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킴의 극장

<성난 변호사>, 이선균의, 이선균에 의한, 이선균을 위한 영화

너의길을가라 2015. 10. 1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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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의 저 유명한 연설의 한 대목을 빌리자면, <성난 변호사>는 이선균의, 이선균에 의한, 이선균을 위한 영화다. 그의 전작(前作)인 <끝까지 간다>의 경우 조진웅과 영화의 무게를 함께 나눠 짊어졌다면, 이번 영화에선 이선균이 오롯이 자신의 어깨만으로 무게를 지탱한다. 특유의 '짜증'과 함께 엘리트 변호사 캐릭터를 제법 맛깔나게 살렸지만, 2시간을 혼자 이끌어가기엔 아무래도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일까? <성난 변호사>는 중반 이후 긴장감을 잃고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두뇌 상위 1%, 승소 확률 100%, 대형 로펌에 소속되어 있는 에이스 변호사 '변호성(이선균)'은 "이기는 게 정의지"라는 능청스럽게 혹은 단호하게 말하는 속물적인 캐릭터다. 특유의 현란한 '말빨'로 제약회사 소송을 퍼펙트한 승소(勝訴)로 이끈 변호성은 문 회장(장현성)의 호출을 받는다. 그 자리에서 변호성은 문 회장으로부터 하나의 사건을 의뢰받게 되는데, 바로 신촌 여대생 살인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공판 단계로 넘어갔으니 피고인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인 자신의 운전 기사를 변호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피고인은 피해자와 연인 관계였다면서 자신이 결백하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담당 검사 진선민(김고은)은 피해자가 스토킹을 당한 것이라고 반박한다. 시체가 없는 살인 사건. 변호성은 결정적인 증거가 없다는 점에 착안해 소송을 자신의 흐름으로 이끌어간다.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 이르러서 피고인이 "내가 피해자를 죽였다"고 자백한다. 순식간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다 이긴 싸움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닥뜨린 변호성은 무너진 자존심을 만회하기 위해 '사건'의 중심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끝까지 간다>에서 고건수(이선균)에게 '휘말린다'는 표현이 적합한 것처럼, <성난 변호사>의 변호성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사건에 휩쓸린다. 마치 산비탈에서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눈덩이는 집채만큼 커져 있다.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던 변호성은 제약 회사의 거대하고 사악한 음모를 발견하게 되고, 급기야 사회의 부조리와 맞서는 인물로 각성한다. 물론 그 각성의 중심에 '정의'가 아니라 '개인의 자존심'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아쉽다. 이것이 <성난 변호사>의 통쾌함이 <베테랑>의 그것에 못 미치는 이유다.


변호성의 후배이자 담당 검사인 진선민(김고은)이 지나치게 주변적인 역할로 제한된 채 겉도는 것도 아쉽긴 마찬가지다. 굳이 변호성과 진선민을 애정 전선에 가둬뒀어야만 했는지 의문이다. 게다가 중반 이후 진선민의 등장은 현저히 줄어들고, 변호성이 움직이는 하나의 말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한다. 캐릭터의 무게 중심이 지나치게 한쪽으로 쏠려버렸다. 마찬가지로 변호성의 사무장으로 등장하는 임원희도 '신 스틸러'의 역할을 다하지만, 분량은 매우 소박한 수준에 그쳤다.





그럼에도 <성난 변호사>는 '대중성을 잡을 수 있는 오락물을 만들자'는 기획 의도에 맞게 상업 영화로서의 '힘'을 갖고 있다. "분명히 관객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있겠지만, 이런 코드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분명 영화를 재밌어하실 것"이라는 이선균의 자신감은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관객을 만족시킬 만한 반전(충분히 예측 가능하지만, 어차피 제목에서 패를 다 보여준 것 아닌가?)과 적당한 추격신, 나쁘지 않은 웃음 코드 등 <성난 변호사>는 갖출 것은 다 갖춰 놓은 밥상이다.


'조진웅'이 부재하다는 것, 긴장감을 유지할 대결 구도가 없다는 것이 <성난 변호사>가 <끝까지 간다>가 되지 못한 이유이지만, 이전보다 더욱 능청스러운 연기를 펼치는 이선균의 존재는 <성난 변호사>의 버팀목이다. '짖음 방지'를 위해 개의 목에 채워둔 목줄은 이 영화 속에 감춰진 상징이기도 하다. 문 회장은 변호성에게 이 목줄을 채워 그를 길들이고자 하지만, 변호성은 이에 굴하지 않고 문 회장에게 제대로 카운터 펀치를 날린다. "너도 복수하고 싶잖아"라며 목줄이 채워진 개를 복수에 활용하는 것도 인상적이다.



마치 스테판 에셀의 '분노하라'는 목소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목줄이 채워진 개는 조금만 '짖어도' 몸에 전기가 흘러 고통에 몸부림치게 된다. 몇 번의 반복을 경험한 후부턴 더 이상 '짖지' 않게 된다. 그 어떤 저항도 하지 않게 된다. 목줄이 채워진 개, 마치 우리의 모습도 그와 같지 아니한가? 권력에 혹은 자본에 길들여져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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