해자를 부도덕한 사람으로 매도해 2차 피해를 유발했다. 재판 도중에도 피해자에게 새벽에 전화하거나 피해자 남편에게 협박 문자를 보내는 등 죄질이 좋지 않다"


형량을 줄이기 위한 전가의 보도로 활용되는 만취로 인한 심신미약에 대해 법원이 엄정한 판단을 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적어도 이번 사건에 있어서 만큼은 심신미약을 주장하기에 정황이 마땅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이 판단이 법원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전관 예우' 등을 통한 접근, 혹은 소위 '비싼' 변호사를 통해 공략한다면 충분히 '틈'이 벌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지난 2008년 12월 경기도 안산에서 등교 중이던 8세 여아를 인근 교회 화장실로 끌고 가서 목을 졸라 기절시키고 성폭행했던 이른바 '조두순 사건'을 떠올려보자. 당시 재판부는 "조두순의 죄질이 매우 나빠 무기징역에 해당하지만 만취 상태로 범행을 저질렀다"고 인정하며 징역 12년을 선고했다. 심신미약에 의한 필요적 감경이었다.


이 사건은 <소원>이라는 제목의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은 사람들의 공분을 이끌어내기도 했는데, 피해 아동이 겪어야 했던 육체적 · 정신적 고통(생식기와 항문, 대장의 80%가 소실됐다)에 비해 조두순이 받은 형량은 지나치게 가벼워보였다. 사건 당시 8세였던 피해자는 몇 년 후면 출소한다는 생각에 두려움에 떨 것이 뻔하다. 이것이 과연 온당한가? 


"당시 피의자는 술에 만취한 상태였기 때문에 사물 변별 능력과 의사 결정 능력이 미약한 상태였습니다. 현재 피의자는 당시의 잘못에 대해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부디 재판장님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심신미약'에 관한 규정이 형법에 명시되어 있고, 그 범위 안에 '만취'를 허용하는 관례가 이어지면서 법정에서 위와 같은 코멘트는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어 왔다. 그리고 제법 쏠쏠했던 전략이었다.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했다. 이 전략을 사용한 이경실과 그의 남편을 탓할 생각은 없다. 활용가능한 모든 (합법적인) 수단과 방법을 모두 동원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오히려 잘못은 술에 지나치게 관대한 문화(남성중심적 문화와도 관련이 있다)와 정신적인 질환 등에 한해 엄밀하게 판단해야 할 심신미약에 '만취'라는 시대착오적인 관점을 포함시키고 있는 대법원에 있다. 다행스러운 것은 최근에 들어서 술에 취해 저지른 행동에 더욱 엄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술'에 약하다. 잊지 말자. 감당하지 못할 만큼의 술을 마시(게 하는 것도)고 취하는 것부터 문제인 것이고, 그 상태에서 저지르는 행동에도 마땅히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이경실의 남편에 대한 판결은 반갑지만, 만취 상태에 의한 '심신미약'이 여전히 허용되고 있는 판례를 계승하는 관행이 없어지지 않는 한 언제든 이 조항이 다른 케이스엔 적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술에 (만)취한 상태라면 그 어떤 잘못을 저질러도 용서되어야 하는 것일까?'라는 질문이 더욱 많이 회자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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