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국민을 기망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정상이겠지만, 대한민국에서는 그러한 기망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다보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정부가 국민을 기망하는 것에도 정도가 있다!'
지난 29일, 박근혜 대통령은 안산 단원구 초지동 화랑유원지 제2주차장에 마련된 합동분향소를 찾았다. 분향소가 공식적으로 문을 여는 시간인 10시보다 1시간 이른 9시 경이었다. 분향소에 들어선 박 대통령은 제단 좌측에서부터 홀로 헌화를 했고, 우측으로 돌아 다시 출입문 쪽으로 나왔다고 한다. 바로 이때 청와대의 '조문 연출'이 시작됐다. 한 할머니(이하 A 씨)가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팔을 붙잡은 것이다. 두 사람은 짧은 대화를 나눴고, 이는 화보처럼 사진이 찍혀 언론을 통해 보도됐다.
감동스러운 시나리오를 구상했던 것일까? 청와대가 간과한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대한민국의 네티즌들의 수준이 청와대에 비해 훨씬 더 높다는 사실이다. 네티즌들은 관련 영상과 사진을 통해 A 씨가 분향소에서 박 대통령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계속해서 따라다녔다는 점과 A 씨의 빨간색 매니큐어가 유족 또는 조문객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했다. 게다가 아무나 대통령의 근거리까지 접근할 수 있다면 이는 경호가 허술한 것을 넘어 무의미한 수준이 아닌가?
유가족인 유경근 씨(고 유예인 양 아버지)는 CBS 김현정의 뉴스쇼와의 인터뷰에서 박 대통령의 분향을 보면서 생각한 바를 밝혔다. 또, A 씨의 존재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인터뷰 내용을 확인해보자.
◆ 유경근 > 이거 넓게 너그럽게 보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특히 오전에 분향소에 오셔서 분향을 하시는 모습을 보고서 '아,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다시 말해서 우리 가족들 중에는 박 대통령이 새로 만들어진 화랑유원지에 분향소에 오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도 없었고요. 정말로 사과하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면 우리 가족들에게 직접 그러한 뜻을 좀 개인적으로도 표명을 해주셔야 할 텐데 그런 게 없었고. 그리고 분향소 안에 어떤 할머니 한 분을 같이 대동을 하고서 분향을 하고 사진을 찍으신 걸로 알고 있는데 제가 궁금해서 어느 분이신가 하고 수소문을 해 봤는데 희한하게도 아는 분이 없습니다.
◇ 김현정 > 그러니까 할머니 한 분을 위로하면서 찍은 사진이 지금 굉장히 많이 실리고 있는데 그분이 누구인지를 아는 분이 없다고요? 가족인 줄 알았는데.
◆ 유경근 > 가족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알아보니까 우리 유가족 대표들이 팽목항이나 진도체육관에서 수많은 가족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눴는데 아는 분이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도대체 어느 분하고 한 건지 이것도 좀 의문이 들고요. 실제 유가족이라고 그러면 실례가 되겠습니다만.
이러한 논란에 대해 청와대는 전면 부인했다. 민경욱 대변인은 "대통령이 어제 세월호 분향소를 방문했는데 할머니 한분을 위로하는 사진에 대해 연출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데 이건 절대 사실이 아니다. 분향소에는 조문객과 유가족도 있었고, 일반인도 섞여 계셨기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 중 한분이 대통령에게 다가와 인사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일 연출했다면 연출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도 아니고, 연출을 해서 득 될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박 대통령이 위로한 여성은 일반 조문객 <경향신문>
이후 <경향신문>은 분향소의 할머니, A 씨의 존재를 확인했다. 분향소에서 박 대통령이 위로를 했던 그는 유가족이 아니라 분향소 인근 주민인 오모씨(73)이었다. 그는 "어제 분향소에서 박 대통령을 만난 사람이 맞다. 유가족은 아니다"고 밝혔다. 당시의 상황에서 대해서는 "오전 10시부터 일반인 조문객을 받는 지는 몰랐다. 사람들이 줄 서서 들어가길래 들어가도 되는 줄 알고 앞 사람 뒤를 따라들어갔는데, 알고보니 대통령이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오모 씨는 박 대통령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오모 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그에게 "유가족이세요?"라고 물었고, 오모 씨는 "아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했다. 그리고 다른 대화는 없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오모 씨는 "일반 주민이 대통령을 만나다니 황송하고 놀라왔다"며 당시의 감정을 전했다.
"'조문 연출' 논란 할머니, 청와대가 섭외" <노컷뉴스>
CBS 노컷뉴스 특별취재팀은 더 놀라운 내용을 밝혀냈다. 네티즌들이 주장했던 '조문 연출'이 사실이라는 것이다. 정부 핵심 관계자는 "미리 계획했던 건 아니지만, 청와대 측이 당일 합동분향소에서 눈에 띈 해당 노인에게 '부탁'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그 부탁이란 무엇이었을까? 바로 '대통령이 조문할 때 대통령 가까이서 뒤를 따르라'는 것이었고 한다. 정말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조문 연출'은 사실이었고, 민경욱 대변인은 '거짓말'을 했다. 또, 정부는 또 다시 국민을 기망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유가족들이 박 대통령과 정부에 대해 불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청와대 입장에서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오모 씨를 투입해 연출을 시도한 것이리라. 이젠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다. 하다하다 이젠 조문까지 연출하는 정부라.. 대통령은 직접 대답하라. 이 상황을 설명하라. 판단은 국민이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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