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주관한 6차 TV 토론회는 복지와 교육정책, 국민 통합이라는 주제로 진행됐다. 전반적인 평을 하자면, 무난한 흐름이 시종일관 이어졌다. 마지막 TV 토론회였던 만큼 더욱 뜨거운 분위기가 조성될 거라 예상됐지만, 김빠진 콜라마냥 밋밋하기만 했다. 그 가운데 몇 장면들이 돋보이긴 했다. 우선, 한때 같은 당에 몸담았던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서로를 향해 묵은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은 제법 흥미로웠다.
또, 집단 탈당이라는 내홍을 겪으며 벼랑 끝 위기에 놓인 유승민 바른정당 후보의 마지막 발언도 인상적이었다. 유 후보는 자신에게 주어진 발언 시간을 아껴 탈당 의사를 밝히고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한 소속 의원들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성소수자에 대한 입장을 밝히는 데 사용한 심상정 후보의 1분 찬스가 그랬듯, 유 후보의 2분은 제대로 된 보수가 대한민국 정치에 자리잡길 바라는 수많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울렸다. 집단 탈당 사태 이후 유 후보에 대한 후원이 평소에 10배나 늘어난 건 이를 잘 보여준다.
"(심 후보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vs "문 후보와 저는 엄밀히 말하면 다르다"
위의 두 장면 외에 6차 TV 토론회의 또 다른 명장면을 꼽으라면 '복지'를 화두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심상정 정의당 후보가 설전을 벌였던 장면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사실상 토론회의 하이라이트이자 백미라 할 포인트였다. 홍준표 새누리당 후보를 위시한 극우 세력에게 도매금으로 '(종북)좌파'로 묶인 채 이리저리 팔려나가고 있지만, 두 후보의 입장과 비전의 차이(를 넘어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이라고 하는 정치 세력의 차이)를 명확히 보여주는 토론 내용이었다.
심상정 : 대한민국이 OECD 10위권의 경제대국입니다. 그런데 우리 국민의 삶의 질은 최하위 수준이에요. 국가적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것이 우리 국민들이 촛불을 든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향후 10년 이내에 OECD 평균수준의 삶의 질, 복지를 이뤄내겠다는 게 제 복지국가의 비전이거든요. 문 후보의 비전과 목표가 무엇입니까?
문재인 : 우리가 장기적인 방향에 대해서는 공감하는데, 그러나 심 후보의 공약처럼 급격하게 연간 70조 증세해서 늘릴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마련할 수 있는 재원 내에서 접근해 가야겠죠.
심상정 : 결국 현상유지를 하자는 거 아니에요? … 목표와 비전을 어떻게 갖느냐에 따라 프로그램이 달라 질 수밖에 없거든요. 연간 70조원을 걷어서 10년 내에 OECD 평균수준을 이뤄내겠다고 했는데, 그것이 무리라고 하면 거꾸로 여쭤볼게요.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OECD 10위권 경제대국인데 그만한 복지를 누릴 권리가 없는가.
문재인 : 맞는 말씀인데, 복지가 시작된 게 김대중 정권부터였죠. 그 다음에 노무현 정부 때 더 늘렸고요. 그 속도가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 계속 유지가 됐었으면 OECD 평균 가능했을 것 같습니다. … 욕심은 꿀떡 같지만 재원의 한계가 있기 때문에 …
그러자 심상정 후보는 "그것이 문 후보와 제 비전의 차이"라 못박으며 "실패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그런 정의로운 국가를 만드는 게 저의 비전"이라 밝혔다. 문재인 후보는 심상정 후보의 '생각'들을 실현 가능성이 없는, 다시 말해서 '불가능'한 '꿈'이라고 말한다. 반면 심상정 후보는 그런 문 후보의 태도를 '현상유지'라고 비판한다. '복지'를 통해 OECD 평균수준의 삶의 질을 이뤄내겠다는 심상정 후보의 국가적 대전환', '패러다임의 변화'는 정말 지나치게 급진적인 생각일 뿐인걸까.
가령, 이런 '상상'을 해보자. 칼럼니스트 정덕현은 '<윤식당>, 이런 놀이터 같은 일터 어디 없나요?'라는 글에서 '윤식당은 돈을 벌려고 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손님들 한 명 한 명을 말 그대로 소중한 손님으로 대하고 그들이 내놓은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면 그게 또 행복'하다며 '<윤식당>이 이토록 우리에게 판타지를 주는 건 그 곳이 일하는 사람들이나 노는 사람들이나 모두가 즐겁고 행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이런게 되묻는다. "우리에게 이런 놀이터 같은 일터는 요원한 꿈일까요?"
