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서재

뒤늦게 펼쳐 본 『뿌리깊은 나무』, 드라마와 얼마나 다를까?

너의길을가라 2016. 3. 5.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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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하다. 소문을 퍼뜨린 것은 그들이다. 새로운 제도를 막아야 살 수 있는 자들이지."


SBS <육룡이 나르샤>의 프리퀄(Prequel, 그 이전의 일들을 다룬 속편) 드라마인 SBS <뿌리깊은 나무>는 이정명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이정명은 '세종의 『훈민정음(訓民正音)』 반포'라는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역사를 '팩션'이라는 틀 속에서 마음껏 풀어냈다. 그는 10년이 넘게 1백여 점의 관련 서적과 논문 등을 모으고, 30번 넘는 퇴고 끝에 『뿌리깊은 나무』를 완성했다고 한다. 절실했던 작가적 고뇌가 느껴지는 듯 하다.



『뿌리깊은 나무』는 기본적으로 백성을 어여삐 여긴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경학파의 거대한 음모를 다루고 있다. 『훈민정음 반포 전 7일 동안 궁 안에서는 집현전 학사들이 이유를 모른 채 차례차례 죽어 나간다. 수사를 맡게 된 겸사복 채윤은 의문투성이인 연쇄 살인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에서 거대한 시대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뿌리깊은 나무>를 인상 깊게 시청했지만, 정작 원작을 읽지 못한 것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었던 모양이다. 도서관에 들러 『뿌리깊은 나무』1, 2권을 끝내 집어들고 말았다. 이정명의 『뿌리깊은 나무』와 김영현, 박상연이 매만진 <뿌리깊은 나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훌륭한 원작의 존재는 각색에 있어 부담일 수밖에 없다. 사정이 좀 다르긴 하지만, tvN <치즈인더트랩> 제작진의 '졸렬한 짓'을 보라.



어렴풋하긴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의 경우에는 원작(자와 원작의 소비자)과의 마찰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오히려 각색된 드라마의 퀄리티가 워낙 뛰어났던 탓에 그런 틈이 없었다고나 할까? 실제로 <뿌리깊은 나무>는 몰입도 높은 드라마 전개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았는데, 마지막회 25.4%의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었다. 물론 애초에 원작이 '덜' 유명했던 탓도 있으리라.


이정명의 원작 소설『뿌리깊은 나무』와 김영현 · 박상연의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어떤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으며, 어떤 부분에서 차이가 있을까? 간단히 짚어보도록 하자. 우선,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종의 훈민정음 반포와 이를 막으려는 정통경학파의 충돌이라는 기본 틀은 같다. 그리고 관통하는 주제의식은 『훈민정음(訓民正音)』 어지(御旨)에 담겨 있는 한글의 창체 정신(자주정신, 애민정신, 실용정신)에 바탕을 둔다. 



國之語音, 異乎中國, 與文子不相流通. 故 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우리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서 한자와 서로 통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하는 이가 많다. 내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스물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나날의 쓰기에 편리하도록 함에 있느니라.


채윤(장혁)이 중심이 돼 사건의 실체를 밝히는 '흐름'도 일치하지만, 소설 『뿌리깊은 나무』가 후반부에 가서야 '배후(背後)'인 세종을 등장시키는 데 반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세종(한석규)의 존재감을 아예 전면에 내세운다. 그리고 소설이 세종의 대척점에 서 있는 자들을 '정통경학파'로 설정한 것과 달리 드라마에선 '밀본(密本)'이라는 가상의 비밀조직을 등장시킨다. 


서서히 진실에 접근해가는 다소 느리고 단단한 걸음이 분명한 대립각을 설정함으로써 '축지법'마냥 재빠른 속도감을 갖게 됐다. 또, 가상의 조직을 등장시킴으로써 익숙한 역사적 사실, 그 소재들이 훨씬 더 흥미진진해졌다. 그리하여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는 훈민정음 반포와 관련해 '역사에 이면에 이런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있지 않을까?'라는 물음표를 던졌던 이정명으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셈이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거대한 뿌리는 아직 약하기 그지 없다. 선비, 사대부, 관리 바로 우리가 이 나라의 건강하고 튼튼한 뿌리가 돼야 한다. 조선이라는 나무가 만세에 이르도록 우리는 뿌리 중의 뿌리, 숨겨져 있으나 살아 숨쉬고 보이지 않으나 나무와 잎사귀에 기운을 전하며 역사라는 이름의 대지 위에 깊고도 단단하게 감춰진 뿌리 이 땅의 밀본(감춰진 뿌리)이 돼야 한다. 밀본이 정군(임금을 바로 이끈다)한다. 밀본이 격군(임금을 바로 잡는다)한다. 밀본이 이 땅위 가장 낮은 곳에서 위민(백성을 위한다)한다. 밀본이 애민(백성을 사랑한다)한다. 밀본이 중민(백성을 존중한다)한다. 밀본이 안민(백성을 편안케 한다)한다. 밀본이 목민(백성을 기른다)한다. 밀본은 오직 다음 두 가지에 다름이 아니다. 바로 민본(백성이 근본이다)이다"


