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를 쓰고 싶어요. 옛날 혜나한테."
"뭐라고 쓸 건데?"
"혜나야, 울지 마. 너도 행복해질 수 있어. 내가 안아줄게. 난 이제 괜찮아."
지난 15일 종영한 tvN <마더>는 굉장히 특별한 드라마다. 놀랍게도(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 대한민국 연예계의 현실이다. 비단 그것이 연예계뿐이겠냐마는.) 이 드라마는 성별이 여성인 배우들이 전면에서 활약했던, 그래서 남성들의 전유물이 돼 가는 우리네 연예계의 최근 추세와는 대척점에 서 있었다. <마더>는 매우 희귀한 작품이었다. 제목이 ‘마더’였기 때문이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처럼 대부분의 경우에 엄마는 '아들의 엄마'였다. 흥미롭게도 드라마 <마더>에 등장하는 여러 명의 엄마들은 죄다 '딸의 엄마'이다. 영신 역을 맡은 이혜영은 "몇번 엄마 역할을 해왔지만 아들 엄마 역할을 해왔고, 성격도 뻔했다. <마더>에는 딸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연기가 다양하게 보여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이렇듯 <마더>는 그동안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던 생소한 지점을 파고 들었다.
기왕 이혜영의 인터뷰 내용을 언급했으니, 그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겠다. 카메라 앞에서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이혜영의 연기는 전율 그 자체였다. 그야말로 대배우의 아우라였다. 매순간 위대한 연기를 펼치는 이혜영이라는 배우와 동시대를 살아가고 있음에 감사했다. 그에 대한 찬사는 지난 글 '대배우의 카리스마 뿜는, <마더> 이혜영의 미친 연기력'에서 충분히 했으니, 이번에는 다른 배우들의 이야기를 해보자. 공교롭게도 혜나의 엄마였던 이들이다.
고성희의 재발견
"가난한 엄마는 돈 많은 엄마보다 아이를 키울 자격이 없나요?"
고성희가 연기한 자영은 위태로운 엄마였다. 쉽지 않은 역할이었다. 자신이 낳은 아이를 학대하는 엄마라니, 딸을 쓰레기 봉투에 넣어 버리는 엄마라니! "설레는 도전이기도 했지만 두렵기도 한 도전이었다."는 고성희의 소감은 괜한 말이 아니었으리라. 자영의 미성숙한 모성은 시청자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동거남 설악(손석구)이 딸 혜나(허율)를 학대하고 유괴했을 때도 이를 방관했다. 무수한 손가락질과 욕을 받아내야 했다.
<마더>는 선악(善惡)이라고 하는 단순한 이분법을 판단의 잣대로 삼는 드라마가 아니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자영의 이야기가 상세히 풀어졌고, 그의 사정이 이해됐다. 어린 나이에 미혼모가 돼 엄마가 될 준비를 전혀 할 수 없었던 자영은 홀로 모든 짐을 짊어져야 했다. 비겁했던 남자친구는 물론이고, 사회도 그를 외면했다. 과연 비난의 화살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자영은 유일하게 자신의 편이 돼 줬던 설악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고성희는 2013년 영화 <분노의 윤리학>으로 데뷔했다. 같은 해 하정우의 감독 데뷔작인 <롤러코스터>에 출연하며 주목을 받았으나, 그 뒤로는 이렇다할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마더>를 통해 연기 변신과 함께 섬세한 연기력을 증명했다. "좋은 대본, 좋은 연출, 좋은 선배님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는 그의 말처럼, 고성희는 자신의 필모그래피에 의미 있는 이정표를 찍었다.
이보영의 재증명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시간을 되돌려 그때로 돌아간다면 다시 그 애의 손을 잡고 또 도망치게 될 것 같습니다."
역시 이보영이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 같은 단단함으로 드라마를 지켰다. 그가 맡았던 수진은 극 중에서 감정의 변화가 가장 빈번했고, 그 진폭이 가장 컸던 인물이다. 어렸을 때 친모 홍희(남기애)로부터 버려졌(다고 믿은 채 살아왔)고, 그 상처와 아픔을 고스란히 안은 채 성장했다. 당연히 자신이 엄마가 된다는 건 꿈에도 상상하지 않았다. 그런 수진이 자신과 닮안 혜나를 만나 그 아이를 '유괴'한다. 그리고 엄마가 된다.
도망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경찰은 끈질지게 추격해 왔다. 그 와중에 자신을 입양해서 기른 영신의 암투병 사실을 알게 되고, 친모를 만나 묵었던 감정이 요동치게 된다. 동생들과의 갈등도 수진의 몫이었다. 이보영은 안정적이고 성숙된 연기로 드라마 전체에 관여했고, 거의 모든 캐릭터들과 연결됐으며, 그들과 그들의 연기를 빛냈다. 이혜영은 "이보영이라는 배우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정말 프로다웠다."며 극찬을 하기도 했다.
이보영이라는 배우, 그 이름에 대한 신뢰야말로 <마더>에 시청자들이 관심을 갖게 만든 1차적인 이유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영의 작품을 고르는 선구안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 2012년 KBS2 <내 딸 서영이>로 최고 시청률 49.6%을 기록한 이래 시청률과 작품성을 동시에 잡아왔다. SBS <너의 목소리가 들려>, <신의 선물 - 14일>, <귓속말>가 그 예다. <마더>를 통해 이보영은 또 한번 자신의 진가를 재증명했다. 앞으로도 그가 계속해서 두 마리의 토끼를 몽땅 잡아나가길 바란다.
'TV + 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더>의 놀라운 발견, '허율'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라! (0) | 2018.03.18 |
---|---|
<윤식당2>가 선물한 힐링과 고민 덕분에 행복했다 (0) | 2018.03.17 |
노희경이 그린 청춘과 경찰, <라이브>는 어떤 드라마일까? (0) | 2018.03.13 |
"엄마, 한번 더 유괴해주세요." 윤복의 말에 펑펑 울고야 말았다. (0) | 2018.03.09 |
남다른 관찰 예능, <효리네 민박>이라는 희한한 별종 (0) | 2018.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