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듣는 귀

나의 헌혈 이야기, 작지만 꽉찬 뿌듯함을 선물 받다

너의길을가라 2014. 12. 2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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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첫 헌혈은 고등학교 시절이었다. 학교로 찾아온 헌혈 버스에 다들 호들갑을 떨었다. 수업을 빠질 수 있다는 소박한 기쁨과 함께 주삿바늘이 내 몸을 뚫고 들어간다는 공포, 그 상반된 감정들이 뒤섞여 묘한 흥분 상태를 만들어냈다. 어떤 녀석은 손사래를 쳤고, 또 다른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게 앞장 섰다. 체육관에 헌혈을 위한 모든 준비가 마무리됐고, 우리들은 반별로 줄을 서서 차례차례 헌혈을 마쳤다. 옹기종기 모여 초코파이와 음료를 마시면서 '이 정도쯤 아무 것도 아니야' 으스대던, 그 때의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본격적으로 헌혈을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이었다. 한 친구를 만났고, 그 아이는 나를 헌혈의 집으로 끌고 갔다. 그 후로부터 주기적으로 헌혈을 하게 됐고, 그렇게 쌓인 횟수가 어느덧 87회(전혈 7회, 혈소환 6회, 혈소판혈장 4회, 혈장 70회)에 이르렀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계획대로라면 내년에 100회를 채울 수 있을 듯 하다.


거창한 의미가 있는 행위는 아니다. 그저 뭔가가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 좋다. 꾸준히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좋다. 그저 지금의 내 위치에서 세상(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소소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무엇이든 하자. 그런 생각이었던 것 같다. 헌혈이 (나에게는) 가장 쉬운 일이었다. 2주에 한 번, 헌혈의 집을 찾아가기만 하면 되니까 말이다.




물론 '찾아기기만 하면' 헌혈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헌혈을 해본 사람들은 알고 있겠지만, 헌혈을 하기 전에 우리는 수많은 질문을 맞닥뜨리게 된다. 잠을 푹 자고 식사는 잘 했는지, 몸 상태는 어떤지, 금지하고 있는 약을 복용하진 않았는지, 침이나 부항을 맞지는 않았는지, 말라리아 지역을 여행하진 않았는지, 불특정 다수와 성행위를 하진 않았는지 등 쏟아지는 질문들에 모두 'YES'라고 답을 할 수 있어야만 헌혈이 가능하다.


혈소판 수치가 낮으면 혈소판(혈장)은 당연히 할 수 없고, 헤모글로빈 수치가 낮아도 헌혈을 할 수 없다. 많은 여성들이 헌혈의 집에서 발길을 돌리는 이유는 대부분 빈혈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는 단순히 꾸준했던 것만은 아니다. 나름대로 몸 관리도 잘 하는 건강한 꾸준함을 갖췄던 셈이다. 연말이고 하니 이 정도의 자화자찬은 참아주길 바란다. 



올해는 총 16회의 헌혈을 했다. 전혈은 두 달에 한 번 할 수 있고, 혈장이나 혈소판(혈장)은 2주마다 한 번씩 할 수 있다. 가급적 혈소판(혈장)을 하고 싶지만, 규모가 작은 헌혈의 집에는 혈소판(혈장)을 헌혈할 수 있는 기계가 구비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혈소판(혈장)의 경우 지역 별로 T.O가 내려오는데, 하루에 필요한 양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특정 혈액형의 혈소판은 T.O가 없거나(다시 말해서 필요가 없거나) 금세 채워지는 경우가 많다.


내가 가는 헌혈의 집에는 한 대가 구비되어 있지만, 나름대로 경쟁률이 치열한 편이다. 시간도 혈장 헌혈에 비해 조금 더 걸린다. 혈소판 수치에 따라 헌혈 시간이 결정되는데, 나의 경우에는 혈소판 수치가 그리 높은 편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는 조금 더 걸리는 편이다. 물론 높은(?) 경쟁률 때문에 그마저도 쉽지가 않다.



올해는 '2014년도 우수 등록헌혈회원(기준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헌혈에 몇 회 이상 참여한 다수의 사람들이 대상이지 않을까?)'이라고 해서 감사선물이 배송됐다. 작고 깔끔한 다이어리였다. 계획을 세우고, 잡다한 것들을 기록하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참 반가운 선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내년에 쓸 다이어리를 구입하려던 참에 잘 됐지 싶다.


한 해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나름대로 열의를 갖고 있는 헌혈에 대해 쓰게 됐다. 100회를 채우고 나서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고 멋지게 쓸 생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게 더 낯간지러울 것 같아 이번 기회에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쓴 글을 다시 곱씹어봐도, 이 글이 다른 누군가를 헌혈의 집으로 이끄는 '마법'을 발휘할 것 같진 않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확실하다. 엄청나게 대단한 일도 아니고, 위대하다고 할 만큼 거창한 일도 아니지만, 떠벌일 일도 아니고 내세울 만한 일도 아니지만, 헌혈을 마치고 헌혈의 집을 나서는 순간만큼은 참 뿌듯하다. "그래, 우린 함께 살아가고 있구나. 내가 세상에 티끌만큼이지만, 조금은 힘을 보태고 있구나" 그 소박한 따뜻함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느끼게 되길 바라고 또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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