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여운이 남아있다. 몇몇 장면들은 여전히 또렷하다. 심금을 울렸던 대사들이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방심(?)하면 눈가가 금세, 그것도 심하게 촉촉해진다.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근래 이렇게 많은 눈물을 흘린 적은 없었다. 얼마 전에 종영한 tvN <마더> 이야기다. 배우들만큼은 아니겠지만, 시청자도 애정을 쏟았던 드라마에서 빠져나오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도 다행이다. 윤복(허율)은 수진(이보영)과 함께 행복하게 지내고 있을 테니까.
<마더>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처럼 엄마도 태어나는 것'이라는 화두를 던지며, 모성에 대해 새로운 관점의 고민을 던졌다. '모성이란 이러하다', '엄마는 이래야 한다'는 기존의 관습적인 해석에서 벗어났고, 그 어떤 고정된 대답도 거부했다. 소위 '기른 정'이 생물학적인 유대감에 못지 않은, 어쩌면 그 이상의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또, 아동학대와 미혼모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기도 했다.
좋은 극본은 배우를 춤추게 한다.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 등을 집필한 정서경 작가의 필력은 감탄스러웠다. 느린 호흡의 대사들에 공백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백 없는 감동의 물결은 오히려 촘촘했다. 좋은 배우들은 극본을 빛내는 법이다. 압도적인 카리스마를 발산했던 이혜영, 연기 변신에 성공한 고성희, 자신의 진가를 다시 한번 대중에게 확실히 증명한 이보영뿐만 아니라 모든 배우들이 최고의 활약을 펼쳤다.
어른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지만, 역시 <마더>의 진짜(!) 주인공이었던, 혜나이자 윤복이었던 허율에 대해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누가 뭐래도 최고의 발견은 허율이었고, 그의 존재는 이미 감동이었다. 놀라움을 넘어 경이로움의 대상이었다. '연기'라는 것이 특정 인물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넘어 오롯이 그 자체가 되는 것이라면 허율은 '완벽'했다. 허율은 혜나였고, 또 윤복이었다.
"엄마, 한번 더 유괴해주세요."
단 한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편히 말해본 적 없는 윤복이었다. 매번 주저했고, 스스로를 숨겼다. 그런 윤복이가 수진에게 자신을 한번 더 유괴해달라고 말하는데 가슴이 미어졌다. 다시 수진과 만나고 가족들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 "그런데 난 벌써 되고 싶은 게 된 거 같아요. 윤복이요."라고 말하는데 또 한번 눈물이 쏟아졌다. 허율의 연기에는 분명 힘이 있었다.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켜쥐는 강력한 힘이었다.
연기를 제대로 배운(이라는 말에 연기의 본질과 모순되는 지점이 있다) 적이 없는 (아역) 배우가 놀라운 연기를 선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들은 학습이 아닌 본능으로, 셈법이 아니라 습자지와 같은 흡수력으로 연기를 한다. 어쩌면 연기란 학습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도화지 같은 박지의 상태에서 캐릭터와 상황에 대한 완벽한 몰입,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연기가 아닐까. 허율은 그 단계에 이른 놀라운 천재였던 셈이다.
"처음에는 집중을 시키려고 '윤복이 네가 주인공이야' '떠들면 안 돼' '현장에 집중해' '여기 이모 봐. 다른 데 쳐다보지마' 이렇게 말하기도 했는데 중반부터는 그냥 윤복이가 돼있더라. 그 이후로는 가르쳐 줄 필요도 없었다." <오마이뉴스>, <마더> 끝낸 이보영이 인터뷰 중 눈물 흘린 이유
사실 <마더>의 아역 배우가 4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오디션을 통과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대감보다는 의구심을 가졌다. '보통' 정도의 연기만 보여주면 만족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어쭈?'는 '어라?'로 바뀌었고, 어느새 '우와!'로 변해 있었다. 덤덤하고 느릿느릿한 말투, 다양하고 변화무쌍한 표정들은 어느 것 하나 가짜가 없었다. 게다가 성숙하고 정돈된 감정 연기까지! 흠잡을 곳이 없었다.
그러니까 허율은 '연기를 한다'는 개념으로 접근한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연기를 보여준다'는 태도를 취한 게 아니라 그냥 (어느 순간부터) 혜나가 되고 윤복이가 됐던 것이었다. 넘침이 없었고, 부족함도 없었다. 소수점 단위까지 정확했고, 한 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수십 년 동안 연기를 해 온 베테랑 배우도 아닌 그가 그토록 '적절한' 연기를 해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데뷔작에서 말이다. 한마디로 경이롭다.
문득 영화 <아저씨>를 통해 주목을 받았던 김새론이 떠오른다. (김새론의 데뷔작은 <아저씨>가 아니라 <여행자>이다.) 당시 김새론이 10살이었다. 허율은 9살이다. 김새론이 다양한 작품들에 출연하며 성장한 것처럼, 허율에게도 무한한 가능성이 놓여 있다. 허율은 '엄마(이보영)'의 소속사(플라이업)과 전속 계약을 맺고 본격적인 연기 활동을 시작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가 앞으로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너무도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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