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경성학교>, 소녀들이 들려주는 식민지 조선의 아픔

너의길을가라 2015. 6. 27.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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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고 절묘한 시대다. 조선인이기에 정체성을 가질 수 없었던 시기와 여학생들의 과도기적 감성이 맞닿아 있다고 느꼈다. 그 당시의 시대적 정서와 소녀들의 정서가 만났을 때 화학반응 같은 게 있다. (이해영 감독)


<경성학교 : 사라진 소녀들>은 일제 강점기를 시대적 배경으로, 경성의 한 기숙학교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굳이 '1938년'이라는 구체적인 연도를 강조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그 해에 일본이 '국가 총동원법'을 시행(4월 1일에 공포되어 5월 5일부터 일본에서 시행)했기 때문일 것이다. 군국주의로 무장한 일본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식민지로부터 노동력을 동원하고 물자를 수탈하는 법령을 시행한 시기가 <경성학교>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상징적으로 잘 표현한다고 여긴 듯 하다.



국가총동원법


제1조. 국가총동원이란 전시(전시에 준할 경우도 포함)에 국방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의 전력을 가장 유효하게 발휘하도록 인적 및 물적 자원을 운용하는 것을 말한다.


여담이지만, '인간'을 두고 '인적 자원'으로 치부(置簿)하는 사고방식은 당시에도 존재했던 모양이다. 천황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카미가제'의 존재를 생각해보면, 인간이 자원으로 치환(置換)되는 매커니즘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괴수가 되어 버린 국가가 마음대로 정한 '국방목적'을 달생하기 위해 인간은 '인적 자원'으로 관리되고 운용된다. 그것도 '가장 유효하게 발휘'되도록 말이다. 참으로 끔찍하고 살 떨리는 이야기 아닌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그렇다고 해서 <경성학교>가 이른바 '민족 말살 통치' 시기를 살아내야 했던 한국인들의 비극적인 삶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는 영화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무거운 역사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드문드문 그런 뉘앙스가 묻어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경상학교>는 호러를 가장(假裝)한 미스터리 영화이다. 국가 총동원법이 시행됐던 1938년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은 음울한 분위기를 표현하는 데 활용되는 장치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경성학교는 부잣집 따님들이 요양을 하기 위해 머무르는 공간으로 외부와 단절된 기숙학교다. 소녀들은 이 학교에서 '규율'에 따르며 생활하고, 교장이 처방한 약을 먹으며 치료를 받는다. 이를 '근대성'이라는 개념과 결부시켜보면, '개조'를 받는다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규율은 복종되고 훈련된 신체, 순종하는 신체를 만들어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공교롭게도 경성학교는 '학교'이면서 '병원'인 공간이다.




그렇다면 <경성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요양'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치료 행위가 아닐 것이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폐병을 앓고 있는 주란(박보영)은 계모에 의해 경성학교로 보내지는데, 처음에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지어 친구들로부터 괴롬힘을 당한다. 그런 주란에게 연덕(박소담)은 친구 이상의 관계로 다가간다. 김조광수의 청년필름이 제작한 영화에 '동성애적 코드'가 등장하는 건 결코 어색한 일이 아니다. 가장 약한 존재였던 주란이 '개조'를 통해 가장 강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교장(엄지원)의 치료? 아니, '개조'로 인해 주란은 신체적으로 엄청난 능력을 갖게 되는데, 이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강인한 신체'를 만들어내는 데 주력했던 군국주의 일본의 거대한 욕망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또, 그 과정은 마치 각종 생체 실험을 자행했던 일본의 731부대를 연상케 한다. 물론 731부대의 주 목적은 생·화학 무기 개발과 무기 시험, 생체 해부 쪽에 있었지만, 인간을 '재료'로 각종 생체 실험을 저질렀던 그 끔찍한 발상은 별반 다를 게 없다.




"주란은 영화에서 제일 큰 변화를 갖는 캐릭터이다. 감정적인 소모가 굉장히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박보영은 끝까지 자기 페이스를 잃지 않았다. 이 영화로 관객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박보영의 새로운 얼굴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해영 감독)


"이해영 감독님을 좋아하고 존중하기에 '경성학교'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감독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여자 중심 이야기에는 호러 말고는 없었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목마름이 여배우라면 있을 것이다. '경성학교'가 여성 중심의 미스터리라 선택한 것보다는 새로움에 반해 선택하게 됐다. 물론 여배우들만이 나오기에 여기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영화가 더 잘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관객들이 새로운 시도를 즐겁게 받아들였으면 좋겠고 '퓨전밥상'을 맛있게 드셨으면 좋겠다." (엄지원)




'입을 수 있을 때까지 (교복을) 입겠다'던 박보영은 감정 변화가 가장 큰 주란 역(役)을 맡아 자신의 능력을 100% 이상 발휘했다. <페스티발>에 이어 또 한번 이해영 감독과 호흡을 맞춘 엄지원도 우아하면서도 카리스마 있는 교장 역할을 완벽히 소화해냈다. 후반부에서 "인정받고 싶었다"는 절규를 쏟아내는 엄지원의 연기는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일본에 인정받고 싶어했고, 인정받기 위해 그 누구보다 조선인을 착취하는 데 앞장섰던 당대 조선 지식인들의 모습을 잘 표현했다고 생각한다.


박보영과 엄지원, 두 주연배우뿐만 아니라 '올해의 발견'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는 박소담이라는 신인 여배우의 존재감을 만끽하는 것도 <경성학교>를 즐기는 하나의 팁이다. 영화 속에서 묘한 매력을 발산하는 박소담은 독립영화계에선 이미 주목을 받고 있던 배우인데, 류승완 감독의 <베테랑>, 이준익 감독의 <사도> 등 앞으로 개봉 영화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는 만큼 더욱 많은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으로 보인다.


지난 18일 개봉한<경성학교>는 안타깝게도 같은 날 개봉한 <극비수사>와 그 다음 주에 개봉한 <연평해전>에 샌드위치되어 흥행 면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박스오피스 순위는 어느덧 8위까지 추락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지나치게 뻔한 스토리로 전개된다는 점은 아쉽지만, 영상미나 그 안에 담고 있는 이야기들만 놓고 볼 때, <경성학교>는 이대로 묻히기에 아까운 영화임에 틀림없다. 물론 <소수의견> 등 볼 만한 영화들로 가득찬 영화관에서 막상 <경성학교>를 선택하는 것이 쉬운 결정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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