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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가득한 <미생>, 바둑 한 판에 담긴 우리의 인생

너의길을가라 2014. 11. 18.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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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희경 드라마'의 특징은 그 안에 '선악(善惡)'이 아니라 '사람'이 그득하다는 점이다. 반면, 소위 '막장 드라마'에는 '사람'이 아니라 '선악'만 가득하다. 캐릭터가 만들어지고, 그 캐릭터들의 '충돌'에 의해 스토리가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의 필요에 의해 캐릭터를 마구잡이로 찍어내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노희경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인공의 가족(혹은 친구)' 등 병풍에 그치지 않고, 제각각 자신만의 이야기를 갖고 있다. 캐릭터에 대한 분석은 곧 사람에 대한 관찰에서 비롯되고, 이는 궁긍적으로 '사람에 대한 애정'을 기반으로 한다. 이 부분이야말로 '좋은 드라마'를 가름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김원석 연출, 정윤정 극본의 <미생>에도 '사람'이 그득하다. 5.494%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압도적인 호평을 받고 있는 <미생>은 '직장인들의 애환'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주 · 조연 할 것 없이 각자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누구 하나 버릴 캐릭터가 없다. 주인공 장그래뿐만 아니라 신입사원 4인방(안영이, 한석율, 장백기), 영업 3팀(오상식 과장, 김동식 대리)의 이야기가 비중있게 그려지지지만, 각 에피소드 별로 또 다른 주인공(박영구 대리, 선지영 차장, 박종식 과장 등)이 등장하고 결과적으로는 모든 캐릭터의 주인공화가 이뤄진다.


결국 제목처럼 '미생(未生)'인 채 살아가는 군상들, 다시 말해 우리 모두가 '각자의 바둑을 두는' 모습이 그려진다. 이것이 바로 <미생>이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받으며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미생>에서 성희롱과 성차별의 상징(?)인 자원팀 마복렬 부장은 쉴드를 칠 수 없을 정도로 포악한 인물이지만, 그를 제외하고 '악역'이라고 부를 만한 캐릭터는 자원 2팀의 하성준 대리와 철강팀의 강해준 대리, 영업 3팀으로 충원된 박종식 과장일 것이다.



우선 장백기를 이직 직전까지 몰고 갔던 철강팀의 강해준 대리에 대한 오해는 지난 9국에서 풀렸다. 하루빨리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고 싶은 장백기는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을 업무에서 배제하는 강 대리가 자신을 개인적으로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충분히 그렇게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장백기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원인터네셔널을 떠나 다른 직장으로 옮기기 위해 면접 일정까지 잡기에 이른다.


강 대리가 출장을 떠난 사이 사업 예산안을 수정해야 하는 일이 방생했고, 장백기는 강 대리의 허락을 받아 결재 서류를 작성해 제출한다. 자신의 실력을 뽐낼 절호의 기회를 맞이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과는 재무팀으로부터의 보류 이유조차 적혀있지 않은 '빠꾸'였다. 멘붕 상태에 빠졌던 장백기는 오 과장으로부터 '기본기가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고 강 대리가 그동안 자신을 업무에서 배제시켰던 이유를 깨닫는다.


장백기는 강 대리에게 전화를 걸었고, 망설이는 그에게 강 대리는 "예산안 때문에 전화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장백기가 "기본이 안 됐다고 보류 당했다"고 말하자 강 대리는 장백기가 빠뜨렸을 법한 부분을 설명해줬고, 강 대리는 마지막으로 "내일 봅시다"는 한마디로 장백기의 마음을 다잡는다. 결국 장백기는 이직하려던 생각을 접고, 허드렛일부터 다시 배우기 시작한다.



안영이를 괴롭혔던 하 대리도 지난 10국에서 다소 변화된 모습을 보여줬다. 다른 동료들도 안영이에게 허드렛일을 마구잡이로 시키면서 괴롭히는 데 동참하자 화를 내며 불편한 기색을 드러냈던 것이다. 하 대리는 안영이를 잡일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굳이 없던 출장을 만들어 외근을 보냈지만, 예상 외에 일이 꼬여 오히려 안영이가 트럭까지 모는 등 더 많은 고생을 하게 되자 불같이 화를 내며 온갖 욕설을 퍼붓는다.