김영현 · 박상연은 <육룡이 나르샤>를 통해 '밀본'이라는 조직의 정체성에 대해 보다 명쾌한 해답을 내놓았는데, 이는 두 작가의 '자기반성'과도 맞닿아 있다. 사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가장 아쉬웠던 지점은 '밀본'에 대한 설명이었다. '백성을 바라보는 관점'에 다른 '세종'과 '밀본'은 사사건건 충돌한다. 특히 '훈민정음 반포'는 그 갈등이 가장 첨예하게 맞부딪치는 사건이었다.


'민본(백성이 근본이다)'을 말하고 있지만, 밀본에게 '백성'은 '목적어'로 존재한다. 그들은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존중하고, 백성을 편안케 하고, 백성을 기른다. 이는 역사의 중심이 사대부라는 것을 의미한다. 백성은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객체, 다시 말해 '대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뿌리깊은 나무>의 역사관은 이에 정면으로 맞선다. 채윤과 소이(신세경)가 바로 그 명확한 상징이다.



"내 오래 소리를 탐구하였으니 소이는 사람의 소리를 궁리하기에 뛰어나다. 말을 하지 못하므로 그 발음과 성음기관이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은 화선지 같아 어떤 음이라도 수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뿌리깊은 나무』2권 p.165 -


소이는 그림 속에 숨어 있는 하나의 기호를 발견했다. 그것은 목구멍 위쪽에 붙어 구부러진 혀의 모습이었다. 그 숨은 그림이야말로 어금닛소리 ㄱ이었다. 그것은 끝이 아래쪽으로 늘어지고 뿌리가 입천장에 붙은 완벽한 혀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뿌리깊은 나무』2권 p.179 -


세종 스스로 '나의 첫 번째 백성'이라 일컫는 소이는 『훈민정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소설보다 드라마에서 그 비중이 훨씬 더 크게 묘사됐다. 소이는 실어증(失語症)에 걸려 말을 하지 못하지만, 오히려 그것이 '소리'를 궁리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훈민정음』 창제에 '백성'인 소이가 참여했다는 사실은 역사의 주체에 대한 다른 시선을 보여준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목조, 익조, 도조, 환조, 태조, 태종)를 지칭하는 '육룡'을 재해석하는 과감한 시도를 했는데, 이는 <뿌리깊은 나무>의 역사관이 발전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처럼 '밀본'의 존재는 소설과 드라마의 가장 결정적인 차이다. 김영현 · 박상연 두 작가는 밀본을 가장 극적으로 등장시키기 위해 백정 가리온(윤제문)을 밀본의 3대 본원 정도광으로 각색한다.



"재주를 닦았으나 쓸 곳이 없었다. 글 읽는 재주도, 셈하는 재주도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을 죽이는 재주였으니… 시절을 욕하며 단도를 품고 왈짜가 되어 저자를 해맬 밖에… 술을 퍼먹고 왈패들과 칼부림을 하고 난장을 치며 나이를 먹었지. 저자 뒷골목에서 가리온이란 이름을 모르는 자가 어디 있더냐? 우는 아이들도 가리온 하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였다." -『뿌리깊은 나무』2권 p.92 -


재주는 가졌지만 신분의 벽에 막혀 그 뜻을 펼칠 수 없었던 비운의 인물 가리온은 드라마 속에서 <식스센스> 급 반전으로 정체가 밝혀지는데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하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밀본'이라는 조직이 갖는 의의가 퇴색되면서, 정도광은 세종의 거룩한 뜻을 가로막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하고 만다. 캐릭터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정도광의 추락은 드라마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었다. 


그밖에 소설 속에서는 채윤과 소이가 궁에서 만나 연정을 품게 되지만, 드라마에서는 심온의 노비였던 어렸을 때부터 똘복(채윤의 어릴 적 이름)과 소이가 서로에게 애뜻한 감정을 가진 것으로 그려진다. 두 사람의 러브 라인이 드라마에서 훨씬 더 강조됐는데, 끊임없이 지적되고 있는 지상파 드라마의 한계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무협적인 요소가 추가된 것은 극적인 재미를 더하기 위함으로 이해할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라는 역사적 소재에 흥미로운 이야기를 덧대 장대한 '팩션'으로 만들어낸 이정명의 『뿌리깊은 나무』는 그 치밀성에서 가히 압도적이다. 오랜 세월을 궁리하고 탐구했던 작가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여기에 새로운 역사관을 입힌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도 훌륭하지만, 역시 그 원작을 통해 『훈민정음』에 담아낸 세종의 깊은 고민과 백성에 대한 애정을 마주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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