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 애덤 스미스와 조지프 슘페터를 오해하고 있나요?

너의길을가라 2015. 3. 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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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푸줏간 주인, 술도가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생각 덕분이다. 우리는 그들의 박애심이 아니라 자기애에 호소하며, 우리의 필요가 아니라 그들의 이익만을 그들에게 이야기할 뿐이다."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1723~1790)의『국부론』에 등장하는 저 유명한 말은 '개인의 이기심이 사회를 발전시킨다'는 이른바 주류 경제학의 이론적 바탕이자 근거가 되어, 온갖 경제학 관련 책과 경제신문 등에서 재인용되며 시장의 만능성을 강조하는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고 있다. 너무 자주 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당당하게 인용되어 왔기 때문일까? 이제는 애덤 스미스는 시장 만능주의자 쯤으로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애덤 스미스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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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편마차 숫자를 제아무리 늘린다 한들 결코 철도를 얻을 수는 없다."


기업가 이론의 창시자로 알려진 오스트리아 출신의 경제학자 조지프 슘페터(1883~1954)는 또 어떤가? '창조적 파괴', 기업가 정신' 등의 말로 잘 알려져 있는 그는 애덤 스미스와 함께 주류 경제학과 자본가들이 가장 많이 호출하는 경제학자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슘페터는 자본주의를 자본주의답게 하는 핵심 요소가 '기업가의 이노베이션(혁신)'이라고 대답하고 있다.


'철도(신상품, 신기술)'를 얻게 하는 힘은 혁신을 능동적으로 수행하는 기업자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기업가정신을 저해하는 요소로 '정치'를 지목하면서 '제발 좀 방해하지 마!'라고 외치고 있다. 시장을 신성시하는 주류 경제학과 국가의 개입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본가들의 입장에서 조지프 슘페터는 가장 매력적인 경제학자인 셈이다. 애덤 스미스를 언급하면서 했던 질문을 다시 떠올려보자. 정말 우리는 조지프 슘페터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일까? 이 정도에서 그를 이해하고 넘어가도 충분할까?



김종배 시사평론가와 조형근 한림대학교 연구교수가 함께 쓴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은 앞서 제기한 물음에 대한 명쾌한 답을 던져주고 있다. 지난 2013년 7월부터 9월까지 방송됐던 팟캐스트 '김종배의 사사로운 토크'의 '꼬투리 경제학'이라는 코너를 통해 만났던 두 사람은 당시의 방송 내용을 수정 · 보완해서 책으로 엮어냈다.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카를 마르크스, 갈 폴라니, 맥스 베버, 존 메이너드 케인스, 조지프 슘페터, 소스타인 베블런, 마르셀 모스에 이르기까지 경제학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인물들을 다루고 있다.


경제에서 정치가 거세돼버린 후 삶의 문제는 죄다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것이 됐다. 시장은 순수 자연 상태로 존재해야 하는 영역이 됐고, 순수 자연 상태는 곧 적자생존의 법칙이 관철되는 정글에 비유됐으며, 시장 경쟁에서의 탈락은 적자의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개인적 무능의 소산으로 치부됐다. 시장 논리는 이렇게 삶의 교리가 됐다.


신화와 교리가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과정에서 경제학 대가들이 호출됐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는 유력한 근거로 제시됐고, 조지프 슘페터의 '혁신적인 기업가'는 자본주의 견인차로서 자본가의 위상을 입증하는 근거로 제시됐다. 경제학의 '권위'는 이렇게 자본의 교리로 활용됐고 대중의 지침으로 강제됐다.


하지만 이는 왜곡된 사실의 전파였다.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은 <국부론>의 요지가 아니라 그저 일부에 지나지 않는 개념인데도 핵심 뼈대로 왜곡됐고, 조지프 슘패터의 '혁신 기업가'는 아버지 잘 만나 대기업 지분을 물려받은 자본가를 뜻하는 이가 아니었는데도 자본가 찬양가로 왜곡됐다. 애덤 스미스가 누구보다도 노동자의 권리를 앞장서서 옹호한 사실은 감춰졌으며, 조지프 슘페터가 돈 벌겠다는 욕심으로 가득한 자본가들을 경멸했다는 사실 또한 봉인됐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교정하려는 작은 시도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왜곡된 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제학 이론을 당시의 맥락 속에서 되살핌으로써 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삶의 태도를 재정립하기 위한 소박한 시도다.