결국 하 대리는 인간말종이 되고, 안영이의 상처는 더 깊어지고 말았다. 단순한 '악역'을 만들지 않는 <미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하 대리에게도 그만의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추측해볼 수 있다. <미생> 홈페이지에는 하 대리가 여자 상사와 일하며 된통 당했던 트라우마로 여직원에 대한 선입견이 생겼다는 캐릭터 설명이 실려 있다. 하 대리에게 심경의 변화가 나타난 만큼 다음 주에는 하 대리와 안영이 사이의 갈등이 풀리는 내용이 방송될 것으로 보인다.



강 대리와 하 대리까지는 이해한다고 쳐도, 박 과장만큼은 결코 상종하지 못할 인간처럼 여겨지지 않았던가? 김희원의 놀라운 연기 탓에 표정에서부터 '짜증'이 솟구치고, 부하 직원에 대한 막말과 마사지 강요에 여직원에 대한 성희롱까지 그의 행동들은 '최악의 인간' 그 자체였다. 거기에다 협력업체와의 비리가 드러나면서 박 과장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극에 달했다. 그야말로 '타도의 대상!'이라고나 할까?


<미생> 10국에서는 '박 과장'의 몰락을 다루고 있지만, 그와 동시에 '지금의 박 과장이라는 괴물이 탄생하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있다. 박 과장이 1억 2,000만 불의 거래를 성사시킨 능력 있는 직원에서 태만하고 부패한 직원으로 변해갔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에게도 순수하고 뜨거웠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말이다.


<미생>은 도저히 이해 못할 것 같았단 박 과장의 변화 과정을 밀도 있게 다룬다. 특히 "재미 없네. 돈은 니들이 다 처먹고 나는 월급만 받으면 땡이냐"는 박 과장의 읊조림은 상당한 공감을 이끌어냈다. 또, 박 과장이 뒷돈을 받는 모습에서는 한 인간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현실에서 사람들이 '뒷돈'을 용납하게 되는 심경 변화를 잘 보여주었다.



물론 강 대리와 하 대리, 또 박 과장을 전적으로 옹호할 생각은 없다. 강 대리의 경우, 장백기에게 좀더 부드러운 방식으로 문제점을 깨닫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강대리의 바둑'이고, 이에 대해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문제다. 반면, 하 대리의 성차별과 부하 직원에 대한 폭언 등은 용납할 수 없는 부분이다. 이는 명백한 잘못이지만, 하 대리가 '왜' 여성에 대한 피해의식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는 있다.


사회적 약자로서 여성들이 회사 내에서 당하는 불이익과 차별이 워낙 많지만, 그 안에는 남성들이 겪는 어려움도 분명 상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박 과장도 마찬가지다. 그 누가 변질된 박 과장을 밝은 미소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그는 뒷돈을 챙기는 비리까지 저지른 장본인 아닌가? 하지만 "뭐 저렇게 대단한 일 한다고 바쁜 척들인지"라고 말하는 박 과장의 회의감은 모든 직장인들이 한 번쯤 품어봤을 생각 아닐까?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삼성 SDS의 상장 대박으로 단숨에 2조 8천 5백 억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또, 신종균 삼성전자 IM 부문 사장의 1~3분기 보수가 120억 3천 400만 원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수많은 셀러리맨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주기도 했다. 박 과장이 걸어온 길은 특수한 '악인'에게만 주어진 길이 아니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직장인들도 충분히 겪을 수 있는 유혹은 아니었을까?



결국 <미생>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다. 선과 악이라는 잣대로 누군가를 섣불리 판단하기보다 애정을 갖고 그 사람을 차분하게 지켜보는 태도. 저마다에게는 각자의 바둑이 있고,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하는 바둑 한 판에 목숨을 걸고 치열하고 고도한 싸움을 하는 사람. 10국의 마지막을 장식한 김동식 대리와 장그래의 대화는 <미생>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전부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시청자들의 가슴을 적셨을 메시지를 옮겨본다. 


"남들이 우리더러 넥타이 부대니 일개미니 라고 하고 나 하나쯤 어찌 살아도 사회든 회사든 아무렇지도 않겠지만, 그래도 이 일이 지금의 나야"


"그래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 조치훈 9단이 하신 말씀이에요. 바둑 한 판 이기고 지는 거 그래봤자 세상에 아무 영향 없는 바둑. 그래도 바둑. 세상과 상관 없이 그래도 나에게 전부인 바둑. 왜 이렇게 처절하게 치열하게 바둑을 두십니까? 바둑일 뿐인데. 그래도 바둑이니까. 내 바둑이니까. 내 일이니까. 내게 허락된 세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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