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 연예

원작의 아우라를 넘어선 <미생>, 감동으로 우려를 불식시키다

너의길을가라 2014. 10. 19. 12:19
반응형


업무를 위해 과음조차도 피하던 냉철한 일벌레 오상식 과장은 다혈질의 의리남으로 변했다. 한없이 푸근한 선배였던 김동식 대리는 다소 까칠한 직장 상사가 되었다. (물론 비주얼만큼은 싱크로율 100%다.) 차분하고 담담하던 장그래는 좀더 무력하지만 한층 깊고 단단해졌다.



하지만 '본질'은 그대로다. 그들은 삶의 애환으로 가득한 '직장인'이고, 운명 공동체로서의 하나의 '팀'이다. 겉으로는 독설을 내뱉고 타박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너희 애가 문서에 풀을 묻혀 흘리는 바람에 우리애가 혼났잖아!"챙기고 나선다. 2부까지 방영된 드라마 <미생>은 웹툰 '미생'의 느낌과 감동을 고스란히 옮겨내면서도 '먹먹함'은 한층 더 깊어졌다.


'냉혹한 사회를 버텨내는 직장인의 애환'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미생>의 핵심은 '리얼리티'라고 할 수 있다. 얼마나 현실감 있게 표현해냄으로써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느냐가 성공의 키포인트였다. 2회에서 매사를 열심히 하지만 빠릿빠릿하지 못한 인턴 김석호의 어리숙한 모습들은 같은 처지에 있는 혹은 비슷한 경험을 했던 시청자들과 공감대를 형성했다.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맞아, 나도 저랬었는데'라는 회상에 잠기게끔 만들었다.



또, 오상식 과장(이성민)이 퇴근 후 치킨을 사들고 집에 들어가 이미 잠든 아이들을 깨우는 모습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적셨다. 가족의 존재.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의 직장인들이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근무에 매달리면서 상사로부터 쏟아지는 질책을 견디고, 동료들과 '너 죽고 나 사는' 치열한 경쟁을 버티는 이유가 아니겠는가? 미생(未生)이라는 제목, 겉으로 보기엔 정장을 차려 입고 그럴 듯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실은 아직까지 살아있지 못한 자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 처절한 발버둥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장면이었다.


물론 웹툰을 인상깊게 본 사람으로서 일말의 우려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미생> 1회에서는 바둑기사 입단에 실패한 뒤 목욕탕 청소 알바와 대리운전으로 생계 유지를 하던 장그래가 지인의 도움으로 대기업 원 인터내셔널에 취업하게 되는 과정과 그가 낙하산으로 입사한 고졸 검정고시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사내 왕따로 전락한 모습이 그려졌다.



이를 그려내기 위해 드라마 <미생>은 오징어젓 속 꼴뚜기를 찾아내는 현장 지원 업무라는 웹툰에 없던 장면까지 만들어냈다.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던 장그래였지만, 현실은 동료들의 따돌림으로 냉동창고에 혼자 남겨지는 것이었다. "열심히라도 해야지"라는 동료들의 비아냥을 꿋꿋하게 견디면서 장그래는 "내가 열심히 했다고? 아니. 난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세상에 나온 거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라는 자조 섞인 내래이션으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웹툰에서는 없었던 갈등 양상인 '낙하산-왕따'에 포커스가 맞춰지면서 다소 우려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런 스펙도 가지지 못한 사회 초년생인 장그래가 냉혹한 직장 세계에 적응하는 성장기를 다루고 있는 <미생>의 취지가 다소 퇴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임시완이 '모성 본능'을 자극하면서 '장그래'에 대한 공감대를 극대화하고 있지만, 현실에서 '낙하산'의 존재는 결코 반가워할 수 없는 것이 사실 아닌가?



어쩌면 공정한 경쟁을 거치지 않고, 지인의 도움으로 인턴으로 꽂힌 장그래를 같은 인턴 동기나 그의 상사들이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드라마를 지켜보는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장그래가 불쌍하고 안쓰럽게 여겨질 수 있겠지만, 현실에서도 과연 낙하산 장그래를 같은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라는 불편한 질문 앞에 우리는 머뭇거릴 수밖에 없다. "기본도 안 된 놈이 빽 하나 없이 에스컬레이터 타는 세상. 그런데 나는 아직 그런 세상 지지하지 않는다"는 오상식 과장의 외침은 우리 모두의 속마음이었다.


지나치게 왕따 문제에 천착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수렁에 빠질 지도 모른다는 필자의 우려를 <미생> 2회는 깔끔하게 불식시켰다. 낙하산으로 입사한 장그래를 따돌렸던 인턴 동기들은 태도를 180도 바꿨다. 주전부리 공세를 퍼부으며 장그래의 마음을 사기 위해 음흉한(?) 미소를 띠며 접근했다. 물론 이유가 있었다. 바로 업무 이해도가 떨어지는 고졸 검정고시 출신 장그래를 면접 PT 파트너로 삼아 자신의 존재를 돋보기에 하려고 했던 것이다.



하지만 낙하산 문제는 여전히 장그래가 짊어가야 할 몫으로 남겨졌다. 2회에서 오상식 과장이 장그래가 전무가 꽂은 낙하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업무에서 배제하는 등 갈등이 촉발됐지만, 회식 이후에 나온 감동의 '우리애' 코멘트로 장그래를 팀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모습도 그려졌다. 앞으로 <미생>이 낙하산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해진다.


바둑을 토대로 주로 담담한 시선을 유지했던 웹툰 <미생>의 감동을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래도 드라마로 각색을 할 때는 극적인 재미를 추가하지 않을 수 없고, 없던 러브 라인도 만들어내는 무리수를 두는 유혹에 빠지기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라마 <미생>은 웹툰의 아우라를 넘어서는 우직한 힘을 보여줬다. 웹툰에 애정을 갖고 있는 일부 시청자들은 '원작을 훼손하지 말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그런 분들은 "드라마에서는 만화의 가치나 재미를 강요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보다 가족적인, 청춘적인 이야기를 담아냈으면 한다"는 <미생>의 원작자인 윤태호 작가의 이야기를 참고하길 바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