김종배, <책을 펴내며 2>


이미 팟캐스트 '김종배의 사사로운 토크'를 통해 접한 분들이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듣는 것'만으로는 학습과 보다 깊은 이해를 하는 데 한계를 느꼈던 터라 책으로 출간된 것이 정말 반가웠다. 아무래도 '소리'는 휘발성이 강하고, 흐름을 한번 놓쳐버리면 정처없이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특성 때문일 것이다. 아무리 쉽게 설명해도 어렵기만 한 경제학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에서 다룬 인물 중 가자 흥미로웠던 두 사람은 역시 애덤 스미스와 조지프 슘페터였다. 김종배 시사평론가가 서문 격인 글에서 특별히 두 사람에 대한 오해를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쓸고, 그 흐름이 여전히 존속하고 있는 시대에 애덤 스미스와 조지프 슘페터는 가장 오해받고 있는 경제학자일 것이다.


애덤 스미스가 상상했던 시장은 거대 독점 기업들이 경제를 좌우하는 지금의 시장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소상품 생산자들이 독점도 특권도 반칙도 없고 불평등도 없는 상황에서 국가의 규제나 간섭도 없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경쟁하면서 시장경제의 이점을 누리는 시장(p.43)'이었다. 그는 이러한 시장에 특권과 독점 등의 불의가 나타나면 법으로 응징하고 규제하는 등의 개입 필요성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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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받아들였던 '노동가치설(상품의 교환가치의 원천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발상)'의 원조가 애덤 스미스였다는 사실도 흥미롭다. 애덤 스미스는 '가치의 실체를 창조하는 노동자들이 잘 먹고 잘 입고 좋은 집에서 사는 공평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p.32)'고 주장하기도 했다. 초등교육 수준이기는 하지만 의무교육을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고, "세금은 일반적으로 부자들이 많이 부담해야 한다"는 누진세를 언급하기도 한다.


어떠한가? 이처럼 자본과 노동자 사이에서 균형잡인 이론을 전개해나갔던 애덤 스미스를 우리는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받아들인 채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레이건 미국 대통령'규제 반대와 감세'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우면서 애덤 스미스를 내세운 이래 그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시조 쯤으로 여겨져 왔다. 반대쪽에서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시각도 그 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파, 자본가들이 좋아하는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조지프 슘페터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알려진 것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슘페터는 '성공한 기업가들이 쌓아 올린 천문학적 부에 대한 사회의 차가운 비판을 반박하고, 기업 규제를 철폐하라고 주장할 때 안성맞춤인 논리를 제공(p.251)해주는 '용도'로만 활용되곤 하지만, 오히려 그는 "나는 내 생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오히려 내 입장이나 생각이 정말로 타당한지 다시 의문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기업가가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면 자신의 파멸이며, 자기 사명의 이행이 아니라 육체적 사멸의 징후다"라고 말한 것이 바로 조지프 슘페터다. 그가 주장했던 '기업가 정신'의 '기업가'는 탐욕에 찌든 '자본가'가 아니었다. 물론 슘페터가 엘리트주의자였고, 자본가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를 많이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슘페터가 '자본가'를 경멸했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그에게 '돈 벌고 싶은 욕망이 가득한 사람은 기업가가 되기에는 자격 미달(p.307)이었다. 과연 대한민국에 슘페터의 마음에 드는 기업가가 존재하긴 할까?


'책 한 권을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다. 어설프게 아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는 말이다.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당할 수밖에 없다. 의도적인 왜곡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애덤 스미스와 조지프 슘페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전가의 보도처럼 인용되는 탓에 너무도 당연히 받아들였던 그들에 대해 『사회를 구하는 경제학』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특별한 것은 아니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고, 왜곡이 아닌 실체를 보자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왜곡된 채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경제학 이론을 당시의 맥락 속에서 되살핌으로써 경제학에 대한 이해를 바로잡을 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 삶의 태도를 재정립하기 위한 소박한 시도'가 성공하기 위해선 이 책이 훨씬 더 많이 읽혀야 할 것 같다. 만약 그 시도가 성공한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더욱 풍성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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