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연 작가는 희소성이 있다. 드라마 한편(tvN <비밀의 숲>)으로 단숨에 최고의 작가 반열에 오른 놀라운 내공의 소유자다. 그가 쓴 드라마가 소위 ‘드라마 왕국’이라는 대한민국에서 특별한 이유는 두 가지다. 먼저, 이수연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사회 한 단면을 다루면서 그 얽키고설킨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를 고발한다. <비밀의 숲>에서는 그 대상이 검찰이었고, JTBC <라이프>에서는 (대학)병원이다.
두 번째는 돌고돌아 결국 ‘기승전멜로’로 전개되는 기존의 드라마들과 달리 멜로(적 요소)를 과감히 빼버렸다는 점이다. 시청률 확보를 위해 주인공들의 로맨스를 필수 요소처럼 여기는 것이 한국 드라마의 현주소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건 굉장히 도발적인 선택이다. <비밀의 숲>의 주인공들은 철저히 비즈니스적 관계를 유지했다. 검사 황시목(조승우)과 한여진(배두나)은 한눈팔지 않고 동료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집요할 정도로 촘촘히 구성된 사회 고발이 몰고오는 쾌감과 한국 드라마의 공식과 같았던 멜로의 부재가 가져오는 이질감이 합쳐져 이수연의 드라마를 보다 특별하게 만든다. 그의 드라마에는 목표를 향해 뻗어가는 추진력이 있고, 목적한 것을 쟁취하는 근성이 있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자연스레 이수연의 이야기에 열광한다. 게다가 드라마가 고급스럽기까지 하니, 어찌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수연 작가가 “사람의 감정만으로 끌고 가는 멜로나 가족극은 제가 취약한 부분”이라 고백했던 만큼 <라이프> 역시 기본적인 흐름은 동일하다. 병원 내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통해 의료계 전반의 문제점을 점검하고, 더 나아가 자본(한국에서는 그 이름이 재벌로 등치된다)이 병원에 스며들면서 벌어지는 현상을 집중 조명한다. 딱 봐도 이수연표 드라마다. 그저 배경이 검찰에서 병원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만, 결이 조금 다르다. <비밀의 숲>의 경우 멜로가 원천 봉쇄됐었다면, <라이프>에서는 멜로 라인이 여럿 감지된다. 예진우, 예선우 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예진우(이동욱)는 ‘새글21’의 기자 최서현(최유하)과 핑크빛 관계를 만들어가고 있다. 동생 예선우(이규형)는 형의 친구인 소아청소년과 전문의 이노을(원진아)을 오랫동안 마음에 품어왔다. 그의 진솔한 고백은 무언의 거절 앞에 더욱 절절했다.
여기까진 명확한 라인이다. <라이프>에는 이밖에 상당히 애매한 관계가 등장한다. 바로 상국대학병원 총괄사장 구승효(조승우)와 이노을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러브라인이라 단정짓긴 어려운 측면이 있다. 대명그룹 조 회장(정문성)의 명을 받고 상국대학병원을 장악하기 위해 투입된 구승효는 냉철한 인물이다. 황시목과 달리 감정이 존재하지만, 이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그런 구승효가 자신의 인간미를 드러내는 대상이 바로 이노을이다. 따라서 이노을은 드라마 진행에 있어 꼭 필요한 캐릭터였다.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순수한 호기심에서 구승효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테니 말이다. 다만, 구승효와 이노을, 두 사람이 얽히는 설정에 의문이 가는 게 사실이다. 이노을이 구승효를 데리고 병원 구석구석을 보여준다거나 사장실을 다짜고짜 찾아가는 건 아무래도 자연스럽지 않았다.
구승효가 이노을에게 보이는 감정은 분명 호감이지만, 이노을의 그것은 아리송하다. 작가의 의도인지 아니면 원진아의 연기 탓인지 알 수 없다. <비밀의 숲>의 황시목-한여진의 파트너 관계를 이상적이라 여겼던 시청자들로서는 당황스러운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면직처리를 당하고 속상함에 강경아(염혜란) 팀장과 함께 술을 마신 이노을이 술집으로 찾아온 구승효에게 보인 행동은 남자친구에게 삐친 듯한 모습에 가까웠다.
달리 생각하면 그만큼 배두나의 연기가 탁월했다고 볼 수 있다. 애초부터 이동욱과 동기-친구 관계로 설정된 이노을 역에 그보다 훨씬 어려 앳돼 보이는 원진아를 캐스팅한 게 조금 무리였다는 지적도 있다. JTBC <그냥 사랑하는 사이>에서 통속적이지 않은 신선한 연기로 단숨에 기대주이자 유망주로 떠올랐던 원진아로서는 연기 인생의 중대한 분기점에 선 셈이다.
이제 <라이프>는 방송 2회 분량밖에 남지 않았다. 다음 주면 막을 내린다. 구승효와 상국대병원 의사들의 대반격이 예고된 상황에서 이노을 딜레마는 여전히 아쉽기만 하다. 전체적으로 워낙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였기에 이를 반전시킬 캐릭터와 관계가 필요했던 건 분명하지만, 굳이 '멜로 라인'을 집어넣을 필요가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이건 이수연 작가가 앞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 고민일지도 모르겠다.
'TV + 연예'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목과 거리를 누비는 유재석과 백종원, 예능의 다양성을 키워주길! (0) | 2018.09.10 |
---|---|
김상중이 먹방에? <폼나게 먹자>는 무엇이 달랐나? (0) | 2018.09.08 |
분노 유발 드라마, <아는 와이프>가 아니라 <나쁜 허즈밴드>였다 (0) | 2018.09.01 |
유재석만 믿고 간다? <유 퀴즈 온 더 블럭>은 성공할 수 있을까? (0) | 2018.08.30 |
성유리 앞세운 <야간개장>, 공주의 삶을 보여주고 싶었나? (0) | 2018.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