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연극<3월의 눈>, 신구와 손숙이 전하는 삶과 죽음 그리고 비움의 철학

너의길을가라 2015. 4. 5.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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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방송된 tvN <꽃보다 할배> 그리스 편 2회에서 신구는 여행지인 그리스의 지하철 안에서 앉지도 않은 채 계속 창밖의 풍경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스쳐지나가는 그것들을 한 장면도 놓치지 않으려는 청년(靑年) 신구의 눈빛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창밖이 어두워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던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앉아 있는 것보다 서 있으니 들판이 잘 보인다. 옛 그리스인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것이고 전투를 벌였을 거란 생각을 했다." 제작진은 그에게 "늘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 하는 것 같다"며 질문을 건넸다. 돌아온 그의 대답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겠지만, 새로운 경험이다. 이것이 살아가는데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꽃보다 할배>의 미덕은 가보지 못한 여행의 대리만족에만 있지 않다. 인생의 선배인 4명의 배우들의 따뜻한 조언과 연륜이 묻어 있는 삶의 경험들이 TV화면이라고 하는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어 우리들의 가슴 속에 꽂히는 그 뭉클한 순간들에 있다. 그렇기 때문일까? <꽃보다 할배>는 비록 예능이지만, 배우로서의 정체성이 고스란히 유지가 될 뿐만 아니라 실제 연기를 접했을 때 이질감이 아니라 상승효과가 발현된다.



어제(4일) 천안예술의전당 소공연장을 찾았다. <3월의 눈>이라는 작품을 공연하고 있는, 연극 배우 신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축적되어 온 삶의 경험들과 새로운 경험들을 접목시킨 '밑거름'을 다시 연기로 승화시켜 내는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은 설렘 그 자체였다. 연극의 매력이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편집된, 깔끔하게 정리된 연기가 아니라 날것 그대로의 연기를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는 생동감 말이다.



"3월의 눈이라는 게 내릴 때는 찬란하지만 닿으면 녹아버리는데, 그것이 인생이라는 것이지요. 이 외에도 이 작품이 함유하고 있는 의미가 상당히 많아요. 이 작품은 각자의 삶에 따라 다양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인생, 삶에 대해 사유해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작품의 의미가 있는 것 같고. 비워줘야 할 때 비워줄 수 있는 미덕에 대해서 보여주지요. " ( 손진책 연출가)


<3월의 눈>은 80대 노부부 '장오(신구)'와 '이순(손숙)'의 삶과 인생, 사랑과 죽음을 다루고 있다. 배우들의 움직임이 적고, 특별한 에피소드가 전개되지 않는 터라 더욱 정(靜)적인 느낌을 받는다. 따라서 젊은 세대에게는 다소 느슨하거나 혹은 밋밋하게 다가올 수 있다. 삶과 인생, 사랑과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담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 비슷한 연배가 보기에 무난한 작품이다.



배우들의 동선이 적고, 스토리의 변주(變奏)가 분주하지 않다는 것은 배우들의 대사에 집중해야 함을 의미한다. 장오와 이순의 특별할 것 없는 일상, 소박한 대화들 속에는 실로 많은 이야깃거리가 담겨 있다. 때로는 질곡의 현대사가 귀에 들어오고, 때로는 삶에 대한 통찰이 번뜩인다. 장오와 이순이 나누는 대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하지 않으면, <3월의 눈>이 담고자 했던 이야기를 놓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다.


장오와 이순의 대화로만 등장하는 영돈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투쟁했지만 행방불명돼 돌아올 수 없는 인물로 설정되어 있다. 이순이 영돈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들과의 추억을 되새길 때마다 장오는 "빨갱이 아들 둔 적 없어!"라고 소리치지만, 그를 향한 애틋함을 끝내 숨기지 못한다. 현대사의 질곡(桎梏)을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노숙자 황씨는 또 어떠한가? 돼지를 기르던 농장주였던 그는 구제역으로 인해 기르던 돼지들을 생매장해야 했고, 그로 인한 정신적 충격으로 노숙자가 되어 떠돈다. 장오는 매년 봄마다 자신의 집에 들르는 황씨에게 못마땅한 기색을 표하지만, 그러면서도 그에게 밥그릇을 건넨다. 구제역으로 자식같은 돼지를 잃은 황씨와 민주화 운동으로 자식을 잃은 장오는 같은 '상실'을 겪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 셈이다.


또 한 가지 중요한 포인트는 철거될 운명에 처해 있는 한옥이다. 이는 곧 요양원으로 떠나야 할 장오의 처지와 맞닿아있다. 재개발로 대표되는 개발주의의 단면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대목이다. 오래된 한옥을 그대로 두는 것은 상가 건물을 세워 임대료를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손해다. 이런 관점 하에서 오래된 한옥은 불필요한 공간이자 없어져야 할 공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냉랭한 관점은 '사람'에게도 적용되지 않던가?



인생의 끝을 맞이하는, 다가오는 죽음을 준비하는 장오의 "좋은 끝이란 없어"라는 읊조림은 통찰적이면서도 가슴을 아프게 한다.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는 장오는 곧 해체될 한옥과 자신을 비교하며 이렇게 말한다. "그래두 이 집이 나보단 낫군. 흩어질 땐 흩어지더라두 ,뭐가 되든 된다네… 책상두 되고, 밥상두 되구… 허허…"


이처럼 <3월의 눈>은 삶은 허무한 것이라는 이야기로 끝을 맺지 않는다. 한옥의 나무가 책상이 되고 밥상이 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끝 이후에 반드시 또 다른 시작이 찾아온다는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장오 역시도 집을 떠나면서 "다시 돌아오겠다"고 다짐하듯 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3월의 눈>을 관통하고 있는 가치는 '비움'에 대한 철학이 아닐까? 장오가 이순에게 건네는 말에 담겨 있는 끝(죽음)을 맞이하는 우리들이 자세 말이다.


"섭섭헐 것두 없구, 억울헐 것두 없어…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그러니,

자네두 이젠 다 비우고 가게.

여기 있지 말구.

여긴 이제 아무 것두 없어, 아무 것두…"



사족(1). 반전 아닌 반전(?)이 있는데, 생각보다 이를 알아차리는 사람들이 적다. 혹은 지나치게 늦게 알아차린다. 물론 그것이 극을 이해하는 데 큰 방해가 된다거나 마이너스적 요소로 작용하진 않는다.


사족(2). 부디 연극을 감상할 때는 휴대폰을 꺼두자. 진동 모드가 아니라 끄자. 영화와 달리 연극은 배우의 숨소리마저 느낄 수 있는 밀착형 공연인데, 이를 방해하는 건 다른 관객에게 엄청난 피해를 준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게다가 눈앞에서 열연을 하고 있는 배우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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