분명 시니컬한 내용으로 도배가 됐을 '댓글창'을 용기를 내서 살펴보도록 하자. 아니나 다를까, 매우 부정적인 내용의 댓글들이 '베스트'를 차지하고 있다. '촬영이니까 하지. 현실에서 네명이 일하고 하루 열 팀 받으면 부도난다', '만수르 취미생활도 아니고 저렇게 장사하면 한달도 안되서 돈 다 날려먹고 망한다.' 맞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이다.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고 입을 틀어막는 짧고 굵은 한마디. '없어 꿈 깨..'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정말 '꿈을 깨'기만 할 건가. 물론 <윤식당>은 예능이다. '<윤식당>이 주는 힐링, 나영석의 마법은 여전했다'라는 글에서 썼던 것처럼, '윤식당'의 출연 배우들은 '생계'에 대한 걱정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준비한 재료가 다 떨어지면 거기서 장사를 접고 퇴근을 하면 그만이고, 예상했던 만큼 손님이 찾지 않아 재료가 남으면 그 남은 재료로 저녁 식사를 해먹으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그들이 보여주는 '삶'에는 '여유'가 넘친다. 내일의 끼니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삶은 이처럼 아름다울 수 있다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생계'다. 사람들이 '생계'의 고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어떨까. 상상은 그렇게 시작된다. 자연스럽게 '기본소득제(basic income)'가 떠오른다. 간단히 말해서 기본소득이란 중앙 혹은 지방정부가 모든 시민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지급하는 소득을 말한다.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정기적으로 일정한 금액의 현금을 지급하는 것이다. 기본 소득제의 취지는 노동과 소득을 분리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인간다운 삶을 보장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생계'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
알래스카, 나미비아에서 시행 중인 기본소득제는 아직까지 '실험' 단계를 거치고 있지만, 점차 전세계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에 있다. 2016년 스위스에서 전국적으로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려던 시도가 국민투표에서 부결돼 좌절되긴 했지만, 2017년 1월 핀란드에서 이 바통을 이어받아 월 560유로(약 70만 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보장제를 시행했다. 또, 캐나다의 온타리오주는 저소득층에게 가구당 월 120만 원에서 170만 원을 지급하는 기본소득 실험에 동참했다. 또, 네덜란드와 케냐에서도 도입을 논의 중이라고 한다.
우리의 경우는 어떨까. 2009년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이사장 강남훈 한신대 교수)가 만들어져 줄기차게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해 왔다. 당시에는 '말도 안 되는 헛소리'로 취급됐던 기본소득제가 이제 '그럴듯한 이야기'쯤으로 격상됐다. 유력 정치인 가운데 이재명 성남시장이 대표적인 기본소득론자인데, 그는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 경선 과정에서 공식적으로 기본소득제 도입을 공약했다. 돌풍을 일으켰지만 3위에 그쳤던 그의 '정책'을 표면적으로는 문재인 후보가 이어받았다.
지난 4월 27일 문 후보는 성남시 유세 현장에서 "전국 최초 무상 공공 산후 조리원, 전국 최초 청년배당, 성남시 의료원 착공, 전국 최초 무상 교복, 박근혜 정부의 반대를 뚫고 이룬 성과라 더 값지다"면서 "이재명이 꿈꾸는 대한민국, 이제 저 문재인의 꿈입니다"라고 선포했다. 그러면서 이재명 캠프 인사들로 구성돼 있는 기본소득위원회를 후보 직속 기구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문 후보가 내세운 공약들을 살펴보면, 이재명 시장의 '꿈'이 그다지 반영돼 있지 않은 게 현실이다.
이재명의 꿈은 문재인 정부에서 실현될 수 있을까? 지난 마지막 토론에서 문 후보가 보여준 태도만 봐선 요원해 보인다. 도대체 언제까지 '시기상조'라고 말할 것인가. <윤식당>의 놀이터 같은 일터는 정말 요원한 것일까. 생계에 쫓기지 않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은 도대체 언제부터 가능한 것일까. 오히려 우리들의 '굳은' 생각들이 그리 멀지 않은 미래를 자꾸만 요원하다고 믿게 만드는 건 아닐까. 패러다임의 대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더 발칙한 상상들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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